빚내서 떠난 길, 빚 때문에 못 돌아오는 길
'경제적 고통 덜자' 해외로 현대판 이산가족 늘어나
이주시장 브로커 농간 극성 1만 달러 수수료로

 

이주를 통한 여러 경제적 이득을 취하고 있는 필리핀이지만 이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적 문제를 아주 외면할 수는 없다.

필리핀 간호사의 예를 들어보자. 필리핀 간호사가 전 세계 간호사의 20% 이상을 차지하고 있지만 실제로 필리핀 사회의 보건 문제에는 심각한 구멍을 내고 있을 뿐 아니라 이들이 가족과 떨어져 발생하는 사회적 비용도 엄청나다.

해외에서 베이비 시터로 일하고 있는 한 필리핀 여성의 경우, 정작 자신의 아이는 필리핀에서 돈을 주고 고용한 이의 손에 양육되고 있고 아이와의 유대감 역시 떨어져 난감함을 느끼고 있다.

   
 
  고도 프레도 아키노 씨가 아들인 데드가 일하고 있는 한국 업소의 홍보 전단지를 보여주고 있다.  
 

 

◇가족과 생이별, 필리핀판 이산가족

이런 이주로 인한 가족 간의 생이별, 유대감 약화는 흔히 보인다.

마닐라 외곽에 거주하고 있는 1남 2녀를 둔 아키노 씨 가족도 막내 아들인 데드(23)를 2003년 한국에 보냈다.

현 아키노 대통령의 친척뻘 되는 집안이고 아버지인 고도 프레도 아키노(56) 역시 경찰이어서 중산층 정도의 삶을 살지만, 하나뿐인 아들인 데드를 밴드의 일원으로 한국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경찰이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지만 용돈 정도의 벌이에 수도·전기료를 내기에도 빠듯하다. 일을 하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어 쉽게 돈을 벌기 힘들다.

실제로 시집 간 딸인 자스민(29)은 "젊은 사람들이 대부분 직업이 없거나, 직업을 가진 사람들도 작은 규모의 공장이나 밴드에서 일한다"고 말했다.

데드의 경우도 필리핀에서 키보드를 연주하다가 에이전시를 통해서 한국으로 출국했다. 아들이 한국에서 보내주는 10만원 가량의 돈으로 집세 등 아키노 씨 부부의 생활을 꾸려가고 있다.

하지만 한국에 사는 아들 데드도 형편이 빠듯하기는 마찬가지다. 120만원 정도로 벌이가 좋을 때는 40만원 가량 송금을 해왔지만 일이 없는 비수기를 만나면 그마저도 송금을 중단할 수밖에 없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한국으로 떠난 지 4년이 됐지만 한번도 고국인 필리핀에 올 수 없었다.

데드는 필리핀에 돌아오면 돈을 벌기 힘들기 때문에 연예비자로 떠났던 비자 기한이 만료되어 불법 체류자 신분이 되었지만 한국에 계속 머무르기를 희망하고 있다.

어머니인 엘레니타(52)는 "어쩔 수 없는 형편 때문"이라며 의연한 모습을 보이다가 아들이 보고 싶지 않느냐는 한 마디에 결국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악화된 경제 사정, 하루가 다르게 치솟는 환율, 늘어나는 실업률로 인해 필리핀인들은 가족들에게 좀 더 넉넉한 경제 환경을 만들어주기 위해 해외로, 해외로 나가고 있다.

하지만 이로 인해 빚어지는 현대판 이산가족들이 필리핀 전역에서는 끊임없이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고용허가제로 한국에 갔으나 불법체류자로 오인받아 5일만에 상처 입은 몸으로 귀국해야 했던 타라베라 씨.  
 

◇상처만 남은 코리안 드림

꿈을 찾아 떠났으나 몸과 마음에 상처만 입고 필리핀으로 돌아온 이들도 있었다.

고용허가제를 통해 지난 3월 한국으로 떠났던 타라베라(39) 씨. 마닐라에서 차로 3시간 떨어진 사팡 웨바 에시아에 거주하고 있다.

어렵게 한국으로 가는 티켓을 거머쥐었지만 그는 출국 5일만에 필리핀으로 돌아와야 했다.

경기도 포천시 한 가구공장에서 합법적으로 일을 하고 있었지만 출입국 관리사무소에 의해 불법 체류자로 오인 받아 강제 추방당하게 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다리에 부상을 입어 필리핀에 돌아와서도 일할 길이 막막해졌다.

하지만 그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곳은 아무 곳도 없었다. 필리핀 정부도, 한국 정부도 현재 그에게 어떤 도움도 주고 있지 못한 것.

그가 불법 체류의 신분이 아니란 것을 알았지만 필리핀 노무관은 그를 필리핀으로 귀국시켰고, 그를 고용한 사장도 문제가 된 것이 부담이 되었던지 그를 필리핀에 돌려보내는 것에 동의한 것이다.

타라베라 씨는 '코리안 드림'을 꿈꾸고 출국했지만 결국 어떤 일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고국에서의 일자리를 구하는 길까지 막막해져 버렸다.

◇빚내서 한국으로

이주 노동시장이 커지면 커질수록 이주 노동을 떠나는 과정에 개입해 돈을 벌려고 하는 브로커들의 농간도 극성을 부리고 있었다.

고용허가제를 시행한 첫 해, 한국 정부는 1만 2000명의 쿼터를 필리핀에 배정했다. 하지만 그 쿼터의 거의 20배에 달하는 20만 명이 한국행을 신청해 수요와 공급이 심각하게 불균형을 이루고 있는 상태다.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 아들 데드 아키노를 떠올리며 어머니 엘레니타가 흐르는 눈물을 닦고 있다.  
 

이러다 보니 한국으로 올 수 있는 공식적인 통로인 POEA(필리핀 해외 고용청)를 통해서는 600∼700달러 사이의 공식 수수료가 들지만, 현재는 8000∼1만 달러 정도의 비용이 소요된다. 비공식적으로는 이런 계산법이 통용되고 있는 것이다.

고용허가제를 시행하게 된 배경에는 이런 높은 수수료를 줄여 그 사이에 발생할 수 있는 피해를 줄여보자는 의도가 있었다.

그러나 이미 이주가 하나의 시장으로 자리 잡은 필리핀 노동 시장에서는 한국으로 가는 모든 과정에 암암리에 활약하는 브로커들이 수두룩하다.

이 브로커들은 빚을 내어 이주를 하도록 만들고, 빚을 갚고 돈을 벌어 고국에 돌아와야 한다는 부담을 주며 필리핀인들의 불법 체류를 부추기게 만드는 사회 구조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어느 누구인들 정든 내 고향, 내 나라를 떠나 가족과 생이별하며 살고 싶겠는가. 하지만 경제적 고통으로 인해 해외 노동 시장에 뛰어든 필리핀인들은 이를 고스란히 감수할 밖에 없었다.

게다가 돈을 벌기 위해서 또 다른 빚을 내어야 하는 왜곡된 노동시장의 구조가, 이주가 꿈이며 고통스러운 현실이 될 수 밖에 없는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경남도민일보 2007-06-27]

채지혜 기자  know@idom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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