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당' 김기종 대표 청와대 앞 분신
'1988년 우리마당 피습사건' 진실 규명 요구해
민중의소리  윤보중 기자    메일보내기  

  "민주와 통일을 사칭하며, 당국의 음모에 타협과 협잡을 일삼는 자들의 양심을 회복시켜 주십시요" - 김기종 대표의 유서 中
  
  우리마당 김기종 대표가 19일 오후 1시 28분경, 청와대 앞 사랑방 부근 분수대 근처에서 분신을 기도해 한강성심병원에 입원 중이다.
  
  당시 김 대표는 인화물질을 휴대하지 않고 플래카드 등에 불을 붙여 분신을 시도했으며, 이를 본 경찰들이 소화기를 이용해 불을 끈 뒤 곧바로 병원에 이송했다. 병원측에 따르면 김 대표는 온몸에 2∼3도의 화상을 입어 수일 경과를 지켜봐야 소생 여부를 알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 대표는 지난 1988년 자신이 속해 있는 단체였던 우리마당 사무실에 북파공작원이 침투해, 자고 있던 여학생을 성폭행하고 서류를 훔쳐 달아났다며 이 사건에 대해 진실을 규명해 줄 것을 줄 곧 요구해 왔다. 이와 관련 지난 2004년 12월 <시사저널>(788호)은 5.6공 시절 야당 정치인과 재야 인사의 정치테러에 가담했던 북파공작원 출신 이종일씨의 증언을 통해 이 사건이 이종일 씨를 비롯한 북파공작원들의 소행임을 폭로한 바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9주째 청와대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던 김 대표는 이 사실을 주목받기 위해 결국 분신이라는 극단적 선택에 다다랐다.
  
  김 대표가 분신한 청와대 앞은 인화성 물질을 반입하는 것이 검문검색 등을 통해 사전에 차단되는 까닭에, 김 대표는 플랜카드 등 불에 잘 붙는 물품을 이용하여 몸에 불을 붙인 것으로 보인다.
  
  김 대표가 25년간 명맥을 유지해 온 우리마당은 80년대 초 창립해 역사 단절을 문화적 측면에서 극복하고자 민속문화 연구 및 보급 활동을 했다.
  
  특히 우리마당은 '풍물','탈춤','국악','판소리' 등 우리 문화의 보급 속에서 자연스럽게 분단으로 빚어진 남북문화의 이질화를 해소하고자 문익환 목사를 위원장으로 '통일문화큰잔치'를 진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마당은 '2차 통일문화큰잔치' 준비 도중 보안사부대가 보낸 북파공작원들에 의해 사무실을 피습당하면서 2차 대회가 좌절됐다.
  
  한편, 김 대표는 평소 노무현 대통령, 김칠준 인권위 사무총장 등을 거론하면서 "우리마당의 일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권력을 잡으면서 진실 규명을 기대했지만 현실은 달랐다"며 비판해 왔다.
  
  실제 노무현 대통령이 집필한 저서 중에는 우리마당 주최로 열렸던 강연의 교재인 <제2기 새터주민교실 강연- 법의 사법및 입법과정,1993.9.13>이 있으며 김칠준 사무총장 또한 우리마당에서 주최한 생활법률교실에서 여성과 법문제로 강연을 진행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기종 대표의 유서 전문>

  
  지난 실천 되짚으며, 남는 실천을 여러분께
  
  ‘놈’과 ‘사람’이라는 전라 경상의 지역 갈등에서 새롭게 깨달은 분단의 아픔을 씻고자, 전래 민족문화를 통한 동질성을 확보, ‘통일’ 꿈을 실천해 본 지난 과정은 정말 보람 있었습니다.
  
  특히 1988년 ‘서울올림픽’ 당시 공동 개최 주장은 무산되었지만, ‘통일문화큰잔치’ 행사 준비는 국위선양 못지않게 파생될 남북 갈등을 염려하며 마련한 소중한 자리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통일문화큰잔치’ 준비 과정에서 당한 8월 17일 새벽의 ‘우리마당 피습사건’.
  
  그 사건 발생 후 수사 기관과 언론, 국회는 웬일인지 사건 진실을 감추려고만 하고 있고, ‘우리마당’을 폐쇄시키려는 음모와 더불어 자행되는 당국의 끊임없는 탄압은 숱한 사업과 활동을 막바지에 거듭 무산시키고, 결국 많은 회원들을 떠나게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버티겠다는 의지로 직간접 압박에 타협하지 않고 버텨온 20년째, 마당지기 어언 25년.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어 ‘피습사건’ 진실규명 요구하는 청와대 앞 1인 시위 9주째를 핑계로 분신을 결행하는 저의 마지막 글입니다.
  
  민주와 통일을 사칭하며, 당국 음모에 타협과 협잡을 일삼는 자들의 양심을 회복시켜 주십시오.
  
  4340(2007)년 10월 19일 김 기 종 드림
  
  
  [김기종의 마지막 남기는 글]
  
  광주에서 성장하면서 부모님들 바램처럼 사회의 훌륭한 일꾼이 되고자 목표했던 서울대 법대, 그러나 입시 실패로 시작된 서울 생활에서 접하는 숱한 사회 모순들은, 청년기에 접어든 저에게 많은 깨우침을 주었습니다.
  
  즉 어떤 학습보다도 입시 실패가, 사회 모순 혁파의 뜨거운 실천 의지를 갖게 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막연했던 전라, 경상의 지역 갈등 모순에 대해 일찍 눈 뜨고, 아예 삼수 시절에는 함께 공부하는 아우들이 ‘놈과 사람’이라 호칭하면, 왜 썼는지 따졌습니다.
  
  그러면서 이를 이용하는 세력에 대한 확실한 인식과 함께 ‘북한 놈’ 호칭을 대신하는 용어로써 "우리”라는 말을 찾아내고, “우리”를 통한 실천 의지를 갖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당시 광화문 일대의 유신정권 유지를 위한 모습에서 “통일”이 더욱 멀어져 가는 걸 목도하였고, ‘동서’ 지역감정이 존재하면 ‘남북’ 분단 역시 해소될 수 없다는 각성을 구체적으로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라는 더불어 살아가는 민족과, 공동체 구현의 실천을 체득하였습니다.
  
  물론 고시를 통해 사회지도자로써 실천하려는 명분을 다짐, 후기 성균관대 법대에 우선 입학하고, 눈 앞에 펼쳐지는 사회 모순을 헤쳐 나가겠다는 다짐으로 자신을 합리화 시켜보았으나, 막상 제가 접하는 모순의 심각함은 보다 실천적인 책무를 가져주었을 따름입니다.
  
  결국 입시 실패에 대한 자책감에 치를 떨며 대학생활과 함께 오기(?)로 꾸렸던 소위 네번째 재수 생활, 여기에서 만난 아우들, 이들과 함께 ‘바회’ 모임을 결성하여 모순을 토론하며 구렁텅이에 함몰되지 말고 보다 나은 앞날을 설계하자고 서로 어깨를 두드리며 말보다는 실천이 중요함을 보여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우리 사회의 문제를 논하면서, 사회 현장 곳곳을 직접 찾아 다니게 되었고 우리문화 찾기, 야학교사, 청소년 상담교사, 예술소모임 간사활동 등등을 꾸준히 실천해보는 가운데, 명문대, 고시를 통한 실천 만을 모색했던 저에게, 새로운 방식의 현장이 구체적으로 다가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새삼 확인되는 고향 광주의 민주화투쟁 아픔은 보다 근본적으로 자신을 성찰케 하였고, 모두가 하나되는 ‘우리’와 모두의 만남과 나눔이 있는 터 ‘마당’을 확실히 실현시키고자 노력하며 반만년의 한겨레를 상징하는 ‘배달’이라는 필명을 사용, 구체적 여러 실천을 하게 됩니다.
  
  결국 외세에 의존하며 그 첨병 역할을 하는 소위 시민사회단체들이 갖는 모순을 적나라하게 보았고, ‘신라화랑 어디가고 스카웃이 판을 치고, 보부상은 어디 가고 라이온스 판을 치나’라는 구호를 만들며, 비판만 할 것이 아니라 대안을 만들자고 결심했던 실천이 오늘까지 “마당지기” 삶으로 이어졌습니다.
  
  대학 졸업장을 받는 날 부모님까지 속이고 고시를 준비한다는 명목으로 과다한 용돈을 요구, 신촌에 공간을 만들어 뜻을 같이하는 벗들과 “우리마당”을 개설, ‘마당지기’ 25년을 보낸 것입니다.
  
  이 “우리마당”과 ‘마당지기’의 못다한 실천이 많은데도, 제가 삶을 마감하게 됨은 어인 일일까요?
  
  물론 “우리마당”을 통해 그동안 이룬, 우리 사회 민주화와 통일에 기여한 여러 값진 성과와 보람은, 오늘 이렇게 삶을 마감하는 저에게 아무런 여한이 없음으로 대신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특히 제 스스로 구체적 책임과 실천을 직접 맡고 나서면서 많은 성과를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소위 환경연합, 경실련, 민예총,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 태동 과정에서 나름대로의 역할)
  
  하지만 민주화와 통일, 노동해방을 외치다 산화한 분들의 뜻을 잇는 활동에 매몰된 지난 시절을 되새기며, 저는 그 바탕인 “사회 정의”의 아쉬움을 절감하며, “통일문화열사”로써 제 삶을 마감해야 되겠습니다.
  
  아무튼 오늘 이렇게 생을 마감하는 제가 그나마 조그마한 바램들을 여쭈고 싶습니다.
  
  약간 건방질지 모르지만 아래의 세가지로 나누어 부탁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냉전 시절 당시의 ‘놈’과 ‘사람’이 아닌 남북동포 모두 한겨레인 “우리”가 하루빨리 될 수 있도록, 우선 풋내기 정치인들의 놀음에서 비롯된 ‘동서’, 즉 영호남의 지역적 갈등을 풀고 화합되어 봅시다!
  
  민족 통일에 전념하고자 미력한 제가 전래 민족문화의 동질성 유지와 확보를 통해 하나됨을 실천하였고, 소중한 성과를 거두었기 때문에 부탁, 아니 자신 있게 당부 드리는 것입니다.
  
  즉 여러분 자신들의 생활 현장에서 말이나 노래로만이 아닌 실천을 직접 모색 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동서화합 차원에서 보다 확실히 통일을 준비하고자, ‘전라도’에서 “경상도” 독도로 호적을 옮기고, 우리 가슴의 38선을 걷어내기 위해, “독도 38번지”라도 일본으로부터 확실하게 지켜내고자 합니다. 또한 북녘의 청소년들을 정기적으로 “독도”에 초청하는 행사를 준비, 당국과 논의 중에 있었습니다)
  
  둘째, ‘우리마당 피습사건’ 진상이 공개되었는데도 진실이 사회 일반에 공개되기를 꺼려하는 조바심으로,“우리마당”의 열정적 활동을 곳곳에서 직간접으로 조여왔던 공안 세력들의 음모는 타파되어야 합니다.
  
  사건 발생 20여년째를 맞이한 오늘까지도, 수사결과에 대해 입 다물며 사회정의를 논하는 사법 당국, 사건을 열렬히 취재했던 언론인, 그리고 정국 변환에 따라 대응하자던 정치인, 인권변호사들 모두 오늘 저의 죽음을 계기로, 그 음모에 어떻게 대처했는가 깊이 각성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따라서 ‘피습사건’에 대한 국회 차원의 진상조사를 촉구하며, 양심있는 시민들의 동참도 요구 드립니다.
  
  특히 범인이 공개적 자백을 하였기 때문에 사건 규명보다도, 진실을 공개시키지 못한 이면에는 과연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 확인하여 주십시오. 이는 후세에 절대 필요한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실규명이 아니라 대충 넘기려는 기회주의(당시 모월간지 편집실 습격사건, 모일간지 부장 피습사건)가, ‘우리마당’ 김기종에게는 20여년 되도록 안 먹혔음을 오늘 이렇게 죽음으로 입증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결국 공안 당국이 스스로의 과오는 인정하고, 시대에 맞는 자기의 정체성을 올바르게 확립하여, 사회적으로 꼭 필요한 역할 만을 수행하여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셋째, 마당지기를 하며 보낸 지난 25년간의 활동, 집안 장손의 역할은 못했지만 정말 보람 있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마당”이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문화적으로 달성한 소중한 활동 가치를 인정하신다면, 비록 저처럼 모든 걸 투신하지 못했을지라도, 청년학창 시절에 “우리마당” 회원으로 활동했었던 국회의원들만이라도 집결하여,“우리마당 설립에 관한 법” 같은 것을 입법해주시기를 감히 청원드립니다.
  
  즉 “우리마당”이 당국의 엉터리 탄압을 벗어나 보다 합법적인 활동을 마음껏 할 수 있도록, 사회변화 과정에서 형성된 새로운 공동체로써 실천을 할 수 있는 모범이 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덧붙이는 말
  
  민주화되었다는 국민, 참여정부 시절에도 제가 ‘우리마당’ 운동을 실행하면서 당했던 탄압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저의 분신을 진심으로 마음 아파한다면, 그 협작과 공작 과정들에 참여한 분들의 양심선언을 유도해 주십시오.
  
  (참고로 9월 10일 ‘만남과 나눔’ 호외2에 실린 의문점들만 파헤쳐도 그 사연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튼 1980년대 중반 ‘우리마당’같은 열린공간 없던 시절, 일반 활동가들의 분신을 상담하던 이들에게 왜 죽느냐, 죽는 목적이 무엇이냐며, 그들을 1인 시위, 단식농성 등을 지도했던 제가, 우연찮은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단식농성 없이 곧바로 분신하는 아픔을 잘 이해하고, 진실규명에 동참해 주시기를 거듭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1987년 고생하고 촬영한 이한열 열사 장례식 필름 압류 아픔 속에서도 꾸준히 이북영화를 연구하였고, 1997년 ‘고구마 3개의 사랑’을 제작, 이북동포돕기에 실질적 기여한 ‘영화마당’ 대표 이경화 님과 충남 대천 ‘우리마당’ 지회장으로 활동했던 신돈 님에게 “우리마당‘ 운동의 제2대 마당지기로써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그 두 분에게 모든 권한과 의무를 맡김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제가 오늘 분신하는 가장 큰 이유는 언행을 달리하는 사회 지도층 인사들 때문입니다. 1988년 8월 ‘피습사건’ 원인에 대한 언론보도 등으로 ‘보안사’가 “기무사”로 이름이 바뀌자, 국회의원으로 활동하시던 노무현, 이해찬 님 등도 군부의 짓이 명백하니까, 사건 진상규명은 시기를 적절히 대응하자는 말로 저를 달랬습니다. 그러면서 사건 배경은 당시 6월항쟁 이후 ‘우리마당’ 사무실을 비교적 수월하게 드나들었던(?) 경찰, 안기부와는 달리 올림픽을 목전에 둔 군부가 정보 수집 단계에서 문책 당하면서 이같이 엉뚱한 일을 저지른 것이 아니냐는 합의를 도출하였습니다.
  
  이후 ‘국회’ 국정조사 출석 요구에 응하는 등 꾸준히 진상 규명을 요구했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었고, 결국 활동에 여러 제약, 예를 들면 진상규명 요구에 대한 고집으로 ‘민예총’ 창립에 동참 못한 아쉬운 사태가 발생하였습니다. 특히 최근에는 소위 통일관계 시민단체연합 ‘민화협’, ‘615남측위’, ‘통교협’ 등의 창립과 활동에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지만, 군부정권 시절 관변 단체보다 더욱 심한 조직 간의 암투 탓에, 통일사업 역할 분담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안타까움이 연이어지고 있으며, 이에 격분한 저는 회의장에서 발언 도중 흥분하여 실신하는 등 심각한 사태가 연이어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 김기종은 그같은 소외와 냉대에도 통일운동을 하는 문화운동가로써, 통일관계 회의와 행사에 꾸준히 ‘우리마당’ 또는 ‘서울시민문화단체연석회의’를 대표해서 참가(가장 우수한 출석 등), 자신의 역할을 끝끝내 수행하고 있었음을 정말 마지막으로 자랑스럽게 부언합니다.]
  
  
  


2007년10월19일 ⓒ민중의소리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