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이야기는 당시의 풍문과 목격담을 각색해 구상한 실화입니다.

귀촌후 틈틈히 나의 인생이야기를 기록중이며, 그중 공유의 글을 올리는바입니다.)

 

 

때는 1951년 이후 전남 무등산 일대에 활동하던 남부군 빨치산중 일부대원이 내장산,지리산 본거지로 떠나게된다.
이곳은 지리산보다 은신에 취약한지역으로, 한국전쟁 전후 남부군(빨치산) 일부가 임시 은신처로 활용했다.
또한 6.25 인민해방구 시절부터 9.28 후퇴 이후에도, 무등산은 지리산처럼 한동안 남부군의 거점지가 되었다.
광주가 수복된 직후인 1950년 10월 29일,
서석국민학교에 주둔중인 국군 제20연대가 습격을 받고, 학교 건물 일부가 불에 탔다.

하여 군경은 무등산 빨치산 토벌작전을 개시하고, 작전 수행을 위해 경찰이 주민들을 동원하여 신작로를 개설했다.
1950년 12월부터 다음해까지 계림동에서 원효 계곡에 이르는 12㎞ 구간에 도로를 개설한것이다.
그 후 이 도로를 확장하고 포장한 것이 현재의 관광도로이며,
지금의 산수동~원효사 간 구간은 6.25 전쟁이 낳은 산물이라 하겟다.

또한 국군이 1951년경 초가을때 무등산 중봉자락인 규봉암(영평리) 일대에
전투기로 화학무기를 살포하며, 포위작전을 펼쳤다.

남부군에 점점 은신에 취약해지자, 이들은 산발적으로 탈출해 화순으로 도피하거나 지리산 본거지로 향했다.
그 과정에서 군경토벌대와 맞닥뜨려 산발적 교전이 발생했고, 수적으로 열세인 이들은 대응사격을 하며 흩어졌다.
이 인민유격대는 남조선노동당 박헌영대장의 이현상 남부군 총사령관(지리산지구 제2병단) 조직부대중 하나였다.

 

 

 

한편 1951년 늦봄 이른새벽, 광주 외각에서 척호활동하던 몇명의 남부군은,
광주변두리 남서쪽방향에서 왠 폭탄소리를 듣게된다.
순간 낙오된 영산강 동지와 직결된 상황이라 판단하고, 신속히 서창동방향으로 향한다.
가다 매월동(회재로)에 다다르자 폭탄부상을 당한 동지 한명을 만나게 되고,
동지가 알려준대로 폭탄현장으로 향했다.

 

한편 남부군 인질로 있다 폭탄이 터지기 직전 몸을 피하다 부상당한 나의 할아버지는 현장에서 무조건 탈출했다.
그후 대각선에서 숨어 구경하던 지역주민중 한명이 도와주러 인질이 있는곳으로 숨어서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다가가 묶인 손을 풀어주었고, 나의 할아버지는 잠시 휴식만 취한체 이내 이곳을 떠났다.

 


남부군이 서창동 야산 언덕들판 인근에 도착하니,
멀찍이서 반공치안대들이 양민을 암매장하는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탕, 탕, 탕.."
합세해온 남부군이 현장으로 숨어와 일제히 사격하자,
치안대 인솔자는(서북청년단출신) 현장에서 즉사,
지역반공대원 한명은 총상을 맞고 쓰러진다.
그러자 나머지 반공대원들은 가져온 총만 챙긴체 뒤도 돌아보지않고 삼십육계 줄행랑을 쳤다.
폭탄현장에 도착한 남부군은 총상으로 도망치지못한 반공대원에게, 지금 무슨일을 벌이려한거냐고 추궁한다.
알고보니 이북출신 반공대원이 단독으로 치안대를 인솔하며 막무가내 작전을 펼치는 바람에, 
치안대 폭탄을 맞아 인질인 무고한 양민이 죽어있었다.

하여 무과실 전공으로 위장하고자 인질인 지역양민을 암매장하다, 결국 이렇게 발각된것이다.
합세해온 남부군은 조금전 운명한 불갑산 인민간부를 인근에 임시 매장하고 잠시 애도하였다.
그리고 다친 반공대원에게 "인민에 총부리나 겨누지 말고 농사에나 전념하시오." 충고를 하고 자리를 떴다.


 

남부군이 폭탄현장에서 짐을 챙기고 자리를 완전히 뜨자,
멀찍이 숨어 남아서 지켜보던 주민 몇이 그 현장으로 나온다.

폭탄현장에 와 아직도 아수라장 흔적이 생생함을 보고,
허탈하여 한주민이 총상당한 반공대원에게 말을 건넨다.

 

마을주민; "아이고, 꼴이 말이 아니구만이랴~..
그건그렇고, 삽가지고 뭔 난리요~ 빨갱이하면 우리도 싫어하니까, 삽달라해서 줬는데, 이건 아니지않소?"


반공대원 "죽것소. 묻지 마시요~"


마을주민 ; "애고 모르것다. 우리 주민도 오늘 못본걸로할테니, 젊은양반 어디 나서지말고 농사나 전념하게요 들~."
 
반공대원 ; "아이고, 알았당께~ 아주마이~ 나좀 부추켜주시요~"

 

그러했다. 당시 전쟁이라는 엄혹한 시기였기에 아군이든 적군이든 주민이든 서로 묻지말아야할 일이 많았다.
 "묻지를마세요." 트로트는 현대에 김성환 아티스트가 애정을 담은 가요이다.
만일 격동기때 이곡이 시판됐다면 애환곡으로 널리 불리었을지 싶다.

아무튼 졸지에 패잔병이 된 반공대원은 지역주민의 부축하에 이 현장에서 터벅터벅 빠져나왔다.
한편 해는 천연덕스럽게 슈퍼선이 되어 동쪽 무등산 위로 높게 드리우고 있었다..


 

서창동 폭탄현장을 수습하고 나온 남부군은
다시 무등산 방향으로 발길을 잡고, 광주에 당분간만 은신하게 된다.

군경토벌대의 무등산 포위작전이 개시된 상태여서, 이들은 이후 화순방향으로 선회하였다.
화순 야산에 은신하여, 한동안 화순 토벌대의 후방을 교란하다, 이후 또다시 방랑자가 된다.



사람들은 호남권에 빨치산 잔당이 전시 이후로도
인근에 흩어져 은거하는수가 많았다고하는데, 맞는듯하나 틀린면도 있다.

전쟁 당시 전남권만 가담자까지 포함해 남부군(빨치산)이 약6만여명으로 가장 많은 규모인듯보인다.
태백산맥을 끼고 오대산, 태백산, 소백산(강원도, 경상북도)  속리산을 끼고 덕유산, 가야산(충청도, 경상도권)
지리산을 끼고 내장산 및 서,남해 내륙일대(전라도, 경상도) 도합해 남한내에 수십만 이상의 인민유격대가 존재하였다.
이중 전사하거나 생포 및 자수된 인민유격대 수를 아무리 많이 추산하여도 10만여명 안팎이다.
당시 군경의 대대적인 토벌작전 이후, 좌익분자 색출작업도 횡횡하였다.
하여 대부분의 빨치산과 인민 부역자들도 처벌을 피하고자 근거지나 터전을 버리고 멀리 떠나야만 했다.
군경의 대대적인 토벌작전으로 전사하거나 붙잡히거나
혹은 타지역으로 도피를 하다 사살되지만 이들이 다가 아닌것이다.

일부의 빨치산은 인민군이 퇴각할 때 혹은 그후 기회를 엿보아 월북했다.
또 상당수의 일부는 도중에 빨치산 활동을 포기하고 근거지를 떠나 피난민과 석여서 도처에 은거하게 된다.
즉 호남권에서는 호남권밖으로, 영남권도 이지역 밖으로 등등 대규모 엑소더스가 이어진것이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체결 이후 도처에 남아있는 빨치산은 이렇게 각 도처로 흩어져 은거하며 살게 된다.

당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강동정치학원을 통해 양성한 유격대원을 포함해 약 2500여명의 남부군(빨치산)을,
 1948년부터 몇년을 거쳐 남파했다.  그후 9.28 후퇴이후 일부 잔존한 인민군을 합쳐 수십만명 이상인것은,

시사하는바가 크다. 이들에 가담한 민초중 일부는 생존형이었지만 의기투합 의지 또한 많았다.

 

 

한편 인민치하에서 생존을 위해 부역한 대부분의 생존형 소극 부역자들은 차마 자신의 터전을 떠나지 못하였다.
하여 격전지 인근 마을을 비롯 재수없는자는 군경의 토벌작전에 휩쓸려 학살을 당하였고,
운좋은자는 자수해 약간의 처벌만 받고 풀려나기도 했다.
즉 부역자중 운좋은자는 경찰서나 지서에 연행되 조사를 받은 뒤 훈방되었고,
혹은 죄질이 나쁜자는 서울 등지로 이송해 징역 형을 얻도받았고(일부는 사형), 대부분 수감하다 석방됐다.

 

한국전때 인민군과 남부군(빨치산)에 의해 영광을 비롯 남도의 교회와 기득권 세력에 대한 숙청과 탄압이 이어졌다.
탄압이 다소 일방적이었는데, 그렇다면 현제 교회와 기득권이 부의 분배를 하며 먼가 달라야 하는데 그렇지는 않다.
그러면서 당시 빨갱이에게 당했다며 이를 가는데, 과연 억울하다고만 할수있는지 의문이 드는 대목이다..
필자도 당한 집안의 입장에서 양심 고백하자면 그런자는 딱하고 가련할 뿐이다.
그저 역지사지해야만 할말이 있을뿐이다..


생각해보면 당시 호남권에 빨치산이 많이 존재했던 이유는 지리적으로 은거 가능지역이 많다는 지정학적 이유가 크다.
민중의 자각이나 만인 평등사상 분포지는 오히려 구한말 동학사상이 활발했던 중부권으로 충청도와 전북이었다.
구한말 당시 전라도 나주만해도 동학 항쟁시 관군들이 동학도들을 아작냈다고한다.
한편 나주 지역 인사들중 이것이 나주의 자랑인양 공중파 지역민방에서 버젖이 떠벌리고 있다.
이렇듯 전남권에 아직도 은연중에 구태와 천민자본주의가 만연해 있는 실정이다.
현제 호남권의 정치인만봐도 적패스런 바른미래당 인사가 대부분이거나
두각이 잘 안나타난 더민당, 민평당 인사가 주를 이룬다.

일출한 사회 인사는 대부분 중부권에 분포되어 있으며, 그다음에 호남, 경남등에 조금씩 있는편이다.

 

좀 과한 상상이지만, 만일 80년대에 신군부가 광주사태를 벌이는 만행이 자행되지 않았다면,
전남 또한 좀 적패스럽고 모호한 강원권처럼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이 된다.
신군부의 광주 학살 만행으로 인해, 잠들고 있던 남도의 의식을 깨워
독재와 저항해 어느덪 민주화성지로 우뚝서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호남은 무슨 저력에 있어 어떠한가?에 대한 답은 한반도 어느지역 못지않게 잠재력, 저력이 풍부하다.
한반도 호남은 아시아 물류교역의 허브였거나, 외세나 적패와의 끈임없는 투쟁의 역사를 이어온 고장이라 할수있다.
통일신라 이후로 남도에 해상교역이 활발했으며(청해진 장보고대사), 고려시대때 남도에서 삼별초와 함께 항몽하였다.
조선시대 임진왜란때 왜구를 물리쳤으며(남해 충무공 이순신 활약), 격동기때 신군부의 광주만행에 맞서 투쟁하였다.
이렇게 무슨 저력이나, 성장 잠재력은 월등히 풍부하다.
그러나 민주화도 아이러니하게 부의 분배력까지는 이어지지 않거나 미진한 실정이다.
이곳이 정말 좋은곳이라면, 잘사고 못사고를 떠나 도시나 시골이나 인심이 좋아야할것이다.
그러나 남도의 인심도 이반되어, 현실은 타지역처럼 호불호만 있을뿐 마찬가지라는것에서 문제점을 직면하고 있다.
아무튼 오블리스 노블리제, 이것은 일부 유럽 선진국을 제외하고 모든 나라와 인류가 실현해야할 과제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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