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PMC : 더벙커'는 대한민국 영화 중 글로벌 군사기업인 PMC를 최초로 다룬 영화로,
단순한 리얼타임 생존극을 넘어 인류를 구하는 SF를 영상케하는 밀리터리 액션 영화입니다.

영화 줄거리는 CIA에게서 거액의 작전을 의뢰받은 PMC 민간군사기업의 개인 용병들이,
북한 킹을 사로잡으려는 순간 또 다른 음모의 함정에 빠지며, 이것을 해쳐나가는 모습입니다.
특히 이 영화에서 주목할 것은 30m 아래의 한정된 벙커 지하 공간에서
살아남기 위한 극한 혈투속을 생생히 담았는데,

지난 아프리카TV 생방송 시국현장이나 게임을 보는 듯한 화면 전개와
쉴 새 없이 긴장감을 부추기는 배경음악입니다.

하여 평점은 국내 현역 예비역 장성과 해외 영화팬들도
트랜스포머' 스핀 오프인 '범블비'와 견준다고합니다.

한국영화중 배틀그라운드(서바이벌 슈터 비디오게임)를 연상케 하는 이영화는
보기 드문 카메라 워킹이(모션캡 및 관제탑형 모니터 CCTV) 사람에 따라 신선했을수도,
어지러웠을수도 있겠습니다.

볼거리, 생각할거리 둘다 한국 액션영화 치고 보통 이상은 된다 하겠습니다.
벙커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인만큼 액션은
다소 제한적일수도 있겠다 감안하고 감상하면 괜찮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 무슨 난리를 치는듯한 장면을 원하는 관객이 있을듯해, 
그점을 약간 감안해 스토리와 액션을 디테일하고 현장감있게 선사해주는 신선한 영화입니다.
주연 하정우의 등장도 스크린에서 보듯,
불구인 백색테러 대장인만큼 본영화에서 시다바리격 맨몸액션 기대는 다소 무리라하겠습니다.

이 영화를 위해 감독과 제작진이 1년동안 40여권의 pmc 관련 책을 탐독하고, 현 영화사의 강명찬대표는
3년간 영국과 미국을 오가며 파병 경험 등 영화에 출연할만한
현역 출신 배우들을 조사해 우선 케스팅했다고 합니다.

 

PMC 뜻과 영화 PMC 더 벙커 줄거리 1 
[출처 ; kiss7.tistory.com/1104   키스세븐]


사진: CIA의 요청이 있었지만 킹 사냥은 하정우의 결정이다(CIA의 요청이 있었지만 킹 사냥은 하정우의 결정이다 [PMC 더 벙커 영화 줄거리 뜻] / ⓒ 김병우)


에이헵이 갑자기 CIA 작전 제의를 받아들인 건 자료영상에 북한 서열 1위의 "킹"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CIA가 킹을 잡겠냐는 질문을 할 정도로 하정우는 계산적으로 나섭니다.
5천만 달러 이상이 걸린 동아시아 최대의 수배자를 잡는 것이라는 계산에 의해서입니다.
PMC 더 벙커 줄거리는 하정우의 결단 때문에 킹을 잡는 것으로 목적을 변경하게 됩니다.
 


사진: 북한 킹을 잡는데 성공하는 영화 초반부의 장면(북한 킹을 잡는데 성공하는 영화 초반부의 장면 [영화 PMC 더 벙커 줄거리 뜻] / ⓒ CJ엔터테인먼트)


용병들의 반대의견도 있었지만, 비무장지대의 지하벙커로 난입한 이들은 계획대로
북한 경비원을 제압하고 북한 킹을 잡는 데에 성공합니다.
이때 깨어난 북병사의 반격으로 팀원이 한 명 사살되고, 급하게 의료진을 부르지만 CIA는 즉시 철수하라고 재촉하고...
그런데 민간 군사 기업(PMC 뜻)의 팀원들은 의외의 함정을 깨닫습니다.
북한 킹의 주치의인 윤지의(이선균)가 이미 자신들은 아침에 납치되어서 이곳에 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진: 북한 킹은 5000만 달러가 걸린 수배자이다(북한 킹은 5000만 달러가 걸린 수배자이다 [영화 PMC 뜻 더 벙커 줄거리] / ⓒ 퍼펙트스톰필름)


그런데 뉴스에서는 CIA가 고용한 용병들이 10시간 전에 킹을 납치해서 사살했으며 도주하다가
북한군에게 제압되었다는 기사가 나오고 있었습니다.
외부에는 가짜 뉴스가 퍼지고 지하 30m의 벙커에는 새로운 용병들이 이들을 죽이기 위해 투입되고 있었습니다.
PMC 더 벙커의 하정우는 급히 퇴각을 시도하지만, 같은 팀원의 배신으로 엉망진창이 됩니다. 


 


 


 

PMC 뜻과 영화 PMC 더 벙커 줄거리 2 

새로운 뉴스에서는 PMC 더 벙커의 하정우가 이미 사살되었다는 가짜 뉴스도 나옵니다.
누군가가 애초부터 이들을 죽이기 위해 이곳에 몰아넣었던 것입니다.
민간 군사 기업(PMC 뜻)은 어차피 거액의 돈과 배신과 죽음 사이에서 살아가는 용병을 가차 없이 배신했습니다.
이들은 북한 서열 1위인 킹을 살려서 데리고 있어야만 그나마 살아남을 희망이 있습니다. 


사진: 게임처럼 1인칭 시점으로 북한 주치의와 통화하는 모습(게임처럼 1인칭 시점으로 북한 주치의와 통화하는 모습 [영화 PMC 더 벙커 줄거리 뜻] / ⓒ 김병우)


그러는 도중, 북한의 이선균이 의료진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킹의 생존을 위해서 서로 협력하기로 합니다.
북한 킹이 심정지 상태에서 죽을 뻔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살려내고,
이들을 죽이려는 다른 용병들은 포위망을 좁히면서 접근 중에 있습니다.


사진: 비무장지대 지하 30미터 아래에 깔린 벙커의 구조도 장면(비무장지대 지하 30미터 아래에 깔린 벙커의 구조도 장면 [영화 PMC 더 벙커 줄거리 뜻] / ⓒ CJ엔터테인먼트)


생사를 넘나드는 탈출 작전을 벌이며 영화 PMC 더 벙커 줄거리는 막바지에 이르고,
후반 20분은 에이헵과 윤지의의 낙하산 탈출 장면으로 극적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합니다.
국가도 이념도 없는 군대와 이익만을 추구하는 자본주의가 만나면
어떤 비극이 벌어질지를 생존이라는 주제어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엔딩 부분의 액션은 누구나 인정할 만큼 박진감이 넘칩니다.


 

(엔딩장면에서 낙하산을 타고 탈출하고 있다 [영화 PMC 더 벙커 줄거리 뜻] / ⓒ 퍼펙트스톰필름)

 

영화 PMC 더 벙커 줄거리에서 마지막에 남한 사람과 북한 사람이 같이 힘을 합치는 부분은
조금 예상이 되는 부분이지만 현재의 한반도 정세의 기대를 반영한 부분 같습니다.
다만, 미국과 중국에 휘둘리는 모습은 씁쓸한 현실감을 느끼게도 합니다.
PMC 더 벙커의 하정우와 이선균의 모습은 국제 정세에서 우리가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반문이기도 합니다.


[출처 ; 키스세븐(www.kiss7.kr) ]

 

 

(아래의 이야기는 당시의 풍문과 목격담을 각색해 구상한 실화입니다.

귀촌후 틈틈히 나의 인생이야기를 기록중이며, 그중 공유의 글을 올리는바입니다.)

 

 

때는 1951년 이후 전남 무등산 일대에 활동하던 남부군 빨치산중 일부대원이 내장산,지리산 본거지로 떠나게된다.
이곳은 지리산보다 은신에 취약한지역으로, 한국전쟁 전후 남부군(빨치산) 일부가 임시 은신처로 활용했다.
또한 6.25 인민해방구 시절부터 9.28 후퇴 이후에도, 무등산은 지리산처럼 한동안 남부군의 거점지가 되었다.
광주가 수복된 직후인 1950년 10월 29일,
서석국민학교에 주둔중인 국군 제20연대가 습격을 받고, 학교 건물 일부가 불에 탔다.

하여 군경은 무등산 빨치산 토벌작전을 개시하고, 작전 수행을 위해 경찰이 주민들을 동원하여 신작로를 개설했다.
1950년 12월부터 다음해까지 계림동에서 원효 계곡에 이르는 12㎞ 구간에 도로를 개설한것이다.
그 후 이 도로를 확장하고 포장한 것이 현재의 관광도로이며,
지금의 산수동~원효사 간 구간은 6.25 전쟁이 낳은 산물이라 하겟다.

또한 국군이 1951년경 초가을때 무등산 중봉자락인 규봉암(영평리) 일대에
전투기로 화학무기를 살포하며, 포위작전을 펼쳤다.

남부군에 점점 은신에 취약해지자, 이들은 산발적으로 탈출해 화순으로 도피하거나 지리산 본거지로 향했다.
그 과정에서 군경토벌대와 맞닥뜨려 산발적 교전이 발생했고, 수적으로 열세인 이들은 대응사격을 하며 흩어졌다.
이 인민유격대는 남조선노동당 박헌영대장의 이현상 남부군 총사령관(지리산지구 제2병단) 조직부대중 하나였다.

 

 

 

한편 1951년 늦봄 이른새벽, 광주 외각에서 척호활동하던 몇명의 남부군은,
광주변두리 남서쪽방향에서 왠 폭탄소리를 듣게된다.
순간 낙오된 영산강 동지와 직결된 상황이라 판단하고, 신속히 서창동방향으로 향한다.
가다 매월동(회재로)에 다다르자 폭탄부상을 당한 동지 한명을 만나게 되고,
동지가 알려준대로 폭탄현장으로 향했다.

 

한편 남부군 인질로 있다 폭탄이 터지기 직전 몸을 피하다 부상당한 나의 할아버지는 현장에서 무조건 탈출했다.
그후 대각선에서 숨어 구경하던 지역주민중 한명이 도와주러 인질이 있는곳으로 숨어서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다가가 묶인 손을 풀어주었고, 나의 할아버지는 잠시 휴식만 취한체 이내 이곳을 떠났다.

 


남부군이 서창동 야산 언덕들판 인근에 도착하니,
멀찍이서 반공치안대들이 양민을 암매장하는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탕, 탕, 탕.."
합세해온 남부군이 현장으로 숨어와 일제히 사격하자,
치안대 인솔자는(서북청년단출신) 현장에서 즉사,
지역반공대원 한명은 총상을 맞고 쓰러진다.
그러자 나머지 반공대원들은 가져온 총만 챙긴체 뒤도 돌아보지않고 삼십육계 줄행랑을 쳤다.
폭탄현장에 도착한 남부군은 총상으로 도망치지못한 반공대원에게, 지금 무슨일을 벌이려한거냐고 추궁한다.
알고보니 이북출신 반공대원이 단독으로 치안대를 인솔하며 막무가내 작전을 펼치는 바람에, 
치안대 폭탄을 맞아 인질인 무고한 양민이 죽어있었다.

하여 무과실 전공으로 위장하고자 인질인 지역양민을 암매장하다, 결국 이렇게 발각된것이다.
합세해온 남부군은 조금전 운명한 불갑산 인민간부를 인근에 임시 매장하고 잠시 애도하였다.
그리고 다친 반공대원에게 "인민에 총부리나 겨누지 말고 농사에나 전념하시오." 충고를 하고 자리를 떴다.


 

남부군이 폭탄현장에서 짐을 챙기고 자리를 완전히 뜨자,
멀찍이 숨어 남아서 지켜보던 주민 몇이 그 현장으로 나온다.

폭탄현장에 와 아직도 아수라장 흔적이 생생함을 보고,
허탈하여 한주민이 총상당한 반공대원에게 말을 건넨다.

 

마을주민; "아이고, 꼴이 말이 아니구만이랴~..
그건그렇고, 삽가지고 뭔 난리요~ 빨갱이하면 우리도 싫어하니까, 삽달라해서 줬는데, 이건 아니지않소?"


반공대원 "죽것소. 묻지 마시요~"


마을주민 ; "애고 모르것다. 우리 주민도 오늘 못본걸로할테니, 젊은양반 어디 나서지말고 농사나 전념하게요 들~."
 
반공대원 ; "아이고, 알았당께~ 아주마이~ 나좀 부추켜주시요~"

 

그러했다. 당시 전쟁이라는 엄혹한 시기였기에 아군이든 적군이든 주민이든 서로 묻지말아야할 일이 많았다.
 "묻지를마세요." 트로트는 현대에 김성환 아티스트가 애정을 담은 가요이다.
만일 격동기때 이곡이 시판됐다면 애환곡으로 널리 불리었을지 싶다.

아무튼 졸지에 패잔병이 된 반공대원은 지역주민의 부축하에 이 현장에서 터벅터벅 빠져나왔다.
한편 해는 천연덕스럽게 슈퍼선이 되어 동쪽 무등산 위로 높게 드리우고 있었다..


 

서창동 폭탄현장을 수습하고 나온 남부군은
다시 무등산 방향으로 발길을 잡고, 광주에 당분간만 은신하게 된다.

군경토벌대의 무등산 포위작전이 개시된 상태여서, 이들은 이후 화순방향으로 선회하였다.
화순 야산에 은신하여, 한동안 화순 토벌대의 후방을 교란하다, 이후 또다시 방랑자가 된다.



사람들은 호남권에 빨치산 잔당이 전시 이후로도
인근에 흩어져 은거하는수가 많았다고하는데, 맞는듯하나 틀린면도 있다.

전쟁 당시 전남권만 가담자까지 포함해 남부군(빨치산)이 약6만여명으로 가장 많은 규모인듯보인다.
태백산맥을 끼고 오대산, 태백산, 소백산(강원도, 경상북도)  속리산을 끼고 덕유산, 가야산(충청도, 경상도권)
지리산을 끼고 내장산 및 서,남해 내륙일대(전라도, 경상도) 도합해 남한내에 수십만 이상의 인민유격대가 존재하였다.
이중 전사하거나 생포 및 자수된 인민유격대 수를 아무리 많이 추산하여도 10만여명 안팎이다.
당시 군경의 대대적인 토벌작전 이후, 좌익분자 색출작업도 횡횡하였다.
하여 대부분의 빨치산과 인민 부역자들도 처벌을 피하고자 근거지나 터전을 버리고 멀리 떠나야만 했다.
군경의 대대적인 토벌작전으로 전사하거나 붙잡히거나
혹은 타지역으로 도피를 하다 사살되지만 이들이 다가 아닌것이다.

일부의 빨치산은 인민군이 퇴각할 때 혹은 그후 기회를 엿보아 월북했다.
또 상당수의 일부는 도중에 빨치산 활동을 포기하고 근거지를 떠나 피난민과 석여서 도처에 은거하게 된다.
즉 호남권에서는 호남권밖으로, 영남권도 이지역 밖으로 등등 대규모 엑소더스가 이어진것이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체결 이후 도처에 남아있는 빨치산은 이렇게 각 도처로 흩어져 은거하며 살게 된다.

당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강동정치학원을 통해 양성한 유격대원을 포함해 약 2500여명의 남부군(빨치산)을,
 1948년부터 몇년을 거쳐 남파했다.  그후 9.28 후퇴이후 일부 잔존한 인민군을 합쳐 수십만명 이상인것은,

시사하는바가 크다. 이들에 가담한 민초중 일부는 생존형이었지만 의기투합 의지 또한 많았다.

 

 

한편 인민치하에서 생존을 위해 부역한 대부분의 생존형 소극 부역자들은 차마 자신의 터전을 떠나지 못하였다.
하여 격전지 인근 마을을 비롯 재수없는자는 군경의 토벌작전에 휩쓸려 학살을 당하였고,
운좋은자는 자수해 약간의 처벌만 받고 풀려나기도 했다.
즉 부역자중 운좋은자는 경찰서나 지서에 연행되 조사를 받은 뒤 훈방되었고,
혹은 죄질이 나쁜자는 서울 등지로 이송해 징역 형을 얻도받았고(일부는 사형), 대부분 수감하다 석방됐다.

 

한국전때 인민군과 남부군(빨치산)에 의해 영광을 비롯 남도의 교회와 기득권 세력에 대한 숙청과 탄압이 이어졌다.
탄압이 다소 일방적이었는데, 그렇다면 현제 교회와 기득권이 부의 분배를 하며 먼가 달라야 하는데 그렇지는 않다.
그러면서 당시 빨갱이에게 당했다며 이를 가는데, 과연 억울하다고만 할수있는지 의문이 드는 대목이다..
필자도 당한 집안의 입장에서 양심 고백하자면 그런자는 딱하고 가련할 뿐이다.
그저 역지사지해야만 할말이 있을뿐이다..


생각해보면 당시 호남권에 빨치산이 많이 존재했던 이유는 지리적으로 은거 가능지역이 많다는 지정학적 이유가 크다.
민중의 자각이나 만인 평등사상 분포지는 오히려 구한말 동학사상이 활발했던 중부권으로 충청도와 전북이었다.
구한말 당시 전라도 나주만해도 동학 항쟁시 관군들이 동학도들을 아작냈다고한다.
한편 나주 지역 인사들중 이것이 나주의 자랑인양 공중파 지역민방에서 버젖이 떠벌리고 있다.
이렇듯 전남권에 아직도 은연중에 구태와 천민자본주의가 만연해 있는 실정이다.
현제 호남권의 정치인만봐도 적패스런 바른미래당 인사가 대부분이거나
두각이 잘 안나타난 더민당, 민평당 인사가 주를 이룬다.

일출한 사회 인사는 대부분 중부권에 분포되어 있으며, 그다음에 호남, 경남등에 조금씩 있는편이다.

 

좀 과한 상상이지만, 만일 80년대에 신군부가 광주사태를 벌이는 만행이 자행되지 않았다면,
전남 또한 좀 적패스럽고 모호한 강원권처럼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이 된다.
신군부의 광주 학살 만행으로 인해, 잠들고 있던 남도의 의식을 깨워
독재와 저항해 어느덪 민주화성지로 우뚝서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호남은 무슨 저력에 있어 어떠한가?에 대한 답은 한반도 어느지역 못지않게 잠재력, 저력이 풍부하다.
한반도 호남은 아시아 물류교역의 허브였거나, 외세나 적패와의 끈임없는 투쟁의 역사를 이어온 고장이라 할수있다.
통일신라 이후로 남도에 해상교역이 활발했으며(청해진 장보고대사), 고려시대때 남도에서 삼별초와 함께 항몽하였다.
조선시대 임진왜란때 왜구를 물리쳤으며(남해 충무공 이순신 활약), 격동기때 신군부의 광주만행에 맞서 투쟁하였다.
이렇게 무슨 저력이나, 성장 잠재력은 월등히 풍부하다.
그러나 민주화도 아이러니하게 부의 분배력까지는 이어지지 않거나 미진한 실정이다.
이곳이 정말 좋은곳이라면, 잘사고 못사고를 떠나 도시나 시골이나 인심이 좋아야할것이다.
그러나 남도의 인심도 이반되어, 현실은 타지역처럼 호불호만 있을뿐 마찬가지라는것에서 문제점을 직면하고 있다.
아무튼 오블리스 노블리제, 이것은 일부 유럽 선진국을 제외하고 모든 나라와 인류가 실현해야할 과제로 남아있다..

 

9

 

지난 밤에(11/26) 기이한 꿈을 꾸었네요.  

북한 김정은 주석이 올해 늦가을 지나 전격 방한했어요.

즉 올해 초겨울쯤 남한 방한은 하되 회담 날짜와 면담인사 및 장소는 1급비밀하였는데요.

이날 방한 전날 방한 확정 보도가 나고 그 다음날 전격 방한을 한거에요.

판문점을 거쳐 방한한 모습을 공영방송이 TV 생중계를 해주었어요.

방한하여 회담한 장소는 남산타워 전망대였어요.

(현실에서는 북한 수장을 국무위원장이라 호칭하지만,
꿈에서는 인민들이 주석 혹은 수령이라 호칭하여 꿈이니 꿈 용어로 통일합니다.)


저는 아무것도 모르다가 쌀쌀한 그날 서울역전을 우연히 지나나 대형스크린을 통해,

북한 주석이 1시간전 서울로 와 남산타워 전망대에 막 도착한 모습을 보았지요.

남북한대표 및 고위정상들이 남산 전망대에서 포토타임을 잠시 가졌어요.

남한정상들은 좌측, 북한정상들은 우측 총8명으로 참가단이 특별했어요.

좌 남측 정상들 ; 김대중전대통령, 정동영장관, 김근태전총리, 문재인각하

우 북측 정상들; 김정은주석, 리설주여사, 장성택장군, 김일성전주석

 위처럼 꿈나라에서는 김대중전대통령이 아직 살아계셨고,

보건복지부장관을 지낸 김근태전의원도 지난 정권때 총리를 지내다 퇴임했지만,

대통령 유력 후보를 고사하고 문재인후보에게 후보자리를 넘겨준 장자방이었어요.

이것은 16대 대선때 노무현선생에게 대권자리를 넘겨준 전례가 있는만큼,

 국민들도 뜻깊어 하여 국민의 열망에 힘입어 방한정상에 포함된거였어요.

 

우측 북한 정상들중 김일성 전주석이 몸이 좀 수척해졌지만 여전히 살아 장수하고있었어요.
그리고 친중파 숙청설로 나돌았던 장성택장군도 건재한 상태로 리설주여사만큼 회담을 담담히 리드하였어요.

특히 인상적인건 회담전 정식포토타임을 갖은후 장성택장군이 2차 깜짝포토타임을 제안한거였어요.

앞 내빈객중 이재명지사를 먼저 부른후, 아차 잊을뻔했다며 박원순시장도 부른후,

나란히 10여명이 포토타임을 갖고, 모두들 악수했고,

특히 북측 인사들이 이지사에게 고초가 많다는조의 환담도 오갔어요. 


대형스크린을 보다 저 회담장소에 갈수있을까 궁금하던차,
사람들이 말하길 회담 장소는 갈수있어도 회담장소 군중내빈으로 구경하는것도 이미 비밀로 정해져있더래요.
그러나 회담 끝나고 남산에 내려올때는 남산 주위에서 구경가능하다는거에요.
그래서 호기심으로 남산타워로 향했어요.

가보니 앞면있는 시민단체 대표가 자원봉사하면서,

 저보고 회담 끝나가고 있으니 멀찍이서라도 보고싶으면 지금 서둘러 올라가라는거에요.
꿈에 남산타워 전망대는 20층이었어요.
하여 경호원의 안내하에 남산타워로 향하여 올라가니,
승강기쪽에는 사람이 만원으로 인산인해였지만, 계단으로 올라가는쪽은 다행히 좀 한산했어요.
그래서 계단을 타고 한참 올라가다보니 10층이 지나서야 자녀도 대리고 온 시민을 비롯해 사람들이 좀 붐비기 시작했지요.
그래도 사람들이 질서 정연하게 착착 올라갔기에 더디지않고 18층까지 잘갔는데, 문제는 그다음이었어요.
왠 주한미군 가족도 거기에 합세하여 올라갔었는데,
18층 사이에서 주한미군 여러 자녀들이 계단을 거의 점거한체 놀이터마냥 장난을 치고있는거에요.
근데 그 주한미군 부모는 잘도 잘논다 좋다며 히히낙락할뿐 그러지마라 만류않하고 죽치고 멈춰 있는거에요.
그래서 좀 기다리다 짜증나서 머라하고 해집고 18층을 지날수있었고,
나머지 시민들도 그제서야 좀 그리 힘겹게라도 올라가게 됬어요.
19층을 지날 즈음 방금 회담을 마치고 정상들이 귀가중이라는거에요.
하여 서둘러 20층에 다다라서 바라보니, 정상들 뒷모습만 겨우 본체 이내 횡하고 사라지고 말았어요.
나머지 내 뒤를 따라 방금 올라온 사람 외 그 이후 시민들은 뒷모습도 보지못한체,

닭 쫒던 개 신세가 된듯되어 다들 허탈해지고 말았어요.
그래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시민들은 전망대 유리창쪽에 모여 내려가는 정상들 모습을 찾고있었어요.
저도 북한정상들이 도보로 내려가는 모습을 창문너머 히끝히끝하게 볼때즈음..,

잠시후 꿈이 깨었어요..

 

 

자서전 서막 - 한국전쟁과 당시 나의 고향에 있었다던 이야기

 

(아래의 이야기는 당시의 풍문과 목격담을 각색해 구상한 실화입니다.)

 

 

때는 한국전쟁 당시 1950년 10월경 유엔군과 군경이 전남지역을 수복하면서,
좌익들은(인민군 일부와 빨치산) 다시 산으로 들어갔다.

빨치산 인민유격대 조직은 전남도당 유격사령부 예하에 6개 지구 체제로 재개편한 무장조직이었다.
약 6만여명이었던 이들은 남조선노동당 박헌영대장 휘하로,
전남도당 위원장은 박영팔, 부위원장 겸 빨치산 총사령관은 김선우이다.

이중 제5지구당 (불갑산)불갑지구는 함평, 영광, 무안, 목포가 활동무대로 약 2,500명이었다.
(위원장; 김용우, 빨치산사령관; 박정현, 모두 구빨치산 출신)

한편 1951년 2월 20일경 새벽 대대적인 불갑산 토벌작전인 남한 군경합동 '대보름작전'이 전개된다.
이 불갑산 토벌작전에 11사단 20연대와 영광과 함평경찰, 청년방위대와 지역우익단체가 동원됐다.  
이 불갑산 토벌작전을 당한 빨치산중 일부는 나주 금성산으로 후퇴하여, 나중에는 영산강을 건너 장흥으로 향했다.
그중 금성산으로 퇴각하다 흩어진 몇몇 빨치산은 나주야산에 머물다,
봄에 피난주민 행색으로 위장한체 노안면 양천리 계량재에 이르게 된다.

이들은 계량재 아래에 인가를 발견하고 내려가 왠 불탄 성당이 있어 내려가다 멈짓하고 산으로 다시 올라 숨는다.

 

  ∇  나주시 노안면 양천리 망산,뿔바위 인근 전경


∇ 나주시 노안면 양천리 계량마을 노안성당 (현제모습)

 

왜냐면 그 성당은 붉은색 성당으로 멀쩡했기에, 반공대가 유인책으로 그리했을지도 모른다는 판단이 순간 선듯하다.
이들은 계량재를 지나 망산 인근에서 하산하여 인근마을(국룡)을 우회해 들판을 지나 산에서 발견한 방죽으로 향한다.
방죽(장등제) 들판으로 진입해 은신하여, 잠시 휴식을 취하며 주변을 바라보다,
원거리에 있는 기이한 풍경인 고인돌 유적지를 발견하게 된다.

이 빨치산은 순간 저 고인돌 유적지 주인은 아마 이지역의 지주일거라 판단하고,
야산길을 따라 고인돌이 있는 인근 마을로 향했다.

가면서 야산밭에서 일하던 지역 농민에게 고인돌 야산주인집을 수소문하여 그 마을로 향한다.

 

  ∇ 양천리 장등방죽으로 사진위 중간 남색둥근표시가 고인돌 유적지이다.

 

빨치산 : "수고하십니다. 전쟁 난리통을 격다 길을 잃어 배회중이외다.. 참, 저 신기한 고인돌 야산주인이 누구요?"
지역주민 : "아이고, 어쩌다 여기까지 피난 행렬이요?.. 그 야산주인은 저기 금동마을의 신철수아들네이지라~"

 


즉, 위 고인돌과 관련된 마을은 지금의 나주시 노안면 양천리 금동마을이며, 나의 할아버지의 본가였던 집성촌 마을이다.
또한 나의 평산신씨인 할아버지 본가는 소유 야산중에 조상이 오랬동안 관리했던 위 고인돌 야산이 있으며,
집성촌 당시때부터 지주에 속하는 부유한 가문이었다고한다.
이 빨치산은 그날 늦은오후 짐에 숨겨둔 노획한 국군총을 꺼내들고 나의 금동 할아버지집을 급습하였다.
댁이 대가족이었으나 당시 집안엔 방금 밭에서 온 할머니와(중년여성)  한 작은아들만 있었고,
나머지는 다들 밖에 나와 있는 상황이었다.

댁에 총을 들이밀고 먼저 요구한것이 요기거리로 중년여성이 먹거리를 내오자, 좀 희안한 광경이 펼쳐졌다.
빨치산 간부가 자신은 망을 보는데 주념하며,
부하에게 먼저 식사하라하고 먹거리를 거의 양보한체 자신은 대충 먹는것이다.

그리고 있다 조용히갈터이니, 자금과 식량을 내주라면서 다는 줄필요없고 알아서 주라는것이다.
그러자 이 큰집 아들이 앞뒤다짜르고 아니꼬아하며  한마디 거든다.

 

작은아들 ; "앰병~ 그럴거면 머하러 총을 겨누고 지랄이요? 차라리 좀 달라고 구걸하지.."
빨치산 간부 ; "이런 삭아지하고는.. 이보시오 동무, 총알받이로 있다 저 버르장머리없는 녀석이나 대리고 나오시오."
하고는 나의 큰할머니인 중년여성이 챙겨주는것을 받고, 먼저 엄호하며 길을 나설 준비를 한다.
그럴즈음 집안의 가장 할아버지가(중년남성) 바깥일을 마치고 귀가중,
누가 뭐라하는 소리를 듣고 살피자 집안서 총을 든 괴한과 맞닥뜨린다.

집안의 중년남성은 만류하며 내아들 말고 나를 잡아가라 자처했고, 부하는 이내 중년남성을 인질로 하여 길을 나섰다.
왜냐면 총알받이로 소년은 불필요했으며, 간부도 이에 이유를 묻지 않았다.

 

   ∇ 나의 할아버지 본가집터 옛모습

 

 


이 빨치산은 초저녁 인적이 드문 계림리를 거처 서광산(평동 남서쪽)을 지나
지금의 공항 남서쪽 천변을 끼고 서창동으로 향했다.

아마 무등산과 화순야산의 거점지 근황이 궁금해서인듯하다.
이 두명의 빨치산에게 인질이 처음엔 나의 할아버지 혼자였지만,
평동끝을 지나다 길에서 마주친 주민 두명을 생포해 인질이 셋이 된다.

인질 손을 묶은체 끌고가면서, 가다 주민이 물으면 빨치산 내통자를 끌고 가는거라 둘러댔으며,
주민은 낮선 반공대원이긴 하지만 국군총을 소지하고 있어 긴갑다했고,
그래도 의심하는듯 보이는 행인 둘을 잡아가는것이다.

이들은 늦은밤 인적이 드문 지금의 광주시 서구 서창동(회재로) 인근 (백마산)큰야산에서 잠시 여장을 풀었다.
그러는 사이 송정리 인근 지역주민이 밤에 왠 수상한 사람들이 지나는것을 보고,
급히 지역 파출소 같은 반공치안대에 알렸다.

당시 반공치안대엔 이북에서 내려온 서북청년단이 규합해 반공조직을 관리감독하거나, 독거다이 왕초가 종종 있었다.
치안대에 당직을 서다 지역주민의 급보를 받은 서북청년단출신 대원은 전공을 독차지하고자
지역출신 대장에 따로 보고하지 않고,
총 몇개와 전쟁중에 노획해 숨겨둔 수류탄 한개를 챙기고,
급히 (반공청년단)반공대원을 소집하여 빨치산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독거다이 왕초인 서북청년단출신 반공대원은 지리에 밝은 지역반공대원들을 앞세워 단독으로 빨치산을 추격해,
서창동 인근야산 아래 능선들판에서 애워싸며 매복한체(5명이상), 빨치산을 기다리며 급습을 준비하고 있었다.


 

"쾅~"
때이른 새벽 빨치산이 야산에서 내려와 신작로 같은 탁트인 농로를 걸을즈음,
대각선방향에서 폭탄이 날아와 이들 앞에 떨어진다.

폭탄이 날아오기 몇초전 한 일질이(나의 할아버지) 대각선방향에서 누가 숨어 공격직전임을 감지하고,
위험하다 외치며, 손이 묶인체로 농로옆 도랑으로 몸을 내던지어 피신한다.
그 말에 순간 빨치산들은 총으로 엄호하며 두리번 거리는 순간, 이내 폭탄이 인근에 날아와 터진것이다.
이렇게 갑작스런 폭탄과 함께, 미처 피하지못한 총알받이 인질 둘은 사지가 찢기어 그자리에서 죽고,
빨치산간부는 중상, 좀 뒤에서 걸어온 부하는 반사적으로 엎드리며 짐으로 몸을 엄호해 가벼운 부상을 당한다.
그간부는 위기의 순간에서 자신은 틀렸으니 후일을 도모하라며 부하에게 도망치라며 손타레친다.
빨치산부하는 급히 몸을 은폐하고 자신의 총이 멀쩡한지 확인후,
급히 무기를 챙기고 간부에게 경례를 신속히 한후 현장을 피한다.

그러는 사이 도랑으로 몸을 날려 몸을 피한 인질(나의 할아버니)은 폭탄은 피했으나, 그렇다고 몸이 건사한게 아니었다.
도랑에 처박힌듯 되어 허리,옆구리 부상등 크고 작은 전신 찰과상이 생겨 거의 중상자 처지가 되버린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아군도 재수없는자들이라 판단하고, 아무도 없는 쪽으로 무조건 도망을 쳤다.

 

한편 매복해 30M인근에서 수류탄을 막무가내로 까낸 사람은 서북청년단출신으로,
이런 막무가내 공격으로 나중엔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폭탄소리와 함께 주변이 아수라장이 된 현장을 확인하고 이후 덮치러 달려갔는데,
위기의 순간에도 빨치산 부하는 총을 쏘며 저항을 하였다.

그 바람에 지역반공대원 한명이 총상을 당하자, 순간 잠시 대원이 몸을 숨기는 사이, 그 빨치산은 서둘러 줄행랑을 쳤다.
부상당한 빨치산이 도망치는것을 보고, 대원 몇명은 그를 추격하기 시작했고, 나머지는 폭탄이 터진 현장으로 향했다.
빨치산을 추격한 지역반공대원중 한명이 총을 들고 있었으나 총을 잘 쏘지못하여 총알이 헛나갔고,
빨치산은 시야에서 점점 멀어져갔다.

그것을 보고 답답한 서북청년단출신은 뒤늦게 적을 향해 격발했으나, 원거리라서 총알을 피해 이내 사라진 뒤였다.
그 와중에 한 반공대원은 도망치는 인질을 향해 아군이니 안심하라, 쉬었다가라 소리치지만 일없다며 시야에서 사라진다.

 

추격을 포기하고 폭탄현장으로 와 죽어가는 빨치산간부의 총을 수거해 확인해보니 격발이 되지않았다.
그총은 나무대머리판인 국군총으로 인민군총보다 견고치못하여,
폭탄파편을 맞고 붕떠서 굳은 길에 떨어져 고장났기 때문이다.

이보다 아군이 양민까지 죽인처사가 되고 말았으니, 반공대에 더 심각한 난관이 봉착한 것이다.
갑자기 당황해진 치안인솔자는 무과실전공으로 위장하고자 지역반공대원에게 삽하고 응급약을 챙겨오라 지시한다.
이후 인가에서 약과 삽들을 챙겨오자, 한명은 부상대원을 치료하고 나머지들은 음침한곳에 구덩이를 파기 시작했다.
한편 그곳 인가에서는 앞면있는 먼 지역주민(반공대원)이 왠 약과 삽을 달라해서 줬기는 줬으나 무슨일인가 궁금하여,
폭탄,총소리에 놀란 주민과 함께(몇명이) 그 대원을 미행했다.
그리고 멀찍이 숨어서 그 현장과 그들의 현장조치를 보고 이내 놀랄수밖에 없었다.
암매장하려던 사람이 빨치산이 아니라 어디서 본적이 있는듯한 주민으로 둘다 양민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무등산,화순야산 인근에 임시주둔지로 두고 지역정찰을 하고 있던 몇명의 빨치산이,
5KM인근 고지대에서 폭탄 소리를 듣게된다.

본능적 직감이었는지 빨치산 동지와 직결된 상황이라 판단하고 그 빨치산은 서창동방향으로 향한다.
가다 매월동(회재로)을 지날즈음 서창동에서 폭탄부상을 당한 대원 한명을 만나게 되고,
그대원 동지가 알려준대로 사건현장으로 찾아갔다.

서창동 야산아래 언덕들판 인근에 도착하니 멀찍이서 반공치안대들이 시신을 암매장하는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탕, 탕.."
합세해온 빨치산이 현장으로 숨어와 사격하자, 서북청년단대원은 현장에서 즉사,
지역반공대원 한명은 총상을(총상 총 두명)맞고 쓰러진다.

그러자 나머지 반공대원들은 가져온 총만 챙긴체 뒤도 돌아보지않고 삼십육계 줄행랑을 친다.
사건현장에 도착한 빨치산은 총상으로 미처 현장을 빠져나오지못한 반공대원 두명에게,
지금 무슨일을 벌이려고한거냐고 추궁한다.

그래서 시인하길 "서북청년단출신 사람이 전공에 눈이 멀어 신중한 작전을 뒤로하고 막무가내로 폭탄을 던졌어라.
그바람에 주민인 인질이 죽었지라, 그래서 이걸 숨기려 암매장하고, 폭탄으로 빨치산만 죽인걸로 위장하려고 했지라~..."

 

 

PS (추신; 덪붙임)


이사건의 진위는 당시도 그렇고 지금이라도 지역주민에 수소문하려한들 잘 알길이 없다.
왜냐면 당시 반공파 목격 주민 스스로도 누구에게 말하기 민망할만큼,
위처럼 그 광경이 너무나 어처구니없고 황망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광주지역 반공치안대 스스로도 쪽팔려서 이사건을 입다물고 있었기에 더욱이 알수가 없다.
다만 알수있는것은 이처럼 빨치산에 비해 반공치안대에 의한 양민의 이러저러한 피해가 더 많았고(예; 누명),
그 행태 또한 치졸했다는것이다.

(1951년 봄 국군 11사단은 불갑산 토벌작전을 개시하며,
일대 주민들에게 소개령을 내리고 마을에 불을 질러 주민 터전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주민들은 국군의 소개 작전, 지시로 인근 월야, 해보, 나산면 마을로 피난을 했지만, 되려 인명피해가 더컸다고한다.
해보면 성대마을로 피난 간 주민 대다수는 국군 5중대('5중대 사건)에 의해 무참히 희생되는 일이 발생했다고한다.)


그리고 격전지가 이 백마산 인근인지는 확실치는 않다.
다만 지금은 고인이된 동네 문중큰어른이 당시 수소문한 바에 의하면,
당시 광산군 어떤주민이 목격하길, 양천리사람 한명이 어떤자에게 끌려가는듯했다한다.(나의 할아버지로 추정)
그리고 풍문에 그다음날 무등산 못가 광주 남서쪽 변두리의 크고작은 야산이 많은곳에서,
왠 폭탄소리와 총싸움이 좀 있었다는것이다.

그때 즈음 반공대원이 빨치산에 깨진적이 있고, 그럼에도 무슨 모의를 하려 했다는것 등등이다.
 이를 증명하듯 인근에 양민 몇이 암매장되있다 사라졌다고한다.
한편 나의 할아버지는 당시 잠시 실종되었다 며칠후 나타났는데, 거의 반병신 상태였다는것이다.
그리고 문중어른이 이르길 그것은 전쟁 후유증이라며, 그후 오래 못살다 결국 운명하였다고 한다.
또한 전쟁 당시 양천리내 행방불명자였던 사람은 나의 할아버지만으로, 이러저러한 기억의 조각들이 퍼즐로 남아있다..

 

 

http://cafe.daum.net/myrefarm/14Lb/34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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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사진처럼 국내 라면이 70년대 전후에 보급되기 시작된걸로 기억되는데요.

당시 70년대초 보급용으로 '소고기라면'이 시판되면서 부자도 이를 애용했습니다.

당시 어린 기억으로 바쁠땐 스프만으로 최대한 맛을 살린 무양념 라면도 맛있었고요.

그리고 소고기라면에 대파와 양파, 김치를 곁들여 먹으면 더욱 맛있었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스프만 넣은 무양념라면이 맛이 아주 떨어진다 생각되진않았어요.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양념이 곁들이지 않으면 라면맛에 확실한 질적이 차이가 느껴졌는데요.

양념중 대파, 계란 뿐아니라 양파가 꼭 들어가야 식감이 더좋게 느껴졌어요.

이렇게 라면을 좀더 맛있고 풍미스럽게 드실려면, 각종 까메오 양념을 첨가하는게 일반인데요.

 

라면의 단점은 너무 오래 끌이거나(4분 초과) 하면은 금방 뿔어지기 시작하는것입니다.

라면이 뿔더라도 좀더 부담없이 먹는 방법이 없을까 하다, 건두부가 생각났습니다.

라면에 건두부를 곁들인 라면을 해먹어보니 호불호가 있지만 나름 괜찮네요.

건두부 첨가 요리에 유의할점은 통메밀면보다 식감이 거칠지요.(호불호 요인)

하여 라면 양념으로 넣을때, 라면 1개당(약200g) 건두부 한롤만 사용하도록 하며,

썰을때 건두부 한롤을 반으로 잘라서(사각어묵 크기) 그것을 겹쳐 김밥처럼 둥글게 말아,

 채썰듯이(2~3mm) 가늘게 썰어서 양념 넣기전 라면 넣을때 같이 넣어 끌이시면 됩니다.

(다만 거친 식감에 잘 적응된 사람에 한에서며,
그렇지 않은경우 반롤 정도만 시도하거나 아예 하지를 말것.)

 

이것을 응용하여 짜장라면이나 짜장면 등에 곁들여 먹으면 금삼첨화이지요.

( 단 이것도 거친 식감에 잘 적응된 사람에 한에서며,
그렇지 않으면 조금만 사용하거나 아예 첨가하지 말것.)

 

 

∇ 라면 양념 재료들입니다. 시골이라 양념이 이색적입니다.

(곰보배추?, 뽕잎, 미나리, 부추, 오이고추잎, 냉이, 씀바귀?, 양파, 시레기등)

 

 

위재료가 대부분 자급되는 장소로, 몇년전 귀촌하여 조성한 미니텃밭입니다.

 


 

∇ 라면 양념의 까메오 재료들 (건두부, 양파, 계란)

 


 

∇ 라면과 함께 건두부를, 이후 텃밭 양념을 곁들인 모습입니다.

(본 귀촌인은 거친 식감에 익숙하여, 건두부를 가위로 대충 5mm로 잘라 넣었습니다.)

 

 

∇ 김이 모락모락 나는, 왕성된 건두부 양념라면.

 


 

∇ 소박한 귀촌 이색 건두부라면 식단.

(식사중 촬영한 모습이며, 식단은 깻잎, 깍두기, 매실종합장아찌등입니다.)

 

기준치에 넘는 스레트(슬레이트) 무상철거 완료

 

귀촌하여 오랫동안 방치됐던 고향집터를 수리하던차,
스레트처리문제에 직면했드랬습니다.
본가기와집을 확장한 좌측과 뒷쪽베란다 지붕을 스레트로 증축되어 있었고(21평),
기와집 우측에 있는 창고도(12평) 스레트 상태였습니다.


이곳을 개량하려면 스레트를 처리해야하는데, 관의(구청) 민원처리 절차가 복잡합니다.

일의 순서가 먼저 민원인은 동.면사무소에 처리신고를 하게되면,
동.면사무소는 구.군청에 민원신고를 올립니다.
그러면 관은 철거업체를 선정해 그업체의 스케줄에 따라 스레트 현장처리가 지원되고 있습니다.

동사무소에 신고하며 여쭈기를
본민원인 : "철거지원받은 며칠간은 비가않와야하는데,
그럴려면은 철거날짜를 잘 잡아야하는데 그게 그렇게 않되고 철거업체 스케줄에 따라야하니 어찌해야하죠?
날씨도 그렇고, 시골집을 개량할일은 많은데 철거문제로 마냥 손놓고 기다려야하니 난감한상황인데요..
동사무소직원 ; " 아, 그러시면 구청에 문의해보고 나중에 답변을 드릴게요."
며칠후.. "공사차질로 철거안한 스레트를 직접 철거하고자한다면, 일단 철거과정 증거사진을 확보해두세요."

 


동사무소 지시에따라 지붕을 철거하고 지난 3월 구청에 전화하니,
이미 철거한 스레트는 수거 불가하다는 입장을 밝힙니다.
 
아래사진처럼 창고일부를 완전철거않하고 처마만 커팅한체, 칼라강판으로 개량했는데(총7평),
영마음이 않들어 이거라도 스레트철거 지원해줄수있냐고 여쭈니,
그것은 가능할거같다는 답변을 합니다.

 

즉 정부에서 주로 스레트철거지원사업 명목하에 철거안한 건물을 철거해주고,
그곳에서 나온 스레트폐기물을 처리해주는것이지, 이미 철거한 상태에서는 불가하다는것입니다.

다만 신고후 철거시 과정증거사진이 있다면 가능하기도한다는것이지 장담은 못한다고요.

본인의 경우 아직 완전철거는 아니니 철거않한곳을 철거지원을 해주되,
이미 철거해둔것은 양이 많을경우 처리비용이 발생할수있을거라는것입니다.


 

그후 5월경 구청담당직원과 용역업체에서 사전현장답사를 와서 둘러본후,
다행히 왠많하면 무상으로 해주겠다고 약속해주었습니다.
설마 동사무소에서 허언을 할까 생각했는데,
6월경 역시나 다행으로 직권으로 전액무상철거가 시행됐습니다.

본가기와집을 확장한곳 스레트지붕 ; 21평, 스레트창고 ; 12평 하여 총33평입니다.


정부에서 한가구당 총30평미만까지만 무상지원이고 그이상은 저소득층이라도 비용이 발생됩니다.
제시골집의 경우 만일 하나도 철거않한 상태였다면, 정부나 가정이나 비용에 더 불리하겠죠.
다행히 대부분 철거해놓았기에 정부에선 일부만 철거비가 발생되고 처리비만 동일하게 나오기에 예산도 절감됩니다.

(보통 스레트 철거비가 스레트 처리비보다 많이 비쌈, 처리비는 톤당 50만원.)

스레트 면적량이 33평으로 1.5~2톤 나올지라도 철거비가 덜하기에 전액 무상처리됐습니다.

 

 

스레트철거시 전문철거업체가 일반인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고 방진복,방진마스크 착용후 철거합니다.

그런데 철거과정을 본후 완벽한 철거처리가 이루어지지않는 헛점이 발견됐습니다.

 

 

 

위사진의 남색 동그라미안의 부서진 스레트 잔해 및 산폐된 스레트가루가 남아있는데,

이것은 어떤철거업체도 처리해주지 않으며 오로지 집주인의 몫입니다.

문제는 이 남은 잔해를 청소하는 일이,
스레트를 해체하여 옮기는 과정만큼 혹은 그이상으로 분진이 발생된다는것입니다.

도시에서는 석면구조물 철거할때 일정기간을 두고 주위에 공고를 붙여서
일반인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고 특수작업복을 착용한 인원이 올라가서 작업을 합니다.

그러면 주변에 지나는사람은 그다지 분진 않마시고 안전할까요?

안전은 얼어죽을..

위사진처럼 정말 분진이 더발생되는 잔해먼지청소도 않한상태로 끝내고 가는데 말입니다.

어떤 집주인은 이런 억박자행정에 짜증을 내며 오기로 "안죽어!"하고 마스크도 않쓰고 
분진이 날리든말든 막청소하는 경우도 있겠죠?

이렇듯 안전이라는 이유로 스레트철거는 집주인에겐 손도 못대게하고 전문업체가 하게해놓고,

그러다 전문업체는 뜾어 해체하는데만 집중한체, 대충 치우고 철수하는 엉뚱한 이형상.

정말 안전하고 제대로된 행정인지 아이러니한 경우입니다.

하여 집주인에겐 손도 못대게하는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동사무소에서 조언해주셨듯이,

남들도 유드리있게 철거지원을(선철거 후처리가능) 해줘야한다 생각됩니다.

필요하다면 이에대한 정부의 대책을 촉구하는 청원도 생각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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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자료]

건물 철거에 따른 행정적 절차는? 2012.01.26

blog.daum.net/ejinwook/16413264   jin^__^아름다운 삶을
30평이상은 돈이조금들어감... 주택도 시나군에서 무료로 철거 해줍니다..

 

 

임차인의 슬레이트 지붕의 무허가 건물을 지었는데 이를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까요? ..
답; 옆에 쌓아 두실수 있습니다 하지만 완전밀폐 을 원칙으로 합니다 .. 계속적으로는 안되고요
그렇지 않고 그냥 쌓아두실경우 법에 걸려요 과태료도 맣구요
무허가 건물이기 때문에 보상이나 그런거 없습니다
하지만 무허가 건물이기 떄문에 노동부쪽에 신고서류을 안내도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폐슬레이트을 버릴라고하면 시.구청에 신고 서류을 내야 합니다.

석면혜체 공정
1 석면조사을 하고 30-50만원사이
2 시,구청에 폐기물신고서을 작성해서 제출하고 (3일정도 소요)
3 석면해체 신고증이 있는 업자가 철거 시작 ( 신고증이 없는사람이 할수가 없어요 )
4 폐기물 반출
5 폐기물확인증

계약 동시에 석면업체에서 다 해드려요.
http://tip.daum.net/question/69961880?q=%EC%8A%A4%EB%A0%88%ED%8A%B8+%EC%B2%98%EB%A6%AC%EB%B0%A9%EB%B2%95


 

석면 슬레이트 철거시 정부 지원정책  http://blog.naver.com/vnddnsdk1102/120212737888
[출처] 슬레이트 철거시 정부 지원정책과 지붕개량 작성자 지붕지
슬레이트와 같은 특수 폐기물의 철거는 지정업체가 따로 있습니다
정부 지원 사업에 채택이 되지 못하고 개인 자비로 슬레이트를 철거하고자 하는 경우는
개인적으로 지정 업체를 알아보는 것 보다는
지역 내 동사무소에 연락하여 업체를 알아보시는 것이 현명한 방법입니다
이유는 슬레이트 철거시 비용 산출에 있어서 가격 차이가 상당히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붕 철거에 관해 2012.05.14. http://cafe.naver.com/kimyoooo/99506  

[출처] 스레트 지붕 철거에 관해 (지성아빠의 나눔세상 - 전원 & 귀농 -) |작성자 키퍼
따라서 스레트 처리시 해당 지자체랑 꼭 의논해서 하시길 바랍니다.
저는 자가철거가 가능하다는 답변만으로로 많은 부담이...
자가처리가능여부; 노동부에서는 200제곱미터내에(60평), 지자체에서는 50제곱미터(15평)
스레트 처리는 기존에는 특정폐기물 처리 업체에서만 처리가 가능했으나
2012.4월 법 적용이 완화되어 일반쓰레기로 마대자루에 담아서 일반쓰레기 매립장에서...
배출자 입장에서는 변한 것이 없고 기존 수집운반업체에
(슬레이트 처리 허가를 득한)사업장폐기물 운반업체를 추가한 정도라고 하는군요..

 

스레트철거  2013.03.27.
지성아빠의 나눔세상 - 전원 &am... http://cafe.naver.com/kimyoooo/140313

[출처] 스레트철거 (지성아빠의 나눔세상 - 전원 & 귀농 -) |작성자 singl99
제가 직접 지붕에 올라가서 석면지붕을 제거해서 모아 놓고 철거회사에 연락하니
포크레인 가져와서 건물 철거하고 석면은 석면수거회사에서 와서 가져갔는데, 석면 수거비...

면사무소에 물어보니 창고제거 전과 제거후 사진을 첨부하고
석면제거업체에서 발행한 서류를 함께 제출해야 한다고 합니다.
석면제거업체와 건물철거업체에 물어보니 석면을 스스로 제거해서 모아놓으면
석면제거비용이 들지 않고 가져가는 비용만 들기 때문에 비용이 훨씬 싸진다고 하더군요.
석면지붕을 제거하여 모아 놓으면  철거업체에서 건물철거하고 석면까지 처리해 주기로 하고 금액을 계약하였읍니다.
제가 직접 지붕에 올라가서 석면지붕을 제거해서 모아 놓고 철거회사에 연락하니
포크레인 가져와서 건물 철거하고 석면은 석면수거회사에서 와서 가져갔는데,
석면 수거비용은 철거회사에서 석면수거업체에 얼마인지 모르겠지만 그자리에서 지불하더군요.
석면제거 증명서는 철거회사에서 석면수거업체로 부터 받아서 1주일 후에 저에게 넘겨 주었읍니다.
저는 건물 철거 전과 철거후 사진, 석면수거업체로부터 받은 증명서를 면사무소에 제출하고 멸실신고를 마쳤읍니다.


환경 답변수 1
질문 석면 슬레이트 지붕이 얼마나 위험한가요? 2009.08.03.
소량은 괜찮다면서 화만내시는데 슬레이트지붕을 교체할순 없다해도
최소한 바닥에 쪼개진 여러 조각들은 치워야 하지 않을까요? 아버지는 자기가 전문가고...
답변 소량의 석면은 크게 위험하지는 않지만 석면을 다량으로 취급하는 공장에서 근무한...
다량의 슬레이트 지붕을 처리할 경우는 전문 처리 용역업체를 써야 하겠지만 작은...
https://kin.naver.com/qna/detail.nhn?d1id=8&dirId=808&docId=33154296&qb=7IaM65+JIOyKrOugiOydtO2KuCDsspjrpqw=&enc=utf8§ion=kin&rank=2&search_sort=0&spq=0&pid=TzgXmdpVuFRsscv9GUhsssssssC-139137&sid=f/DHIxtgBGvPpATQOvE%2BzQ%3D%3D

지난 2017년 8월경에 경차 다마스의 효율성의 글을 포스팅한데이어,

오늘은 경차 다마스의 또다른 효율성을 살펴보고자합니다.

 

보통 경차에 3M 정도의 철재구조물(앵글, 각파이프, 쇠파이프등) 상차시,

아래 사진처럼 뒷트렁크를 열어 재쳐서 실어야만 가능하다고 하십니다.

 

∇ 작년에 중고칼라강판을(3.5M) 구매해 잘 고박한후 상차한 모습
(화순인근에서 집까지 30여KM 거리를 조심히 운전해 무사히 도착)


 

1#

그러나 다마스의 경우 요령만 있다면 문닺은 상차가 가능합니다.

방법은 일단 조수석 의자를 탈거합니다.

 

∇ 조수석 고정클립 두개를 열면, 조수석의자에 4개의 10mm나사가 고정되 있으며,
이것을 10mm 복스나 스패너(렌치)로 풀어서, 의자를 분리합니다.

 

∇ 조수석의자를 분리하면 파란표시처럼 평평하고 탁트인 공간이 생깁니다.

자 그럼, 응용 들어갑니다.

 

 ∇ 먼저 목재사에서 다량의 은합판을(3T, 180cm)산후,

 건자재백화점에서 일단 3M 앵글 몇개만 사서 상차한 모습입니다.

(편리성을 위해 상차할때만 트렁크를 연상태에서, 앵글 각 끝부분을 긁 방지 한후,
조수석쪽으로 비스듬히 올리어 상차후 트렁크문을 닺으면 됩니다.)


 

 


∇  아래는 3M의 앵글과 각파이프를 실코자할때의 모습입니다.

 ∇ 위와 같이 앵글 각 끝부분을 긁힘 방지를 한후, 상차한 모습입니다.

3M짜리여도 트렁크를 닺은체 운송이 가능함을 알수있습니다.

 

이것으로 알수있는것은 캠핑카식으로 응용이 가능하겠습니다.
즉 굳이 캠핑카로 별도로 고비용을 들여 제작할 필요도 없습니다.
지난 경차 다마스의 효율성의 글처럼(http://cafe.daum.net/minivan/6t6P/17977),

평소엔 맥가이버처럼 간단히 캠핑카식 구색만 갖춘체 타고 다닙니다.
그러다 단기여행을 하며 간단히 차박을 할때 조수석을 탈거하여,

넓은 취침공간을 만들어 차숙이 가능함이 되겠습니다.

(짐은 다이선반을 활용해, 선반에 올려놓고 하면되고,

여름시 앞옆 유리창에 찍찍이 방충망을 붙히고, 뒷트렁크를 닺아도됨.)

 

 

2#

이번에는 3M 그이상의 건자재를 상차하는 방법을 알아보겠습니다.

경차중 다마스이기에 그나마 3M까지는 문닺고 운송가능하나 그이상은 불가합니다.

다만 경량에 소량의 건자재라면 아래처럼 가능하기는 합니다.

방법은 아래처럼 이것도 조수석 탈거상태에서, 조수석 창문을 이용하면됩니다.

 ∇ 아연 각파이프 20mm X 40mm (1.4T) 6M를 3.5M로 절단후 상차한 모습.

 

∇ 리오건자재백화점에서 6M 각파이프 소량을 구매후 절단한 모습입니다.

절단은 대부분 건자재백화점이 절단 서비스가 없기에 쇠톱질의 각오가 필요합니다.

고대시대로 회기해 쇠톱으로 총30분의(각5분) 톱질로 절단마감이 가능했습니다.

행여 톱질하다 못하면 안손된거 반품하면 되지 싶지만, 반품도 않됩니다.(대략난감)

 

∇ 다마스는 6M짜리 상차가 된다한들 무척 위험하기에,

대략 절반사이즈로 필요 크기를 계산해 절단하여 상차 운송하는게 낳습니다.

(본인은 대략 3.5M 가량 필요하기에, 그렇게 절단후 상차완료했습니다.

조수석 탈거상태에서 조수석 창문을 완전히 내리고 창문걸치는곳에 긁힘방지후,

각파이프 끝도 긁힘방지하고 주의용 빨간표시 마감후 흔들림 고정하는 순입니다.)

 

 

 3#

 ∇ 다량의 좀 큰 각파이프 경우 아래처럼 길게하여 상차하면 됩니다.

(미리 차끝 트렁크에 목재 가로바를 해놓은후, 건자재 흔들림 고정한 모습.)

 

 

∇ 상차후 차안의 짐들을 운송시 유실방지 조치한후,

 뒷트렁크를 내리고 트렁크도 고박하여 짐 유실방지한 모습입니다.

 

 

4#

 추가로 다량의 건자재를 길게 상차하는 흔한 모습입니다.

다마스는 넓고 긴 건자재일 경우 큰것은 아래 작은것은 위로 상차해야 안전합니다.

하여 칼라강판 주문도 큰것은 제일 나중에 작업하는순으로 계산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살다보면 이런 황당한 경우도 다 있습니다.

분명 처음 거래하는곳도아니고 작업자도 제가 다마스차인걸 알터인데,

칼라강판 파래트 작업을 주문순서가 아닌 큰것부터 하여 작은것을 나중에 작업해 놨습니다.
파래트가 후라이팬처럼 뒤집어지는것도 아니고, 결국 예상과 달리

작은것이 맨아래에서 큰것은 위로되는 역순 상차를 할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상차해준 작업자가 뒷고객들이 있어서 빨리 고박해 차를 빼야한다고 합니다.

속으로 "미쳤냐? 아예 죽치고 않아서 장시간 단단히 고정후 나갈란다." 하고,

머라떠들든 일단 급히 고박작업에 들어가보니 후다닥 고박은 어림없는 상황.

하다 빡쳐서 "이런 우라질~ 이거 어떻게 실고가라고.." 투덜대다
중간에 갔는지 확인하든말든, 죽치고 앉아 고박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이거 대충 고박했다간 위에 있는 큰강판이 아래로 쏠리면서 쑥빠지는 이탈사고가 날지도 모르며,
그럴경우 인생 역대급 대형사고가 될 판입니다.

우여곡절 장장 30분에 걸쳐 동서남북 완벽 고박이 아래처럼 완료됐습니다.

 

 

 하여간 교훈은 경차는 어련히 알아서 해주겠지 말고, 판매자가 잔소리에 귀찮아하더라도

"큰것은 제일 먼저 상차되는순으로 해주세요."하고 미리 당부해주는것입니다.

 

 잘고박하여 집까지 무사 도착후, 트렁크를 연 모습입니다.

 

 

5#

 위에까지는 물품을 구매한 사례이며, 아래는 활용해 집수리 작업 모습입니다.

 

 ∇ 스레트창고를 칼라강판으로 개량 완료중인 모습입니다.

 

∇ (우)창고와 (좌)본가 사이를 대형빚물받이 작업후 앵글로 고정한 모습입니다.

(각파이프로 고정하면 더완벽하지만, 앵글도 지지대 역활을 충분히 할뿐아니라,

약초용 선반을 더 쉽고 용이하게 사용할수있어서 앵글로 작업했습니다.)

 

 

∇ 아래는 낡은 축사 구조물 안에 텃밭을 조성했던 모습입니다.

 

∇ 철재 지붕이 이미 녹슬고 있어서, 강판이 아닌 차광막인 경우 부식이 더 진행됐습니다.
하여 낡은 철재 지붕을 해체하고 새로하기로 했습니다.

 

∇ 해체할것은 해체하고, 옆 튼튼한 철재 굵은기둥은 그대로 놔두고,

그라인더에 쇠망을 달아 녹을 빼고, 페인트와 락카로 방청작업을 했습니다.

 

 

 

 ∇ 구비해둔 각파이프를 지붕에 8mm 십자형 육각볼트로 조립하고 용접한 모습입니다.
좌우측 중간에 작업이 않되어 살짝 가라않은 상태이며, 중간을 좀올려 철재를 대고
용접하여 비스듬히 물이 떨어지게끔 작업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중고 칼라강판으로 상판 마무리 해나갈 계획입니다.

 

  

 

긴 이야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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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레트 처리문제에 억박자행정이 있어서야..

 

시골에 스레트(슬레이트) 개량건물을 유심히보면 스레트를 철거하지않고,
처마만 커팅하고 지붕에 목재틀을 보강한체 칼라강판을 덪씌운 곳이 많습니다.
시공업자들은 스레트가 아주 낧은것이 아니라면 결로방지와
보수공사시 안전문제가 덤으로 생기니 그렇게 시공하면 된다합니다.
그런데 공사주민의 입장에선 다른 또하나의 큰 이유가 있다하며,
스레트처리문제가 아주 복잡해서라고합니다.
얼마나복잡해서인지 낧은 스레트 상태인데도 그대로 개량하는곳이 있을지경입니다.
자가건물이라해도 직접 철거후 폐기물처리업체에 돈주고 처리한다해도 않될수도있다는것입니다.
주민민원이 없다하더라도 현행법상 철거규정이 있어 반드시 신고하에 무엇을해야한다는것이며,
설령 신고하에 직접 철거한다하더라도 억박자 행정 때문에 수거지원문제가 발생할수있다는것이죠.

 

스레트 처리시 동,면사무소 말보다 구청,군청 말을 듣고 시행해 옮겨야
본인도 귀촌후 본체일부를 스레트로 증축한곳과 스레트창고가 있어, 이두곳을 개량하기로했습니다.
제 시골집처럼 차상위계층(저소득층)이라면 스레트철거에서 수거까지 무상지원 받을수있다합니다.
동사무소에 신고하여 스레트로 증축한 가옥본체일부를 철거수리한 사진과 철거안한 스레트창고 사진을 보냈습니다.


 

 

 

 

 

 

건물을 개량할 날짜에 맞춰 나라에서 스레트를 철거해줄수 있는지 문의하니, 장담할수없다합니다. 
참 이부분이 빡치는 경우입니다.
아무리 나라에서 무상으로 철거하고 수거해준다해도, 개량 시행날짜에 맞춰 철거해주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그러니까 무슨 공사를 철거지원 날짜에 맞춰서 계획해야 한다는것입니다.
설령 철거지원 날짜가 바쁜 일손때라도 감수하고 후에 짬을 낸다해도 또하나의 문제는 바로 날씨입니다.
철거보상후 자가개량시 보통 5일간은 비가 않와야합니다. 근데 그것이 쉽냐 이것입니다.
즉 철거보상후 직수리는 꿈도 못꾸고, 고비용을 들여 업자에 맞기어 며칠내로 뚝딱 공사를 완료해야할판입니다.
그래서 이런 문제가 발생한다며 동사무소에 여쭈니,
철거안한 창고를 직접 철거시 과정증거사진을 확보해두면 될거라고하기에, 그렇게 했습니다.

 

 

일단 창고 우측부터 철거하면서 얇은합판(3T)을 붙이며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얇은합판(3T)을 붙인후 PVC골판지로(3T) 방수보완작업을 하였습니다.

 

철거후 나온 스레트들(좌,우측)

 

∇ 스레트를 철거한후라강판으로 개량한 모습으로,

철거에서 개량까지 혼자하다보니 장장 일주일이 걸렸습니다.


 

 

창고개량 완료후 구청에 전화하니, 이미 철거한 스레트는 수거 불가하다는 입장을 밝힙니다.

동사무소에 문의하여 철거안한 창고를 직접 철거시 과정증거사진을 확보해두면 될거라고하기에,
그렇게했는데 그래도 않되냐고 되여쭈니 장담을 할수없다고 얼버무리기 시작
합니다.

드디어 빡침이 시작되는 대목입니다.

 

아래사진처럼 창고일부를 완전철거않하고 처마만 커팅한체, 칼라강판으로 개량했는데,
영마음이 않들어 이거라도 스레트철거 지원해줄수있냐고 여쭈니,
이것은 가능할거같다는 답변을 내놓습니다.

즉 나라에서 주로 스레트철거지원사업 명목하에 철거안한 건물을 철거해주고,
그곳에서 나온 스레트폐기물을 처리해주는것이지, 이미 철거한 상태에서는 불가하다는것입니다.

다만 신고후 철거시 과정증거사진이 있다면 가능하기도한다는것이지 장담은 못한다고합니다.

본인의 경우 아직 완전철거는 아니니 철거않한곳을 철거지원을 해주되,
이미 철거해둔것은 양이 많을경우 처리비용이 발생할수있을거라는것입니다.

창고 스레트를 철거하면서 아직 쓸만한거라서 구지 철거할필요가있을까해서 일부를 철거않한게 천만다행인 상태입니다. 
스레트 바로위에 덪씌울수있는 칼라강판을 찾다가 그나마 비슷한게 V-115인듯하여,

이것으로 주문했는데 시공해보니 아래처럼 맞는듯하다말고 모양이않나와 그냥 다철거할까 생각도했습니다.
그런데 스레트가 제발 나좀 그냥 놔두라고 소리치는거같아 완전철거를 중단했더니,

위기중 기회가 생긴 형세입니다.


창고중 스레트 일부를 완전철거않하고(약4평) 칼라강판으로(V-115) 개량한곳

 


 

시행착오후 스레트 바로위에 덪씌울수있는 칼라강판이라면 아래처럼 V-250이거나, W-140이라할수있습니다.
V-115는 스레트골 크기와 비슷할듯하다 마니, 차라리 일괄적으로 들뜬 V-250이 낳습니다.

미관보다 강풍문제를 고려한다면 시공업자가 스레트위에 목재를 덪대어 시공하여 본체와 점점 붕뜬형태보다,
아래처럼 본체보다 살짝들뜬 상태로 바짝붙여 시공하는것이 좋다는 생각입니다.

스레트로 증축한 가옥본체일부중 완전철거않하고(약5평) 칼라강판으로(V-250) 덪씌운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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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수리나 무슨 공사를할때 전동공구를 자주사용하는데요, 이것을 잘사서 사용해야겠네요.

큰구멍을 뚤을때 집에 아래사진처럼 대형함마드릴이 있는데도 무거워서 잘사용않고,

빨간색의 작은 전기드릴로 뚤다 결국은 모터가 터지고.. 이런식으로 몇개나 말아먹었네요.

아쉬운데로 쓴셈치고 대형함마드릴로 큰드릴작업을하니, 왜 진직 이걸을 사용않했을까 깨닳음이.. 

아쉬운게아니라 원래 큰철판이나 큰타공 및 콘크리트드릴작업도 이 대형함마드릴이 재격이네요.

핸드형전기드릴과 비교가않되게 마치 도루방을 사용하듯 대형드릴작업이 쉽게됐습니다.

앞으로 핸드형전기드릴은 얇은강판 작은구멍을낼때나 나사작업 등에만 사용하고,
무리하게는 사용말아야겠네요.

 

 

 

 

 

아래는 귀촌후 집수리 모습입니다.

지붕위에서 본 고향집 모습으로, 오른쪽 슬라브창고 지붕개량하기전에 우선

왼쪽본가의 기와밑의 대형빗물받이강판이 조금씩녹슬어 이것부터 교체작업하였습니다.

파란색표시부분은 빗물받이강판 주문시 참고 셈플용으로 그라인더로 단락한 모습입니다.

 

 

신가의 부국판넬에 들러 일부 잘라낸 낡은 빗물받이강판 조각을 보여주며,
과거의 빗물받이는 이렇고, 새로할것은 아래 도면처럼 해달라 부탁하였습니다.

 

 

대형빗물받이강판이 마치 대형처마강판을 방불케할정도로 사이즈가 어마합니다.

세로사이즈가 50CM이상나오고 장당 3M(짧은건 1.5M)정도입니다.

(0.6T 3M 2장, 0.6T 1.5M 1장,  0.4T 3M 4장하여 ; 총16만원)

 

빗물받이를 따로 주문시 항상 챙겨놔야할것이 기존 빗물받이걸쇠(받침쇠)입니다.

저희집처럼 기존에 대형으로 주문제작했을경우 새로할때도 단한개라도 버리지않고,

걸쇠를 챙겨놔서 아래처럼 녹빼고 광내고 하시면 되겠습니다.

 


 

∇ 아래는 귀촌전 방치되있던 본가 모습입니다.

 

 

 

∇ 귀촌후 조금씩 수리하여 최근 빗물받이까지 교체한 모습입니다.

 

위 앞전 고양이가 있는 사진을 보면 각건물마다
빗물받이가 따로따로 2개씩 엊물려있는듯마는듯한 상태입니다.

이것을 앞으로는 아래처럼 기와집 본체 대형빗물받이가 우측 창고 빗물까지 카바할 예정입니다.

그런데 이강판이 육중한 0.6T라서 걸쇠를 여러개 고박한다하더라도 하중력엔 택도없습니다.

그래서 아래에 따로 지지대를 만들어 보강해야합니다.

 

 ∇ 아래처럼 구비한 대형앵글을 이용해, 대형선반식으로 짜서

 빗물받이와 바로닿아 고정되게끔 작업할 예정입니다.. (END)

문재인 케어를 반대하는 의사들의 움직임과 반응을 '의료'와 '복지'차원에서 다루려고 했다.

그러나 의협 비대위 모습을 보면 최대집이 그동안 해오던 극우 보수 태극기 집회와 너무 유사하다.

결국, 최대집은 의사협회를 이용해 문재인 정권 흔들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문재인케어 #의사협회비대위 #최대집 #극우보수 #아이엠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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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케어 반대’ 의협 최대집 투쟁위원장, 극우단체 대표로 드러나|

 

태극기 집회 등에서 “박근혜 탄핵 부당” 외치고

‘자유통일해방군’이라는 극우단체 대표 맡기도

10일 서울 중구 대한문 앞에서 ‘문재인 케어 반대’를 외친 대한의사협회 국민건강수호 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에서 투쟁위원장을 맡고 있는 최대집 씨가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이 부당하다고 외치고 있는 극우단체 대표를 맡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22923.html

 

그렇담 쓰레기집단이라 비난받아도 별로 변명할 여지가 없다는 얘기겠죠.
3만명이 운집했다했나요?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그 3만의 의사들 중 지난 촛불집회에 참여해 박근혜탄핵과 적폐청산을 외친 의사는 있을까?있다면 몇명쯤이나 될까?

사람이 먼저라는 생명이 먼저라는 철학없이
생명을 다루는 일 하는 사람들을 의사도 아닌 의사선생님이라 불러줘도 될까요?

여기서 잠깐,
문재인케어가 뭔지 짚어보죠.

‘문재인 케어 ‘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으면 본인이 내는 돈과 건강보험이 부담하는 비용이 있습니다. 가령 진료비가 1만원이면 3천원은 개인이, 7천원은 건강보험공단이 지불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모든 의료비를 건강보험공단이 부담해주지는 않습니다. 특히 MRI나 초음파 검사 등 일부 검사 비용은 비싸도 전액 본인이 부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문재인 정부는 비싼 검사비용이나 고가의 약 등 보험 적용이 되지 않던 ‘비급여 항목’을 개선하는 정책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는데, 이를 가리켜 ‘문재인 케어’라고 부릅니다.

아무리 세상일에 어둡다 해도 과거 이력이 저런 인물을 대표로 세우고 그를 따라 목소리를 높이는 의사들이라니
몹시 실망스럽습니다.

적폐는 사회 온 권력층을 뒤덮고 있음을 다시 한 번 절감합니다.

피터님글 기사로 꼭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http://theimpeter.com/41818/


 

 

원문 ; http://cafe.daum.net/kseriforum/7pAX/36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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