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2016년 봄에 귀촌하여 텃밭외에는 농사(소득작물 재배)를 짓지않는 관계로
하게된 일이 농촌일을 도와주거나 시내 막일입니다.
호남권 광주에서는 인력소개소를 인력대기소라 주로칭하네요.
목수대모도를 하면서 목수일을 배울까 아니면? 고민중에..
제가 다니던 송정동의 대기소에 어쩌다 인부를 구하던 어떤 타일사업자가
제 차량 연락처를 통해 타일일좀 따라다녀보지않겠냐고 제의하길래 한번 따라다녀봤습니다.
타일일이 노가다중에 괜찮은쪽에 속하다던데, 기술자가 되면모르겠으나
대모도 상태에서는 철근대모도만큼 노가다중에 상노가다입니다.
사모래개기(시멘트와 모래를 삽으로 섞는일)를 하루에 30포이상 하는 경우도 있고,
30kg가까이되는 타일박스를 하루에 수백개를 나르기하기, 경우에 따라 질통지기..
대모도이니 이것을 감내하고 기술자가 됐다치드라도 또하나 이겨내야하는게 있는데 그것은 세멘독입니다.
미장쟁이 버금가게 시멘트를 다루는 직업이 타일쟁이일줄은 미쳐 몰랐습니다.
피부가 약한(피부질환)사람은 세멘독에 걸리기쉽상인데, 저또한 그러하기에 대모도 한달도않되 몸에 슬슬 세멘독 증상이 생깁니다.
메스컴에서 줄눈이작업(벽돌메지)하는 아줌마가 돈을 많이 번다고하는데, 알고보면 그만큼하기에 그렇다는걸 알수있습니다.
이 줄눈이작업은 타일쟁이보다 더징하게 시멘트를 다루는데, 믹서로 돌리는게아니라 아예 손으로 주물러서 시멘트를 섞습니다.
꼭 고무장갑이나 끼고 손으로 시멘트를 섞어야하다보니 세멘먼지에 가장 취약하게 노출되는 직업군이며,
일끝나면 노가다중에 작업장갑이 제일 더러워진 1위중 하나입니다.
모아니면도라고 타일일배워 메지라도 넣는일이나 하고다닐까했는데, 왠수인 시멘트와 함께해야하니,
대마찌(일이 없을때)때를 맞춰 두손들고 그만두었습니다.
(줄눈이나 타일 일은 아무나하나 교훈이 생깁니다..)

 

 


타일대모도 한달 남짓하여 번돈으로, 저에게는 한달에 투잡않하고 번돈중 가장 크게번돈입니다.
귀촌후 농촌일과 시내 막일(노가다 대모도) 합쳐 약400만원선을 모왔는데, 아끼고사는터라 1년 생활비입니다.
귀향해서도 내몸하나 건사하는것보다, 불우이웃을 좀 도와줘야하는데 생각하니..
집안 느낌이 안좋아 귀촌후 집안의 우환거리를 해결해놓고도, 넉놓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수중에 돈이 없는것도아니지만, 마땅한 일거리를 찾지못한상태라 마음이 바빠집니다.

 ∇ 2016년 - 객지생활에 비해 소소한 후원영수증들

 


그래도 시골에서 차로 시내까지 가까운 20여분거리이기에 다른일을 하더라도 안심이니..
시골일을 거들며 문중산도 관리하고 집수리.차수리도하고 잠시 짬을 들여 여행도 다녀왔습니다.

 

 

∇ 아래사진처럼 오래전 다마스 운전석 오른쪽지지대가 단락되어,
굵은전선으로 묶어서 한동안 운행중에 있어서, 시트수리하러갔습니다.

 

 

 

∇ 중고시트를 문의하러, 수도권 폐차장에 문의해보니 수출차라서 부품이 많지않다고합니다.

신기하게도 나주에서 동일기종의 부품이(시트셋트) 있다고하여가보니(광주의 남도폐차장에서 알려줌),
진짜로
세진폐차장에 다마스폐차 수십여대를 비롯 주로 경차가 있었습니다.

 

 

∇ 종합검사에서 차량구조변경으로 불합격되는일이 많아서 시트수리점도 시트년식에 좀 신경을 쓴다며,

년식에 맞는게 있냐고 여쭈니, 이주노동자 딜러가 "무슨소리세여? 검사든 연식이든 안되는게 어딧어요. 다되지^^"
그러고는 그중 적당한걸 찾아서 5분안에
달아주는데 좀 신형이지만 크기에도 문제없이 장착됐습니다.

"아무래도 폐차로 오래방치된 상태라 좀 양호한것도 시트아래가 너덜너덜하여서 상태가 매롱이라 결국 전문시트수리점에 맞겨야할판이니
시트뼈대만산다 생각하고 값을 많이 쳐주지는
못하겠네요"하니, 내심 기대하는눈치였다가 그러시라며 5만원받고 OK해줍니다.

둔탁한구형에 비해 심플신형이 운전석에서 1CM 심플하니 약간의 공간이 절로 생긴 느낌입니다.

 

 

∇  집에가서 시트수리점을 통해서가 아니라 시트매트만사서 자체교체가 가능할지싶어 한번 풀어보았습니다.
시트본체는 아래처럼 복스로 쉽게(한의자당 볼트 2개) 풀수있었지만, 시트매트를 분리해서 새로
이식하는 작업은 만만치가 않다는게 보였습니다.

 

 

 

∇ 시트를 분리해 물세척후 말리는 모습입니다.일단 시트본체를 세척하고 말린후 너덜한곳은 꿰매거나 테이프로 붙이거나 하여 당분간 타고다닌후,
나중에 걸치는
시트를 사서 그위에 씌울생각입니다. 아니면 나중에 시트전문점에 가서 새로 시트매트를 교체의뢰하거나 말이지요.

 

∇ 시트를 말린후 다시 완전히 장착한 모습입니다.

 

 


 

∇ 다마스를 오래타고다니다 종합검사에서 문제되는것중하나가 배출가스입니다.

작년까지만해도 탄화수소량이 100안팍이었는데 갑자기 996으로 측정이되 재검사를 받아야했습니다.

 

 

 

∇ 일단 인터넷으로 비품.신품인 다마스 촉매컴버터를 구매후.. 

 

 

 

 

 

∇ 지정직영정비업체에서는 정품부품일경우에만 수리해주므로,

배출가스 수리도해주고 종합검사 대행도해주는곳에 수리를 맞겼습니다.

 

 

∇ 일반수리업체에 의뢰시 추가된 부품은 산소센서입니다. 탄화수소량 과다주원인은 산소센서이고
그다음으로 촉매컴버터 이상유무와 점화플러그 점검
이라는군요.
(지정직영정비업체에서는 묶어서 다수리해야한다는경우가 많다고함)

아래는 광주남구의 동양자동차공업사에서 싸게 수리한 내역입니다.

 

 

 

∇ 촉매컴버터를 단후 밸조절(EGR장치)도 해야되는데, 해당 공업사에 수리량이 많아

거의 공임비 않받다시피하고 대충 조정하고 문제없을거라며, 다음에 검사할때 확실히 잡으면 될거같다하고,
기사가
제차를 휘리릭타고 교통안전공단에 들리어 재검사하여 적합승인받아낸 내역입니다.

 

 

 

 

∇ 수리와 검사가 거의 완료되어 구형다마스5밴을 간단한 캠핑카식으로 살짝 업그레이드해봤습니다.

캠핑카 업그레이드할시 고려할문제중하나가(난관이기도함) 운전석 뒷열을 사용하는 방식으로(뒤에 사람을 태울수도 있게끔하는)업그레이드할것인지,
아니면 뒤에 사람태우는것은 포기하고 의자열을 앞으로 제치어 펼쳐서 넓게 캠핑카를 만들것인지입니다.

 

 

∇  저는 만일을 대비하여 뒤에 사람태울수있게끔 평상시에는 뒷의자를 그대로놔두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캠핑시 그때 뒷의자를 완전히 젖히고 의자쪽에도 짐을 놔두거나 혹은 짐이 적을땐(당일치기시)
뒷의자자체도 미리 제처놓지않고 뒷의자뒤의 물건적재공간에 물건을 몰아넣어서 심플히 캠핑을 가는방식입니다.

서랍적재공간은 판넬을 물건적재공간라인에(뒤에 앉게될 사람 머리위 걸거치지않게) 수평으로 위로 깔면됩니다.
저는 판넬말고 그물망으로 피스를 고정하여
부피만크거나 가벼운물건만 올릴수있게끔 간단히 만들었습니다.

 

 


 

∇ 무안을 오갈때 가끔 경유하는 나주신도시모습입니다.

 

 

∇ 무안 앞바다의 모습입니다.

 


 

∇ 지리산 인근 무주구천동가기전 인근 고속도로 모습입니다.

 

 

∇ 지리산 인근 무주구천동가기전 어느 국도변에 펼쳐진 무주계곡모습입니다.

무주구천동 국립공원입구는 성수기때 사전예약해야 차량통행이 가능하며, 공원입구 아래는 장사꾼이 계곡까지 점령하여
주차비나 평상
자릿세를 공원보다 더받기에 그냥 드라이브만 하고 나왔습니다.

(경차라해도 평상을 이용않할시 주차비만 당일 1만원임)

 

 

∇ 무주구천동에서 좀 떨어진 무명계곡이지만 이곳도 시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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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40을 넘어 중년되기전 귀향해 정착준비중인 모습입니다.
고향 위치는 광주시 광산구 신동입니다. (나주경계 시골마을)
(귀향동기는 이전에 쓴 수기를 참조하세요.
나의 귀향수기 http://cafe.daum.net/mmnix/5SuV/199674 )


 

 ∇ 집안 모두 도외로 나가 집관리가 않되어 있는 모습입니다.

 

 

∇ 일단 귀향후 가장 먼저 집앞 울타리를 보수했습니다.아래는 급히 폐깔망으로 망을 친 모습입니다.



∇ 일단 망을 친후 긴갈대발로 마무리한 모습입니다.집앞에 이웃집 텃밭이 있는지라, 일조량을 위해 벽돌이나 블럭으로 담장을 쌓을때 낮게해야하며, 나무도 심는다면 아래처럼 갈대발 높이까지의 낮게자라는걸로 해야합니다.벽돌보다 비용이나 밭 일조량을 위해선 일반적으로 철망을 치고 낮은 나무를 심어놓는데,야산에서 그런 나무를 구할수없으면 이또한 비용이나 시간이나 마찬가지이기에,일단 갈대발로 마무리하고 몇년후 발교체시 철망만 보완해야겠다는 생각입니다.

 

∇  검은망을 칠때는 농가에 활용치 않는 망으로 했기에 비용이 들지 않았으며,

 갈대발도 (120,150cm x 180cm) 6묶음하여 총3만원으로(넷홈쇼핑) 싸게 마무리했습니다.

 


 

∇ 왼쪽문은 집 입구중 하나인데, 얇은 비닐에 거의 투명인지라,가져온 남은 자제인 두꺼운 비닐과 커텐천으로 마무리했습니다.

 

 

 


∇ 이어서 집수리중 대공사인 지붕보수를 하였습니다.

 

 

∇ 지붕 페인트를 칠하기전 깨진기와는 접착마감제로 이어붙이거나 남은 기와로 교체하고,

두꺼운 사포로 기와사포질을 하는데 장장 이틀이나 소요되었습니다.

그런데 하고보니 시행착오를 격었는데, 아래와같이 10년이 지난 기와의 경우

기와청소를 이틀이 아니라 삼일정도는 해야겠다는 결론입니다.

 

 

 


∇ 페인트 1차작업을 완료한 모습으로 2차를 않해도 될정도로 뽀대가 나는 모습입니다.

 


∇ 그래서 페인트 2차칠까지 굳이 않해도 되는가보다고 냅두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보니 이것은 방심이었네요.

 


∇ 한달이 지난후 지붕을 보니 지붕하단 기와에 녹이 조금식 올라와 있던것입니다.

 

 

 

 ∇ 하여 페인트가게에 자문을 자세히 구하니,

오래된 기와는 굵은 사포와 경우에 따라 쇠솔도 동시에 사용하여, 오랜시간을 거쳐 잘 문질러줘야하며,

청소는 빚질을 한후 꼭 물청소를 하여 이물질을 완전히 제거후 마른다음에 하라였습니다.

페인트칠은 2차까지 꼭 하되, 1,2차를 떡칠을 하듯 해야하며

그리아니할경우 3차까지 해야하는 경우도 생긴다던데, 실제보니 정말 그랬습니다.

아래사진은 다시 사포질을 하고 물청소하기전 모습인데, 아직도 녹이 좀 남아있습니다.

잘해놓으려면 지붕청소하는데만 1주일 걸릴판입니다.

그래서 청소는 이쯤까지만 하고 포기했습니다.

 


 

∇ 페인트 2차칠 완료후 모습입니다.

또 한달이 지나면 전번보다는 덜하겠지만 미세하게나마 또 녹이 올라올거라 예상됩니다.

그러나 이쯤하여 자족하고 그러려니 해야할거같습니다.

 

 


 

∇ 메인 지붕페인트칠후 서브 헛간도 페인트 칠한 모습입니다.

비용은 메인 기와페인트 4리터 4통(총 10만원), 소부신나 4리터 3통(총4만5천원),

서브 헛간 페인트 1리터 3통(1만8천원), 에나멜신나,휘발유 8리터(총1만5천원)

 

 

 ∇ 이리하여 집앞 울타리와 지붕보수를 왼료한 모습입니다.

 

 

 

 

 

 ∇ 아래사진은 집뒤 담벼락이며, 이곳도 수리에 들어갔습니다.

 

 

∇ 송정시인근 영광방향국도에 위치한 철망도매상에서 울타리철망을 싸게 구매했습니다.

(PVC능형망 높이 120cm X 길이 5m 짜리 2묶음 ; 총28,000\)

 


∇ 시골집에 남은 아시바로 지지대를 만들고 PVC망을 연결중인 모습입니다.

 

 

 

 

 

 

∇ 마무리는 이또한 갈대발(120cm x 180cm) 고급형 4묶음하여 3만원선에 싸게 마무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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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명철 어머니댁

 

 

 

 

 

 

 

 




 신한배형 결혼식에서 - 서울 2015.3.21

 

 

 

 

 






 

 

 

 

 

 

 

 



 

 

 

 

 

 

 

 

 

 

 

 



 

 

 

시멘트바닥에 텃밭을 정식으로 만들때 배수판을 깔고, 부직포로 덮는등하지만,

바쁜 주말농장인의 경우 시멘트위에 페포대 및 깔망을 곂으로 깔아서
만든다고도하여 한번 만들어서 가꾼 모습니다.

 

1#

∇ 아래와 같이 고향집앞에 넓은 공터가 있어 공간을 활용했습니다.

텃밭 위치는 광주시 광산구 신동(나주 근처) 시골마을입니다.

 

 


∇ 텃밭을 시멘트바닥위에 페포대와 검은 깔망을 곂으로 깔아서,
다마스로 문중성산에서 흙을 공수하여 덮었습니다.




 

 

우천시 토사 유실을 방지하기위하여 텃밭 모서리에
잔디와 고랑풀등으로 완충부분을 만들어놓고,
추가로 물흐름 방향인 우측 남쪽주변 잔디모서리에 돌을 좀 깔았습니다.

 

 





 

∇ 마지막으로 텃밭가꾸기를 업그레이드한 모습입니다.

송정시장에서 몇차레에 걸쳐 여러모종을 조금 사서 심어 놓았습니다.

(오이,대파,부추,참나물,상추,브르콜리,신선초,토마토,고추,가지 등; 약5만원선)

 



 2#

∇ 첫사진은 처음에 심은 모종 텃밭 모습이며,

흙높이가 좀 얕은편이라서 왼쪽고랑라인에 두줄모종인것을

(2번째사진)흙높이를 높여 한줄로 재작업했습니다.

 

 

 

 
∇ 이어서 비닐작업, 줄메기 작업완료 모습입니다.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 추가로 가뭄을 대비하여 북측상단에 미니담수로를 갖추었습니다.

(주말에만 텃밭을 가꿀시 수돗물을 조금씩만 틀어서 담수로를 통해
고랑에 서서히 흐르게 놔두는것도 사막화 방지에 도움이 되는군요.)

 

 

 3#

∇ 고향집 왼편에(장돗대옆) 5평 남짓한 자투리공간이 있어서

집앞 메인 텃밭외에 추가로 텃밭을 만들었습니다.

이곳은 바닥이 흙바닥이라서 흙높이에 상관없이,

흙매기 작업과 퇴비흙만 공수하여 간편히 만들수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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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 전 한번 올렸던 글인데, 글 올린 후에 다큐 감독과 작가 등이 연락을 해오며 다
양한 사건을 만들어 냈던 바로 그 글이다. 미흡한 부분이 있어 다시 정리해 올린다. 한 
어르신의 파란만장한 삶을 다룬 이야기인지라 요약한다고 했어도 양이 방대함을 양해 
하시길. -

2009년 노무현 대통령 서거당시, 그 소식에 분사하여 돌아가신 분이 계신다. 그분은 군산 
사시는 고태곤 어르신이셨다. 이 사건은 언론에 짤막히 소개되었는데, 이 어르신의 마지막
이 언론에 이렇게 볼품없이 묘사되었음은, 중요한 것과 보잘 것 없는 것을 가릴 능력이 안 
되는 시대의 특성이리라. 하여 오늘 낮에 어르신이 운영하던 책방에 들렸다가 잊혀져가는 
어르신을 기려야할 필요를 절감해 장문의 글을 정리한다. 노무현의 죽음이 이 어르신의 죽
음으로 이어진 기막힌 운명의 고리는 한편으로 우리 현대사의 비극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내가 이 어른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십 수년 전, 군산 구역전 사거리에서 피켓을 
들고 있을 때였다. 여름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새만금 사업 규탄하는 피켓을 들고 땡볕 
내리 꽂는 번화가 사거리 모서리에 서 있었다. 군산이라는 동네는 새만금의 마법이 걸린 지
역이고 5천명의 시민이 구역전에 모여 ‘새만금관제데모’까지 했던 터, 당시 그런 피켓을 들
고 있으려면 갖은 수모를 감수해야 했다. 그 얼마 전에도 술취한 아저씨가 “니가 뭔데 반대
해”라며 달려들어 피켓을 뺏으려 하며 폭력을 휘둘러 곤욕을 치렀었고, 이날 역시 지나던 
택시기사가 창 너머로 “후레자식, 개새끼” 등도 연발했었다. 새만금 반대 순례를 하던 문정
현 신부님 등과 수녀님들을 향해 전북도청에서 운영하는 행정깡패들이 젓갈 폭탄을 던지며 
“ㅆㅂ년 ㄱㅅ끼”’를 연발한 사건도 있었고, 새만금 자전거 평화순례단 단장은 그 행정깡패
가 휘두르는 쇠꼬챙이에 눈이 찢어지기도 했다. 그럴 정도로 새만금 사업에 정신 나간 지역
이 전북. 그 중에 군산이었다. 

하여간 거리에서 피켓 들고 있는 것이 쑥스럽기도 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총이 따갑기
도 해서 피켓을 메고 잔뜩 주눅이 들어 있었는데, 어르신이 한분 다가오신다. 고개 돌려 봤
더니 칠순이 넘으신 어르신이 비닐봉투에 먹을 것과 음료수를 넣어 가지고 오시는 것 아닌
가. 점쟎은 어르신은 얼마나 고생이 많냐?고 나를 격려하시며 봉지를 건네시는데, 적진 한
가운데서 시달림 받던 나는 여간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건 어르신이 단순히 나에게 
먹을 것을 건내서가 아니라, 이렇게 정치, 행정, 언론, 여론이 새만금 광풍에 미쳐 돌아가는 
현실에서 그에 휩쓸리지 않고 자기만의 판단 기준을 가지고 있는 어른이 있다는 것은 그 자
체로 큰 힘이었기 때문이다. 

하여간 그 얼마 후 어르신에 대한 좋은 기억을 머리에 담고 상가를 돌며 전단지를 뿌리던 
터 나운동 유원아파트 앞의 책방에서 어르신과 다시 조우했다. 어르신이 따님과 함께 운영
하는 글방였다. 인연이 있는 듯 해 차를 얻어 마시며 앉아서 이야기를 들어보니 어르신은 
‘무공수훈자지회’라는 보수단체에 소속되신 분이셨다. 하지만 그런 보수단체에 소속된 분들
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이셨다. 여느 보수단체에 소속된 이들은 ‘무턱대고 개발사업 찬
성하고, 관에서 추진하는 사업은 무조건 오케이’이다. ‘국가가 하는 것은 잔말 말고 따라야 
한다.’가 그들의 모토였다. 이런 집단의식으로 스스로 고민하고 판단하는 능력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다. 이렇기에 정치인들은 이들 보수단체들을 동원해서 시민들 선동에 앞장서 왔던 것이다. 

그런데, 이분은 기성세대의 문제를 꿰뚫어 보시고 이를 강력히 비판하시는 명철함이 있으셨
다. 군산에서 진행되고 있던 ‘새만금 사업’과 ‘핵폐기장 사업’에 대해서 반기를 들면서 성토
하셨을 뿐만 아니라, 종종 이외의 사회적 현안에 대해서 귀뜸해 드리면 아무런 편견이나 선
입견, 권위의식 없이 골똘히 들으신 후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용하셨다. 마치 어린 학생 같
은 수용력을 가지신 분이셨다. 내가 만약 어른이 된다면 꼭 닮고 싶은 그런 모습이셨다. 

이런 모습은 그냥 일순간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기에 나는 어르신의 인생이 궁금했
고, 그 후로 종종 찾아뵈면서 그의 삶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리고 그 만남의 말미에 
나는 어르신의 생이 인의를 아는 군자의 모습 그대로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한 강직한 인간
의 인생을 관통한 처절한 투쟁사를 어찌 다 이 짧은 글에 담아 낼 수 있을 것인가. 

어르신은 불의를 보면 견디지 못하고 정의가 아니면 행하지 않는 그런 분이셨다. 6.25 직전 
에 사병으로 입대하셨는데, 하사 한명이 저지르는 부조리에 맞서다가 엉덩이 살이 파일 정
도로 두들겨 맞고 창고 한쪽에 버려졌다고 한다. 워낙 초죽음이 되도록 맞았던 터라 아예 
몸은 움직일 수 없는 지경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개죽음 당하는 것은 당시 일도 아녔다. 
7,80년대까지 군대 내 구타에 의한 사망 등은 ‘군기확립’이라는 이유로 별다른 처벌도 않고 
유야무야 되었던 실태로 봤을 때, 어르신은 그대로 유명을 달리 했어도 하등 이상할 것 없
었다. 당시 해방 직후. 남북의 이념 투쟁이 격화되면서, 단지 사상이 의심 된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사람을 파리 잡던 하던 흉흉한 정국이었기에 말해서 뭐하랴. 당시 그를 살린 것은 
그 후임병이었다고 한다. 어르신을 신망하던 후임병이 창고 뒤쪽에 쓰러져 있는 어르신께 
고참들 몰래 밥을 가져다 먹여 살렸다고 한다. 그렇게 한 달 동안 창고 뒤쪽에 버려진 체로 
있다가 살아나왔다고 한다. 

이후 어르신은 계속 그렇게 있다가는 또 다른 시비로 맞아죽을 것 같아서, 살아남기 위해서 
소위 임관 시험을 준비하셨단다. 하지만 당시에는 책 살돈이 없어서 시간 날 때마다 헌책방
을 오가면서 역사책을 읽고 외우면서 공부했다고 한다. 그리고 시험에 합격해서 기어이 소
위 계급장을 달았다고 한다. 

어르신을 괴롭혔던 그 하사는 어떻게 되었냐고? 소위계급장 달고 나타나니 그는 어르신 앞
에서 제대로 서있지도 못하고 사시나무 떨듯 발발발 떨고 있었다고 한다. 계급이 깡패라고, 
자기 계급으로 내리 눌러서 어르신을 쳐 죽이다시피 해서 창고 뒷 쪽에 버렸던 것이고, 마
찬가지 원리로 더 높은 계급 달고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어르신이 자신을 쳐 죽이는 것도 
아무 문제꺼리가 되지 않기에 그 사실을 확인한 순간 그의 혼령은 이미 지옥에 떨어졌던 듯
하다. 하지만 어르신은 자신의 지위를 악용하는 이가 아녔기에 핏기 없이 떨고 있는 그에게 
다가가 “인생 그렇게 살지 말아!”라는 말을 건네고 끝냈단다. 

이후 6.25가 터지고 그는 최전선에서 사선을 넘나드는 임무를 수행 했단다. 그가 어떤 임무
를 수행했는지는 다음 한 줄이면 드러난다. ‘백마고지 전투(6.25 중 가장 치열한 전투 중 
하나)에서 수색중대장 임무를 맡았고 이로 인해 무공훈장을 두 개를 받았으며 이승만이 직
접 헬기타고 나타나서 훈장을 수여함.’ 이에 따라 어르신은 죽을 고비도 수없이 겪었다는데, 
북한군이 스피커를 동원해서 ‘고태곤 너 이 새끼 목을 따버리겠어’라는 엄포를 할 정도였다니 과히 당시의 아찔함이 전해진다. 

중공군 개입 후에는 전세가 극도로 분리해 졌다는데 하루 종일 기관총을 쏘는 것으로도 모
자라 밤새 쏘고 또 쏴도, 중공군이 시체를 밟고 끊임없이 밀려 내려오는 것은 그야말로 악
몽이었다고 한다. 한번은 중공군 진지 근처에서 육박전 하는 중에 그 시체에 파묻혔는데, 
중공군이 사망확인을 하려고 죽은 시체에 일일이 총검을 꽂고 다니는 중에 얼굴 옆에 단도
가 꽂히는 아찔한 경험까지 하셨단다. 하여간 그 후 중공군 총알의 과녁이 되지 않기 위해
서 낮에는 썩어가는 시체 분비물과 냄새 속에서 7월의 땡볕을 버텼고, 밤 역시 그들의 눈에 
띄지 않게 천천히 몸을 굴려서 3일 만에 아군 진지로 돌아왔다고 한다. 

이러한 괴로운 기억 때문에 따님 이야기에 의하면, 책방 의자에 앉아서 졸던 할아버지는 가
끔 ‘위생병 위생병’하고 잠꼬대를 하다 깨어나고, 해마디 6월이 되면 ‘포성 때문에 귀가 아
파서 잘 수 없다.’며 배란다에 나와서 뜬눈으로 새우시곤 했다고 한다. 

자. 그런데 이런 얘기로 끝날라 치면 어르신 얘기를 아예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625전쟁의 무용담은 '독립군 잡아 죽이던 <간도특설대>장교를 하다가 해방 후 빨갱이 잡아 
죽이는 구국의 영웅'이 된 백선엽 장군이나 박정희 등의 이야기에 무수히 회자되었기 때문
이다. 

어르신의 강직한 성품에 의해 만들어지는 남다른 이야기가 지금부터 시작된다. 6.25직후부
터 어르신이 군생활을 했던 10년의 시간 동안 군 조직은 그야말로 ‘부정부패의 박물관’ 역
할을 했다고 한다. 일 예로 대한민국 국군의 최악의 방산비리 사건으로 일컬어지는 ‘국민방
위군 사건’을 들 수 있는데, 이는 6.25기간 동안 국방부 고위 장교들이 군수물자를 빼돌려
서 10만명의 국군이 아사한 사건이다. 적은 내부에 있다는 말이 딱 맞는 사건이었다. 이에 
대한 책임으로 국민방위군 사령관과 부사령관 등 관련자 5명이 사형을 당하기는 했지만, 
‘10만명’이 몰살당했으니 책임을 물어 조치한 사건이지, 어지러운 전쟁기간 내에 이런 사건
이 얼마나 많이 빚어지고 은폐되었겠는가. 

이 때문에 당시에는 늘 물자가 부족했고 결핍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리고 이 결핍을 보충할 
수 있었던 가장 효과적이고 직접적인 방법은 다른 중대, 다른 대대로부터의 도둑질이었다고 
한다. 90년 중반에 군생활 했던 나도 고참들로부터 ‘도둑질’을 장려 받았을 정도였기에 50
년대 상황은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물품 부족에 시달리는 와중에도 
장교들은 그 부족한 물품을 빼돌려 시장에 팔아먹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장교들은 사병
들을 자신의 종부리 듯 사역에 동원했고, 산의 나무를 잘라 팔아먹기 위해 물길을 막고 숲
을 깍아 냈다고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끊이지 않고 터지는 군납비리는 그때부터 그렇게 
차분히 기반이 다져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불의를 참지 못하는 강직한 성격의 어르신은 이런 문제가 보일 때마다 문제를 제기
했고, 자기 상급자인 모 대령에게 총까지 꺼내들며 항명하다가 결국 대위에서 중위로 강등
까지 당했다고 한다. 백마고지 전투의 1등 공신으로 무공훈장 두 개를 차고 있는 어르신을 
그렇게 강등시킬 수 있었던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이들 군조직이 기실 깡패조직보다 
더 추악하게 의협의 사슬에 묶여 있기 때문에 이권이 맞물린 이들이 서로서로 뒤를 봐준 때
문이다. 

어르신은 당시의 힘겹던 군생활 압박의 가장 큰 특징으로 ‘함께 비리를 저지르지 않으면 버
틸 수 없게 만드는 분위기’를 든다. 그도 그럴 것이 비리를 저지르는 간부와 장성들은 부하
들이 해꼬질 할 수 없도록 공범자를 만들어야 한다. 공범이 되면 함께 비리의 결과물을 나
누면서 점차 ‘비리가 밝혀질 위협’을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공범을 많이 만들면 만들 수
록 안전해진다. 이런 식으로 관계가 물고 물리면 종국에는 군조직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비
리 집단이 되는 것이다. 이렇다보니 현재와 같이 퇴역하고 나서도 각종 이권에 개입해서 수
천억의 국방비를 빼내다 걸리는 사건이 수시로 터지는 사건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들의 
눈으로 군은 나라를 지키기 위한 조직이 아니라 이권의 샘일 뿐인 것이다. 이러한 질병이 
다른 곳도 아닌 군에 광범위하고도 집요히 퍼져 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이렇게 어르신은 군조직이라는 것이 인의를 지킬 수 있는 장소가 아닐 뿐 아니라, 청렴하게 
살려면 굶어죽어야 하고, 진급도 불가능한 현실에 통탄했다. 자신은 진정 나라와 겨레를 위
해서 목숨 받칠 각오로 군에 뛰어든 것인데, 군조직 자체가 ‘이권이 맞물린 부패한 조직들
의 사슬’ 이상이 아님을 깨닫고 10년의 군생활을 마무리하고 50년대 말에 제대했다고 한다. 
그 50년이 지난 2009년에도 해군의 군납비리를 폭로했던 김영수 소령이 해군 조직의 왕따
를 당해 결국 퇴역할 수 밖에 없었던 터이기에 ‘장교라면 너도나도 한몫 챙기는 것이 관례
인 50년대 군대의 분위기’를 어르신은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이에 부하들은 부모를 잃은 듯이 아쉬워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어르신은 부인을 친정에 보
내고 혼자 독신 생활하다시피 했었는데, 이는 함께 살면서 가족의 궁핍한 처지를 눈앞에 보
면 마음이 약해져서 비리에 연류 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렇게 나라의 의를 홀로 
구하려는 어르신의 마음이 부하 사랑의 마음으로까지 이어지는 것은 당연했는데, 그는 ‘굶
주리는 우리 불쌍한 부하들 먹여 살려야 한다.’며 군에서 나오는 월급과 특별 포상금 같은 
것을 몽땅 쏟아서 돼지잡고 쌀팔아 이들을 먹여 살렸다고 한다. 물품 빼돌려 팔아먹고, 개
인 사업을 위해 병사를 사역에 동원하는 장교들 속에 그가 얼마나 부하들로부터 존경받은 
인물이었는지는 예상할 수 있는 바와 같다. 하지만 어르신은 그렇게 퇴역했고, 부하들은 부
모를 잃은 듯 슬퍼했다고 한다. 중공군이 홍수처럼 밀려오는, 사선을 넘나들던 백마고지 전
투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당당히 맞섰던 그가, 군내 부정비리를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왔음은 
결국 군조직이 ‘인의’를 갖춘 이가 발디딜만한 곳이 아님을 강변하는 것이다. 

아마 그렇기 때문에도 나는 이 어르신과의 만남 후에 625와 월남전의 경험을 회상하며 ‘애
국’을 떠벌리기만 하는 노인양반들을 전혀 신뢰하지 않는다. 그들은 북한군과 중공군을 적
으로 규정해 도살 하기는 했을 지언정, 그들의 둔감한 정의감은 군대내 부조리를 전혀 인식
도 못했고, 그 부조리에 타협했으며, 그 부조리에 저항하는 고태곤 어르신 같은 이를 학대
했던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는 터져 나오는 전현직 육해군 장성
들이 연류 된, 부정과 비리는 바로 그들 수준의 애국이 누적된 참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로 지금도 길거리에서 군복입고 ‘애국’을 강변하며 진보단체들을 ‘빨갱이’로 규탄
하는 그들은 이렇게 명백히 눈에 보이는 부정과 국방부의 비리의 결과물에 함구한다. 아니 
‘함구’정도가 아닌 ‘공생’ 중인 현실이다. 일예로 재향군인회라는 단일 조직만 해도 해마다 
국방부와 2천억의 수의계약을 치르고 그 와중에 각종 납품 비리사건이 터져나고 있다. 오죽
했으면 재향군인회 내부 간부가 이 사실을 폭로했다. 자 이런 비리가 조직적으로 연류 되어 
있기에 총을 쏘면 나가지가 않고, 방탄조끼는 구멍이 뚫리고, 수류탄이 터지지가 않고, 전차
는 기동이 안 되며, 조잡한 어군탐지기가 장착된 ‘최신의 구조함’은 재난 현장에 출동을 하
지 않았던 것이다. 바로 이런 짓을 전 현직 군인들. 정부와 국정원의 지령을 받고 관제데모
를 하고 다니는 보수단체들이 함께 기획, 실행, 동조 해온 것이다. 전직 해군참모총장들이 
나란히 구속된 사건은 이 참상을 대변한다. 국가안보의 가장 해악을 주는 세력이 바로 전현
직 군인들, 군조직이라고 하면 너무 심한 말일까?!   

아니 별로 심한 말 같지는 않다. 그 둔감한 정의감, 결핍된 인의로 과거 50년 전에 그랬던 
짓을 지금도 고스란히 하고 있는 것 같이, 앞으로 50년 100년이 지나도 군조직 내의 체질
화된 부정과 비리의 관행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이 나라는 병들어 가는데, 그 병들
어 가는 원인을 저들은 ‘방구뀐 놈이 성내는 식’으로 엉뚱한데 풀고 있다. 인의가 빠진 말뿐
인 ‘애국’의 참상이다. 

하여간 어르신은 군 제대 후에 면장시험을 합격해서 군생활 중에 부하들 아끼듯이 면민을 
돌보셨다고 하는데, 새벽 네 시 반에 나가서 밤 12시에 돌아오시곤 하셨다고 그 따님은 기
억한다. 어르신은 하루 종일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마을 곳곳을 순찰하며 살피셨다는데, 
여느 가정집 부엌에 들어가 솥을 손으로 긁을 때 녹슨 때가 나오면 밥해 먹은 지 오래인 것
을 판단해 구호 쌀을 몰래 실어다 놓고 가는게 일상이셨다고 한다. 면장 퇴직 후엔 연장자
로서 후배들에게 자리를 내줘야 한다고, 군 관련이나 어떤 자리의 제안이 들어와도 모두 거
절하셨다고 한다.

어르신은 시류에 흔들리지 않고 오직 사람 사랑하는 마음을 앞세워서 일을 하셨고, 그러다
보니 이에 맞지 않는 조직들과 수도 없는 마찰이 있었지만, 그 ‘인의’의 기반에 세워진 강직
한 의지는 그를 지치지 않고 나아가게 할 수 있었던 듯하다. 이것이 바로 여느 나이든 양반
들과 달리 ‘새만금’과 ‘핵폐기장’의 집단최면의 함정에 빠져들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고, 갖
은 사회부조리에 대해 끊임없이 성토하실 수 있었던 힘이며, 피켓을 들고 있던 청년에게 음
료수를 건네고 돌아와 그 딸에게 ‘젊은 청년이 땡볕에서 고생하고 있음’을 몇 번이나 안타
까워하면서 한숨을 쉬게 할 수 있었던 따스함의 원천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어르신의 강직함은 결국 어르신을 비극으로 내밀고 있었다. 애초에 어르신은 
이 부조리한 사회와 평생을 통해서 불화했지만 그 막바지의 사건은 노무현의 죽음이었다. 
노무현은 한편으로 어르신 자신이었다. 아무리 성심을 쏟아도 변화하지 않는 군조직 앞에서 
끊임없이 좌절했지만, 그 앞에서 쓰러지지 않고 꿋꿋이 나아가고 버텼던 그 자신을 어르신
은 노무현의 모습에서 보셨을 것이다. 그런데 굳건한 성벽 같던 노무현은 수구세력들의 끊
임없는 시비와 찝적거림에 자신의 부하들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던졌다. 모든 화근의 씨
앗을 자신의 어깨에 짊어지고 떠났다. TV에서 그 충격적 소식을 접하며 어르신은 이 조악한 
국가에 맺힌 평생의 한이 머리로 역류하는 것을 느끼셨을 것이다. 결국 어르신의 강직함은 
그 순간 꺾이셨다. 더 이상 이 세태를 버틸 수 없으셨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노무현 전 대
통령의 서거에 애통해 하던 80대 노인이 TV를 보다 호흡곤란을 일으켜 숨졌다.’는 간략한 
보도의 실상이다. 

어르신이 평생을 싸워 오셨던 이 조악한 세상은 그의 사후에도 어르신의 이름을 욕되게 함
을 멈추지 않았다. 노무현을 죽음으로 몰았던 이명박 정부는 ‘노무현대통령 사망에 노인 분
사’라는 제목의 기사가 불러올 파국을 우려해서 장례식장에 경찰을 파견해 그 남겨진 가족
들에게 ‘노무현 대통령 때문에 분사한 것이 아님’이라는 확인서를 받아 가려고 까지 했던 
것이다. 이에 천국으로 향하던 어르신의 혼은 이 기가 찬 현실을 져버릴 수 없어 지금도 구
천을 떠돌고 있을 줄도 모를 일이다. 

그 누구보다 정의롭고 강직하되, 절절히 사람을 사랑하고 나라를 위해서 진실 되게 자신을 
내던진 어르신. 어르신은 나서서 공을 취하지 않았고, 우연히 쥐어진 공도 아낌없이 주변에 
나눈 탓에 사람들에게 전혀 알려진 바 없이, 오직 저 몇 줄의 기사 속의 ‘80대 노인’으로 
흔적이 남을 뿐이다. 








* 작년 초에 이 글을 올리고 나서 어떤 분이 연락을 해오셨다. 본인의 아버지가 백마고지 
전투에서 어떤 지휘관의 헌신적 보살핌 덕분에 죽지 않고 살아 남았고 그 분의 은덕을 늘 
기리셨다는데, 그분이 바로 고태곤 어르신이셨다고.   


출처 : 길위의 평화
글쓴이 : 둥글이 원글보기
메모 :


고향이 광주이며(광주시 광산구 신동; 나주IC인근)
가정형평상 이른 청소년때 서울에 상경해 노동일하며 살다
이제 중년되기전 귀향해 정착준비중에 있습니다. 아래는 나의 삶의 수기 및  그간 서울생활수기 기록입니다.
(2개의 링크글)
자린고비 생활수기 전격공개- 박봉 자수성가기

짠돌이카페 베스트선정 원문 : http://cafe.daum.net/mmnix/7mn8/7890

 

꿈에본 내고향 - 광주 병풍산 아래에 하늘의 은총이 함께하시길..

http://blog.daum.net/chmanho/16883796

 

집안에 논.밭이 있으나 모두 도외로 나가 관리가 않되어 임대해준 상태이며, 아직 귀농은 아닙니다.
일단 귀촌한 상태로 도로보수 및 집수리와 텃밭만들기등을 마무리중에 있습니다.
아래 사진은 귀향하여 정착준비중인 모습입니다.

 

 수년전부터 화물차 영업넘버 법제 및 단속강화로 다마스라해도 영업넘버값이 최하 1500만원이상이라,
신문 배달.배송도 노란넘버를 달고 다녀야하는 처지여서, 작년 겨울 차라리 이직을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자금도 있기에 더큰차를 사서 화믈운송업을 할까하여, 화물운송종사자격증을 취득해 놓고,
물류회사에서 피킹 알바를 하면서 무슨일을 구체적으로 할지 고민을 하다..

잠시 시간적 여유가 있어 다마스에 캠핑나가는 정도의 짐을 챙겨서, 
오랬동안 못갔던 고향집을 방문하고 고향산하를 들러보았습니다.

 

 

 

 

 

 고향길을 오가는중에 고급승용차 뒤로 경비행기 비슷한 특이한걸 실고 가는걸 봤습니다.
참 부럽기도하고 신기한 모습입니다.

 

 

 ∇ 고향에 거의 도착전 무안방향 고속도로에서 본 금성산 인근 산하모습입니다.

 

 

∇ 고향에 거의 도착전 무안방향 고속도로에서 본 고향산하 모습입니다.

 

 

 ∇ 고향을 둘러보며 병풍산줄기에서 찍은 고향산천모습입니다.

 

 

 ∇ 고향산하중 친가문 성산의 모습입니다.

 

 

 

 

 ∇ 고향산하중 마을입구 모습이며, 사진뒤로 배밭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 고향에 오니 나의 반려냥이가(야옹이) 가장 신난 모양입니다.

 

 

 

 

여러 고민을 뒤로하고 올해 이른봄 일단 귀촌을 결정하고, 다마스로 그간 서울에서

못가져온 짐을 실고 내리니 아침 해가 밝아오는 모습입니다.

1인 자취인(싱글족)으로 살면서, 짐이 적었을때 다마스로 한번에 이사가 가능했듯이,

냉장고 소형과 맥가이버를 능가하는 다양한 생활품과 사무기기와 책등을 챙겨
딱 2차례로도 충분히 가능하니, 싼 경비에 참 고마운 경차입니다.

(처음 고향에 마실나가는 식으로 뒷의자를 않젖히고 캠핑나가는 식의 간단한 짐만 챙겨서 내려가다 놓고 왔으니, 귀촌을 결정한 이후 다 실고 오기는 무리여서 일부 중요치 않은 비품은 남겨두고 왔습니다. 어차피 반전세 보증금을 새세입자 계약완료 이후 받는다 했기에, 또한 서울에서만 싸게 살수 있는 각종 물품등이 있어서, 또 한차례 서울을 방문해도 경비가 결코 부담은 아닙니다.)

 

 

 

귀향을 해서 먼저, 집안정리를 하면서 도로보수 공사를 하였습니다.

귀농을 할때 현지인에게 친해지는 방법중에 하나이기도 합니다.

시골의 특성상 동네 이장도 바뻐서 바로 행정기관에 요청이 불가한 경우가 많고,

설령 요청을 했다해도 바로 해주는게 아니라 시일이 좀 걸립니다.

 



∇ 바로바로아스콘 4포정도이면(6만원) 약2~3미터정도로 도로보수가 가능했습니다.

 

 

 



 ∇ 집안 모두 도외로 나가 집관리가 않되어,

일단 귀향 전후 가장 먼저한것이 울타리 망입니다.

제목에 "귀향해서 바로 망했습니다." 할수있지만, 놀랄까봐서 뺐습니다.

 

 

 

 

∇ 아래와 같이 집앞에 넓은 공터가 있어 텃밭을 만들어 보았습니다.

농사법을 잘모르데, 집안에 모친이 살아계시나 요양병원에 계십니다.
그래도 여러 귀농사이트가 있어, 정보를 얻을수 있으니 크게 문제는 않되며,
아래는 가장 심플히
텃밭 가꾸기한 모습입니다.

 

 

 

∇ 텃밭을 시멘트바닥위에 페포대와 검은 깔망을 곂으로 깔아서,
다마스로 문중성산에서 흙을 공수하여 덮었습니다.

 

 

 

 



 

∇ 이어서 울타리망 상태로도 좀 보기 흉하기에, 갈대발로 울타리를 좀 마무리 했습니다.

검은 망으로 할때는 농가에 활용치 않는 망으로 했기에 비용이 않들었으며,

 갈대발도 (150cm x 180cm) 6묶음하여 총3만원으로 싸게 마무리했습니다.

 

 

 

 

 

 

 

우천시 토사 유실을 방지하기위하여 텃밭 모서리에
잔디와 고랑풀등으로 완충부분을 만들어놓고,
추가로 물흐름 방향인 우측 남쪽주변 잔디모서리에 돌을 좀 깔았습니다.

 

 


∇ 마지막으로 (몇년후:2019) 텃밭가꾸기를 업그레이드한 모습입니다.

송정시장에서 몇차레에 걸쳐 여러모종을 조금 사서 심어 놓았습니다.

(오이,대파,부추,참나물,상추,브르콜리,신선초,토마토,고추,가지 등; 약5만원선)

 조촐한 이야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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