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명절이 다가오면 그리운 고향을 오래간만에 가게되어 많은 분들이 설레이실것입니다.
일반에겐 설레는 명절이지만, 저에겐 늘 우울한 명절이었고 앞으로도 그럴것같습니다.
명절에 고향에 못가는 경우라면 연세드신 실향민이거나 고아인 경우일진대,
현제 고아아닌 고아가 된 기구한 제 삶 또한 그러합니다.

오래전 저의 개인삶의 글을 읽어 보신분은 사유가 어찌한지 대략 짐작이 가시리라 봅니다.
'하늘이 주신 선물- 청지기처럼 살면 득탬이 가득~..'
(
http://cafe.daum.net/kseriforum/9Q8k/28233)
좀더 구체적인 이유는 '삶의 십자가 - 내게 십자가사랑 주신 은사님을 생각하면 늘 감사할뿐입니다.'에 기록이 있습니다. http://blog.daum.net/chmanho/16883718

제 가문.집안을 대략 다시 소개하오며,
고향은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동으로 가난한 농가의 전쟁고아 집안입니다.
원래 본 고향은 한국전쟁 전후까지만해도 뒷마을 나주시 노안면 금동마을로
(임야)성산에 조상 소유의 간접적인 연관이 있는 고인돌이 있으며,
집성촌 당시때부터 동네 토우(유지.유림)에 속하는 좀 부유한가문이었다고합니다.
http://cafe.daum.net/sdsms/2R8A/12

그런데 한국전쟁때 저희 할아버지는 북한무장공비로 추정되는 괴한에 의해 납치.실종을 당하셨고,
할머니는 전쟁 후유증에 지병까지 겹쳐 끝내 일찍 운명을 달리하셨습니다.
하여 제 아버지는 어렸을때 뒷 마을(내기마을) 고씨성의 부자농가에 의해 자랐고,
후에 내기마을에서 독립은 하셨으나 가난한 농부였습니다.
가문의 재산을 본가 '금동마을'의 (큰형)큰아버지가 대부분 물려 받은터라 그런듯했습니다.
 지금은 고인이된 아버지는 어렸을적 당시 친지나 이웃에게는 좋게 다정히 대했지만,
어머니에게 자주 화풀이하고 자녀들에게도 좀 쌀쌀하게 대하고 학대를 했습니다.
이렇게 아버지로 인해 집안의 부부 싸움도 잦았는데,
어느날 (초등학교 들어가기전 유년시기에) 집안의 부부싸움 며칠후,
제가 어머니에게 무슨 투정을 한것도 아니었는데,
집에서 어머니는 갑자기 뭐라 짜증을 내며,
저에게 맞아 죽거나말거나 막무가내로 부억칼을 던지었고,
그칼이 그대로 머리에 맞아 꽂히어 피가나는 부상을 당했습니다.
하여 갑작스런 어머니의 칼던짐에 머리부상이 돼 사경을 해맸으며,
부상 휴유증과 적지않은 정신적 충격을 받았습니다.
당시 아버지는 자주 술을 마시고 주정을 하면서 자녀를 학대하며 괴롭히기 일수였고,
어머니는 그러지않으셨어야하는데 어느날 칼을 맞는 극단적인 경우를 격고나니,

정신적 충격으로 그때부턴가 어느덪 부모님 모두에게 마음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명절이 되면 직장생활에 찌든 맘을 달래주는 고향이 되야하지만,
이미 집안 또한 마음의 안식처가 아니었습니다.
전에 잘살다 전쟁으로 인해 가세가 기울어서라한다해도, 오붓한 정감이 오가야되는데,
 아버지는 별로 반기지 않으셨고, 돈이나 많히 벌어왔는지 하는 눈치였습니다.
누나도 중졸후 바로 취직했는데, 명절때 누나에게도 돈이라도 벌어왔는지 하는 눈치였고,
돈을 얼마 않가져 온것을 보시고는, 어머니마저도 등뒤에다 대고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어머니만큼은 차마 저에게 아쉬운소리를 잘 않하는편이었는데,
누나에게 대하는 태도를 보게되니 심적으로 너무 힘들었지요.
그래서 속으로 그랬습니다. "죄송해요, 아버지 어머니, 나중에 돈 많이 벌어서 올게요.
만일 돈 못벌어오면 앞으로는 오지 않을게요.."

그후 오래전(2002년) 어머니와 누나의 매형과의 전화통화후 그것이 마지막 통화로,
만나지도 못한체 어느덪 10년이 지났습니다..

저의 사연을 보고 가세가 기운것이 혹시 지난 한국전때 남침한 북괴 때문이라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지극히 편파적인 사고인바, 잘못 짚으셨습니다.
원인은 천민자본주의 때문입니다.
전쟁이야 격동기때 남북한 모두 서로 못잃으켜서 안달이였기에
먼저 일으킨 북한에 대해 한마디 할수있겠지만,
그렇다고 남한이 정치.외교에 초연하지는 않다는사실입니다.

(성경에도 마음으로 누구를 증오하면 이미 죄를 저질렀다고 말합니다.)
저의 가문이 부자였기에 평소에 불우이웃에게 배풀거나 머슴에게 잘 대해 드렸다면,
북한무장공비로 인한 고의적인 화는 않당했습니다.
한국전 이후 작고한 할머니와 큰집 어머니께서 용서와 화해등을 말씀하셨다고하는데,
마을 인근에 전파된 천주교회와 기독교회의 말씀도 있었습니다만,
직접적인것은 말로만이 아닌 살아있는 공산당에 대한 문화적 충격을 받아서입니다.
그들은 실로 대장이나 졸병이나 같은침상에 같은밥을 먹으며 잠시 내려와 머무는 동안에 민생을 살피는등,
반공쟁이가 말한 무슨 무자비함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어떤 아집이 아닌 뚜렷한 사명을 가지고 움직이는 집단이었다는것을 목도했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때 온마을이 사랑이 넘쳐났다고 했듯이, 지금의 공산당은 북한이나 중국이나 좀 초심을 잃은 모습입니다만,
당시에는 좀 무얼하려는 사명과 행동이 있었긴 있은 모양입니다.)

이러한것을 보고도 한국전이라는 패해의식에 못이겨 '북괴!"어쩌며 이만 간다면, 이또한 감정에 억매인 모난 단세포적 인간상이며,
지금의 수구보수층이 그러하며 기득권 수뇌부 또한 그러하니 참으로 딱하지 아닐할수없습니다.
진정히 복수하고 싶다면 공산당 이념을 뛰어넘는 진정한 복지사회와 이데아나라를 펼치면 되는것입니다.
그러나 복지의 초석인 '노블래스 오블리주'조차 못하는 주제인 상태에서,
그저 반공하며 복수라는 감적이입에 머뭄으로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정치가 공안이 판치고
사회양극화로 민생이 후퇴하고 있으니 한심하지 않을수없습니다.

 

 

지금만보더라도 저의 고장 광주.광산구에는 정치소신이 불분명한 김동철의원과
고향은 다르나 이와 연이 있는 손학규전의원 등 호남계라는 정치에 썩 신통치않은 인물들이 포진되어 있고
주민들 또한 천민자본주의자가 종종 있기도하니,

고향하면 그리 썩 내키지도 않을뿐더러 왠지 피곤하다는 느낌입니다.
http://cafe.daum.net/antimb/HcaD/2287
광주가 민주화의 산지라고요? 민주화에 헌신하고 민주시민이 좀 있으시니 그러하겠지요.
그러나 그저 자본을 쫒아 사는 속물들 또한 적지않은게 사실이며,
제 가문 또한 그러했으며 그런 여러마을주민들 직간접적으로 봐오기도했습니다.

단적인 예로 고려인동포가 많이 거주하는 광주 월곡동 단칸방이 월세 30만원으로
서울.수도권 못지않게 높은월세를 받아먹는 인간들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주위는 어떻습니까? 주위를 돌아보면 왜 이사회가 이지경인지 대충 가늠이 되리라봅니다.
우리사회에 있어서 지상과제가 있으니 하나는 '천민자본주의' 타파입니다.
이제 글을 줄이오며, 편안하고 초연한 명절이 되시길 빕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