羅州, 故鄕
우리의 고향 나주는 산업화 때문에 인구의 도시집중화 현상으로 지금은 많이 퇴락한 느낌이지만,
그래도 늘 마음속에는 따뜻한 어머니의 품처럼 아늑한 위안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나고 자란 고향을 추억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작년부터 고향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알면 알수록 재미있고, 지난 날 나주의 위상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긍지와 자부심
을 가져도 좋습니다. 반면 부정적인 면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후손된 우리는 선현들의 좋은 점만을
본받고 계승 발전시켜나가야 합니다. 과거의 나주인들보다 더 훌륭한 미래의 나주인을 기대해 봅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고향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씩 살펴보려고 합니다. 물론 저보다 많이 배우고 현명한
분들이 많겠지만, 함께 배우고, 오류는 지적해서 바로 아는 기회가 되기 바랍니다. 그럼 지금부터
조심스런 행보를 시작해보겠습니다.
오늘은 첫 시간으로 나주의 현황에 대해 알아봅니다.
羅州市 연혁
삼국시대 백제의 발라군(發羅郡) 반나부리현(半奈夫里縣)·미동부리현(未冬夫里縣) 등이 위치했던
곳으로,
통일신라시대
660년(무열왕7년) 당이 백제를 멸한 뒤 이 지역에 대방주를 설치.
686년(신문왕6년)에 발라군을 통의군(通義郡)으로 개칭.
757년(경덕왕16년)에는 통의군을 금산군(錦山郡)으로, 반나부리현을 반남현으로,
미동부리현을 현웅현으로 각각 개칭했다. 금산군은 금성으로도 호칭했음.
903년(효공왕7년)금산군을 나주군으로 개칭.
고려시대
983년(성종2년)나주목(羅州牧)으로 개칭.
996년(성종15년) 해양도 나주진해군절도사(羅州鎭海軍節度使)
1018년(현종9년) 나주목으로 환원.
조선시대
1645년(인조23년)금성현(錦城縣)으로 강등.
1654년(효종5년)나주목으로 복구
1728년(영조4년)나주현으로 강등
1737년(영조13년)나주목으로 복구
1895년 23관찰부의 하나인 나주관찰부.
1896년 23부제 폐지로 나주군이 됨.
일제시대
1906년 나주군 소속이던 종남·비음·원정·금마면이 영암군으로 이관.
망운·삼향면이 무안군으로 이관. 대화·장본·오산·여황·적량면이 함평군으로 이관.
1914년 남평군(南平郡)이 나주군으로 흡수통합. 남평군 소속이던 남평·산포·금천·봉황·
다도면이 나주군으로 편입. 함평군 적량·장본·여황면을 통합 후 본량면으로 개칭.
1927년 영산면이 영산포읍으로 승격.
1929년 나신면이 나주면으로 통합.
1931년 나주면이 나주읍으로 승격.
1949년 삼도·본량·평동면이 광산군으로 편입.
1981년 나주읍과 영산포읍 통합, 錦城市로 개칭. 나주군에서 분리.
1985년 금성시를 나주시로 개칭.
1995년 나주군·나주시 도농통합 나주시 탄생.
면적 603.96㎢ 행정구역: 1읍 6개동 12개면 440개리(행정) 자연마을 676
인구 40,931세대 87,927명(세대 당 평균인구 2.15명) - 읍·면별 인구는 생략함
남자 44,255명(50.33%) 여자 43,672명(49.67%)
인구가 가장 많은 지역: 성북동 9,953명 인구가 가장 적은 지역: 반남면 1,812명
이 자료는 2013년 6월30일 통계임
고려와 조선시대의 행정구역은 당시 고을에서 사건의 발생에 따라 목에서 현으로 강등되고
다시 격상하는 과정을 반복했습니다.
나주 개칭연대를 두고 많은 논란이 있습니다.
903년(효공왕 7년), 918년(태조 즉위년) 또는 940년(한국사대사전-국사편찬위원회)을 주장
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공식적으로는 삼국사절요의 903년을 인정합니다. 물론 저도 여기에
동의합니다. 그러니까 나주개칭은 약 1,100년이 된 셈이군요.
계해년(癸亥年; 903) 신라 효공왕 7년, 후백제 견훤 12년, 궁예 3년 당(唐)나라 천복 3년
(西海)에서 광주(光州) 지경(地境)에 이르러 금성(錦城) 등 10여 고을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인하여 금성을 고쳐 나주(羅州)로 삼았으며, 군사를 나누어 방수(防戍)하게 하고 돌아왔다.
- 국역 三國史節要에서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사절요 나주시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