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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소
이사 와서 처음 맞는 겨울이었다. 어느 날 칼바람에 꽁꽁 언 몸을 지글지글 방바닥을 구르며 간질간질 녹일 생각에 부풀어 보일러를 켰다. 그런데 빨간색 혹은 초록색으로 켜져야 할 곳이 계속 깜박깜박하더니 보일러가 돌아가다 뚝 멈추는 것이다. 다시 시도해보아도 그 모양. 그날 밤은 할증까지 붙은 택시비를 날려가며 친구 집에서 신세를 져야 했다.
다음날 AS센터의 점검을 받았는데 보일러가 너무 오래되어서 뭔가를 갈아야 한다는 것. 급하니까 일단 내 돈 주고 갈았다. 그리고 주인에게 전화를 하려고 보니, 아차! 얼마 전에 주인이 바뀌었다는 통보를 받았는데 연락처를 받아 놓지 않았던 것이다. 부동산으로 전화를 돌렸다. 상냥하게,
“안녕하세요. 여기 땡땡 빌라 305호인데요. 보일러가 고장 나서 그러는데 주인집 전화번호 좀 가르쳐 주세요”
“아~ 땡땡 빌라? 근데 주인 바뀐 지 얼마 안 돼서 새 주인이 고쳐주려고 하겠어? 그럴 때는 일단 전 주인에게 말하는 게 맞는데. 전 주인 전화번호는 알죠?”
“네…….”
전화를 끊고,
어찌됐건 새 주인 전화번호를 알려달라고 할 걸 하는 찝찝함이 밀려왔지만 다음에 다시 물어보리라 다짐을 하며 전 주인 전화번호를 찾아 책상서랍을 뒤졌다. 다음 날, 나는 전 주인에게 줄 밀린 관리비 중에서 보일러 수리비를 뺀 나머지를 계좌 이체했다.

그리고 겨울 끝자락의 어느 날, 나의 집 바로 위에 비어 있던 옥탑 방에서 뚝딱뚝딱 공사가 시작되었다. 그 공사소리는 밤낮으로 한 달을 넘게 갔다. 옥상에 집을 한 채 더 얹질 모양인가? 으~~~시끄러!!! 그리고 공사가 시작된 지 한 달이 지났을 무렵, 난 이사 올 사람들, 내 나이 또래로 보이는 두 여성, 을 만났고, 옥상이 아이들에게 미술을 가르치는 학원으로 변신했다는 사실을 들었다. 그리고 그 두 여성 중 한 사람은 이 빌라 전체의 주인의 딸이고, 한 사람은 그녀의 오빠의 부인이라는 사실을, 그녀의 오빠가 아버지 대신 이 빌라를 관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느 새 봄. 집으로 올라가는 언덕길에 낯익은 자동차가 좁은 길을 다 먹고 떡하니 주차된 것이 눈에 들어왔다. 부동산 아저씨의 번쩍번쩍 하얀색 에쿠스. 그때, 에쿠스 뒤 쪽에서 허리를 숙이고 있던 아저씨가 모습을 드러낸 그 순간, 내가 인사를 할까 말까 망설이던 그 순간, 우리 집 위 미술학원 원장의 아들래미, 즉 빌라 주인의 아들의 아들래미가 빌라 현관에서 쪼르륵 달려 나와 “할아버지! ~~~”라고 하는 것이었다!
뭐야, 이건! 그럼 바뀐 새 주인이 부동산 집이었던 거야? 그럼, 보일러 수리비 안 주려고 자기가 새 주인인걸 숨겼던 거야? 이런 �장! 약이 올랐다. 그리고 왠지 불길한 예감이 몰려왔다. 1년 전 내가 이 집을 계약할 때, 전 세입자에게 법정금액이 훨씬 넘는 복비를 불렀다가, 그 전날 네이버에서 복비공부를 좀 하고 온 내 귀에 딱 걸려 얼굴 붉히며 법정 복비만 챙겨야 했던 그 돈에 찌든 아저씨가 집주인이 되다니. 이런, 옳지 않아~~~

시간은 흘러 흘러, 4만원 하던 관리비가 4만5천원으로 올랐지만 전 주인이 있을 땐 가끔씩 물청소의 호강을 누렸던 계단은 물방울 하나 맞아보지 못한지 이미 오래. 옥상 미술학원에서 발생하는 소음과 진동은 익숙해지지가 않건만 말 한마디 않고 참아주는데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참내. 베란다 천장에서 물이 샌다고, 고쳐달라고 말한 지가 열 달이 넘게 흘렀건만 아직도 비만 오면 뚝뚝 물방울이 빨래를 시커멓게 다 적셔놓고 있다.

다시 겨울이다. 4월말이면 계약기간이 끝난다. 올려달라고 하면 어쩌지? 대책 없는 걱정이 스물 스물 올라올 무렵 전화벨이 울린다. 모르는 번호. 왠지 불길해 했는데 주인 아들이다.
요지는 지금 전세보증금을 그대로 두고, 월세로 40만원을 더 내라는 것이었다. 쿵!
요즘 시세가 어쩌고저쩌고…….자기 아버지가 그렇게 원하시고 어쩌고저쩌고…….한참을 듣다가 말했다. 임대차보호법에 따르면 주인이 올릴 수 있는 금액이 5% 이하로 제한되어 있잖아요! 내 목소리는 좀 떨렸지만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 하지만 뻔뻔함으로 치자면 그는 챔피언이었다. 그렇게 못 맞춰주시면 다른 곳을 알아보시지요. 당신 지금 나한테 올려주든지 아니면 나가라고 협박하는 거야? 를 마음속으로 백 번 외치면서 인터넷 검색을 시작했다.
임대차보호법, 전세 월세 전환, 주인이 임대료를 엄청 올려달라고 해요, 등등의 검색어들을 쳐 넣고 정보를 하나하나 주워가는데, 갈수록 힘이 쭉쭉 빠졌다. 재계약 시 주인은 세입자에게 현 임대료의 5% 이상을 올려 받을 수 없지만, 세입자가 5% 이상 못 올려준다고 버티면 주인은 “그럼 나가!”하고 지르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새로운 세입자와 올려 받고 싶은 임대료로 계약을 하면 그만이었다. 주인이 계약 갱신 안 하겠다고 계약기간 한 달 전에만 통보하면 세입자는 무조건 방 빼야 한다. 불행히도 나의 집의 주인은 이런 사정에 빼꼼한 부동산 사장님이시다. 지지리 복도 없지…….
꼴값 이름값도 못하는 임대차보호법이여! 말이 나온 김에 말이지, 주인들의 임대료 인상 횡포를 제대로 제압하려면 ‘기존 임대료의 5% 이상 올릴 수 없다’는 규정을 살고 있는 세입자뿐만 아니라 새로 살게 될 세입자에게도 적용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그러면 적어도 임대료 안 올려준다고 쫓아내지는 않을 것이 아닌가. 아님 법정금액 이상 임대료 인상을 요구하는 주인을 고발하고 처벌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던지. 속 터져!!!

괘씸한 주인 부자 면상 보기 싫어서라도 내가 나간다. �! 집을 보러 다니기 전까지 내 마음이 딱 이랬다. 그. 런. 데. 집을 보러 다닌 날, 난 2년 전과 사뭇 다른 시세에 놀라자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부동산에 들어갔다 나올 때마다 어깨가 축축 쳐지고, 등은 더 굽어지고, 하이힐 속에서 내 발은 퉁퉁 부어 난리가 나고, 목구멍에서는 한숨이 계속 새어나와서 나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래, 더러워도 일단은 숙이고 협상하자.
주인과 나는 이제 막바지 협상을 진행 중이다. 좀 깎기는 깎았다. 주인이 요구한 인상액도 깎았고 내 자존심도 깎았다. 주인 아들과 최종 금액을 서로 합의했는데 얼마 전 통화에서는 말을 바꿔 자기 아버지한테 말하고 나한테 다시 전화하겠단다. 지랄도 가지가지다! 난 또 그 전화를 기다리며 한 며칠 마음을 태우고 있어야 한다. 쳇, 재계약되기만 돼봐라. 난 벼르고 있다. 일단 관리비 받아 어디에 쓰는 지 명세서부터 매달 달라고 할 것이다. 베란다 물새는 것도 당장 고쳐 달라고 하고, 보일러도! 또……. 생각해봐야지! 오늘 밤도 말똥말똥하겠네.
시소 님은 인권운동사랑방 돋움활동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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