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는 대통령 얼굴 보고 투자했나
[경제뉴스 톺아읽기] "투자 늘리겠다"는 짜고 치는 고스톱… 왜 노조에만 법과 원칙 요구하나
2007년 12월 31일 (월) 08:36:29 이정환 기자 ( black@mediatoday.co.kr)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가 지난 28일 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을 만났다.  이 당선자 역시 현대건설 등 CEO 출신이다. 이 당선자는 "'비즈니스 프렌들리(business-friendly, 기업친화적인)' 정부를 만들도록 할 것"이라며 "(어려운 일 있으면)직접 전화로 연락해도 좋다"며 우호적인 입장을 거듭 밝혔고 CEO들은 "투자를 적극 늘리겠다"고 화답했다.

29일과 31일자 주요 언론은 이 소식을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서울경제는 29일 <"올해 보다 3조 더" "2배로…"/재계, 투자 확대 일제 화답>에서 "기업들이 유보금으로 쌓아둔 자금이 많기 때문에 새 정부가 규제를 대폭 풀게 되면 투자는 더 늘어날 것"이라는 전경련 관계자의 말을 전했다. 서울신문도 <5년 전과 뭐가 달라졌나>에서 "2002년 노 당선자를 마주한 경제 5단체장들의 불안한 눈빛을 찾을 수 없었다"고 전했다. 중앙일보는 <총수들 줄이어 "조 단위 투자" 화답>이라는 기사를 내보냈고 매일경제는 <삼성, 내년 투자 증액으로 화답>이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매일경제는 31일 <바빠진 재계>에서 "간담회 이후 투자 확대와 일자리 창출 노력을 가시화하고 있다"고 전하기도 했다.

   
  ▲ 매일경제신문 12월31일 18면.  
 
주목할 부분은 언론이 강조하고 있는 것과 달리 실제로 이날 간담회에서 투자를 늘리겠다는 CEO들의 발언이 많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먼저 "삼성이 투자 증액을 화답했다"는 내용은 사실과 다르다. 이건희 회장은 이날 투자와 관련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일부 언론은 "삼성이 내년에 25조 원을 투자할 계획"이라고 밝혔지만 삼성의 공식 입장은 아니다. 투자를 늘리겠다고 밝힌 CEO는 31명 가운데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과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정도다. 그러나 현대차 투자 계획은 대부분 이미 진행되고 있는 사안이고 일부는 2011년까지 투자 계획이 내년 투자 계획인 것처럼 와전되기도 했다.

   
  ▲ 한겨레 12월29일 4면.  
 
이와 관련 한겨레가 <대기업 회장들 '투자 선물' 되풀이>에서 "'눈도장'을 받기 위한 일종의 '립 서비스'가 아니냐"고 지적한 것도 주목된다. 동아일보도 31일 <"공수표 날릴 수 없어서… 투자발언 신중">에서 "과거와 달리 투자 확대 계획이 쏟아져 나오지는 않았다"고 전했다.

노 대통령 때도 투자 확대 발언은 남발

실제로 이날 간담회에서는 이 당선자가 투자 확대를 줄기차게 당부한 가운데 CEO들은 규제 완화를 주문했다. 간담회 분위기는 좋았지만 서로 엇박자를 낸 셈인데 이를 정확히 지적한 언론은 많지 않았다. "기업 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겠다는 대통령이 들어섰으니 투자를 늘리겠다"는 공연한 구호만 늘어놓고 있을 뿐이다. 동아일보가 "노무현 대통령과 만날 때는 총수들이 앞다퉈 투자 확대 계획을 쏟아냈지만 나중에 거의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고 지적한 부분도 주목된다. 이 당선자가 기업 환경을 잘 알고 있어 함부로 이야기하기 어려웠다는 맥락의 발언이지만 투자 확대가 단순히 립 서비스만으로는 이뤄질 수 없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오히려 관심을 가질 부분은 CEO들이 이 당선자에게 요구한 규제 완화의 내용이다.

   
  ▲ 조선일보 12월29일 3면.  
 
조선일보는 "글로벌 시장에서 치열한 판매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데 노사문제가 우리 기업의 경쟁력을 갉아먹고 있다"며 "기업과 마찬가지로 노조도 법과 원칙을 지키는 사회 분위기가 돼야 한다"는 정몽구 현대차 회장의 말을 전했다.

이 당선자는 이날 간담회에서 "정경유착의 시대는 끝났다"고 선언했지만 노사문제에 정부 개입을 요구하는 정 회장의 발언은 다분히 신 정경유착의 우려를 낳는다. 특히 1천억 원대에 달하는 비자금을 조성, 횡령한 혐의로 구속 기소 됐다가 집행유예로 풀려난 정 회장이 노조에 법과 원칙을 지킬 것을 요구하는 대목은 다분히 아이러니하다.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높이고 노사 모두가 반대하는 비정규직법은 이른 시일 내에 개정돼야 한다"고 요구한 대목도 주목된다. 이 당선자는 "새로운 노사문화를 만들기 위한 근거는 '준법'"이라며 "사용자든 노조든 법과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화답했다. 이명박 정부의 험난한 노사관계가 예고되는 대목이다.

합법적인 파업 불가능한 현실 외면

기업 CEO들과 보수·경제지들이 요구하는 엄격한 법 집행은 불법 파업에 대한 단호한 대처를 의미한다. 불법 파업이 되는 경우는 간접 고용 노동자들이 원청 사업자에 대해 노동법상 권리를 요구하는 경우, 개정된 비정규직법에 의거 2년 이내에 해고된 노동자들이 복직을 요구하는 경우, 공익 사업장으로 분류돼 직권중재가 시작됐는데 파업에 돌입하는 경우 등이다. 또한 교통 혼잡 등을 이유로 집회가 원천 불허되는 경우도 있다. 애초에 불법이 될 수밖에 없는 현실, 합법적인 파업이 불가능한 현실을 보수·경제지들은 제대로 돌아보지 않는다.

기업 CEO들은 어려울 때 전화할 수 있는 친구가 생겼지만 노동자들의 암울한 현실은 오히려 더욱 악화될 것으로 우려된다. 기업이 잘 돼서 일자리가 늘어나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 당선자는 이미 출자총액제한제도 폐지와 금산 분리 완화 등의 파격적인 규제 완화를 공약으로 내건 바 있다. 투자 확대나 경제 활성화와는 무관한 다분히 재벌 총수 일가의 경영권 편법 승계를 공식 허용하는 제도들이다. 이 당선자는 "일자리는 기업이 투자를 많이 함으로써 생기는 것이기 때문에 정부는 기업투자를 활성화하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 외에 할 일이 없다"고 밝히기도 했다. 사실상 재벌 정책을 포기했다는 의미의 발언인 셈이다.

한편, 기업 CEO들은 이날 간담회에서 수도권 규제 완화를 핵심 현안으로 거듭 강조했다. 파이낸셜뉴스는 "일본이나, 영국, 프랑스 등 선진국들은 수도권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수도권 규제를 없애는 추세"라고 전했다. 일방적인 규제 완화 요구 가운데 수도권 과밀화나 환경 오염에 대한 우려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머니투데이는 31일 <'굴뚝 같은' 수도권 공장>에서 "외국인 상수원 보호구역 내에서 배출기준으로 구리 사용에 대한 제한을 두고 있으나 국내의 경우 사용 자체 만으로 제한을 해 왔다"며 "하이닉스반도체 등이 공장 증설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전했다.
최초입력 : 2007-12-31 08:36:29   최종수정 : 0000-00-00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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