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민주화 운동이 벌써 29주년을 맞이 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재 도청 이전문제로 시끄럽다.
시중에 떠도는 ' 5.18은 폭도다.' '5.18은 북한 특수부대에서 조종한 폭동이다.' 라고 서슴없이 말하는 '전사모' 이하 5공 살인마 정권을 추앙하는 못된 者들, 심지어는 현정권이 '구국의 영웅 전두환'이라고 미화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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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도록이면 5.18의 시간적인 접근을 위해서 발체한 상황일지의 내용도 첨부했습니다. 사진에 잔인한 장면도 있지만 5.18의 진실에 근접하려면 이런 아픔은 감내해야 한다고 봅니다.
어쩌면 이런 사진도 턱없이 모자르다고 봅니다.
잔인하다 하여, 참혹하다 하여 스스로 감추고 드러내지 않으면 또다시 당하지 말라는 법도 없습니다. 역사는 반복됩니다. 방심하면...
아~ 광주여!
그러나, 역사를 기억하지 못하면 살인마는 부활한다.
1. 계엄 확대조치와 산발적 학생시위...
계엄포고문
2, 1980년 공수부대의 무차별 진압작전... 일명 ' 화려한휴가'라는 작전명령
수창초등학교에 집결한 공수부대가 조를 재편성해 시내 각 곳으로 배치된다. 이들은 모두 철망이 부착된 철모를 쓰고 등에는 총을 메었으며 대검과 곤봉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한편 오전의 수동적이고 산발적인 시위와 달리 학생들은 적극적인 공격의 형태로 이들과 맞서게 된다.
광주공원 부근에 모인 시위대는 도청 쪽으로 진출해 학생회관 앞에서 경찰과 충돌, 페퍼포그차 한 대를 불질렀으며 파출소를 파괴하였고 농장다리 부근에서는 버스에 탑승해 있는 경찰들을 무장해제시켜 인질로 잡기도 했다. 시위대의 가두투쟁이 적극적으로 변화함에 따라 7공수에 이어 11공수가 광주로 투입되었고, 여단병력으로 증강된 공수부대와의 충돌 또한 더욱 치열해진다. 공수부대는 집안까지 쫓아 들어가 학생으로 보이는 젊은이들을 끌고 갔으며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달려들어 곤봉과 대검을 닥치는 대로 휘둘러댔다. 작전명령 '화려한 휴가'가 시작된 것이다. 피로 얼룩진 시위는 밤까지 계속되었으며 시민들은 분노와 공포의 밤을 보냈다. 이날부터 '광대' '대학의 소리' 팀 외에도 개인별, 단체별로 시위 상황을 적은 유인물이 제작, 배포되었다. 이러한 분산적인 선전작업은 21일부터는 '투사회보'로 결집되어 언론이 통제된 항쟁기간동안 시민의 눈과 귀가 된다. 계엄사령부는 통금을 1시간 앞당겨 21:00 ∼ 04:00로 발표했으며 시내전역과 직장예비군의 무기 및 탄약을 회수하였다. 5월 18일 13:10
- 7공수 35대대, 31사 96연대로부터 도청 앞 데모대 진압 명령 수행. (특전사 전투상보)
- 유동 삼거리, 수창국교 근처 등에 M16소총을 비껴맨 일군의 공수부대 출현.
시외버스공용터미널을 중심으로 시내 곳곳의 시위진압.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시간미상<정호용, 전두환 등 군 수뇌에게 광주사태 보고하고 3공수 7공수 20사단 증파 결의>
- 서울 : 이때 주영복 국방장관, 이희성 계엄사령관, 전두환 보안사령관 겸 중정부장 서리 등 군수뇌부가 모여 광주사태에 관한 대책회의를 열었다. 여기에서 정호용 사령관이 광주상황에 대한 자세한 브리핑을 하면서 제3공수여단과 제7공수여단을 동시에 증파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전두환 장군은, "20사단도 함께 진입시키는게 좋겠어. 계엄군이 집중적으로 나서면 그만큼 이쪽의 시위가 위력적일 테니까." (말, 1988.5)
시민동향
- 5.17 이전의 학생 가두시위에는 시민들이 냉담한 반응을 나타냈으나 - 5.18에는 군인들이 금남로 등 시내 중심가에서 학생으로 보이는 청년이나 여자를 마구 때리고 짓밟고 찌르는 등의 잔인한 행동을 시민들이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으며
- 일부 시민들은 군인들이 경상도 사투리를 쓰기 때문에 경상도 사람들이 난동을 부린다고 격분하였고, 일부 부녀자는 '내 자식도 어디 가서 저렇게 맞고 다닐 것이다'하고 울면서 칼에 찔린 청년들을 노상에서 치료해 주려고 하였음(군인들이 방해).
- 특전대원들이 '전라도 새끼들 씨를 말려버려야한다''면서 청년들을 폭행한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음.
- 거부장 옥상에서 구경하고 있던 시민들이 군인들에게 투석하자 군인들이 거부장으로 들어와 3명을 연행한 사례로 보아 일부 시민들이 학생 편에 가담할 우려가 있음. (시청 상황일지)
3,일시적 소강상태(1980,5,19)
19일 0:05
- 제11공수여단(여단장 최웅 준장, 병력규모 102/696) 제31사단에 도착.
- 태평양지역 미공군사령관, 전술공군기 출동 대기중이라고 발표.
09:00 금남로에 군중들 모여들기 시작
10:00 대동고생 교내시위
* "1교시 수업을 위해 교실에 들어갔더니 한 학생이 벌떡 일어나 '선생님, 공수들에게 맞아죽은 형님, 누나들의 원수를 우리가 갚아야 합니다' 하고 울부짖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맞습니다, 우리는 왜 이렇게 비극의 역사 속에서 살아야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고 말하고 울었다. 순식간에 교실은 울음바다가 되었고, 격분한 학생들이 의자를 부숴들고 교실을 뛰쳐나갔다. 학생들은 그때부터 운동장을 돌며 '민주교사 합세하라, 민주학생 동참하라, 광주시민 학살한 공수들을 때려죽이자'고 외치며 교내시위를 벌였다. 그러자 공수들이 학교 앞에 몰려와 진을 쳤고 헬기가 계속 학교 상공을 돌며 학생들의 동태를 살폈다." (구술 : 박행삼, 현사연 조사)
* "우리들은 등교하자 전날 시내에서 행해졌던 공수들의 만행에 대한 목격담을 주고받으며 웅성거렸다. 1교시 수업을 전후로 3학년 학생들이 일제히 운동장으로 뛰쳐나갔다. 일부 학생은 저지하는 선생님을 밀치고 1,2학년 교실을 돌아다니며 '우리의 형님, 누나들이 공수들의 총칼에 맞아 죽어가고 있습니다. 우리 고등학생들이 총궐기하여 공수들을 물리칩시다'하고 호소했다. 그러자 학생들이 운동장으로 몰려나갔다. 우리는 스크럼을 짜고 운동장을 돌면서 '전두환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목청껏 외쳤다. 11시경 교문 진출을 시도하는데 공수들이 몰려와서 학교 주변을 포위하고 정문을 완전히 차단하고 있었다. 단체로는 학교를 빠져나갈 수 없다고 판단한 우리는 삼삼오오 짝을 지어서 시내로 나가 시위대열에 합류하게 되었다." (구술 : 이덕준, 현사연 조사)
* "학도호국단 연대장이 교실을 돌아다니며 '대학생 언니, 오빠들이 데모를 하다 다치고 죽었다. 조의를 표하기 위해 교복의 칼라를 떼자'고 말했다. 우리들은 연대장의 말대로 교복의 흰 칼라를 떼어냈다. 한두 시간 수업을 받은 후 다시 연대장이 우리들을 운동장에 모이게 한 후 30여 분 동안 시위를 주도했다. 의식있는 몇 분 선생님이 동참하셨지만 대부분의 선생님들은 '학생들이 시위를 하는 것은 이롭지 못하다'며 만류했다. 결국 시위를 중단하고 오후 2시쯤 하교했다." (구술 : 박안숙, 현사연 조사)
11:00 시위진압에 탱크까지 동원
- 광주공원 앞에서 여학생 발가벗기고 진압봉으로 구타.(이세영 증언, 전남일보, 1989. 1. 24)
* "도청 앞 상무관 골목에서 공수들이 아가씨를 붙잡아놓고 팬티와 브래지어만 입힌 채 손으로 당겨보는 등 온갖 희롱을 하고 있었다. 그 광경을 목격한 나는 온몸의 피가 정지되는 것 같았다. 저런 금수만도 못한 놈들을 보고도 항의할 수 없는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기만 했다." (구술 : 천순남, 현사연 조사)
- 수창국민학교 정문 부근에서는 공수부대가 젊은이를 전봇대에 거꾸로 매달았음.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 "금남로 양쪽 인도에 굉장히 많은 시민들이 운집해 있었고, 차도에 선 공수대가 이끄는 장갑차가 서서히 운행하고 있었다. 갑자기 '밀어버려!' 하는 지휘관의 외침이 들렸다. 순간 공수들이 인도의 시민들을 향해 우르르 몰려들었다. 거리에 서 구경하던 시민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공수들은 도망치다 넘어진 사람을 붙잡아 곤봉으로 실신할 때까지 때렸고 골목으로 도망친 시민들을 끝까지 쫓아가서 피투성이를 만들어 끌고 갔다." (구술 : 장막동, 현사연 조사)
...너무 방대하여 대략적인 것만 먼저 올림... 양해바랍니다.
두번째의 장입니다.
다소 과한 잔혹한 참상의 장면이 나오더라도 광주을 위해서 똑바로 잘 보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진실이 광주민중항쟁의 진실인 것입니다.
4,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항거.(19일 오후부터~20일오전꺼지)
공수부대의 살륙전에 치를 떨던 시민들은 이제는 공포감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적극적으로 싸움에 가담하게 된다. 시민들의 이러한 참여와 투쟁은 학생시위에서 민중항쟁으로 질적인 변화를 함과 동시에 지금까지보다 훨씬 치열하고 공세적인 국면으로 상황이 변화된다. 개머리판과 대검을 휘둘러대며 점점 더 포악해지는 공수부대에 맞서 일부 고등학생까지 합세한 시위대는 비가 오는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죽음을 각오한 싸움을 계속했으며 한걸음 더 나아가 뒤처진 공수를 공격하거나 고립된 차량을 포위하기도 했다. 가톨릭센터에서는 경계가 허술한 틈을 이용해 총과 방패를 빼앗았으며 광주고 앞에서는 시민들에게 포위당한 장갑차에서 최초의 발포가 있었다. 이날 밤 시내 중.고등학교에는 휴교령이 내려졌다. 계엄군이 3특전여단으로 교체되고 20일 오전부터는 시위진압의 양상이 달라진다.
13:00 - 15:00 가톨릭센타 앞 시위
가톨릭센터 앞에 모인 시위군중은 4, 5천 명에 달했다. 이들은 금남로를 차단하고 있는 경찰을 향해 돌과 화염병을 던지며 몰아붙였다. 청년들은 금남로 2가 제일교회 신축공사장에서 사용하는 두 개의 기름통에 불을 붙여 군경저지선에 힘껏 굴려보냈다. 군과 경찰은 갑자기 시위대로 접근, 곤봉과 총, 대검을 휘둘렀다. 흩어졌던 시위대는 다시 모여 도로변의 대형 화분과 공중전화 박스 등으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계속 돌을 던졌다. 오후 3시쯤 군경저지대는 진압화기가 바닥난 듯 방패를 앞세우고 곤봉을 손에 쥔 채 긴장된 모습으로 제자리를 고수했다.
오후 3시 20분경 점심을 끝낸 공수병력이 도청 앞과 광남로 사거리에서 점차 포위망을 좁혀왔기 때문이다. 시위대는 돌을 던지며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캐리버 60 기관총으로 무장한 장갑차가 무서운 속력으로 시위대를 향해 돌진해 왔다. 바로 이 순간 가톨릭센터 안으로 올라갔다가 빠져나오지 못하고 인질로 잡은 공수부대원을 지키고 있던 청년들은 일시에 들이닥친 공수대에 의해 최후를 맞이해야만 했다. 이곳에서 수많은 살상자가 생겼다.
- 가톨릭센터 건물 안에서 시체 6구가 발견됨.
14;35
- 시내는 거의 철시하고 있으며, 차량이 완전히 통제되고 있음. 일반건물, 독서실, 식당 등도 뒤져 젊은이는 트럭으로 실어가고 있음.
- CBS 승용차 1대, MBC 승용차 3대, 일반승용차 2대에 방화. 시민,학생 바리케이드 쌓고 MBC(시내 중심가에 위치) 앞, 금남로 지역 등 3개소에서 군인들과 대치중(오후 2시 현재)에 있음. 한 곳에 시민 학생 2천 명 정도씩.
- 대동고, 중앙여고 학생들이 수업을 거부하고 데모를 시작할 기미를 보이자 군인들이 출동하였고, 이들이 학교를 포위해 학생들은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음 .
14:50 일반시민들의 합류로 불어나는 시위대
화염방사기를 시위진압에 사용
*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앞에 운집한 시민들이 소방서 부근에 진을 치고 있던 공수들에게 돌을 던졌다. 계엄군들이 달려오면서 화염방사기를 공중을 향해 쏘아 댔다. 총구에서 불이 뿜어나오는 살상용 화염방사기를 쏘아대는 것을 보자 한편 두렵기도 했지만 공수들의 잔악함에 치가 떨렸다. 소방서 뒤쪽에는 장갑차 한 대가 세워져 있었고 주변에 공수들과 시민들이 있었다. 시민들이 욕설을 퍼붓고 야유를 보내도 처음에는 반응을 보이지 않던 놈들의 태도가 돌변했다. 갑자기 최루탄을 쏘며 시민들을 무작위로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나는 주변 민가에 몸을 숨겼다. 잠시 후 그곳으로 들이닥친 공수들에게 온몸을 구타당하고 의식을 잃었다. 깨어나보니 그들이 나를 질질 끌고 가고 있었다. 우리는 트럭에 실려 조선대학교 체육관으로 갔다. 오후 3시경이었다. 몇 시간 동안 그곳에서 살인적인 구타와 기합을 받은 후 저녁 6시경 전경버스에 실려 상무대로 갔다." (구술 : 최충용, 현사연 조사)
15:30 격렬해지는 시위대
- 광주지역 학생, 시민 합류하여 1천여 명이 투석하면서 관광호텔 방향으로 진행중에 있음. (계엄사 상황일지)
- 관광호텔 앞에서 시위군중 3천여 명 군경에 강력히 대항.(전교사 작전일지)
- MBC 방송국 앞에서 분산된 시위군중 2백여 명이 MBC 앞에 세워둔 승용차 등 8대를 방화 및 투석. (전교사 작전일지)
16:45
- 진압작전을 위한 병력배치
11특전여단 61특전대대 : 시외버스터미널
11특전여단 62특전대대 : 한일은행 앞
11특전여단 63특전대대 : 광주고교 앞
7특전여단 35특전대대 : 광주소방서 (전교사 교훈집)
18:00 시외버스 공용터미널에 시체 쌓여
- 시외버스 공용버스터미널 주차장에는 7, 8구의 시체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고, 무등경기장 스탠드 아래쪽에는 10여 구의 시체가 즐비하게 늘어져 있었다. 이날 공수대원의 대검에 찔리거나 몽둥이에 맞아죽은 사람들이었다.
특히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주차장의 시체는 시외버스 공용버스터미널 로터리 광장에서 시위하던 군중들이 차량으로 수송된 공수부대원들에 의해 희생된 사람들이었다. 이같은 시체들은 '공수부대원들이 부녀자나 노인들에게까지 무차별 난타해서 많은 사람을 죽였다', '머리통을 때려 즉사시켰다', '임신부를 죽였다'는 풍문들을 사실로 입증할 수 있는 증거물이 된 셈이다.
K씨(40)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저는 이날 낮 시골에서 올라오는 어머니를 마중하러 공용터미널에 갔었읍니다.
그러나 시외버스들이 제대로 운행되지 않아 돌아오려고 광남로 쪽으로 나 있는 문을 나와 걸어오는데 시외에서 버스가 들어오는 입구 안쪽에 시체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어요. 아마 7, 8구는 되었을 것입니다. 더욱 제가 놀란 것은 맨 위 시체가 엎어져 있었는데 등에 X표로 칼자국이 나 있더군요. 얼마나 두렵고 무서웠는지 모릅니다." (10일간의 취재수첩)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면 똑바로 윗 사진들을 쳐다보세요.
잔인하게 보이십니까? 참혹해 보이십니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러한 광주시민들은 대한민국을 지킨다는 정예의 공수부대등에게 살상 당했습니다.
23:08 3특전여단 광주에 투입
23:50
- 광주역 분수대에서 여학생을 발가벗겨 놓고 유방을 도려내 죽였다는 소문으로 시민들은 더욱 훙분했다. 나중에 계엄분소 부사령관도 이런 사건이 있었다고 시인함. (현사연 조사 종합)
아침, 신임 소준열 계엄분소장과 정호용 특전여단장
- 정호용 장군은 국군보안사령부 기획조정실장인 최애섭 준장과 함께 광주에 와서 장형태 지사와 안병학 도경국장 경무관에게, "폭도의 총에 맞아 죽더라도 자리를 지키라"
고 지시하였다(그러나 자리를 이탈하여 시외로 도피하였다). 이날 소준열 중장이 전남북지역 계엄분소장 겸 육군전투병과 교육사령관으로 부임하여 현지의 정호용 장군과 상의하였다. 소준열 장군이 정호용 장군에게, "이대로 방치하다간 큰일나겠소. 하루라도 빨리 평정을 시켜야 되겠소." 정호용 장군이 소준열 장군에게,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말, 1988.5)
지난밤의 유인물을 본 시민들 분노
<유인물 내용>
시내 죽은 인원 수십 명이다.
공산당도 이렇게 무자비하지 않았다.
계엄군이 경상도 출신이다.
특정인 물러가라. (전교사 작전일지)
10:20 팬티만 입힌 채 기합
- 금남로 3가 가톨릭센터 바로 앞이었다. 희한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30명이 넘는 젊은 남녀가 팬티와 브래지어만 걸친 알몸으로 붙잡혀 기합을 받고 있었다. 4열로 줄지어 선 젊은이들. 나중에 필자가 좀더 가까이 다가가 세어보니 어떤 줄은 7명, 어떤 줄은 6명, 어떤 줄은 8명이었다. 정확하게 세어보지 못했으나 이 가운데 여자는 10여 명쯤으로 짐작되었다.
당시의 정황에 대해 윤대주교는 이렇게 술회했다.
"내가 그 광경을 보고 난 후 옆길을 보니까 어떤 젊은이가 두 군인에게 붙들려 수없이 두들겨맞고 있었어요. 머리는 무엇으로 찍어버렸는지 모르지만 피가 낭자했어요. 내가 보기에도 그대로 놔두면 죽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나 나 자신 무서움이 들어 감히 쫓아내려가 만류하지 못했어요. 그 뒤 그 사람의 생사가 궁금했지만 왜 내가 내려가 만류하지 못했을까. 성직자로서 지금도 가슴 아프고 또 두고두고 가슴이 메이게 하는 광경이었지요. 나는 그때의 일을 두고 수없이 참회하고 하느님께 용서를 빌었습니다." (10일간의 취재수첩)
* "일반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가톨릭센터 앞에서 미치광이짓을 하고 있었다. 남녀청년 10여 명을 붙잡아놓고 남자는 팬티만 입히고 여자는 브래지어와 팬티만 입힌 채 옆으로 굴러, 뒤로 굴러 등 기상천외한 기합을 줬다. 동작이 조금만 느려도 곤봉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도시복판에서 젊은이들을 반나로 만든 채 기합을 주다니……짐승한테도 그렇게 잔인하게 대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옆에서 지켜보던 많은 시민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하던 짓을 계속했다. 한쪽에서는 7, 8명, 다른 한쪽에서는 2, 3명의 남녀가 그런 기합을 받고 있었다." (구술 : 서명원, 현사연 조사)
14:20 시위진압에 화염방사기 사용
- 서방 삼거리에서 시위대와 공수부대 충돌. 공수대 화염방사기 발사하여 까맣게 그을린 시체 및 부상자는 군용트럭에 싣고 감.
- 서방 삼거리의 시민과 공수부대 사이에 충돌. 공수부대는 화염방사기로 20개의 불길을 뿜어댔고, 시위대 선두에 섰던 사람들은 순식간에 불에 타죽음. 공수부대는 시체 및 부상자를 군용트럭에 싣고 감.
- 광주역 부근 20여 대의 택시가 모여 동료기사들의 죽음에 분노, 조직적인 대응책으로 전환시키는 논의 활발. (1980년대 민주화운동)
아~ 광주여!
사진이 너무 잔혹하다 하여 외면하지는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그 당시 오월의 진실에 조금이나마 가깝게 접근하는 하나의 선량한 매개체라 생각해 주시고 민주주의를 이룩하기 위해서 얼마나 잔인하게 신군부 쿠데타 세력들에게 학살 당했는지 정도는 정확히 알아야..., 29년이 지난 지금 시점에서 또다른 많은 분들과의 교감과 유대가 형성되리라는 생각에서입니다.
위 사진들은 아래 설명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29년전 무고한 광주시민들이 국군으로부터 무차별 학살을 당했습니다.
피로 쓴 광주 민주화 운동이 1987년 6월 항쟁으로 불타 올랐었고, 지난해 촛불문화제로 진화를 하였습니다.
지금도 사악한 독재의 후예들이 권력의 정점에서 국민을 국민으로 보지않고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민주주의가 아주 위험지경에 처해 있습니다.
국민의 기본권은 물론 헌법의 부정하고 임정을 부정하는 역사왜곡이 심화되고 있으며 민주주의 가치가 침해되고 있으며 남북대결구도가 가시화 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민주주의의 적은 국민들의 침묵과 국민들의 정치무관심, 선거권 권리불행사입니다.
국민여론이 무시되고 있으며 국민들의 표현의 자유, 언론인들의 언론의 자유가 파괴되고 있습니다. 이는 대한민국 사회를 정의롭지 못하게 하는 한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광주민주화운동 29주년에 즈음하여 스스로 헌법상 보장된 국민저항권, 국민자위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국민은 도탄에 빠지고 있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사회 전반적인 문제점은 우리들에게 민주화의 의미를 되새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말 국민이 국민으로서 살기 힘든 시대입니다.
이제, 국민은 선거로, 투표로 말하고 국민의 당연한 헌법상 권리를 되찾아야 하는 숙명적인 국민의 의무가 실감나는 대한민국입니다.
아! 민주주주의여! 광주여!
광주 5.18민주화운동
(The May 18 Democratic Uprising)
아래는 흑우님의 글과 5월 노래...[펌]
☞오월가.mp3(3.1M) |
☞5dnjfdml shfo - shckwtk.wma 노.찾.사(5월의노래)
/꽃잎처럼 금남로에 뿌려진 너의 붉은피 / 두부처럼 잘리워진 어여뿐 너의 젖가슴
오월 그날이 다시오면 우리가슴에 붉은피 솟네…. 이 노래는 <님을 위한 행진곡>과 함께
이 나라의 민주화를 위한 전선에서 빠질 수 없는 불후의 명곡이었다.
움츠린 대중의 가슴을 열어제치고 대오를 함께 하며 적들의 바리케이드를 넘어서며
목이 터져라 불렀던 노래들이다. 특히 <오월의 노래>는 80년 5월 학살의 리얼리티를
가감 없이 전달하고 있는 가사의 선명함이 너무나 '민중적'이어서 함부로(?) 따라 부르기 어려울 정도였다.
/이 노래가 80년 5월 이후 이런저런 시위 현장에서 급속히 인기를 끌게 된 것은 아마도 가사가 담고 있는 명료한 의미와 쉬운 멜로디 탓이었을 것이다.
민중가수 범능스님의 회고에 따르면, 82년 어름에 이 노래를 처음 들었고,
당시 대학가를 중심으로 급속히 대중 속으로 퍼져 나갔다고 했다.
그렇다면, 정선된 가사와 쉽고도 선동적인 멜로디는 누구에 의해서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당시에 이 노래의 출처를 두고 말들이 많았는데, 80년대 중반이었을까? 오창규 당시 광주 MBC 피디가 자신의 프로에서 5월 18일을 맞아 이 노래의 원곡을 들려주며
우회적으로 <오월의 노래>를 상기시키던 기억이 내게 남아 있다.
오월 그 날을 맞아 방송을 통해 <오월의 노래> 원곡을 들으며 떨리는 가슴을 짓누르던
기억과 함께 뛰어난 선곡 능력을 가진 음악가가 대체 누굴까 적이 궁금해 했었다.
/알려진 대로 <오월의 노래> 원곡은 'Holiday' 등으로 유명한 프랑스 샹송가수 미쉘 뽈나레프 Michel Polnareff의 'Qui A Tue Grand Maman'라는 노래였다.
제목이 <어느 할머니의 죽음>이라 번역되어 소개되던 그 노래는 샹송 특유의
뛰어난 서정성 때문에 당시 살아남은 자들의 가슴에 남아 있는 오월의 상흔을
<오월의 노래>와는 또 다른 의미로 흔들어 놓곤 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거센 행진곡풍의 <오월의 노래>와 뽈나레프의 서정성 짙은 그 노래는 분위기나 흐름으로 보아 상당히 편차가 있어 아마도 대단한 능력을 가진 이름 모를 뮤지션이
당시 우리 곁에 몰래 '암약'하고 있나 보다고 최근까지도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도 작사자는 물론 편곡자가 여전히 오리무중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갖고 있던 묵은 의문에 조그만 답을 주는 노래를 최근에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다. <목마와 숙녀>, <끝이 없는 길>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박인희가 1975년 6월에 뽈나레프의 그 노래를
<사랑의 추억>이라는 제목으로 개사 편곡해 부른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상수리나무에 등을 기대어 앉아서/그대가 불러주던 고운 노래에 귀 기울인다......
/가사며 제목도 그렇고, 곡 전체의 분위기는 뽈나레프의 그것과는 상당히 다르게 들렸다. 무엇보다도 박인희의 <사랑의 추억>은 우리가 익히 알고 목이 터져라 부르던 <오월의 노래>
바로 그것에 가까운 노래였다. 가사만 바꾼, 이름하여 '노가바'의 원조격이 바로 그 노래인 셈이다.
누군지 모르지만, 학살의 피냄새가 채 가시지 않는 금남로 거리를 고통 속에 거닐며
가사를 생각해냈고, 자신이 알고 있던 박인희의 <사랑의 추억>을 다듬어
한국(민중)음악사에 길이 남을 명곡을 탄생시켰을 것이다.
/'뽈나레프-박인희-익명의 편곡자'로 이어지는 한 노래의 변천과정은 원 가사의 내용과 작 편곡자들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서로 수미상관하면서 노래의 위대한 힘을 국경과 시간을 넘어 보여준 셈이다.
이제는 다시 그런 노래를 탄생시켜서는 안된다는 다짐과 함께 박인희 버전의 가사처럼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한 마음 한 뜻으로 위로하고 아껴주는" 따뜻한 인간들의 세상이 오기를 빌어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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