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경기지사는 지난 2016년경,  “북한 핵 포기할 수 있는 인도적인 상황 만들자.”며,
고김대중선생에 이어, 제2의 신햇볕정책을 제시했습니다.

 <한반도는 이제 묵은 냉전 이념을 벚어나, 서로 상생해 남북경협을 활성화하자.
물류교역과 에너지협력 슈퍼그리드도 활성화해 동북아경제네트워크를 이루자.> 입니다.

 

이지사는 지난 여시재포럼에서 “유럽에서 독일, 프랑스 간의 탈석탄을 두고 경쟁을 하는 것을 기초로
상생 경제공동체에서 안보 협력체도 이룬 경험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국제사회가 상생해 합리적으로 교류할때 비로소 자국의 이익에도 도움이 된다는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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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이치가 주는것이 있어야 오는것이 있듯이, 세상사가 다 이와같다 할수있습니다.
아래는 하나의 개인적인 삶의 경험을 소개하며,
모조록 이 나라에 좋은 세상이 밝히 오시길 소망합니다.

 

제 고향 인근 금동마을에 가장 인색한 나이든 여인이 있습니다.
다만 그렇다고 인성이 나쁜 악인은 아니며, 단지 구두쇠일뿐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녀를 향해 마을회관을 좀 이용하면, 먹거리를 가끔이라도 챙겨와야하는데,
거의 그런게없고 무전취식한듯하다며, 평소에 무얼 나누는게 인색하다. 불만입니다.
(그 여인은 저희 친척에 속하는 명철모친입니다.)

 

인색한것은 친척에게도 마찬가지며, 그 모친에게 제부친이 해꼬지한 과거가 있기에,
제집에 무얼 가져다준적인 없는것은 물론이었고, 귀촌초까지 그리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른사람에게는 몰라도, 이제 저희 집안에게는 그렇지않습니다.

 

그 모친은 제 큰집의 장녀(지금은 출가외인)로 출가후 일찍 남편과 생이별하듯 되어,
(남편이 객지로 돈벌러 떠난후 감감 무소식) 혼자서 시골에 남아,
가사를 책임지고 살아서인지 상남자 스타일로 부지런했습니다.

자택이 나주시내이나 간혹 시골에 들러 야산밭을 찾아 텃밭을 일구곤했습니다.

 

저희 작은집이 고인돌야산에 세운 비닐하우스를 쓰게 허락하셨는데,
사는곳이 나주라서 바쁠때는 비닐하우스에서 주무시는데, 좀 안스럽고 그랬습니다.

 

 

 

하여 녹녹치않은 큰집을 위할겸, 비닐하우스 말고 이곳에서 잠시 머물다 가시라고,
황량한 큰집터에 아래와 같이 컨테이너 쉼터를 무상으로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원래 큰집 유산이던 이고인돌 야산중 큰야산밭에 속하는 아래 사진상의 밭을,
저희 집이 무상임대해 여지껏 경작해왔지만, 이것도 이 명철모친네에게 양보했습니다.

 


저희집안에서는 밭이라면 위 야산밭이 유일하기에 그밭을 누구에게 양보하는것을 반대했으며,
저 또한 넉넉한 자산가도 아니었지만, 가족의 반대를 무마하고 전격 양보한것입니다.
사연은 작고한 큰집어르신이 약속하시길 그 고인돌산중 그 야산밭을 절반으로 나눠 그 기점에서
좌측은 신갑례장녀네에게, 우측은 제 신길웅 작은집에게 각 몇백평 이상 주겠다 구두 약속을 했습니다.
그러나 70년초 부동산특별법조치때 등기 시점에 당숙네가 끼어들어 법을 잘아는 자기가 등기해주겠다며
말 장난을 치고, 등기하기를 당숙이 들간 공동갑 3인으로 둔갑해 놨습니다.

(공동갑; 큰집 부친 신철주와 당숙2인으로, 약속된 작은 갑인 신갑례와 신길웅이 아예 배제된 상태)
하여 당숙에 대한 분노와 상대적 박탈감은 제작은집뿐아니라 큰집출가 장녀네에도 있었습니다.
그나마 제부친은 그야산밭 전체를 빌려서 쓰기라도했지만, 큰집출가 장녀네에게는 없었습니다.
하여 귀촌후 그 야산밭 사용을 중단케하고, 바로 이 명철모친네에게 전부 양보한것입니다.

 

∇ 고인돌야산 과일나무 인식표를 자세히보면, 야산 약력을 알수있습니다.

 

 

그후 저희 집안에 대한 태도가 180도 달라졌으며, 더욱 나에게는 친자식처럼 챙겨주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제는 자주는 아니지만 마을회관에 가끔 먹거리를 챙겨온다합니다.

∇ 큰집 출가외인 명철모친이 챙겨주신 농산물입니다.


∇ 심고 가꾸시는분은 그 모친이지만, 조금씩 소출을 챙겨가는걸 허락하시었습니다.

예전에는 자신 가족외엔 어느누구도 못가져가게했지만, 이제 저에게만은 예외입니다.

 

 


그리고 제 모친이 희귀질환인 파킨슨병으로 요양병원에 오랫동안 계시지만,
가족외 제 친지중 말만은 몰라도 어느누구도 요양 문안 온 집안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위 명철모친이 요양병원 문안을 말로만이 아닌,
감사하게도 처음 방문객으로 요양병원에 찾아와 문안해 주셨습니다.

 

 

∇ 제 모친이 요양병원에서 그 큰집모친도 많나시고,
이후 병세가 잠시 호전되어 하루 외출한 모습입니다.

 

 

 


한편 집안에 우환이 겹쳐 있고, 귀촌의 계기도 그리하여,

상경생활처럼 많은 기부는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정기적으로 할곳을 생각하던차 작게 후원한곳이나, 격한 감사를 표한 '꿀잠'이 떠오릅니다.
 '비정규노동자 쉼터' 꿀잠(http://cool-jam.kr)은 언론에 간혹 보도되어서,
서울지하철노조를 비롯 독지가들이 도와주어 나름 센터가 운영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리 넉넉치 않은 제정 형편이라고합니다.
은행대출를 끼고 센터용 건물을 매입한 상태이니, 아직 채무가 남은 상태입니다.
하여 작은 보탬이나마 소소한 후원금과 후원물품을 기탁하였습니다.
앞으로도 나름 후원을 이어나갈 생각입니다..

 

 

 

도대체 '꿀잠'이 뭐기에.. 무보수 막노동꾼 몰렸다.  2017.05.22  오마이뉴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_w.aspx?CNTN_CD=A0002327435&CMPT_CD=P0001

 

 

영화 'PMC : 더벙커'는 대한민국 영화 중 글로벌 군사기업인 PMC를 최초로 다룬 영화로,
단순한 리얼타임 생존극을 넘어 인류를 구하는 SF를 영상케하는 밀리터리 액션 영화입니다.

영화 줄거리는 CIA에게서 거액의 작전을 의뢰받은 PMC 민간군사기업의 개인 용병들이,
북한 킹을 사로잡으려는 순간 또 다른 음모의 함정에 빠지며, 이것을 해쳐나가는 모습입니다.
특히 이 영화에서 주목할 것은 30m 아래의 한정된 벙커 지하 공간에서
살아남기 위한 극한 혈투속을 생생히 담았는데,

지난 아프리카TV 생방송 시국현장이나 게임을 보는 듯한 화면 전개와
쉴 새 없이 긴장감을 부추기는 배경음악입니다.

하여 평점은 국내 현역 예비역 장성과 해외 영화팬들도
트랜스포머' 스핀 오프인 '범블비'와 견준다고합니다.

한국영화중 배틀그라운드(서바이벌 슈터 비디오게임)를 연상케 하는 이영화는
보기 드문 카메라 워킹이(모션캡 및 관제탑형 모니터 CCTV) 사람에 따라 신선했을수도,
어지러웠을수도 있겠습니다.

볼거리, 생각할거리 둘다 한국 액션영화 치고 보통 이상은 된다 하겠습니다.
벙커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인만큼 액션은
다소 제한적일수도 있겠다 감안하고 감상하면 괜찮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 무슨 난리를 치는듯한 장면을 원하는 관객이 있을듯해, 
그점을 약간 감안해 스토리와 액션을 디테일하고 현장감있게 선사해주는 신선한 영화입니다.
주연 하정우의 등장도 스크린에서 보듯,
불구인 백색테러 대장인만큼 본영화에서 시다바리격 맨몸액션 기대는 다소 무리라하겠습니다.

이 영화를 위해 감독과 제작진이 1년동안 40여권의 pmc 관련 책을 탐독하고, 현 영화사의 강명찬대표는
3년간 영국과 미국을 오가며 파병 경험 등 영화에 출연할만한
현역 출신 배우들을 조사해 우선 케스팅했다고 합니다.

 

PMC 뜻과 영화 PMC 더 벙커 줄거리 1 
[출처 ; kiss7.tistory.com/1104   키스세븐]


사진: CIA의 요청이 있었지만 킹 사냥은 하정우의 결정이다(CIA의 요청이 있었지만 킹 사냥은 하정우의 결정이다 [PMC 더 벙커 영화 줄거리 뜻] / ⓒ 김병우)


에이헵이 갑자기 CIA 작전 제의를 받아들인 건 자료영상에 북한 서열 1위의 "킹"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CIA가 킹을 잡겠냐는 질문을 할 정도로 하정우는 계산적으로 나섭니다.
5천만 달러 이상이 걸린 동아시아 최대의 수배자를 잡는 것이라는 계산에 의해서입니다.
PMC 더 벙커 줄거리는 하정우의 결단 때문에 킹을 잡는 것으로 목적을 변경하게 됩니다.
 


사진: 북한 킹을 잡는데 성공하는 영화 초반부의 장면(북한 킹을 잡는데 성공하는 영화 초반부의 장면 [영화 PMC 더 벙커 줄거리 뜻] / ⓒ CJ엔터테인먼트)


용병들의 반대의견도 있었지만, 비무장지대의 지하벙커로 난입한 이들은 계획대로
북한 경비원을 제압하고 북한 킹을 잡는 데에 성공합니다.
이때 깨어난 북병사의 반격으로 팀원이 한 명 사살되고, 급하게 의료진을 부르지만 CIA는 즉시 철수하라고 재촉하고...
그런데 민간 군사 기업(PMC 뜻)의 팀원들은 의외의 함정을 깨닫습니다.
북한 킹의 주치의인 윤지의(이선균)가 이미 자신들은 아침에 납치되어서 이곳에 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진: 북한 킹은 5000만 달러가 걸린 수배자이다(북한 킹은 5000만 달러가 걸린 수배자이다 [영화 PMC 뜻 더 벙커 줄거리] / ⓒ 퍼펙트스톰필름)


그런데 뉴스에서는 CIA가 고용한 용병들이 10시간 전에 킹을 납치해서 사살했으며 도주하다가
북한군에게 제압되었다는 기사가 나오고 있었습니다.
외부에는 가짜 뉴스가 퍼지고 지하 30m의 벙커에는 새로운 용병들이 이들을 죽이기 위해 투입되고 있었습니다.
PMC 더 벙커의 하정우는 급히 퇴각을 시도하지만, 같은 팀원의 배신으로 엉망진창이 됩니다. 


 


 


 

PMC 뜻과 영화 PMC 더 벙커 줄거리 2 

새로운 뉴스에서는 PMC 더 벙커의 하정우가 이미 사살되었다는 가짜 뉴스도 나옵니다.
누군가가 애초부터 이들을 죽이기 위해 이곳에 몰아넣었던 것입니다.
민간 군사 기업(PMC 뜻)은 어차피 거액의 돈과 배신과 죽음 사이에서 살아가는 용병을 가차 없이 배신했습니다.
이들은 북한 서열 1위인 킹을 살려서 데리고 있어야만 그나마 살아남을 희망이 있습니다. 


사진: 게임처럼 1인칭 시점으로 북한 주치의와 통화하는 모습(게임처럼 1인칭 시점으로 북한 주치의와 통화하는 모습 [영화 PMC 더 벙커 줄거리 뜻] / ⓒ 김병우)


그러는 도중, 북한의 이선균이 의료진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킹의 생존을 위해서 서로 협력하기로 합니다.
북한 킹이 심정지 상태에서 죽을 뻔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살려내고,
이들을 죽이려는 다른 용병들은 포위망을 좁히면서 접근 중에 있습니다.


사진: 비무장지대 지하 30미터 아래에 깔린 벙커의 구조도 장면(비무장지대 지하 30미터 아래에 깔린 벙커의 구조도 장면 [영화 PMC 더 벙커 줄거리 뜻] / ⓒ CJ엔터테인먼트)


생사를 넘나드는 탈출 작전을 벌이며 영화 PMC 더 벙커 줄거리는 막바지에 이르고,
후반 20분은 에이헵과 윤지의의 낙하산 탈출 장면으로 극적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합니다.
국가도 이념도 없는 군대와 이익만을 추구하는 자본주의가 만나면
어떤 비극이 벌어질지를 생존이라는 주제어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엔딩 부분의 액션은 누구나 인정할 만큼 박진감이 넘칩니다.


 

(엔딩장면에서 낙하산을 타고 탈출하고 있다 [영화 PMC 더 벙커 줄거리 뜻] / ⓒ 퍼펙트스톰필름)

 

영화 PMC 더 벙커 줄거리에서 마지막에 남한 사람과 북한 사람이 같이 힘을 합치는 부분은
조금 예상이 되는 부분이지만 현재의 한반도 정세의 기대를 반영한 부분 같습니다.
다만, 미국과 중국에 휘둘리는 모습은 씁쓸한 현실감을 느끼게도 합니다.
PMC 더 벙커의 하정우와 이선균의 모습은 국제 정세에서 우리가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반문이기도 합니다.


[출처 ; 키스세븐(www.kiss7.kr) ]

 

 

(아래의 이야기는 당시의 풍문과 목격담을 각색해 구상한 실화입니다.

귀촌후 틈틈히 나의 인생이야기를 기록중이며, 그중 공유의 글을 올리는바입니다.)

 

 

때는 1951년 이후 전남 무등산 일대에 활동하던 남부군 빨치산중 일부대원이 내장산,지리산 본거지로 떠나게된다.
이곳은 지리산보다 은신에 취약한지역으로, 한국전쟁 전후 남부군(빨치산) 일부가 임시 은신처로 활용했다.
또한 6.25 인민해방구 시절부터 9.28 후퇴 이후에도, 무등산은 지리산처럼 한동안 남부군의 거점지가 되었다.
광주가 수복된 직후인 1950년 10월 29일,
서석국민학교에 주둔중인 국군 제20연대가 습격을 받고, 학교 건물 일부가 불에 탔다.

하여 군경은 무등산 빨치산 토벌작전을 개시하고, 작전 수행을 위해 경찰이 주민들을 동원하여 신작로를 개설했다.
1950년 12월부터 다음해까지 계림동에서 원효 계곡에 이르는 12㎞ 구간에 도로를 개설한것이다.
그 후 이 도로를 확장하고 포장한 것이 현재의 관광도로이며,
지금의 산수동~원효사 간 구간은 6.25 전쟁이 낳은 산물이라 하겟다.

또한 국군이 1951년경 초가을때 무등산 중봉자락인 규봉암(영평리) 일대에
전투기로 화학무기를 살포하며, 포위작전을 펼쳤다.

남부군에 점점 은신에 취약해지자, 이들은 산발적으로 탈출해 화순으로 도피하거나 지리산 본거지로 향했다.
그 과정에서 군경토벌대와 맞닥뜨려 산발적 교전이 발생했고, 수적으로 열세인 이들은 대응사격을 하며 흩어졌다.
이 인민유격대는 남조선노동당 박헌영대장의 이현상 남부군 총사령관(지리산지구 제2병단) 조직부대중 하나였다.

 

 

 

한편 1951년 늦봄 이른새벽, 광주 외각에서 척호활동하던 몇명의 남부군은,
광주변두리 남서쪽방향에서 왠 폭탄소리를 듣게된다.
순간 낙오된 영산강 동지와 직결된 상황이라 판단하고, 신속히 서창동방향으로 향한다.
가다 매월동(회재로)에 다다르자 폭탄부상을 당한 동지 한명을 만나게 되고,
동지가 알려준대로 폭탄현장으로 향했다.

 

한편 남부군 인질로 있다 폭탄이 터지기 직전 몸을 피하다 부상당한 나의 할아버지는 현장에서 무조건 탈출했다.
그후 대각선에서 숨어 구경하던 지역주민중 한명이 도와주러 인질이 있는곳으로 숨어서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다가가 묶인 손을 풀어주었고, 나의 할아버지는 잠시 휴식만 취한체 이내 이곳을 떠났다.

 


남부군이 서창동 야산 언덕들판 인근에 도착하니,
멀찍이서 반공치안대들이 양민을 암매장하는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탕, 탕, 탕.."
합세해온 남부군이 현장으로 숨어와 일제히 사격하자,
치안대 인솔자는(서북청년단출신) 현장에서 즉사,
지역반공대원 한명은 총상을 맞고 쓰러진다.
그러자 나머지 반공대원들은 가져온 총만 챙긴체 뒤도 돌아보지않고 삼십육계 줄행랑을 쳤다.
폭탄현장에 도착한 남부군은 총상으로 도망치지못한 반공대원에게, 지금 무슨일을 벌이려한거냐고 추궁한다.
알고보니 이북출신 반공대원이 단독으로 치안대를 인솔하며 막무가내 작전을 펼치는 바람에, 
치안대 폭탄을 맞아 인질인 무고한 양민이 죽어있었다.

하여 무과실 전공으로 위장하고자 인질인 지역양민을 암매장하다, 결국 이렇게 발각된것이다.
합세해온 남부군은 조금전 운명한 불갑산 인민간부를 인근에 임시 매장하고 잠시 애도하였다.
그리고 다친 반공대원에게 "인민에 총부리나 겨누지 말고 농사에나 전념하시오." 충고를 하고 자리를 떴다.


 

남부군이 폭탄현장에서 짐을 챙기고 자리를 완전히 뜨자,
멀찍이 숨어 남아서 지켜보던 주민 몇이 그 현장으로 나온다.

폭탄현장에 와 아직도 아수라장 흔적이 생생함을 보고,
허탈하여 한주민이 총상당한 반공대원에게 말을 건넨다.

 

마을주민; "아이고, 꼴이 말이 아니구만이랴~..
그건그렇고, 삽가지고 뭔 난리요~ 빨갱이하면 우리도 싫어하니까, 삽달라해서 줬는데, 이건 아니지않소?"


반공대원 "죽것소. 묻지 마시요~"


마을주민 ; "애고 모르것다. 우리 주민도 오늘 못본걸로할테니, 젊은양반 어디 나서지말고 농사나 전념하게요 들~."
 
반공대원 ; "아이고, 알았당께~ 아주마이~ 나좀 부추켜주시요~"

 

그러했다. 당시 전쟁이라는 엄혹한 시기였기에 아군이든 적군이든 주민이든 서로 묻지말아야할 일이 많았다.
 "묻지를마세요." 트로트는 현대에 김성환 아티스트가 애정을 담은 가요이다.
만일 격동기때 이곡이 시판됐다면 애환곡으로 널리 불리었을지 싶다.

아무튼 졸지에 패잔병이 된 반공대원은 지역주민의 부축하에 이 현장에서 터벅터벅 빠져나왔다.
한편 해는 천연덕스럽게 슈퍼선이 되어 동쪽 무등산 위로 높게 드리우고 있었다..


 

서창동 폭탄현장을 수습하고 나온 남부군은
다시 무등산 방향으로 발길을 잡고, 광주에 당분간만 은신하게 된다.

군경토벌대의 무등산 포위작전이 개시된 상태여서, 이들은 이후 화순방향으로 선회하였다.
화순 야산에 은신하여, 한동안 화순 토벌대의 후방을 교란하다, 이후 또다시 방랑자가 된다.



사람들은 호남권에 빨치산 잔당이 전시 이후로도
인근에 흩어져 은거하는수가 많았다고하는데, 맞는듯하나 틀린면도 있다.

전쟁 당시 전남권만 가담자까지 포함해 남부군(빨치산)이 약6만여명으로 가장 많은 규모인듯보인다.
태백산맥을 끼고 오대산, 태백산, 소백산(강원도, 경상북도)  속리산을 끼고 덕유산, 가야산(충청도, 경상도권)
지리산을 끼고 내장산 및 서,남해 내륙일대(전라도, 경상도) 도합해 남한내에 수십만 이상의 인민유격대가 존재하였다.
이중 전사하거나 생포 및 자수된 인민유격대 수를 아무리 많이 추산하여도 10만여명 안팎이다.
당시 군경의 대대적인 토벌작전 이후, 좌익분자 색출작업도 횡횡하였다.
하여 대부분의 빨치산과 인민 부역자들도 처벌을 피하고자 근거지나 터전을 버리고 멀리 떠나야만 했다.
군경의 대대적인 토벌작전으로 전사하거나 붙잡히거나
혹은 타지역으로 도피를 하다 사살되지만 이들이 다가 아닌것이다.

일부의 빨치산은 인민군이 퇴각할 때 혹은 그후 기회를 엿보아 월북했다.
또 상당수의 일부는 도중에 빨치산 활동을 포기하고 근거지를 떠나 피난민과 석여서 도처에 은거하게 된다.
즉 호남권에서는 호남권밖으로, 영남권도 이지역 밖으로 등등 대규모 엑소더스가 이어진것이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체결 이후 도처에 남아있는 빨치산은 이렇게 각 도처로 흩어져 은거하며 살게 된다.

당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강동정치학원을 통해 양성한 유격대원을 포함해 약 2500여명의 남부군(빨치산)을,
 1948년부터 몇년을 거쳐 남파했다.  그후 9.28 후퇴이후 일부 잔존한 인민군을 합쳐 수십만명 이상인것은,

시사하는바가 크다. 이들에 가담한 민초중 일부는 생존형이었지만 의기투합 의지 또한 많았다.

 

 

한편 인민치하에서 생존을 위해 부역한 대부분의 생존형 소극 부역자들은 차마 자신의 터전을 떠나지 못하였다.
하여 격전지 인근 마을을 비롯 재수없는자는 군경의 토벌작전에 휩쓸려 학살을 당하였고,
운좋은자는 자수해 약간의 처벌만 받고 풀려나기도 했다.
즉 부역자중 운좋은자는 경찰서나 지서에 연행되 조사를 받은 뒤 훈방되었고,
혹은 죄질이 나쁜자는 서울 등지로 이송해 징역 형을 얻도받았고(일부는 사형), 대부분 수감하다 석방됐다.

 

한국전때 인민군과 남부군(빨치산)에 의해 영광을 비롯 남도의 교회와 기득권 세력에 대한 숙청과 탄압이 이어졌다.
탄압이 다소 일방적이었는데, 그렇다면 현제 교회와 기득권이 부의 분배를 하며 먼가 달라야 하는데 그렇지는 않다.
그러면서 당시 빨갱이에게 당했다며 이를 가는데, 과연 억울하다고만 할수있는지 의문이 드는 대목이다..
필자도 당한 집안의 입장에서 양심 고백하자면 그런자는 딱하고 가련할 뿐이다.
그저 역지사지해야만 할말이 있을뿐이다..


생각해보면 당시 호남권에 빨치산이 많이 존재했던 이유는 지리적으로 은거 가능지역이 많다는 지정학적 이유가 크다.
민중의 자각이나 만인 평등사상 분포지는 오히려 구한말 동학사상이 활발했던 중부권으로 충청도와 전북이었다.
구한말 당시 전라도 나주만해도 동학 항쟁시 관군들이 동학도들을 아작냈다고한다.
한편 나주 지역 인사들중 이것이 나주의 자랑인양 공중파 지역민방에서 버젖이 떠벌리고 있다.
이렇듯 전남권에 아직도 은연중에 구태와 천민자본주의가 만연해 있는 실정이다.
현제 호남권의 정치인만봐도 적패스런 바른미래당 인사가 대부분이거나
두각이 잘 안나타난 더민당, 민평당 인사가 주를 이룬다.

일출한 사회 인사는 대부분 중부권에 분포되어 있으며, 그다음에 호남, 경남등에 조금씩 있는편이다.

 

좀 과한 상상이지만, 만일 80년대에 신군부가 광주사태를 벌이는 만행이 자행되지 않았다면,
전남 또한 좀 적패스럽고 모호한 강원권처럼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이 된다.
신군부의 광주 학살 만행으로 인해, 잠들고 있던 남도의 의식을 깨워
독재와 저항해 어느덪 민주화성지로 우뚝서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호남은 무슨 저력에 있어 어떠한가?에 대한 답은 한반도 어느지역 못지않게 잠재력, 저력이 풍부하다.
한반도 호남은 아시아 물류교역의 허브였거나, 외세나 적패와의 끈임없는 투쟁의 역사를 이어온 고장이라 할수있다.
통일신라 이후로 남도에 해상교역이 활발했으며(청해진 장보고대사), 고려시대때 남도에서 삼별초와 함께 항몽하였다.
조선시대 임진왜란때 왜구를 물리쳤으며(남해 충무공 이순신 활약), 격동기때 신군부의 광주만행에 맞서 투쟁하였다.
이렇게 무슨 저력이나, 성장 잠재력은 월등히 풍부하다.
그러나 민주화도 아이러니하게 부의 분배력까지는 이어지지 않거나 미진한 실정이다.
이곳이 정말 좋은곳이라면, 잘사고 못사고를 떠나 도시나 시골이나 인심이 좋아야할것이다.
그러나 남도의 인심도 이반되어, 현실은 타지역처럼 호불호만 있을뿐 마찬가지라는것에서 문제점을 직면하고 있다.
아무튼 오블리스 노블리제, 이것은 일부 유럽 선진국을 제외하고 모든 나라와 인류가 실현해야할 과제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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