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수리나 무슨 공사를할때 전동공구를 자주사용하는데요, 이것을 잘사서 사용해야겠네요.

큰구멍을 뚤을때 집에 아래사진처럼 대형함마드릴이 있는데도 무거워서 잘사용않고,

빨간색의 작은 전기드릴로 뚤다 결국은 모터가 터지고.. 이런식으로 몇개나 말아먹었네요.

아쉬운데로 쓴셈치고 대형함마드릴로 큰드릴작업을하니, 왜 진직 이걸을 사용않했을까 깨닳음이.. 

아쉬운게아니라 원래 큰철판이나 큰타공 및 콘크리트드릴작업도 이 대형함마드릴이 재격이네요.

핸드형전기드릴과 비교가않되게 마치 도루방을 사용하듯 대형드릴작업이 쉽게됐습니다.

앞으로 핸드형전기드릴은 얇은강판 작은구멍을낼때나 나사작업 등에만 사용하고,
무리하게는 사용말아야겠네요.

 

 

 

 

 

아래는 귀촌후 집수리 모습입니다.

지붕위에서 본 고향집 모습으로, 오른쪽 슬라브창고 지붕개량하기전에 우선

왼쪽본가의 기와밑의 대형빗물받이강판이 조금씩녹슬어 이것부터 교체작업하였습니다.

파란색표시부분은 빗물받이강판 주문시 참고 셈플용으로 그라인더로 단락한 모습입니다.

 

 

신가의 부국판넬에 들러 일부 잘라낸 낡은 빗물받이강판 조각을 보여주며,
과거의 빗물받이는 이렇고, 새로할것은 아래 도면처럼 해달라 부탁하였습니다.

 

 

대형빗물받이강판이 마치 대형처마강판을 방불케할정도로 사이즈가 어마합니다.

세로사이즈가 50CM이상나오고 장당 3M(짧은건 1.5M)정도입니다.

(0.6T 3M 2장, 0.6T 1.5M 1장,  0.4T 3M 4장하여 ; 총16만원)

 

빗물받이를 따로 주문시 항상 챙겨놔야할것이 기존 빗물받이걸쇠(받침쇠)입니다.

저희집처럼 기존에 대형으로 주문제작했을경우 새로할때도 단한개라도 버리지않고,

걸쇠를 챙겨놔서 아래처럼 녹빼고 광내고 하시면 되겠습니다.

 


 

∇ 아래는 귀촌전 방치되있던 본가 모습입니다.

 

 

 

∇ 귀촌후 조금씩 수리하여 최근 빗물받이까지 교체한 모습입니다.

 

위 앞전 고양이가 있는 사진을 보면 각건물마다
빗물받이가 따로따로 2개씩 엊물려있는듯마는듯한 상태입니다.

이것을 앞으로는 아래처럼 기와집 본체 대형빗물받이가 우측 창고 빗물까지 카바할 예정입니다.

그런데 이강판이 육중한 0.6T라서 걸쇠를 여러개 고박한다하더라도 하중력엔 택도없습니다.

그래서 아래에 따로 지지대를 만들어 보강해야합니다.

 

 ∇ 아래처럼 구비한 대형앵글을 이용해, 대형선반식으로 짜서

 빗물받이와 바로닿아 고정되게끔 작업할 예정입니다.. (END)

문재인 케어를 반대하는 의사들의 움직임과 반응을 '의료'와 '복지'차원에서 다루려고 했다.

그러나 의협 비대위 모습을 보면 최대집이 그동안 해오던 극우 보수 태극기 집회와 너무 유사하다.

결국, 최대집은 의사협회를 이용해 문재인 정권 흔들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문재인케어 #의사협회비대위 #최대집 #극우보수 #아이엠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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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케어 반대’ 의협 최대집 투쟁위원장, 극우단체 대표로 드러나|

 

태극기 집회 등에서 “박근혜 탄핵 부당” 외치고

‘자유통일해방군’이라는 극우단체 대표 맡기도

10일 서울 중구 대한문 앞에서 ‘문재인 케어 반대’를 외친 대한의사협회 국민건강수호 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에서 투쟁위원장을 맡고 있는 최대집 씨가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이 부당하다고 외치고 있는 극우단체 대표를 맡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22923.html

 

그렇담 쓰레기집단이라 비난받아도 별로 변명할 여지가 없다는 얘기겠죠.
3만명이 운집했다했나요?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그 3만의 의사들 중 지난 촛불집회에 참여해 박근혜탄핵과 적폐청산을 외친 의사는 있을까?있다면 몇명쯤이나 될까?

사람이 먼저라는 생명이 먼저라는 철학없이
생명을 다루는 일 하는 사람들을 의사도 아닌 의사선생님이라 불러줘도 될까요?

여기서 잠깐,
문재인케어가 뭔지 짚어보죠.

‘문재인 케어 ‘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으면 본인이 내는 돈과 건강보험이 부담하는 비용이 있습니다. 가령 진료비가 1만원이면 3천원은 개인이, 7천원은 건강보험공단이 지불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모든 의료비를 건강보험공단이 부담해주지는 않습니다. 특히 MRI나 초음파 검사 등 일부 검사 비용은 비싸도 전액 본인이 부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문재인 정부는 비싼 검사비용이나 고가의 약 등 보험 적용이 되지 않던 ‘비급여 항목’을 개선하는 정책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는데, 이를 가리켜 ‘문재인 케어’라고 부릅니다.

아무리 세상일에 어둡다 해도 과거 이력이 저런 인물을 대표로 세우고 그를 따라 목소리를 높이는 의사들이라니
몹시 실망스럽습니다.

적폐는 사회 온 권력층을 뒤덮고 있음을 다시 한 번 절감합니다.

피터님글 기사로 꼭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http://theimpeter.com/41818/


 

 

원문 ; http://cafe.daum.net/kseriforum/7pAX/3666

 

종교는 언제 니체사상을 극복할건지.. (삶의 경험담에 부쳐)

세상에 안타깝게도 정의의 온전한 신은 없고..

 

 

사람들이 세상에서 어느신이 가장 쎈지합니다.
가장 쎄면 그만큼의 책임과 의무가 따르는법인데,
안타깝게도 온전히 지구와 인류의 평화와 정의를 지켜낸신은 하나도 없습니다.
의무는 방기한체 권리만 요구하는 신과 그추종자는 도처에 널려있으며,

천민자본주의와 독선이 모든 종교계에 만연해 있습니다.
기독교는 종교계중 가장 천민자본주의가 만연해 천주교와 달리 종교인과세에도 소극적입니다.

이슬람은 기독교계에 비해 헌금 강요를 하지않습니다만, 구태한 봉건문화가 문제이며,

일부극단주의자가 무차별테러를 일삼기도합니다.

한편 어떠한 잔악행위는 시대만 다를뿐 하나님을 따르는 모든 종교계서 자행됐음이 진실입니다.
중세시대엔 국수주의를 위시해 가톨릭에서는 종교 폭압정치와 마녀사냥을 자행했고,
이를 벋어나고자 근대에 청교도들이 아메리카로 이주했습니다.
그런데 이주민들과 일부 기독교인도 가세해 원주민 소탕작전을 펼쳤고 ,

그과정에서 수많은 아메리카원주민을 학살하는 오류를 범합니다.

기독교가 중세가톨릭의 전행을 되풀이한 이유는 중세에 교회를 신성시했는데,

그 교회독재의 잔재를 청산치못하고, 다른 형태로 이어져왔기때문입니다.

"예수천당 불신지옥!, 예수않믿으면 다지옥가!" 하며,

다른종교를 우상숭배로 치부하는 공포전도와 독선주의가 그것입니다.

인류사회에 중세에서 근대과도기에도 종교가 온전치못하다보니,

독재정치도 횡횡했고 공산당같은 이념과 냉전도 여기서 파생됩니다.

김일성이 기독교집안이었는데, 공산사상뿐아니라 일부는 기독교를 취합 이념화해,

주체사상을 수립, 기괴한 김부자독재체제를 이어가게됩니다.

불교계는 원래 도올김영옥교수가 주창하듯 깨닮음의 종교였지만,

독선적교회의 영향으로 불교의 법전해석도 갈라져서 일부 불자중에는 부쳐님을 잘 모시지못하면 

사바세계나 무간지옥에 떨어진다며, 절에 자주 갖다받치는 시주질과 기복신앙으로 변질되기도합니다.

 

교회라면, 그리스도인이라면 세상의 빛이 되어 먼가달라야하는데,

어떻게된것이 기업화되고 속세와 똑같은 교인이 천지입니다.
교회가 사역이 아니라 사업화,장사속으로 전락하다보니,

이것을 수습하고 뒤치닥거리다 종치는게 그나마 양심있는 현제의 주님의 종들의 서글픈 현실입니다.
개인적으로 청소년기에 예수님을 믿어 교회를 다녔고 선교사가 꿈으로,
전문인선교사를 준비했지만 이렇듯 허망한 현실을 접하고 때려친지 오래입니다.
하나님도 무능하고 방관자적이라 예수님을 믿기는하나 교회는 다니지않습니다.

 

 

한편 살며 느끼는것은 조상신 앞에서 누가 센지 함부러 논하지말라 생각됩니다.
조상신만큼 쎈신이 있을까? 반문할정도로 쎄긴아주쎕니다.
그래서 사회정의를 구현하는가면 어느신처럼 생색내기에 그칠뿐 이또한 말짱꽝으로 한심뿐입니다.
유교문화주의에 봉건,권위사회라는 오류가 팽배해,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역설도 있습니다.
가정이 가부장적으로 집안 자녀 재산분배도 자매와 아래남동생에겐 극히 일부만 돌아가고
장남이 거의 독차지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습니다.

 

 

개인사 예기를 좀 하고자합니다.
나의 집안 원래 본 고향은 한국전쟁전후까지만해도 나주시 노안면 양천리 금동마을로 당시 좀 부유한가문이었습니다.
집터만해도 마을에서 좀 큰편이었고, (300평이상으로 본가외 큰감나무 수십그루와 텃밭등이 있었음)
논,밭 약20마지기선, 야산임야 4천평이상이였습니다.

형제 둘중 저희 부친은 둘째로 작은아버지로 통합니다.
저희 부친은 물려받은 재산이라봐야 논 3마지기에 큰집터 절반정도의 대지융통부동산정도였습니다.
(집터는 옆 성동마을에 낡은집을 얻어 분가해 확보했드랬습니다.)
가문의 재산을 대부분 물려 받은 본가 '금동마을'의 큰집에서는 아우가 상대적으로 적은 재산에 삶도 궁핍하기에,
재산을 좀더 나눠주려는 취지로 야산 두개중 동네서 가까운 임야 2천평을 공동갑으로 등기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약50여년전으로 사실은 큰어머니 배려였으며, 큰아버지는 인색했기에 그럴 생각은 사실 없었음)

이 임야는 서울 여의도공원처럼 낮은언덕과 완만한평지로 이루어져있기에 개간해 야산밭으로 활용하기에 적합한땅이었으며,
이미 큰집에서 100평 이상을 수월히 개간해 사용중으로, 중장비만있다면 대부분 개간할수있는 좋은 임야입니다.
그런데 저희 부친은 그 조건을 뒤로하고, "야산밭은 빌려써도 좋으니까 논이나 좀 떼어주소" 합니다.
그것을 수년이 지나도 서로의 의견이 좁혀지지않았고, 큰아버지는 "거시적으로 말고 먼장래를 생각해보라. 장차 밭농사도 흥할것인데 논3마지기도 좋겠다만, 임야1000평을 받아 개간해 야산밭으로 사용하는게 훨씬 경제적이다"는 취지로 설득해도 반응이 시킁둥합니다.
그러자 이러한 정황을 10여년간 넌지시 지켜본 큰당숙이 큰아버지에게 "작은 아우가 싫다고하니 그야산을 우리에게도 좀 주소. 싼임야값이라도 치뤄줄테니 나중에 작은갑으로 등기해주소"하고는 저희 부친에게는 "큰형이 야산말고 방죽옆논을 좀 준다하며, 우리 당숙2인은 그야산을 일부 싸게 사기로했네.
부동산법을 아는 내가 서류대행해줄테니 큰형에게 임감을 달라고하시게. 내가 다 알아서 해줌세."하고 말장난을 칩니다.
자초지경을 다시 확인하지않고 큰집에 도장을 휙 받아 바로 건네준 부친은,(풍문으론 제부친은 그냥왔고 당숙네가 최종 도장을 편취해갔다함)
등기과정에서야 논할당 논의가 없음과 큰당숙이 돈도 않주고 임야 일부를 편취하렴을 알고
큰집에 알립니다.
그러나 큰집이 관공서에 가보니 이미 당숙들이 등기장난을 쳐놓은 상태로 때는 늦었습니다.

이것은 제가 소년기때 큰아버지 편찮은 틈을타서, 친지당숙이 위처럼 어찌어찌해서 큰아버지 인감도장을 빼돌려서,
큰집야산을 공동명의 3인(공동갑;큰아버지, 당숙2명)으로 둔갑한 사건입니다.
하여 눈뜨고 당한 큰아버지는 당숙들에게 "너희는 우리 작은집에 비해 논.밭이나 재산이 좀 있고, 먼 친척이다.
공동명의로 둔갑해둔 고인돌 야산을 작은집에게 계속 빌려줄터이니, 너희들은 사용할 생각일랑말어라."며 선을 그었습니다.
치상 당숙들은 군소리없이 저희 작은집에게 밭을 사용하는데 이의를 제기하지않았고, 이리하여 지금까지 이릅니다.

 


∇ 원래 큰집임야였던 야산 2천평 일부모습(사진에 일부보이듯 성산 우측엔 고인돌문화재가 있음)

 

 


 

여기서 짚고넘어갈것은 큰당숙이 정말 악해서 큰집임야등기장난을 쳤는가인데,
정신이 훽해서 그런것이지 정말 사람이 그래서 그런것이 아니며, 원인은 아래처럼 조상신이 노해서임이 큽니다.
당시 큰아버지가 저희 작은집에 야산공동갑 제의 수년이후,
제부친은 일단 논을 더 받기전까지 야산을 빌려쓴다 생각하고 확장,개간해서 밭을 늘렸는데 그과정이 문제였습니다.
큰집이 이미 개간한 100여평 바로 밑 주변에 우리 신씨 웃대조상묘가 몇개 있었는데,
그것을 순리대로 이장하고
개간해야했는데 그러지를 않고, 그 조상묘를 밑으로 쭉내려서 이장시켜 버렸습니다.
묘지순서가 웃대는 위로 아랫대는 아래여야하는데, 웃대 조상묘를 밑으로 쭉내려놨으니,
이른바 아랫대와 겸상하는 형세인것입니다.

∇ 고인돌야산 북동쭉으로 사진상에 보이는 묘지 2개(증조 신태술네)
위둥근칼라강판공구리는 무관함(주위에 대뿌리가 치고오고 있어 차단막 작업한 상태임)

 

 

그래서인지 내나이 4~5세경 그조상묘 이장사태이후 저희집안에 별의별 불화가 끈이지를 않았습니다.
세살때까지 기억으론 부친이 선한 사람이었는데, 조상묘사건이후 거의 괴물로 돌변해 있었습니다.
그 만극한사건이 있은직후 큰집 장녀가 저희부친에게 조상묘를 제대로 이장시키라고 항의했지만,
"출가외인은 문중사에 참견말라"며 모르쇠로 일관했습니다.

그러며 간혹 술취해서 큰집에 찾아가 "제발 논이나 좀 떼주라"며 추태를 부렸다고합니다.

 이렇듯 제부친은 갑자기 술주정뱅이가 되 집안이 시끄러웠으며, 자녀들에게 칼부림까지하며 자주 학대했습니다.
3남2녀중 첫째가 누나인데(둘째는 나 장남) 누나는 결혼후에도 우울증에 시달리다 끝내 자살에 이르고맙니다.
모친에게도 시련이 닥쳤으니, 내가 국민학교다닐때 어느날 다리를 크게 다쳐,
모친외가의 가족력 파킨슨병이 되살아나 그때부터 지금까지 파킨슨병으로 고생중이십니다.

 

 

조상묘사건 그때시점에 첫째 남동생이 태어났는데 나중에보니 지적장애아였습니다.
처음에는 지적장애였는데 장애 극복하려는 노력을 않했고, 나중에 커서는 인성에 문제있는 인격장애에 이릅니다.
예로 어둑한 밤에 자려는 동네노인들의 집에 자주 찾아가 못자게 말을걸며 귀찮케하는 진상짓에,
쓸데없이 싸돌아다니다 못해 남의 자전거를 편취해 지금까지 훔친 자전거만 50대가 넘으며,
부모님돈 훔치는것도 모잘라 어렵게사는 먼사촌댁에 침입해 기물파손 및 절도행각이니, 못쓸인간 그자체입니다.

 

 

 

한편 아버지로 인해 집안의 부부 싸움도 잦았는데, 내나이 5세때 어느날 집안의 부부싸움 며칠후,

제가 어머니에게 무슨 투정을 한것도 아니었는데, 집에서 어머니는 갑자기 뭐라 짜증을 내며,

저에게 맞아 죽거나말거나 막무가내로 부억칼을 던지었습니다.
그래서 그칼이 그대로 제 머리에 맞아 꽂히어 머리부상을 당했고 사경을 해맸었습니다.
하여 갑작스런 어머니의 칼던짐에 머리부상과 정신적 충격으로 후천적 지적장애가 생겼습니다.
이것은 나의 친지중에서나 죽마고우도 이후 사회직장사람도 모르는 사실입니다.
선천적장애가 있는 남동생과 달리, 사고장애를 딪고 일어서려는 노력을 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머리부상으로 상처는 아물었으나 뇌를 다쳐서
기억상실증, 앞면장애, 정신착란증까지 생기기도해 꿈과 현실을 구분못하기도했지요.

사회생활에서도 일이 서툴다고 종종 핀잔을 듣기도해,
자의,타의로 그만둬야했던적이 수차례일정도로 절망과 고독의 삶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래도 분발하려 하며 나름 장애를 극복하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유년기 학교에서나 사회생활에서나 그냥 특출나지않는 소년이나 사람으로만알뿐
귀촌시 골사모에 저의 삶의 사연을 올려서 읽으신 분들외에는,

뇌를 다친줄은 죽마고우도 지금까지도 모르고있고, 주위 사회인은 더더욱 모르는 사실입니다.
다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후유증이 심해져서 기억력이 퇴화되고
앞면장애,마비가 조금씩 생기다보니 대인기피는 어쩔수없는거같습니다.

그러다보니 사고와 기억력에 있어, 지금까지 거의 정신력으로 버티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노력의 결실이었는지 지금도 회상하면 내인생에 신묘한 사건이 몇차례 있었습니다.

 

가사난으로 중퇴후 직장생활을 하며 틈틈히 검정고시 학원을 다니며 공부를 했습니다.

검정고시학원 반에서 등수가 2~10등으로 공부를 잘했고 장학금도 받으며, 고졸자격을 이수했습니다.

 

 

 

그리고 고졸자격이기에 병역을 민방위가 아닌 단기병으로 입대하였습니다.

단기병으로 제대하기까지 말년휴가까지 포함해 보통 많게는 포상휴가가 5차례입니다만,

군대생활을 다만 열심히했을뿐인데 휴가가 8차례 가까이(한달) 됐으니,

군선.후배들이 포상휴가 비법의 조언을 구할정도였습니다.

 단기병 복무시 군사단 무등산 미화활동대회에서 포상휴가 받은사례 활동모습.

 

가문사람중 삶이 나은 인생이 아니지만 노력과 배푸는 공덕을 실천하였기에 저주도 저멀리가지않았나 생각됩니다.

 

 

자린고비 생활수기 전격공개- 박봉 자수성가기

하늘자산;5천만원이상, 땅자산;1억원이상 달성

짠돌이카페 베스트선정 원문 : http://cafe.daum.net/mmnix/7mn8/7890

 

∇ 귀촌전까지의 후원관련 이미지영상


누가 어느신을 믿는지 묻는다면 두루믿는 케이스로, 좀 온전한 신이라면 다믿으나 아닌신은 상종도 않는다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모르겠으나 예수님하면 사회정의를 실현하고자하는 일부 천주교인들과
촛불에 앞장선 진보기독교인들이 가끔 떠올립니다.
교회를 다니지는 않지만 나의 마음한켠에는 은혜와 소망의 예수님, 낮은자의 예수님으로 남겨있습니다.
그리고 자비스러운 부처님도 그리워져봅니다.
기독교 덕목의 '믿음,소망,사랑'도 괜찮겠지만, 불교에서 "공덕하여 성불하소서"하는 격언이 마음에 와닺습니다.
이세상에서 사람들이 "공덕=인간질" 이것만 잘하면 천하태평인것을 생각해봅니다..

긴 이야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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