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래 전 한번 올렸던 글인데, 글 올린 후에 다큐 감독과 작가 등이 연락을 해오며 다
양한 사건을 만들어 냈던 바로 그 글이다. 미흡한 부분이 있어 다시 정리해 올린다. 한 
어르신의 파란만장한 삶을 다룬 이야기인지라 요약한다고 했어도 양이 방대함을 양해 
하시길. -

2009년 노무현 대통령 서거당시, 그 소식에 분사하여 돌아가신 분이 계신다. 그분은 군산 
사시는 고태곤 어르신이셨다. 이 사건은 언론에 짤막히 소개되었는데, 이 어르신의 마지막
이 언론에 이렇게 볼품없이 묘사되었음은, 중요한 것과 보잘 것 없는 것을 가릴 능력이 안 
되는 시대의 특성이리라. 하여 오늘 낮에 어르신이 운영하던 책방에 들렸다가 잊혀져가는 
어르신을 기려야할 필요를 절감해 장문의 글을 정리한다. 노무현의 죽음이 이 어르신의 죽
음으로 이어진 기막힌 운명의 고리는 한편으로 우리 현대사의 비극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내가 이 어른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십 수년 전, 군산 구역전 사거리에서 피켓을 
들고 있을 때였다. 여름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새만금 사업 규탄하는 피켓을 들고 땡볕 
내리 꽂는 번화가 사거리 모서리에 서 있었다. 군산이라는 동네는 새만금의 마법이 걸린 지
역이고 5천명의 시민이 구역전에 모여 ‘새만금관제데모’까지 했던 터, 당시 그런 피켓을 들
고 있으려면 갖은 수모를 감수해야 했다. 그 얼마 전에도 술취한 아저씨가 “니가 뭔데 반대
해”라며 달려들어 피켓을 뺏으려 하며 폭력을 휘둘러 곤욕을 치렀었고, 이날 역시 지나던 
택시기사가 창 너머로 “후레자식, 개새끼” 등도 연발했었다. 새만금 반대 순례를 하던 문정
현 신부님 등과 수녀님들을 향해 전북도청에서 운영하는 행정깡패들이 젓갈 폭탄을 던지며 
“ㅆㅂ년 ㄱㅅ끼”’를 연발한 사건도 있었고, 새만금 자전거 평화순례단 단장은 그 행정깡패
가 휘두르는 쇠꼬챙이에 눈이 찢어지기도 했다. 그럴 정도로 새만금 사업에 정신 나간 지역
이 전북. 그 중에 군산이었다. 

하여간 거리에서 피켓 들고 있는 것이 쑥스럽기도 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총이 따갑기
도 해서 피켓을 메고 잔뜩 주눅이 들어 있었는데, 어르신이 한분 다가오신다. 고개 돌려 봤
더니 칠순이 넘으신 어르신이 비닐봉투에 먹을 것과 음료수를 넣어 가지고 오시는 것 아닌
가. 점쟎은 어르신은 얼마나 고생이 많냐?고 나를 격려하시며 봉지를 건네시는데, 적진 한
가운데서 시달림 받던 나는 여간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건 어르신이 단순히 나에게 
먹을 것을 건내서가 아니라, 이렇게 정치, 행정, 언론, 여론이 새만금 광풍에 미쳐 돌아가는 
현실에서 그에 휩쓸리지 않고 자기만의 판단 기준을 가지고 있는 어른이 있다는 것은 그 자
체로 큰 힘이었기 때문이다. 

하여간 그 얼마 후 어르신에 대한 좋은 기억을 머리에 담고 상가를 돌며 전단지를 뿌리던 
터 나운동 유원아파트 앞의 책방에서 어르신과 다시 조우했다. 어르신이 따님과 함께 운영
하는 글방였다. 인연이 있는 듯 해 차를 얻어 마시며 앉아서 이야기를 들어보니 어르신은 
‘무공수훈자지회’라는 보수단체에 소속되신 분이셨다. 하지만 그런 보수단체에 소속된 분들
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이셨다. 여느 보수단체에 소속된 이들은 ‘무턱대고 개발사업 찬
성하고, 관에서 추진하는 사업은 무조건 오케이’이다. ‘국가가 하는 것은 잔말 말고 따라야 
한다.’가 그들의 모토였다. 이런 집단의식으로 스스로 고민하고 판단하는 능력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다. 이렇기에 정치인들은 이들 보수단체들을 동원해서 시민들 선동에 앞장서 왔던 것이다. 

그런데, 이분은 기성세대의 문제를 꿰뚫어 보시고 이를 강력히 비판하시는 명철함이 있으셨
다. 군산에서 진행되고 있던 ‘새만금 사업’과 ‘핵폐기장 사업’에 대해서 반기를 들면서 성토
하셨을 뿐만 아니라, 종종 이외의 사회적 현안에 대해서 귀뜸해 드리면 아무런 편견이나 선
입견, 권위의식 없이 골똘히 들으신 후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용하셨다. 마치 어린 학생 같
은 수용력을 가지신 분이셨다. 내가 만약 어른이 된다면 꼭 닮고 싶은 그런 모습이셨다. 

이런 모습은 그냥 일순간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기에 나는 어르신의 인생이 궁금했
고, 그 후로 종종 찾아뵈면서 그의 삶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리고 그 만남의 말미에 
나는 어르신의 생이 인의를 아는 군자의 모습 그대로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한 강직한 인간
의 인생을 관통한 처절한 투쟁사를 어찌 다 이 짧은 글에 담아 낼 수 있을 것인가. 

어르신은 불의를 보면 견디지 못하고 정의가 아니면 행하지 않는 그런 분이셨다. 6.25 직전 
에 사병으로 입대하셨는데, 하사 한명이 저지르는 부조리에 맞서다가 엉덩이 살이 파일 정
도로 두들겨 맞고 창고 한쪽에 버려졌다고 한다. 워낙 초죽음이 되도록 맞았던 터라 아예 
몸은 움직일 수 없는 지경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개죽음 당하는 것은 당시 일도 아녔다. 
7,80년대까지 군대 내 구타에 의한 사망 등은 ‘군기확립’이라는 이유로 별다른 처벌도 않고 
유야무야 되었던 실태로 봤을 때, 어르신은 그대로 유명을 달리 했어도 하등 이상할 것 없
었다. 당시 해방 직후. 남북의 이념 투쟁이 격화되면서, 단지 사상이 의심 된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사람을 파리 잡던 하던 흉흉한 정국이었기에 말해서 뭐하랴. 당시 그를 살린 것은 
그 후임병이었다고 한다. 어르신을 신망하던 후임병이 창고 뒤쪽에 쓰러져 있는 어르신께 
고참들 몰래 밥을 가져다 먹여 살렸다고 한다. 그렇게 한 달 동안 창고 뒤쪽에 버려진 체로 
있다가 살아나왔다고 한다. 

이후 어르신은 계속 그렇게 있다가는 또 다른 시비로 맞아죽을 것 같아서, 살아남기 위해서 
소위 임관 시험을 준비하셨단다. 하지만 당시에는 책 살돈이 없어서 시간 날 때마다 헌책방
을 오가면서 역사책을 읽고 외우면서 공부했다고 한다. 그리고 시험에 합격해서 기어이 소
위 계급장을 달았다고 한다. 

어르신을 괴롭혔던 그 하사는 어떻게 되었냐고? 소위계급장 달고 나타나니 그는 어르신 앞
에서 제대로 서있지도 못하고 사시나무 떨듯 발발발 떨고 있었다고 한다. 계급이 깡패라고, 
자기 계급으로 내리 눌러서 어르신을 쳐 죽이다시피 해서 창고 뒷 쪽에 버렸던 것이고, 마
찬가지 원리로 더 높은 계급 달고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어르신이 자신을 쳐 죽이는 것도 
아무 문제꺼리가 되지 않기에 그 사실을 확인한 순간 그의 혼령은 이미 지옥에 떨어졌던 듯
하다. 하지만 어르신은 자신의 지위를 악용하는 이가 아녔기에 핏기 없이 떨고 있는 그에게 
다가가 “인생 그렇게 살지 말아!”라는 말을 건네고 끝냈단다. 

이후 6.25가 터지고 그는 최전선에서 사선을 넘나드는 임무를 수행 했단다. 그가 어떤 임무
를 수행했는지는 다음 한 줄이면 드러난다. ‘백마고지 전투(6.25 중 가장 치열한 전투 중 
하나)에서 수색중대장 임무를 맡았고 이로 인해 무공훈장을 두 개를 받았으며 이승만이 직
접 헬기타고 나타나서 훈장을 수여함.’ 이에 따라 어르신은 죽을 고비도 수없이 겪었다는데, 
북한군이 스피커를 동원해서 ‘고태곤 너 이 새끼 목을 따버리겠어’라는 엄포를 할 정도였다니 과히 당시의 아찔함이 전해진다. 

중공군 개입 후에는 전세가 극도로 분리해 졌다는데 하루 종일 기관총을 쏘는 것으로도 모
자라 밤새 쏘고 또 쏴도, 중공군이 시체를 밟고 끊임없이 밀려 내려오는 것은 그야말로 악
몽이었다고 한다. 한번은 중공군 진지 근처에서 육박전 하는 중에 그 시체에 파묻혔는데, 
중공군이 사망확인을 하려고 죽은 시체에 일일이 총검을 꽂고 다니는 중에 얼굴 옆에 단도
가 꽂히는 아찔한 경험까지 하셨단다. 하여간 그 후 중공군 총알의 과녁이 되지 않기 위해
서 낮에는 썩어가는 시체 분비물과 냄새 속에서 7월의 땡볕을 버텼고, 밤 역시 그들의 눈에 
띄지 않게 천천히 몸을 굴려서 3일 만에 아군 진지로 돌아왔다고 한다. 

이러한 괴로운 기억 때문에 따님 이야기에 의하면, 책방 의자에 앉아서 졸던 할아버지는 가
끔 ‘위생병 위생병’하고 잠꼬대를 하다 깨어나고, 해마디 6월이 되면 ‘포성 때문에 귀가 아
파서 잘 수 없다.’며 배란다에 나와서 뜬눈으로 새우시곤 했다고 한다. 

자. 그런데 이런 얘기로 끝날라 치면 어르신 얘기를 아예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625전쟁의 무용담은 '독립군 잡아 죽이던 <간도특설대>장교를 하다가 해방 후 빨갱이 잡아 
죽이는 구국의 영웅'이 된 백선엽 장군이나 박정희 등의 이야기에 무수히 회자되었기 때문
이다. 

어르신의 강직한 성품에 의해 만들어지는 남다른 이야기가 지금부터 시작된다. 6.25직후부
터 어르신이 군생활을 했던 10년의 시간 동안 군 조직은 그야말로 ‘부정부패의 박물관’ 역
할을 했다고 한다. 일 예로 대한민국 국군의 최악의 방산비리 사건으로 일컬어지는 ‘국민방
위군 사건’을 들 수 있는데, 이는 6.25기간 동안 국방부 고위 장교들이 군수물자를 빼돌려
서 10만명의 국군이 아사한 사건이다. 적은 내부에 있다는 말이 딱 맞는 사건이었다. 이에 
대한 책임으로 국민방위군 사령관과 부사령관 등 관련자 5명이 사형을 당하기는 했지만, 
‘10만명’이 몰살당했으니 책임을 물어 조치한 사건이지, 어지러운 전쟁기간 내에 이런 사건
이 얼마나 많이 빚어지고 은폐되었겠는가. 

이 때문에 당시에는 늘 물자가 부족했고 결핍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리고 이 결핍을 보충할 
수 있었던 가장 효과적이고 직접적인 방법은 다른 중대, 다른 대대로부터의 도둑질이었다고 
한다. 90년 중반에 군생활 했던 나도 고참들로부터 ‘도둑질’을 장려 받았을 정도였기에 50
년대 상황은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물품 부족에 시달리는 와중에도 
장교들은 그 부족한 물품을 빼돌려 시장에 팔아먹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장교들은 사병
들을 자신의 종부리 듯 사역에 동원했고, 산의 나무를 잘라 팔아먹기 위해 물길을 막고 숲
을 깍아 냈다고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끊이지 않고 터지는 군납비리는 그때부터 그렇게 
차분히 기반이 다져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불의를 참지 못하는 강직한 성격의 어르신은 이런 문제가 보일 때마다 문제를 제기
했고, 자기 상급자인 모 대령에게 총까지 꺼내들며 항명하다가 결국 대위에서 중위로 강등
까지 당했다고 한다. 백마고지 전투의 1등 공신으로 무공훈장 두 개를 차고 있는 어르신을 
그렇게 강등시킬 수 있었던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이들 군조직이 기실 깡패조직보다 
더 추악하게 의협의 사슬에 묶여 있기 때문에 이권이 맞물린 이들이 서로서로 뒤를 봐준 때
문이다. 

어르신은 당시의 힘겹던 군생활 압박의 가장 큰 특징으로 ‘함께 비리를 저지르지 않으면 버
틸 수 없게 만드는 분위기’를 든다. 그도 그럴 것이 비리를 저지르는 간부와 장성들은 부하
들이 해꼬질 할 수 없도록 공범자를 만들어야 한다. 공범이 되면 함께 비리의 결과물을 나
누면서 점차 ‘비리가 밝혀질 위협’을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공범을 많이 만들면 만들 수
록 안전해진다. 이런 식으로 관계가 물고 물리면 종국에는 군조직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비
리 집단이 되는 것이다. 이렇다보니 현재와 같이 퇴역하고 나서도 각종 이권에 개입해서 수
천억의 국방비를 빼내다 걸리는 사건이 수시로 터지는 사건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들의 
눈으로 군은 나라를 지키기 위한 조직이 아니라 이권의 샘일 뿐인 것이다. 이러한 질병이 
다른 곳도 아닌 군에 광범위하고도 집요히 퍼져 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이렇게 어르신은 군조직이라는 것이 인의를 지킬 수 있는 장소가 아닐 뿐 아니라, 청렴하게 
살려면 굶어죽어야 하고, 진급도 불가능한 현실에 통탄했다. 자신은 진정 나라와 겨레를 위
해서 목숨 받칠 각오로 군에 뛰어든 것인데, 군조직 자체가 ‘이권이 맞물린 부패한 조직들
의 사슬’ 이상이 아님을 깨닫고 10년의 군생활을 마무리하고 50년대 말에 제대했다고 한다. 
그 50년이 지난 2009년에도 해군의 군납비리를 폭로했던 김영수 소령이 해군 조직의 왕따
를 당해 결국 퇴역할 수 밖에 없었던 터이기에 ‘장교라면 너도나도 한몫 챙기는 것이 관례
인 50년대 군대의 분위기’를 어르신은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이에 부하들은 부모를 잃은 듯이 아쉬워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어르신은 부인을 친정에 보
내고 혼자 독신 생활하다시피 했었는데, 이는 함께 살면서 가족의 궁핍한 처지를 눈앞에 보
면 마음이 약해져서 비리에 연류 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렇게 나라의 의를 홀로 
구하려는 어르신의 마음이 부하 사랑의 마음으로까지 이어지는 것은 당연했는데, 그는 ‘굶
주리는 우리 불쌍한 부하들 먹여 살려야 한다.’며 군에서 나오는 월급과 특별 포상금 같은 
것을 몽땅 쏟아서 돼지잡고 쌀팔아 이들을 먹여 살렸다고 한다. 물품 빼돌려 팔아먹고, 개
인 사업을 위해 병사를 사역에 동원하는 장교들 속에 그가 얼마나 부하들로부터 존경받은 
인물이었는지는 예상할 수 있는 바와 같다. 하지만 어르신은 그렇게 퇴역했고, 부하들은 부
모를 잃은 듯 슬퍼했다고 한다. 중공군이 홍수처럼 밀려오는, 사선을 넘나들던 백마고지 전
투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당당히 맞섰던 그가, 군내 부정비리를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왔음은 
결국 군조직이 ‘인의’를 갖춘 이가 발디딜만한 곳이 아님을 강변하는 것이다. 

아마 그렇기 때문에도 나는 이 어르신과의 만남 후에 625와 월남전의 경험을 회상하며 ‘애
국’을 떠벌리기만 하는 노인양반들을 전혀 신뢰하지 않는다. 그들은 북한군과 중공군을 적
으로 규정해 도살 하기는 했을 지언정, 그들의 둔감한 정의감은 군대내 부조리를 전혀 인식
도 못했고, 그 부조리에 타협했으며, 그 부조리에 저항하는 고태곤 어르신 같은 이를 학대
했던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는 터져 나오는 전현직 육해군 장성
들이 연류 된, 부정과 비리는 바로 그들 수준의 애국이 누적된 참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로 지금도 길거리에서 군복입고 ‘애국’을 강변하며 진보단체들을 ‘빨갱이’로 규탄
하는 그들은 이렇게 명백히 눈에 보이는 부정과 국방부의 비리의 결과물에 함구한다. 아니 
‘함구’정도가 아닌 ‘공생’ 중인 현실이다. 일예로 재향군인회라는 단일 조직만 해도 해마다 
국방부와 2천억의 수의계약을 치르고 그 와중에 각종 납품 비리사건이 터져나고 있다. 오죽
했으면 재향군인회 내부 간부가 이 사실을 폭로했다. 자 이런 비리가 조직적으로 연류 되어 
있기에 총을 쏘면 나가지가 않고, 방탄조끼는 구멍이 뚫리고, 수류탄이 터지지가 않고, 전차
는 기동이 안 되며, 조잡한 어군탐지기가 장착된 ‘최신의 구조함’은 재난 현장에 출동을 하
지 않았던 것이다. 바로 이런 짓을 전 현직 군인들. 정부와 국정원의 지령을 받고 관제데모
를 하고 다니는 보수단체들이 함께 기획, 실행, 동조 해온 것이다. 전직 해군참모총장들이 
나란히 구속된 사건은 이 참상을 대변한다. 국가안보의 가장 해악을 주는 세력이 바로 전현
직 군인들, 군조직이라고 하면 너무 심한 말일까?!   

아니 별로 심한 말 같지는 않다. 그 둔감한 정의감, 결핍된 인의로 과거 50년 전에 그랬던 
짓을 지금도 고스란히 하고 있는 것 같이, 앞으로 50년 100년이 지나도 군조직 내의 체질
화된 부정과 비리의 관행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이 나라는 병들어 가는데, 그 병들
어 가는 원인을 저들은 ‘방구뀐 놈이 성내는 식’으로 엉뚱한데 풀고 있다. 인의가 빠진 말뿐
인 ‘애국’의 참상이다. 

하여간 어르신은 군 제대 후에 면장시험을 합격해서 군생활 중에 부하들 아끼듯이 면민을 
돌보셨다고 하는데, 새벽 네 시 반에 나가서 밤 12시에 돌아오시곤 하셨다고 그 따님은 기
억한다. 어르신은 하루 종일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마을 곳곳을 순찰하며 살피셨다는데, 
여느 가정집 부엌에 들어가 솥을 손으로 긁을 때 녹슨 때가 나오면 밥해 먹은 지 오래인 것
을 판단해 구호 쌀을 몰래 실어다 놓고 가는게 일상이셨다고 한다. 면장 퇴직 후엔 연장자
로서 후배들에게 자리를 내줘야 한다고, 군 관련이나 어떤 자리의 제안이 들어와도 모두 거
절하셨다고 한다.

어르신은 시류에 흔들리지 않고 오직 사람 사랑하는 마음을 앞세워서 일을 하셨고, 그러다
보니 이에 맞지 않는 조직들과 수도 없는 마찰이 있었지만, 그 ‘인의’의 기반에 세워진 강직
한 의지는 그를 지치지 않고 나아가게 할 수 있었던 듯하다. 이것이 바로 여느 나이든 양반
들과 달리 ‘새만금’과 ‘핵폐기장’의 집단최면의 함정에 빠져들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고, 갖
은 사회부조리에 대해 끊임없이 성토하실 수 있었던 힘이며, 피켓을 들고 있던 청년에게 음
료수를 건네고 돌아와 그 딸에게 ‘젊은 청년이 땡볕에서 고생하고 있음’을 몇 번이나 안타
까워하면서 한숨을 쉬게 할 수 있었던 따스함의 원천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어르신의 강직함은 결국 어르신을 비극으로 내밀고 있었다. 애초에 어르신은 
이 부조리한 사회와 평생을 통해서 불화했지만 그 막바지의 사건은 노무현의 죽음이었다. 
노무현은 한편으로 어르신 자신이었다. 아무리 성심을 쏟아도 변화하지 않는 군조직 앞에서 
끊임없이 좌절했지만, 그 앞에서 쓰러지지 않고 꿋꿋이 나아가고 버텼던 그 자신을 어르신
은 노무현의 모습에서 보셨을 것이다. 그런데 굳건한 성벽 같던 노무현은 수구세력들의 끊
임없는 시비와 찝적거림에 자신의 부하들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던졌다. 모든 화근의 씨
앗을 자신의 어깨에 짊어지고 떠났다. TV에서 그 충격적 소식을 접하며 어르신은 이 조악한 
국가에 맺힌 평생의 한이 머리로 역류하는 것을 느끼셨을 것이다. 결국 어르신의 강직함은 
그 순간 꺾이셨다. 더 이상 이 세태를 버틸 수 없으셨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노무현 전 대
통령의 서거에 애통해 하던 80대 노인이 TV를 보다 호흡곤란을 일으켜 숨졌다.’는 간략한 
보도의 실상이다. 

어르신이 평생을 싸워 오셨던 이 조악한 세상은 그의 사후에도 어르신의 이름을 욕되게 함
을 멈추지 않았다. 노무현을 죽음으로 몰았던 이명박 정부는 ‘노무현대통령 사망에 노인 분
사’라는 제목의 기사가 불러올 파국을 우려해서 장례식장에 경찰을 파견해 그 남겨진 가족
들에게 ‘노무현 대통령 때문에 분사한 것이 아님’이라는 확인서를 받아 가려고 까지 했던 
것이다. 이에 천국으로 향하던 어르신의 혼은 이 기가 찬 현실을 져버릴 수 없어 지금도 구
천을 떠돌고 있을 줄도 모를 일이다. 

그 누구보다 정의롭고 강직하되, 절절히 사람을 사랑하고 나라를 위해서 진실 되게 자신을 
내던진 어르신. 어르신은 나서서 공을 취하지 않았고, 우연히 쥐어진 공도 아낌없이 주변에 
나눈 탓에 사람들에게 전혀 알려진 바 없이, 오직 저 몇 줄의 기사 속의 ‘80대 노인’으로 
흔적이 남을 뿐이다. 








* 작년 초에 이 글을 올리고 나서 어떤 분이 연락을 해오셨다. 본인의 아버지가 백마고지 
전투에서 어떤 지휘관의 헌신적 보살핌 덕분에 죽지 않고 살아 남았고 그 분의 은덕을 늘 
기리셨다는데, 그분이 바로 고태곤 어르신이셨다고.   


출처 : 길위의 평화
글쓴이 : 둥글이 원글보기
메모 :


고향이 광주이며(광주시 광산구 신동; 나주IC인근)
가정형평상 이른 청소년때 서울에 상경해 노동일하며 살다
이제 중년되기전 귀향해 정착준비중에 있습니다. 아래는 나의 삶의 수기 및  그간 서울생활수기 기록입니다.
(2개의 링크글)
자린고비 생활수기 전격공개- 박봉 자수성가기

짠돌이카페 베스트선정 원문 : http://cafe.daum.net/mmnix/7mn8/7890

 

꿈에본 내고향 - 광주 병풍산 아래에 하늘의 은총이 함께하시길..

http://blog.daum.net/chmanho/16883796

 

집안에 논.밭이 있으나 모두 도외로 나가 관리가 않되어 임대해준 상태이며, 아직 귀농은 아닙니다.
일단 귀촌한 상태로 도로보수 및 집수리와 텃밭만들기등을 마무리중에 있습니다.
아래 사진은 귀향하여 정착준비중인 모습입니다.

 

 수년전부터 화물차 영업넘버 법제 및 단속강화로 다마스라해도 영업넘버값이 최하 1500만원이상이라,
신문 배달.배송도 노란넘버를 달고 다녀야하는 처지여서, 작년 겨울 차라리 이직을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자금도 있기에 더큰차를 사서 화믈운송업을 할까하여, 화물운송종사자격증을 취득해 놓고,
물류회사에서 피킹 알바를 하면서 무슨일을 구체적으로 할지 고민을 하다..

잠시 시간적 여유가 있어 다마스에 캠핑나가는 정도의 짐을 챙겨서, 
오랬동안 못갔던 고향집을 방문하고 고향산하를 들러보았습니다.

 

 

 

 

 

 고향길을 오가는중에 고급승용차 뒤로 경비행기 비슷한 특이한걸 실고 가는걸 봤습니다.
참 부럽기도하고 신기한 모습입니다.

 

 

 ∇ 고향에 거의 도착전 무안방향 고속도로에서 본 금성산 인근 산하모습입니다.

 

 

∇ 고향에 거의 도착전 무안방향 고속도로에서 본 고향산하 모습입니다.

 

 

 ∇ 고향을 둘러보며 병풍산줄기에서 찍은 고향산천모습입니다.

 

 

 ∇ 고향산하중 친가문 성산의 모습입니다.

 

 

 

 

 ∇ 고향산하중 마을입구 모습이며, 사진뒤로 배밭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 고향에 오니 나의 반려냥이가(야옹이) 가장 신난 모양입니다.

 

 

 

 

여러 고민을 뒤로하고 올해 이른봄 일단 귀촌을 결정하고, 다마스로 그간 서울에서

못가져온 짐을 실고 내리니 아침 해가 밝아오는 모습입니다.

1인 자취인(싱글족)으로 살면서, 짐이 적었을때 다마스로 한번에 이사가 가능했듯이,

냉장고 소형과 맥가이버를 능가하는 다양한 생활품과 사무기기와 책등을 챙겨
딱 2차례로도 충분히 가능하니, 싼 경비에 참 고마운 경차입니다.

(처음 고향에 마실나가는 식으로 뒷의자를 않젖히고 캠핑나가는 식의 간단한 짐만 챙겨서 내려가다 놓고 왔으니, 귀촌을 결정한 이후 다 실고 오기는 무리여서 일부 중요치 않은 비품은 남겨두고 왔습니다. 어차피 반전세 보증금을 새세입자 계약완료 이후 받는다 했기에, 또한 서울에서만 싸게 살수 있는 각종 물품등이 있어서, 또 한차례 서울을 방문해도 경비가 결코 부담은 아닙니다.)

 

 

 

귀향을 해서 먼저, 집안정리를 하면서 도로보수 공사를 하였습니다.

귀농을 할때 현지인에게 친해지는 방법중에 하나이기도 합니다.

시골의 특성상 동네 이장도 바뻐서 바로 행정기관에 요청이 불가한 경우가 많고,

설령 요청을 했다해도 바로 해주는게 아니라 시일이 좀 걸립니다.

 



∇ 바로바로아스콘 4포정도이면(6만원) 약2~3미터정도로 도로보수가 가능했습니다.

 

 

 



 ∇ 집안 모두 도외로 나가 집관리가 않되어,

일단 귀향 전후 가장 먼저한것이 울타리 망입니다.

제목에 "귀향해서 바로 망했습니다." 할수있지만, 놀랄까봐서 뺐습니다.

 

 

 

 

∇ 아래와 같이 집앞에 넓은 공터가 있어 텃밭을 만들어 보았습니다.

농사법을 잘모르데, 집안에 모친이 살아계시나 요양병원에 계십니다.
그래도 여러 귀농사이트가 있어, 정보를 얻을수 있으니 크게 문제는 않되며,
아래는 가장 심플히
텃밭 가꾸기한 모습입니다.

 

 

 

∇ 텃밭을 시멘트바닥위에 페포대와 검은 깔망을 곂으로 깔아서,
다마스로 문중성산에서 흙을 공수하여 덮었습니다.

 

 

 

 



 

∇ 이어서 울타리망 상태로도 좀 보기 흉하기에, 갈대발로 울타리를 좀 마무리 했습니다.

검은 망으로 할때는 농가에 활용치 않는 망으로 했기에 비용이 않들었으며,

 갈대발도 (150cm x 180cm) 6묶음하여 총3만원으로 싸게 마무리했습니다.

 

 

 

 

 

 

 

우천시 토사 유실을 방지하기위하여 텃밭 모서리에
잔디와 고랑풀등으로 완충부분을 만들어놓고,
추가로 물흐름 방향인 우측 남쪽주변 잔디모서리에 돌을 좀 깔았습니다.

 

 


∇ 마지막으로 (몇년후:2019) 텃밭가꾸기를 업그레이드한 모습입니다.

송정시장에서 몇차레에 걸쳐 여러모종을 조금 사서 심어 놓았습니다.

(오이,대파,부추,참나물,상추,브르콜리,신선초,토마토,고추,가지 등; 약5만원선)

 조촐한 이야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관련글 포스팅글(링크)

짠돌이카페  http://cafe.daum.net/mmnix/5SuV/199674
김광수경제포럼  http://cafe.daum.net/kseriforum/8oZY/5487
다타방  http://cafe.daum.net/minivan/6t6P/16894

지입차비대위  http://cafe.daum.net/young4857/HyKf/9732
귀농사모  http://cafe.daum.net/refarm/QHa/97824

구노회모임  http://cafe.daum.net/truesupportingworker/Xoq5/164

골사모  http://cafe.daum.net/CS11/9bMi/2581






11.jpg



출처는 스마트 인컴이며  2,4,6,9,10,11번은 구글유튜브 요청으로 인컴에는 삭제 되어 있음

http://smartincome.tistory.com/336

 

1.TV모드 빅스크린으로 보기

www.youtube.com/tv#/"로 들어가면 아래 스크린샷과 같이 TV용 네비게이션 메뉴와 빅스크린 TV를 위한 전체화면 동영상들을 볼 수 있죠. 하지만 한가지 아쉬운 점은 한 동영상에서 다른 동영상으로 넘어갈 때 마우스 대신 키보드밖에 사용을 할 수 없답니다. 이 부분을 해결하려면 가지고 있는 스마트폰으로 스마트TV와 직접 연결을 해서 리모콘같이 사용을 하면 되죠.

12.jpg


 

2.동영상을 GIF (움직이는 이미지) 파일로 빼내오기

www.youtube.com/watch?v=PGuTN_ilmEk"라는 유튜브동영상에서 GIF 이미지를 빼오고 싶다면 "www.gifyoutube.com/watch?v=PGuTN_ilmEk"라고 URL창에 입력하면 새로운 사이트가 열리면서 GIF 이미지로 만들 길이와 시작 시간 그리고 제목과 캡션을 정할 수 있습니다. GIF 이미지로 전환시켜서 개인 아바타나 블로그에도 사용할 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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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멀티 카메라 옵션

Youtube는 현재 새로운 기능을 테스팅하고 있는 단계인데"원하는 카메라 뷰 고르기"라는 기능입니다. 스포츠 경기나 콘서트 동영상을 여러 카메라 각도를 바꿔가면서 볼 수 있는 기능입니다. 물론 여러 카메라로 촬영을 한 유튜브동영상 이여야겠죠. 이제 곧 여러분이 좋아하는 가수의 공연을 클로즈업이나 옆에서 또는 먼 관객 뷰로도 볼 수 있게 됩니다. 페이스북이 360도 동영상을 올리면서 Youtube도 다급히 멀티 카메라 옵션을 준비하는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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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자동 무한 반복시키기

www.youtube.com/watch?v=2ips2mM7Zqw"에서 'youtube.com'와 'watch'를빼고 'infinitelooper.com'으로 교제해주세요: "www.infiniteloopercom/?v=2ips2mM7Zqw". 이 동영상 안에서도 특별히 듣고 보고싶은 부분이 있으면(예를 들어서 노래 시작에서 1:24까지만 듣고 싶으면), 따로 그 구간을 해서 무한반복으로 설정할 수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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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느린 인터넷을 위한 기능


 우리나라에는 불행히 유튜브 데이터센터가 없지만, 빠른 인터넷 인프라 때문에 별로 걱정할 필요는 없을듯 합니다. 유튜브는이 새 기능을 원래 아시안 국가들을 위해서 내놓았는데, 느린 인터넷 지역을 위해 "Feather" 베타 서비스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 새 기능은 동영상을 재생하는 웹브라우저에서 자동으로 다운로드 받을 수 있는 총 킬로바이트를 제한해주죠. 또한 자동적으로 사이드 바에 있는 동영상 리스트들과 댓글들을 없애주고최대한 동영상을 볼 때 불필요한 부분들을 제거하면서 느린 인터넷 속도에 최적화시켜줍니다. 간단하게 살을 쏙 뺀유튜브 사이트라고 보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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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유튜브 동영상 다운로드 받기


". 여기서 동영상 외에mp3 오디오 파일도 따로 다운로드 받을 수 있죠. 저는 개인적으로Keepvid.com을 주로 쓰는데, 그 이유는 화질 별로 골라서 다운로드를 쉽게 받을 수 있고 상대적으로 우리나라에서 받을 때 속도도 양호한 편이면서 안정적이기 때문이죠.www.pwnyoutube.com/watch?v=2ips2mM7Zqw". 여기서 동영상 외에mp3 오디오 파일도 따로 다운로드 받을 수 있죠. 저는 개인적으로Keepvid.com을 주로 쓰는데, 그 이유는 화질 별로 골라서 다운로드를 쉽게 받을 수 있고 상대적으로 우리나라에서 받을 때 속도도 양호한 편이면서 안정적이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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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정확하게 검색하기


유튜브에는 수억개의 동영상들이 있어서 특별히 찾고 싶은 영상을 검색할 때힘들 수가 있습니다. 특히 키워드 중심으로 검색 할 때 유사하지만 그 특정한 동영상이 검색에 안나올 때가 많죠. 다행히 더 정확한 검색 기능이 유저들한테 제공되죠. 검색창 첫 부분에 "allintitle"을 치고 검색 키워드를 바로 치시면 됩니다. 예를 들어 "빅뱅 뱅뱅뱅 vs 싸이 강남스타일"을 검색하면 5,980개의 결과물이 나오는데"allintitle빅뱅 뱅뱅뱅 vs 싸이 강남스타일"을 검색하면 단 10개의 결과물로 축소되서 원하는 동영상을 찾을 수 있죠.

유튜브에는 수억개의 동영상들이 있어서 특별히 찾고 싶은 영상을 검색할 때힘들 수가 있습니다. 특히 키워드 중심으로 검색 할 때 유사하지만 그 특정한 동영상이 검색에 안나올 때가 많죠. 다행히 더 정확한 검색 기능이 유저들한테 제공되죠. 검색창 첫 부분에 "allintitle"을 치고 검색 키워드를 바로 치시면 됩니다. 예를 들어 "빅뱅 뱅뱅뱅 vs 싸이 강남스타일"을 검색하면 5,980개의 결과물이 나오는데"allintitle빅뱅 뱅뱅뱅 vs 싸이 강남스타일"을 검색하면 단 10개의 결과물로 축소되서 원하는 동영상을 찾을 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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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특정 키워드 제외시키기

 

"-" 대시를 이용해서 특정 키워드를 검색에서 제외시킬 수 있는 기능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강남스타일'을 제외한 모든 싸이의 노래를 찾고 싶다면검색창에 "싸이 -강남스타일"(싸이와 - 사이에 한칸을 꼭 띄어야 합니다)을 검색하면 아래 스크린샷과 같이 결과가 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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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유튜브 사용법:지역별 제한뚫기

 

만약 지역제한이 걸려있어 한국에서 접속할 수 없는 동영상이 있다면, URL만 잠깐 바꿔줘서 해결 할 수 있습니다.

URL 사이에 "/v/"만 넣어주면 되는데,예를 들어 "www.youtube.com/watch?v=2ips2mM7Zqw"이 지역제한이 걸려있다면 다음과 같은 URL을 쳐서 보면 됩니다: "www.youtube.com/v/2ips2mM7Zqw". 한가지 않좋은 점은 전체화면으로만 재생이 가능하다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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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자동 고화질 + 광고차단

 

유튜브는자동으로 모든 동영상을 저화질에 기본 설정을 해놓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빠른 인터넷이 있고 항상 모든 동영상을 HD 고화질로 보고싶다면 크롬이나 파이어폭스 웹브라우저의 "Magic Actions" 플러그인을 설치하면 됩니다. 공짜에다가 지긋지긋한 광고까지 다 차단해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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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동영상 원하는 부분만 퍼가기

 

유튜브에서 정말 퍼가고 싶은 동영상이 있는데 전체가 아닌 한 부분만 원한다면 다행히도 쉬운 해결책이 있습니다. 일단 퍼올 동영상의 embed코드를 받아와서 URL 끝부분에 "?start=ss&end=ss"를 넣어줍니다. 여기서 "ss"는 시간을 초 단위로 나타내고 있죠.

23.jpg


 

그럼 여기서 예를 들겠습니다:빅뱅 뮤직비디오의 embed 코드입니다. 만약 30초에서 50초까지만 퍼오고 싶다면 원래 코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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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아래와 같이 바꿔주면 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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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한류열풍 사랑
글쓴이 : 숲속의왕자 원글보기
메모 :

 

1#  
 늦가을이 되면 오래전 양천리를 비롯 광주광역시 광산구 인근에선
무말랭이(신기루) 수확이 한창이었어요.
광산구 신동에 위치한 내 고향에서도 무말랭이 작업이 한창이었지요.
제 집안은 빈농이라 농지에 무우농사가 그리 풍족치 않은관계로
자체적 조달이 어려워, 주로 이웃마을에 일당제를 나간 곳중
큰토지에 속하고 생산가치 없는 잘잘한 무우를 많이 버려진밭에서
무우를(무말랭이 재료) 얻어와 작업을 하였어요.
특히 계량마을(이슬촌) 인근의 부농밭에 버려진무우가 많이 있는편이어서,
그곳으로 가족단위로 나가 무우를 무상으로 얻어와 활용한 기억이나네요.

아마 그 부농의 후덕한 인심이 훗날 복으로 되돌아왔던것일까요,

몇년전 성골롬바노중학교 카페를 알게되어 나중에 카페글을 보던중,
요셉천사의집을(고아원) 이대호님이 운영하신다기에,
존함이나 얼굴도 잘모르던분이라 그런가보다했어요.
그러다 관련글을 유심히 보다 이대호원장님 고향이 계량마을 인근이라시길래,
어렸을적 노안성당 입구 밭에서 무말랭이 재료(무우)를 얻게된 기억이 나면서,
무슨 보은할것이 없나 생각이 나던거에요.
하여 보은하는 마음으로 요셉천사의집과 병풍산하 복지기관에 후원을 이어오고있어요.

 

 


최근 제가 더 좋은 직업으로 이직을 준비중인지라,

화물운송자격증 등을 준비하며,(아래 운전정밀 검사 통과 사진 첨부)
잠시 시간적 여유가 있어 오랬동안 못갔던 고향산하를 들르기로했어요.
고향 생각하니 고향산천중 저희집 성산에(금동 뒷산) 고인돌이 제일 먼저 생각이 되며,
 제일 먼저 반길듯 눈에 아른거리네요.




 

2#

10여년만의 어머니와의 첫통화
제개인적으로는 어렸을적 불미스러운일로 머리를 다쳐
후유증(편두통,만성피로,기억상실..)이 있어 사회생활이 원만치않아
일이 서툴다고 종종 짤리기도 하여, 절망과 고독한 삶의 연속이었어요..
(마이리틀히어로, 김영광을 보면 나의 삶이...; http://blog.daum.net/chmanho/16883715)
일찍 출가했던 여동생이 3년전 편지를 하는덕에 집안 소식과 연락처를 알게되었지만,
변변치못한 직업에 저소득상태인지라 좌절스러운 나날로 어쩔수없이 가기가 망설여졌어요.
여동생에 의해 가족의 연락처를 알았지만 고향을 생각하면,
또한 지나온 과거 고향 옛적의 않좋던 기억이 떠올라,
그리움이 악몽이 되어 잠을 뒤쳑이기도 했지요.
(삶의 십자가... ; http://blog.daum.net/chmanho/16883718 )
어찌하든 어머니가 이미 60이 넘은 고령인지라 살아생전에 뵙는게 도리라 생각되어,
오래간 주저하던 연락을 12월초 여동생과 어머니께 하게되었어요.
그리고 12월 첫주말에 10여년만에 못보았던 고향산천을 방문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지병이 악화돼 국비로 광주시내의 요양병원에 입원중이었고,
가족들 대부분 다행히 광주시내에 잘 정착해있었어요.
먼저 매재댁에(여동생) 방문후 여동생과 함께 요양병원에 들려 어머니를 만나뵈었습니다.
안쓰러히 반기던 어머니께 고향소식을 듣던중 윗집 숙경이할머니가 돌아가신 이유가
홀연히 교통사고를 당해서였다는 뜻밖의 소식을 뒤늦게 알게되었습니다..

(삶의 십자가를 지시고 홀연히 떠나셨으니, 어찌하든 미안한 마음과 함께 천국에서 영면하시길 빌뿐입니다..)
병원에 있는 관계로 어머니도 고향을 자주 못갔지만 기회가 된다면 가끔씩 찾아보고싶다하여,
거동상담을 받은후 어머니와 함께 그리운 고향산천을 방문하였어요..


 










 

1#

  늦가을이 되면 오래전 양천리를 비롯 광산구 인근에선 무말랭이 수확이 한창이었어요.
광산구 신동에 위치한 내 고향에서도 무말랭이(신기루) 작업이 한창이었지요.
제 집안은 빈농이라 농지에 무우농사가 그리 풍족치 않은관계로
자체적 조달이 어려워, 주로 이웃마을에 일당제를 나간 곳중
큰토지에 속하고 생산가치 없는 잘잘한 무우를 많이 버려진밭에서
무우를(무말랭이 재료) 얻어와 작업을 하였어요.
특히 계량마을 인근의 부농밭에 버려진무우가 많이 있는편이어서,
그곳으로 가족단위로 나가 무우를 무상으로 얻어와 활용한 기억이나네요.
아마 그 부농의 후덕한 인심이 훗날 복으로 되돌아왔던것일까요,

몇년전 성골롬바노중학교 카페를 알게되어 나중에 카페글을 보던중,
요셉천사의집을(고아원) 이대호님이 운영하신다기에,
존함이나 얼굴도 처음본분이라 그런가보다했어요.
그러다 관련글을 유심히 보다 이대호원장 고향이 계량마을 인근이라시길래,
어렸을적 노안성당 입구 밭에서 무말랭이 재료(무우)를 얻게된 기억이 나면서,
무슨 보은할것이 없나 생각이 나던거에요.
하여 보은하는 마음으로 요셉천사의집과 병풍산하의 복지기관에 후원을 이어오고있어요.

 

 

 

 

 

 최근 제가 더 좋은 직업으로 이직을 준비중인지라,
잠시 시간적 여유가 있어 오랬동안 못갔던 고향집을 방문하고 고향산하를 들러볼까해요.

 

 

 

 고향 생각하니 고향산천중 저희집 성산에(금동 뒷산) 고인돌이 제일 먼저 생각이 되며,
 제일 먼저 반길듯 눈에 아른거리네요..

 


 

  2#

 △ 10여년만의 어머니와의 첫통화

일찍 출가했던 여동생이 3년전 편지를 하는덕에 집안 소식과 연락처를 알게되었지만,
과거 고향에 불편한 일이 있었던지라 어쩔수없이 가기가 망설여졌습니다.
여동생에 의해 가족의 연락처를 알았지만 고향을 생각하면 지나온 과거 고향 옛적의 않좋던 기억이 떠올라 그리움이 악몽이 되어 잠을 뒤척이기도 했지요.
(마이리틀히어로, 김영광을 보면 나의 삶이...; http://blog.daum.net/chmanho/16883715
삶의 십자가... ; http://blog.daum.net/chmanho/16883718 )
어찌하든 어머니가 이미 60이 넘은 고령인지라 살아생전에 뵙는게 도리라 생각되어,
오래간 주저하던 연락을 12월초 여동생과 어머니께 하게되었어요.

그리고 12월 첫주말에 10여년만에 못보았던 고향산천을 방문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지병이 악화돼 광주시내의 요양병원에 입원중이었고, 형제들도 대부분 광주에 정착해있었습니다.
먼저 매재댁에(여동생) 방문후 여동생과 함께 요양병원에 들려 어머니를 만나뵈었습니다.
안쓰러히 반기던 어머니께 고향소식을 듣던중 윗집 숙경이할머니가 돌아가신 이유가
갑작스런 교통사고를 당해서였다는 뜻밖의 소식을 뒤늦게 알게되었습니다..
(삶의 십자가를 지시고 홀연히 떠나셨으니, 어찌하든 미안한 마음과 함께 천국에서 영면하시길 빌뿐입니다..)
병원에 있는 관계로 어머니도 고향을 자주 못갔지만 기회가 된다면 가끔씩 찾아보고싶다하여, 거동상담을 받은후 어머니와 함께 고향마을을 방문하였습니다.

 

 



 




 

 

지난 2014년 8월 SBS에 방영된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에서 (802회 2014년 08월 07일 20:55)
부산 감천동에 신문배달을 하는 할아버지를 소개한적이 있었는데요,
방송에서 그 할아버지의 삶을 꾸밈없이 잔잔히 소개하며,
"거미줄 같은 골목길 곳곳을 35년간 달려온 82세 백발 신문배달맨, “인생은 아름다워~”라고 외치는 할아버지의 인생예찬론.."하였지요.
http://program.sbs.co.kr/builder/endPage.do?pgm_id=00000010099&pgm_mnu_id=14821&pgm_build_id=&contNo=cu0013f0080200

저도 서울에서 신문직업배달을 (한때는 자차 다마스로 1천부까지), 수십년째 해왔던지라, "저 할아버지 힘든구역을 맡아 고생이 많구나" 하고 애잔한 생각이 들더군요.
그리고 또한 "참 그곳 보급소 너무하네. 할아버지까지도 싸게 막 부려먹는구만!"
혹시 신문보급소에 알바라도 해본 사람이라면 저처럼 뭔가 번듯스치며 "저기 일하는 보급소 정상인가?" 하고 느껴졌을것입니다.
세상에 달동네같은 도시형 산동네를 400부 돌리는데 겨우 배달료 월60만원이라는것입니다.
그것도 근무하는데 10시간 가까히 허비하는데도 말입니다.
서울이든 부산이든 물가든 신문값이든 비슷한상황인바,
1부당 월배달료 최하가 1500원이며, 그것도 계단않타고 뭉탱이로 들어가는 빌딩인 경우가 그러하고,
계단 좀 타는 상가나 아파트 혹은 주택가의 경우는 최하가 2000원이며, 이것도 서울에서는 악덕 지국인 경우 그러합니다.
즉 정상적인 지국의 경우 신문 여러개 보는 빌딩, 상가(건물 관리인이 신문배분해주는)엔 1부당 월 2000원이며, 계단 좀 타는 상가나 아파트는 2500원, 주택가는 2500~3500원순으로 배달료를 책정해주지요.
그런데 부산 감천동에 그 신문배달 할아버지의 경우, 100만원을 받아야할것을 겨우 60만원을 받고 일하고 있다는것입니다.

만일 그보급소가 조선일보를 취급한곳이라면 본사에서 매분기별로 할당해주는 확장량이나
혹은 본사를 통해 신청온 독자는 몇달보다 끈어도 최소한 수년이상에서 몇십년가까이 유가지(보다 끈어 보지도 않은 독자인데  본사 전산상 실독자라 되있는것)로 밀어부치는등,
이러저러한 일방적 본사밀어대기가 있어 보급소 경영이 다른신문사보다 다소 어려워 약간의 작은노임 책정이 어쩔수없이 있겠다지만,
그리하더라도 주택가의 경우 최소한 1부당 월2000원은 줘야하는게 정상입니다. (400부 ; 월80만원)
그런데 무슨 신문을 취급한지는 모르지만(보아하니 조선일보는 아닌듯하고)
어찌하든 구독료는 부당 15,000원 공통인바, 그리 작은 배달료를 주고 부려먹는것도 기가차고,
 더 기가찬것은 그 방송을 본 일반국민 소회가 그냥 "참 노년에도 의미있게 열심히사네.."이더군요.
"임금피크제를 빙자한 현대판 노동착취가 아니냐?, 너무 싸게 막부려먹는거 아니냐?"이런 의견은 거의 찾아볼수없었습니다.
신문종편의 경우 본사밀어대기가 있어서 지국 경영이 다소 어려운점이 있다하더라도 저경우는 심했습니다.
그리고 신문보급소의 경영 어려움을 따지면 가판시장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최근 어떤 마트사장이 자신이 투잡으로 신문가판직업배달을 하고 있는데 과로 때문에 더는 하기 힘들어 다른 사람에게 자기구역을 인수하고, 자신은 자기가 벌여논 마트사업에 매진할까한다며, 저에게 신문가판배달일을 하지 않겠냐며 제안하더군요.
하여 근무환경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을 듣고 지입차 선탑하듯 한번 따라다녀봤습니다.
사무실은 낙성대에 있는 윤사장이 총판으로 운영하는곳이었는데,
1구역당 60~90군데 돌며 (출근: 밤23;30~24시 - 퇴근: 새벽05:30~06:00사이) 하여 급료 월200만원이라하여 긴가민가했는데 진짜였습니다.
그리고 다른구역은 모르지만 제가 인수맡을 구역은 배달범위가 좀 넓은 대신에 70군데도 않되었고,
코스요령등 요령만 알면 편한구역이었고 인수해주는 마트사장도 일하기 편하게 요령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런데 좀 놀라운것은 가판배달신문을 약1500부정도 챙겨서 계약 채결한 편의점,지하철 등에 다배부해 주고 전날것 수거해오는 신문이 평균 1000부가 넘었습니다.
그제야 인수해줄 마트사장이 실토하길 "내 구역가판이 못팔리면 300부이고 많이 팔리면 500부"라면서 "실제 내 구역은 관악에서 출발해 지하철가판이 개화역까지 가는
구역만 넓고 잘 안팔리는 적자구역이지만, 강남,여의도 구역에서 경영부분을 땔방해주기에 아직은 문제없다"며 이렇게 일하면서도 월200이니 이게 어디냐는것입니다.
정말 그런가하고 담당부장님에게 넌지시 여쭈니 "그 적자구역이 언제까지 있을성 싶으냐?"는 걱정어린 조에 마트사장에겐 태평한 소리하고 있다며 핀잔을 주는 모양이었습니다.
 즉 이 적자구역이 언젠가는 구조조정되 다른구역과 합쳐지든지 아니면 줄어들든지 하는 기로에 선 상황이기도 하였고, 하여 투잡하고 일하고 있던 마트사장은
구조조정 당하기전에 먼저 손털고 그만두자는 심상이었던것입니다.
그런데 마트사장님은 또 태평한소리를 하기를 설령 구조조정하더라도 당장은 아니고 전에도 이렇게 수년이상 가판사업이 버텨왔듯이 그리할것이다는것입니다.
그러나 혹시 어찔될지몰라서 저는 불안해서 이구역 인수못맡겠다며 하고 인수를 접었습니다.
신문가판이 못팔리는 구역이 평균 1일 400부라 치면 1부당 월배달료가 5000원이라는 셈이고, 원래 가판시장은 배달료가 1부당 못해도 3500에서 많게는 5000원이상이라는것입니다.
아니 신문보급소라면 그리 배달료를 줄라치면 아이고 나죽네하고 직원에게 죽는소리하는곳이 줄줄이인것과 달리 가판시장 왠만한곳은 그게 아니라는것이었으니,
순간 자선사업가나셨네 할정도로 이런 잡(JOB)시장도 있구나 느껴졌습니다.

출처 : 김광수경제연구소포럼
글쓴이 : 채널만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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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이 다가오면 그리운 고향을 오래간만에 가게되어 많은 분들이 설레이실것입니다.
일반에겐 설레는 명절이지만, 저에겐 늘 우울한 명절이었고 앞으로도 그럴것같습니다.
명절에 고향에 못가는 경우라면 연세드신 실향민이거나 고아인 경우일진대,
현제 고아아닌 고아가 된 기구한 제 삶 또한 그러합니다.

오래전 저의 개인삶의 글을 읽어 보신분은 사유가 어찌한지 대략 짐작이 가시리라 봅니다.
'하늘이 주신 선물- 청지기처럼 살면 득탬이 가득~..'
(
http://cafe.daum.net/kseriforum/9Q8k/28233)
좀더 구체적인 이유는 '삶의 십자가 - 내게 십자가사랑 주신 은사님을 생각하면 늘 감사할뿐입니다.'에 기록이 있습니다. http://blog.daum.net/chmanho/16883718

제 가문.집안을 대략 다시 소개하오며,
고향은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동으로 가난한 농가의 전쟁고아 집안입니다.
원래 본 고향은 한국전쟁 전후까지만해도 뒷마을 나주시 노안면 금동마을로
(임야)성산에 조상 소유의 간접적인 연관이 있는 고인돌이 있으며,
집성촌 당시때부터 동네 토우(유지.유림)에 속하는 좀 부유한가문이었다고합니다.
http://cafe.daum.net/sdsms/2R8A/12

그런데 한국전쟁때 저희 할아버지는 북한무장공비로 추정되는 괴한에 의해 납치.실종을 당하셨고,
할머니는 전쟁 후유증에 지병까지 겹쳐 끝내 일찍 운명을 달리하셨습니다.
하여 제 아버지는 어렸을때 뒷 마을(내기마을) 고씨성의 부자농가에 의해 자랐고,
후에 내기마을에서 독립은 하셨으나 가난한 농부였습니다.
가문의 재산을 본가 '금동마을'의 (큰형)큰아버지가 대부분 물려 받은터라 그런듯했습니다.
 지금은 고인이된 아버지는 어렸을적 당시 친지나 이웃에게는 좋게 다정히 대했지만,
어머니에게 자주 화풀이하고 자녀들에게도 좀 쌀쌀하게 대하고 학대를 했습니다.
이렇게 아버지로 인해 집안의 부부 싸움도 잦았는데,
어느날 (초등학교 들어가기전 유년시기에) 집안의 부부싸움 며칠후,
제가 어머니에게 무슨 투정을 한것도 아니었는데,
집에서 어머니는 갑자기 뭐라 짜증을 내며,
저에게 맞아 죽거나말거나 막무가내로 부억칼을 던지었고,
그칼이 그대로 머리에 맞아 꽂히어 피가나는 부상을 당했습니다.
하여 갑작스런 어머니의 칼던짐에 머리부상이 돼 사경을 해맸으며,
부상 휴유증과 적지않은 정신적 충격을 받았습니다.
당시 아버지는 자주 술을 마시고 주정을 하면서 자녀를 학대하며 괴롭히기 일수였고,
어머니는 그러지않으셨어야하는데 어느날 칼을 맞는 극단적인 경우를 격고나니,

정신적 충격으로 그때부턴가 어느덪 부모님 모두에게 마음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명절이 되면 직장생활에 찌든 맘을 달래주는 고향이 되야하지만,
이미 집안 또한 마음의 안식처가 아니었습니다.
전에 잘살다 전쟁으로 인해 가세가 기울어서라한다해도, 오붓한 정감이 오가야되는데,
 아버지는 별로 반기지 않으셨고, 돈이나 많히 벌어왔는지 하는 눈치였습니다.
누나도 중졸후 바로 취직했는데, 명절때 누나에게도 돈이라도 벌어왔는지 하는 눈치였고,
돈을 얼마 않가져 온것을 보시고는, 어머니마저도 등뒤에다 대고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어머니만큼은 차마 저에게 아쉬운소리를 잘 않하는편이었는데,
누나에게 대하는 태도를 보게되니 심적으로 너무 힘들었지요.
그래서 속으로 그랬습니다. "죄송해요, 아버지 어머니, 나중에 돈 많이 벌어서 올게요.
만일 돈 못벌어오면 앞으로는 오지 않을게요.."

그후 오래전(2002년) 어머니와 누나의 매형과의 전화통화후 그것이 마지막 통화로,
만나지도 못한체 어느덪 10년이 지났습니다..

저의 사연을 보고 가세가 기운것이 혹시 지난 한국전때 남침한 북괴 때문이라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지극히 편파적인 사고인바, 잘못 짚으셨습니다.
원인은 천민자본주의 때문입니다.
전쟁이야 격동기때 남북한 모두 서로 못잃으켜서 안달이였기에
먼저 일으킨 북한에 대해 한마디 할수있겠지만,
그렇다고 남한이 정치.외교에 초연하지는 않다는사실입니다.

(성경에도 마음으로 누구를 증오하면 이미 죄를 저질렀다고 말합니다.)
저의 가문이 부자였기에 평소에 불우이웃에게 배풀거나 머슴에게 잘 대해 드렸다면,
북한무장공비로 인한 고의적인 화는 않당했습니다.
한국전 이후 작고한 할머니와 큰집 어머니께서 용서와 화해등을 말씀하셨다고하는데,
마을 인근에 전파된 천주교회와 기독교회의 말씀도 있었습니다만,
직접적인것은 말로만이 아닌 살아있는 공산당에 대한 문화적 충격을 받아서입니다.
그들은 실로 대장이나 졸병이나 같은침상에 같은밥을 먹으며 잠시 내려와 머무는 동안에 민생을 살피는등,
반공쟁이가 말한 무슨 무자비함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어떤 아집이 아닌 뚜렷한 사명을 가지고 움직이는 집단이었다는것을 목도했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때 온마을이 사랑이 넘쳐났다고 했듯이, 지금의 공산당은 북한이나 중국이나 좀 초심을 잃은 모습입니다만,
당시에는 좀 무얼하려는 사명과 행동이 있었긴 있은 모양입니다.)

이러한것을 보고도 한국전이라는 패해의식에 못이겨 '북괴!"어쩌며 이만 간다면, 이또한 감정에 억매인 모난 단세포적 인간상이며,
지금의 수구보수층이 그러하며 기득권 수뇌부 또한 그러하니 참으로 딱하지 아닐할수없습니다.
진정히 복수하고 싶다면 공산당 이념을 뛰어넘는 진정한 복지사회와 이데아나라를 펼치면 되는것입니다.
그러나 복지의 초석인 '노블래스 오블리주'조차 못하는 주제인 상태에서,
그저 반공하며 복수라는 감적이입에 머뭄으로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정치가 공안이 판치고
사회양극화로 민생이 후퇴하고 있으니 한심하지 않을수없습니다.

 

 

지금만보더라도 저의 고장 광주.광산구에는 정치소신이 불분명한 김동철의원과
고향은 다르나 이와 연이 있는 손학규전의원 등 호남계라는 정치에 썩 신통치않은 인물들이 포진되어 있고
주민들 또한 천민자본주의자가 종종 있기도하니,

고향하면 그리 썩 내키지도 않을뿐더러 왠지 피곤하다는 느낌입니다.
http://cafe.daum.net/antimb/HcaD/2287
광주가 민주화의 산지라고요? 민주화에 헌신하고 민주시민이 좀 있으시니 그러하겠지요.
그러나 그저 자본을 쫒아 사는 속물들 또한 적지않은게 사실이며,
제 가문 또한 그러했으며 그런 여러마을주민들 직간접적으로 봐오기도했습니다.

단적인 예로 고려인동포가 많이 거주하는 광주 월곡동 단칸방이 월세 30만원으로
서울.수도권 못지않게 높은월세를 받아먹는 인간들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주위는 어떻습니까? 주위를 돌아보면 왜 이사회가 이지경인지 대충 가늠이 되리라봅니다.
우리사회에 있어서 지상과제가 있으니 하나는 '천민자본주의' 타파입니다.
이제 글을 줄이오며, 편안하고 초연한 명절이 되시길 빕니다.

 

단기간 물리적으로 남북합치는 흡수통일은 망상이다, 장차 연방제만 가능할 것.

한반도(코리아) 통일하면 독일처럼 체제가 합치어 비자 없이 자유로이 왕래하고 교역.교류하는 것을 생각하는 분도 있는데, 이것은 수십년쯤에나 가능한 것으로, 당장 몇년에는 전혀 실현 불가능한 망상입니다.
한편 몇년이후로도 가능한 통일안이 있는데, 오래전 진보정치인 권영길이 제시한 고려연방제입니다.
고려연방제란 상호 체제를 인정한 상태로 조건부비자를 통해(부작용이 없으면 비자조건 완화) 남북을 왕래하며 교역.교류하는 것을 말합니다.

참, 여기서 왜 남북이 체제를 허무는 완전한 통일이 단기간 몇년이후로는 불가능할까요?
이는 남북 모두 싯지못할 실수와 앙금이 있어서이죠.
북한이 고난의 행군을 하는등 경제적으로 어렵게 된 이유가 한.미 공조로 추진된 경제제재인데, 이것은 북한 기득권뿐이나라 인민대중까지 원망이 높다 못해(수만은 아사자 대부분이 인민임) 미국에 원한이 된 지경입니다.
남한의 기득.수구권이 친미를 통해 북한을 경제제재를 하고 무역 봉쇄정책을 펴 압박하는 외교를 꾀했는데, 이것은 한반도 장래를 생각할때 잘못된 행위입니다.

한편 북한은 남파간첩사건 및 연평해전 등 국지적 도발을 일삼았기에 대한민국 서민에게도 북한이 좀 불편한 존재이긴 사실이죠.
(다만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인혁당사건, 천안함사건, 국정원의 왕모 사업가.유우성 간첩조작 사건, 최근 비무장지대(dmz)지뢰폭발사건 등은 한.미가 원인을 제공했거나 조작극)
연평해전의 경우 대한민국 월드컵축제 당시 진보계의 노무현 참여정부시절때 일어난 사태라 더욱 충격이 큰 것으로, 진보정부 상태에서도 북한이 도발을 했으니, 북한을 흡수해 통일한다는것 자체가 얼마나 망상인지 알수있습니다.
지금처럼 수구정권이라면 더더욱 택도없거나 추진된다해도 이념점쟁이 심화돼 국론분열이 더욱 격화되고, 사회양극화로 폭동.소요사태도 발생돼 거의 도루묵 통일이 예상됩니다.
즉 남한의 가진자들이 무엇을 나누는 사회환원정신이 모잘라 북한인민을 저임금에 일을 부려먹겠고, 상대적으로 극빈층인 북한인민들이 반발심으로 부자들 사업체를 약탈.방화, 이에 기득권과 수구보수가 합작해 관재대모를 하게되고, 이에질세라 쇠파이프 등을 동원해 보수를 아작 내는등, 여지껏 보지 못한 환상의 시추레이션이 펼쳐지겠죠.
이렇듯 설령 가능하더라도 후폭풍이 큰것으로 현제 남남갈등은 아무것도 아닐 정도로 소요사태가 발생되 도루묵 통일인 것입니다.
다만 다음 정권이 민주인사인 정부로 바뀌면 가능성이 있겠습니다만, 민주참여정부시절에도 격한 연평도발이 발생했으니, 평화의 남북화합일지라도 단기간의 흡수통일은 이 또한 망상입니다.

최근 한반도 비무장지대(DMZ) 지뢰폭발사건이후 한반도 주변정세가 급변하는등 아이러니가 생기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국방부에선 북한군이 DMZ에 침입하여 지뢰를 매설해 벌여진 사건이라 단정하고,
휴전선에 대형 확성기를 설치해 북한당국을 비방하고 대내외적인 공세를 펴며 압박했습니다.
이에 북한은 비열한 모략극과 공세를 중단하라며 이런 식으로 물리력을 동원해 북진까지하려든다면 무자비한 응징만이 있을것이라며, 마치 쐬기라도박듯이 준전시 비상사태를 발동하고 휴전선 인근.후방에 단.장거리포를 대거포진하고 핵잠까지 포함한 50여척 잠수함도 포진, 비상대기를 하는등, 이로 인해 한반도 전시위험 사태를 방불케 했습니다.

 

한편 중국은 북한군의 비상.군사행동을 앞두고, 중국군을 북한 접경지역에 탱크-장갑차를 집결하고,
외교당국자 5명을 극비로 한국靑 방문해 물밑 접촉하는등, 한반도 정세에 관여했습니다.
이미 중국군은 작년 10월 동북 3성에서 한반도 유사시 투입하는 기동주력 부대를 동원해 북한의 급변에 대비한 대규모 군사훈련을 실시했습니다.
당시 '연합행동-2014E'라는 작전명을 붙인 훈련은 선양(瀋陽) 군구 주관으로 제39집단군과 공군을 주력으로 각종 군종과 병종 부대 2만명이 참가했으며,
앞서 39집단군은 2013년 12월 백두산 인근에서 동계훈련을 했고, 작년 4월에는 실전 능력과 신속배치 기동력을 강화하려는 훈련도 했습니다.
(참고글 ; http://cafe.daum.net/sisa-1/mvOx/746 , http://media.daum.net/foreign/others/newsview?newsid=20150823172208694)

 

이렇듯 전쟁으로 북을 얻을 수 있다 생각한다면 천하바보입니다. 급변사태로 한반도에 전쟁이 나고, 북이 전쟁에 승산이 없고 불리하다 싶으면 공산당은 조선을(북한땅) 중국에 받치겠다는 각오까지 하고 중국개입을 긴급히 요청할 것이며, 중국은 이미 준비한대로 남한 역공과 전후 수습에 전격 나설 것입니다.
그도 그럴것이 북한은 중국의 막대한 무상원조 외 많은 차관이 있습니다.(중국의 대북무상원조만 보더라도 대한민국 대북원조는 애들 껌값에 불과하다 합니다.)
경제특구만하더라도 중국사업체에 많은 부동산.땅(자원이 매설돼있는 막대한 토지도) 자체를 내주어 돈과 맞바꾼지 오래인 실정입니다.
하여 유사시 중국은 북한에 투자한 경제 및 차관회수 명분으로 재산권 행사 차 반드시 진군을 합니다.

 

그러면서 중국이 한편으론 외교당국자 5명을 극비로 한국靑 방문해 물밑 접촉을 하고, 2015년 8월 30일 미 백악관 라이스보좌관과 북한문제를 논의하며, 미국이 확전을 피하기 위해 북한을 중국과 분할 통치하는 방안에 응대한 것은 흥미로운 일이며, 중국의 복잡 다난한 속내를 엿볼수있습니다.
(참고글 ; 푸틴.. "미국이 시베리아를 빼앗으려 해"  http://cafe.daum.net/revelation1/ImMq/4114
미국의 한반도 플렌 http://cafe.daum.net/revelation1/ImMq/4115 )
작년에 한중 정상회담서 “북한 동북4성 편입 생각있나” 朴대통령 질문에 中시진핑 부인 “南주도 통일 지지” 했습니다만, 이러한 환담을 이제 중국이 지킬 필요가 없음은, 朴대통령 스스로 이질적인 대내외 행보로 파톤이 났기 때문입니다.
최근 중국의 오래간만의 열병식에 대한민국 박대통령이 중국의 초대에 응하고 박통이 중수석에 한반도 평화통일을 예기했습니다.
그러다 이후 한미외교 행보에서는 유사시 전쟁도 구사할수있는 흡수통일을 예기하고 다닙니다.
즉 보수층을 위시하며 전쟁도 불사하는 흡수통일 구상하다 중국에 평화를 예기했으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빈말임은 그 이후 다시 보수적 흡수통일 구상인 것입니다.
그럼 그렇지 하며 주변 열강은 한반도에 어떤 부담감을 갖을 필요 없이 그들의 이로운대로 판도를 판단할 수도 있게 됐으니,
장차 제3차대전 아마겟돈의 서막이 IS에 의하여뿐아니라 미국의 야욕 혹은 한반도 급변사태로 일어날수도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전쟁시 설령 대한민국이 유엔연합군의 도움으로 어찌어찌해서 전쟁승리를 한다해도 돌아오는 것은 6.25때보다 더 처절한 공멸같은 폐허 속의 헛된 승리이며, 그로 인해 이익을 보는 것은 미.중.일.러 등 주변 강국으로서 이들에게 전쟁패해복구에 막대한 차관과 지원품을 받아야할것이며 남는 것은 빚더미입니다.
북한정권에 핵포기만 시킬수있다면 북한체제를 붕괴시킬수있다는 생각이 한국 지성인에게도 있습니다만, 이 또한 모를 가변성이 있습니다.
북한이 핵포기를 하되 태국과 버마처럼 경제는 개방하되 군사독재 장기집권을 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리하게되면 한국 또한 신유신독재가 도사리는 마당에 한.미는 북한에 더이상 외교간섭을 할수없게되며,
중국도 미국에게 한반도 정세에 더이상 신경을 끄라고 종용할것입니다.

 

현제 미국은 암암리에 동북아경제권을 확보하기 위해 시베리아와 만주를 러시아로 분리독립 시키려고 계획 중이며, 중국의 개입을 무마하기 위해 북한땅을 중국에 내주는 제안을 하고 있습니다만 속내는 따로 있습니다.
그리한 후 중국에 편입된 북한지역을 중심으로 북한자치구(조선인이라 불리는 북한인민) + 간도(조선족과 중국에 이미 넘어온 조선인) 독립운동을 자극하고 그와 연대하여 소수민족 독립운동을 지원해 중국을 흔들겠다는 속셈입니다.
중국이 북한에 긴밀한 외교 외에 다변화적 외교를 하고 있음은 조선인은 신장.위구르족보다 더 골치 아픈 소수민족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10년전 유엔이 북한에 안보리 경제제재 조치에도 불구하고 중국이 비공식으로 북한과 교역을 대폭 확대하며 무상원조까지 해주었고, 북한에 나진선봉 등 경제특구를 세워 주었지만, 중국기업인이 노무(급료)를 밀리면 장비를 압류하기도 한다 합니다.
그리고 중국 첩보원이 발각되면 가차없이 처단하며, 최근 친중 고위간부 장성택 숙청으로 북중관계가 약간 서먹해지기도 했습니다.
조선인 성격만 봐도 다소 호전적이니 대한민국 민족주의자의 간도회복 염원은 현제 구상만 있을뿐 실천.실현성은 부족하여 공염불에 불과하겠지만,
조선인이(북한) 한다면 기회를 엿봐 할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중국사람의 뇌리에 존재하기도한다합니다.

 

마무리하며, 서두의 남북통일 논단에서, 통일은 단계적으로 하여,
우선 상호 체제를 인정한 상태로 조건부 왕래하며 교역.교류하는 '연방제' 통일을 구상해야할것이며,
이것이라도 실현 가능하다면 한민족의 큰 과업 달성이라 생각됩니다.
감사합니다.

출처 : 시사평론 - 정론직필을 찾아서
글쓴이 : 채널만호 원글보기
메모 :

나주 계량마을 100년의 역사, 노안성당 

출처: KBC 광주방송 '남도의 보물(寶物) 100선' 33회(2015년 09월 05일 오전 방영)

동영상 다시보기 : http://youtu.be/os89n2VWQgc

http://www.ikbc.co.kr/jw_2ds/index.html?code=namdo05&mode=list&type=&page=&keyfield=&key=&menu_id=57:94:96&uid=250761&mode=view

 

 



 * 나주 계량마을 100년의 역사, 노안성당  포토(캡쳐) 하이라이트



 

 

 

 

 

 

 

 

 

 

 

 

 

 

 


 

 

 

 

 

 

 

 

 

 

 

 

 

 

출처 : 성골롬바노중학교
글쓴이 : 신만호 원글보기
메모 : ..

  우리는 주변에서 경제적으로 살아라. 이 것은 경제적이다. 이건 경제적이지 못했다... 이런 식의 말들을 많이 듣는다. 이런 말들에서 경제란 가지고 있는 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란 의미이다.따라서 경제적이라는 말에는 자원이라는 단어가 빠지지않고 등장한다. 보다 적은 자원을 투자해서 보다 많은 것들을 생산하는 것.. 이 것이 경영학의 주요 개념이며 경제학에서도 경제의 효용성을 지칭하는 말이 된다. 이런 개념으로 현재의 자본주의경제는 자원을 소모해가며 발전해 왔다.


      20세기 석유의 등장은 자본주의 경제체계를 한단계 위로 성장 시켜 놓았다. 막대한 에너지응축량을 가진 석유는 가공하기도 운송하기도 쉽고 매장량도 풍부한 최고의 자원이었다. 20세기의 부는 석유에서 나오고 석유로 발전했다고 해도 전혀 과언이 아닐만큼 석유는 우리생활에 너무 크게 자리 잡고있다. 또한 지금의 사회시스템은 고에너지 소모체계이기도 하다. 지금 세계는 석유,석탄,바이오연료,원자력,수력,풍력,태양광,태양열등 수많은 에너지원을 새로 개발하고 개선하면서 현재의 물질문명사회를 유지 발전시켜나가고 있다. 지난 20세기초에서부터 현재까지 세계인구는 11억에서 56억까지 5배이상늘었고 경제규모는 40배이상 그리고 에너지 소비량은 10배이상 늘었다.


      우리는 자본주의에서 경제라고 하는 개념이 항상 자원은 주위에 존재하고 있으며 그 자원을 효울적으로 사용하는 개념으로 이제까지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자원은 항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 것들은 사라지고 있다. 따라서 있는 자원들을 소모해 효율적으로 사용한다는 경제학의 개념은 이제 전환을 모색할 때가 되었다. 지속가능한 환경과 자원의 소모속에 가장 효율적이라는 명제로 경제학은 그 전환을 모색해야한다. 그 이유는 바로 자원이  고갈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부의 단계를 통해 향후 우리에게 일어날 일들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볼 수 있다.왜냐하면 부의 단계마다 그 크기와 복잡성이 증가하지만 필수 불가결한 요소들이 존재하고 그 것들은 곧 붕괴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의 단계를 이해하는 것만으로 향후 벌어질 일들에 대한 전망을 스스로 해볼 수 있다.


      우선 부는 3가지의 단계로 이루어진다.첫번째 단계는 인간의 노동력으로 자연에서 산물을 얻어내는 것이다. 농사라든가 임업, 노면에 존재하는 광산업등의 잉여생산물을 통한 부의 중가이다.이 1단계에서 인류는 선사시대이래후 원시경제의 시작부터 거의 18세기(AD1760) 산업혁명전까지의 시기를 보낸다.부라는 것은 인간의 노동력의 산물인 관계로 저장할 수 있는 크기만큼의 부가 인정되던 시기이다. 그런데 산업혁명이후 세계의 부는 크게 변화한다.인류가 사람의 노동력과 자연의 에너지(풍력,수력-물레방아)만을 사용하던 것에서 농축된 에너지인 화석에너지(석탄,석유)를 사용하면서 부의 크기가 엄청나게 늘어나게 된다. 생산혁명은 그 당시 서구사회에 인간의 노동력을 천시하게 만들고 기계문명을 발전시켜 부의 집중이 상위로 쏠리게 만들어 버리는 결과를 낳았지만 전체적인 부는 크게 팽창한다.1차적인 부에서 2차적인 부로  부의 개념이 바뀌게 되는데 가장 큰 동력을 제공한 것은 화석에너지(석탄,석유)였다.


      이 부의 물결은 아직도 우리의 주변에 점점 강화되며 커져가고 있다.20세기에 들어오면서 인류는 또한번 숫자로 표기되는 커다란 부의 팽창을 맞이하게 된다. 이것은 금융활동에 의한 부의 팽창이며 이 부의 팽창이 가능한 것은 바로 신용사회라는 슬로건이었다. 신용화폐하는 개념이 브레튼우즈채제이후 등장하면서 이 신용이라는 개념은 사회전체로 확대되어 신용버블을 일으키게 되었고 실체가 없는 부의 엄청난 증가가 20세기와 지금까지 일어나고 있다.2007년 금융위기는 이 거짓신용에 의한 부가 끝장이 났다는 선언이며 이미 신용사회는 그 힘을 급속히 잃어가고 있다. 주요국들의 신용화폐는 이미 대규모이 화폐발행으로  그 가치가 축소되고 있고 곧 신용붕괴를 통해 세번째단계의 부가 시작되었던 그 당시의 크기로 무너지게 될 것이다.그래서 그동안 부풀었던 신용사회의 거품들은 결국 실물기반의 경제위에 그 초라한 실체를 곧 공개하게 될것이다.


      문제는 여기서 이 붕괴가 멈추지 않으리라는 사실이다.1차적인 부에서 2차적인 부로의 팽창을 만들었던 절대적인 요인인 에너지(화석에너지)가 이제 곧 고갈이 되게 된다. 이는 경제의 구조를 송두리째 바꿔버릴 것이며 에너지의 공급이 현저히 줄어들 경우 인류는 다시 2차적인 부의 붕괴를 목도할 것이다.이로 인해 현재 우리가 보는 것보다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경제적 붕괴가 일어날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물론 대체에너지를 말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지만 대체에너지의 현재 에너지대체율은 터무니없이 낮고  비율을 높일 수 있다 하더라도 현재의 석유로 집중되어있는 에너지순환체계를 대체하는데에는 많은 시간과 비용이 소모된다.




위의 표는 현재 확인된 석유의 매장량이다. 기준 가채년수는 평균적인 에너지소비를 기준으로 작성된 것이고 피크오일이 지난시점이후 비용상승에 대한 부분이나 에너지 사용증가폭에 대한 설정은 보수적으로 설정되었다.



      지금 위로 보는 표는 전세계의 산유량의 변화에 관한 표이다. 2015년을 지나는 지금 시점은 생산꼭지(피크오일)을 지난 시점으로 향후 원유의 감소량이 눈에 띄게 늘어날 것이다.에너지는 지금의 복잡한 경제사회를 이루는 근간이다. 에너지 없이는 현재의 사회,경제적시스템은 작동할 수없다.그리고 그 에너지의 근원인 자원이 사라져 가고 있다. 인류는 고작 200여년의 시간동안 지구가 가지고 있던 30억년의 농축된 태양에너지를 다 소모해버리고 있다. 앞으로는 우리가 마주치는 순간의 태양에너지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그렇기 때문에 이제 경제적이라는 말은 점점 의미가 퇴색하고 았다.이제는 지속가능한 환경적 발전이 이루어져야하며 우리모두는 좀 더 소박한 삶을 살아야한다. 이제까지의 경제시스템은 자원소모량을 극대화해서 2차적인 부를 만들고 이를 신용으로 뻥튀기해서 3차적인 버블을 쌓았다.우리가 목도할 상황은 이 모든 것이 무너지는 현실이다.


       앞으로 우리의 경제시스템이 무너지게 되고 새로운 변화를 맞을 것은 확실하다. 경제위기가 아니더라도 자원이 소모되는 순간 이미 다 끝난다.아니 자원의 채굴량이 급속히 감소하기 시작할 무렵 대격변이 다가올 것이다. 물론 지금의 신용화폐는 당연히 붕괴할 것이며 지금 붕괴하고 있고 우리의 경제활동의 근간이 자원도 곧 우리에게 보복을 시작할 것이다.이제 우리가 할일은 우리 주변의 에너지 과사용을 줄이는 생활방식을 가져가는 것이고 변화될 환경에 대해서 생존하고 샹활이 가능하도록 지금부터 우리의 삶을 천천히라도 바꾸어 나가야한다. 이제 우리에게는 정말 시간이 별로 없다.


출처 : 김광수경제연구소포럼
글쓴이 : To the Sky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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