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문: 문재훈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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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
작은 누나가 전화를 한다. 목소리에 탱탱 생기가 담겨 있다.

축하한다. 예? 민주노동당 5석이나 됐잖아. 5석이나?! 지금 염장 지르나 그게 후퇴지 축하야. 야야 배부른 소리 마라 난 1석도 안되는지 알고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데.. 괜히 나눠져 갔고 말야.

권영길, 강기갑 노동자 농민 대표의 상징적 승리가 왜 기쁘지 않겠는가. 차포가 사라진 장기판에 마와 상으로 5졸로 버틴 장기판에서 기사회생을 한 셈이니 말이다. 하지만 겨우 죽음을 모면했을 뿐이다. 후유증도 장차 닥칠 새로운 합병증도 그 어느 것도 쉬운 것이 없다.

이번 총선은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말이 진실임을 알려줬다. 창단 한 달도 안 돼 3%가 다된 저력을 위안 삼는 것도, 의석을 유지했다는 상징을 위안 삼는 것도 아직 소 잃고 외양간 고칠 생각도 없다는 것을 말해 준다.

우선 후보들이나 선거운동원들은 고백해야 한다. 합쳐 17대 민주당 정도의 고정표를 나눠가진 3~4당이 선거운동 중에 들은 가장 많은 대중들의 지적이 무엇인지. 내가 들은 가장 많은 비판과 아쉬움은 분열 그 자체에 있었다. 아닌가. 종북주의도 분열주의도 아닌 분열 그 자체를 보는 대중에게 우리의 피해자 의식은 그렇게 중요하지도 절실하지도 않는 문제였다.

반성과 혁신이 내부적인 문제로 대두가 될 때도 우리는 그 방향을 우선 문제 삼을 줄 알아야했다. 진보적 과제에서 또는 사회 변혁적 과제에서 자주와 평등을 분리하는 것은 과학적 관점도 역사적 안목도 취하지 못하는 우둔함이다. 민주노동당이 대선에서 국민의 지지를 충분히 받지 못한다고 했을 때, 그 패배 앞에서 정말로 우리가 진지했다면 어떻게 했어야 했을까?

우린 3%를 패배적 관점으로 보는 것은 자기에 대한 과대망상이라고 생각했다. 국민들에게 민주노동당이 대표하는 진보정치는 아직 심판의 대상도 못됐기 때문이다. 그것은 총선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의미있는 심판은 오직 울산에서만 있다는 것이 냉정한 판단일 것이다.

또한 이번 대선 총선투쟁 즉 07~08을 하나로 묶어 보아야 한다고 했다. 우리가 이것을 하나의 과정으로 보자고 한 것은 민주노총 민주노동당으로 이루어진 민주노동당 1기가 꺾이는 시기이자 87체제 또는 95~97체제로 말해지는 한 시대가 접히는 과정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런 시기는 각 영역에서 자기 강령과 정치적 의제를 정비하고 정립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이런 시대적 과제를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에 대해 우리는 당연하게 가능한 변혁적 조건에서, 가능한 유리한 조건에서, 가장 위력적인 방법으로 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 중차대한 혁신 발전의 기회와 시기를 유실했다. 아니 우리는 대선과 총선의 격랑을 버티지 못하고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 는 속설의 생체실험대상이 되고 말았다. 최악의 과정을 거친 것이다.

2. 자주와 평등이란 날개
민주노동당의 발전의 길은 시대에 순응하거나 적응하는 것이 아니다. 이른바 자주파 진영의 정세 판단의 본질적 한계 중에 하나는 6.15라는 거대한 민족사적인 흐름을 타는 것에 만족했다는 것이다. 보다 본질적으로, 보다 전투적으로 나가는 것에 운동의 진취적 기상을 잃고 말았다. 그래서 자주와 통일의 과제 통일과 반미의 과제는 진보운동 선상에서 통 큰 결합, 상승의 배합을 하지 못했다. 이것 또한 진보는 시대를 넘어서는 것임을, 틀을 깨고 나서는 것임을, 우리의 자주 통일운동은 6.15라는 범주를 넘어 더 나가야 하는 것임을 간과했다는 것이다. 이런 나아감이 없으니 당연히 틀 거리 안에서 자신들의 전략과 계획을 관철시키고 다른 견해를 순치시키려고 했다. 결국 정세를 사수하다 정세의 퇴행에 밀린 것이다. 그리고 이런 과정이 종종 그 색깔은 달리했지만 자주파 내부의 종파적 폐해의 본질을 구성했다.

더 크게는 모든 운동 진영은 소련의 몰락에 좌절하고 실망하며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바뀌는 세상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변혁의 전망은 휘발되고, 계급적 변혁적 이론은 낡은 것으로 몰렸다. 혁명의 꿈은 비웃음거리가 되었다. 때론 새로운 좌파라는 이름으로, 때론 녹색, 환경 등의 이름으로, 때론 생활이라는 이름으로, 신자유주의 반동의 시대에 맞서 투쟁하자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적응하여 변화자는 말이 낡은 이라는 수식어 속에 요동쳤다.

이것은 명백하게 역사와 계급 그리고 변혁에 대한 패배적 청산주의였다. 이런 청산주의의 담론들은 종북 논쟁에서 그리고 민주노동당의 분열과정에서 극을 이룬 것이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우리는 혁신과 변화, 그 방향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하는 이가 너무도 적었다는 점이다. 청산주의를 강화하고, 신자유주의 흐름에 대한 적응을 강화하는 흐름만이 혁신이라는 이름으로 좌우를 막론하고 남발되었지만, 속 내용은 좌우를 통 틀어 크게 다르지 않았다.(심상정 비대위와 천영세 비대위 안 차이에 뭔 차이가 있었던가.) 체제내화, 의회주의 즉 우경화로의 경로였을 뿐이다.

그러나 현실은 이 흐름이 아니라고 한다. 신자유주의 시대와 정면으로 대결하기 위해 반자본과 반미, 반제를 강화하지 않을 수 없다. 6.15 시대를 넘기 위해, 아니 이제 지금은 6.15시대나마 지키기 위해 합법적 정부적 힘이 아니라 거리 투쟁이 강화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런 측면에서 이전의 민주노동당은 투쟁의 집중성과 다양한 투쟁을 종횡으로 엮는 기획성을 전혀 살리지 못했다. 의회투쟁과 거리투쟁은 종종 괴리되었고, 의원과 당은 당원 주체적 관점에서 일치하지 못했다. 지도부는 무능했고 지배 언론과 밀착한 체제내화의 유혹은 강력하게 상층 중심의 스타 시스템을 강화했다. 그것은 자못 위력적이었다. 노회찬과 심상적의 사당(私黨)적 분당과 강기갑의 당선은 스타시스템의 장점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준 셈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흐름의 연장으로 혁신이라는 이름의 우경화는 전개되었다.

이런 흐름의 선지자였던 민주노총 내 국민파 부류들의 시대가 오고 만 것이다. 그래서 총선 이후 민주노동당의 행보는 더욱 중요하게 되었다. 우리는 믿고 싶다. 자주라고 하는 날개에서 평등이란 날개로 전진하던 흐름과 평등이란 날개에서 자주라는 날개로 접근하던 흐름이 비록 행복한 도킹을 하지 못했지만 자주라는 날개가 여전히 평등의 날개로 가야할 것이며 그것이 흐름이라는 것을. 그 방향에서 민주노동당의 자기 정체성과 시대 정신이 구현되어야 한다는 것을.

3. 적응이 아니라 저항, 더 깊고 넓은 진보 정치로 나가자.
자주가 낡으면 얼마나 낡았을까? 자본주의 야만 신자유주의만큼 낡았을까? 민족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히틀러 식으로만 작동하는지, 그러는 이들이 이라크에서 쿠르드에서 티베트에서는 왜 그렇게 민족적인지 진지한 성찰이 없다. 그래서 나온 것이 ‘진보를 바꿔 민생을 바꾸자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노동자 농민의 계급 대중조직을 버리거나 분열시키는 위험을 감수했지만 10%에 불과한 진보를 바꾼다고 민생은 바꾸지 않을 것이다. 현실에서는 초라한 보수와 보수적 정치, 돈만을 바라는 양아치 의식만 극대화만 가져왔을 뿐이다.

민주노동당이 가야 할 길은 전 국민 직업의 노가다화, 전 국민 의식의 양아치화에 맞서는 정치와 전망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저항의 힘은 물론, 꿈꿀 자유마저 앗아가는 지독한 신자유주의 체제와 개발론에 기댄 정치적 보수화에 맞서 민주노동당이 할 일은 투쟁하는 것 그 자체에 있다. 강기갑의 당선이 우리에겐 끝까지 한미 FTA에 맞서 단식투쟁을 했던 바로 그 모습의 승리로 보인다. 바로 그것이다. ‘저항이 대안이고 저항이 정책’임을 분명히 밝히는 투쟁하는 민주노동당을 만드는 것이 정말 필요한 것이다.

진보신당의 방향은 노무현에 기대를 걸었다 실망한 강단 학자들에게 함몰된 것일 뿐이다. 민주노동당의 진보적 핵심이 부담스러운 그들이 한겨레, 경향, 프레시안, 대자보 등을 앞장세워 여론적 고립 붕괴를 획책한 것이다. 어디를 봐도 외로웠던 민주노동당이었다. 대안과 대책이라는 이름으로 지식을 파는 여론 주도층이 낙인을 찍으며 배제했지만 그들의 역할은 ‘미래를 말하지 것처럼 하며 변혁을 과거로 돌리는’ 사이비 진보 인텔리겐챠화의 책동일 뿐이다. 민주노동당은 그 길이, 그런 언론의 귀여움을 탐하는 것이 혁신의 길이 돼서는 안 된다.

더욱 붉게, 더욱 푸르게 가자. 더 계급적으로 더 통전적으로 가자. 그 길을 만들기 위해 진짜 필요한 것은 새로움이 아니다. 해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정말 필요한 것은 지금까지 이미 다 해본 것처럼 느껴지는 것, 자기 것처럼 생각해서 낡아 보이는 거리의 정치 투쟁의 담론을 단호하게 부각시키고, 우리의 왼편을 다시 챙기는 것이다. 미국 공화당의 입장에선 힐러리가 빨갱이 좌파란다. 우습다. 노무현이 진보인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런 낙인은 진보진영에게만 생소하고 우스웠다. 대중에겐 여전히 그것이 희망이자 절망이었던 것이다. 기대를 배반하기 전의 노무현이 되는 것이 아니라 진짜 노동자 민중의 주인 주체된 정치에 대한 꿈을 제출하는 것이다.

민주노동당은 더욱 커지고 더욱 강해져야 한다. 커진다는 것은 당이 포괄하는 영역과 당이 포괄하는 세력이 넓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강해져야 한다는 것은 계급적 토대와 변혁적 힘이 깊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넓어지기 위한 진보정당의 혁신이 깊어지기 위한 노동자 정치운동과의 변혁적 강화 과정과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우경화의 경쟁이 아니라 친미 신자유주의 보수 체제의 완성에 맞서 보다 단호한 좌경화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그 기준은 의회 안이 아니라 의회 밖 거리가 되어야 한다. 의회의 힘이 반 토막 난 민주노동당이 의회적 관점을 키우는 것은 난센스다. 작금에 부는 제반 정치 사회적 담론의 신자유주의적 퇴행성을 직시하고 더 근본적으로 더 전투적으로 혁신의 방향을 정립해야 한다.

4. 방향의 대강
1) 진보연대의 과감한 재구성의 필요성 - 전선의 성격이 변한 만큼 단결과 투쟁이 우선이다. 07~08년 정세에 의해 기획된 진보연대의 통전 체제 구축은 명백하게 실패다. 정치적 패배와 조직적 실패를 실사구시 하되 청산적 산개가 아니라 한미FTA, 대운하, 금산법, 대 삼성 투쟁 등의 문제를 하나의 틀로 묶어 가장 광범한 투쟁 연대 체를 만드는 밑불이 되어야 한다.

2) 진보정당의 재구성 - 소 통합이 아니라 대 통합이 되어야 하며 그 범위는 광범할수록 좋다. 다만 그 광범함에 좌우 균형을 맞추는 지혜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럼으로 민주노동당 혁신위에 대하 전면적 재구성을 먼저 하자.

① 백기완, 단병호, 김승호, 오종렬 등 대표적인 선배 세대가 함께 하는 구조를 구축해 보자.
② 한미 FTA 범국본, 또는 대운하 반대 투쟁을 통해 시민 생태 운동의 적극적 구성을 해 나가자.

3) 토호정치에 대한 전쟁을 선포하자.
- 정선, 청도, 자판기 선거운동 구조가 살아있고, 투표 참가율이 저조한 조건이 지속되는 한 선거행위의 민주적 의미는 없다.
- 지역에 대한 생태적 복지적 마인드의 완전함 전환을 해 내자. - 지역 복지 종합 센터 및 지역 여론전 승리 체계 구축
- 선거법 등 정치 관계법의 개정

5.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사람 비웃지 마라 그는 지금 반성 중이다.
소 잃고도 외양간은 고쳐야 한다. 다시 소를 키워야 하기 때문이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것은 최소한 반성을 하는 사람이다. 그럼으로 늦었다고 비웃지 말자는 것이다.

고치려면 제대로 고치자. 민주노동당의 분열은 결국 민주노동당 당권의 향배였다. 당권에 패배하고 회복을 난관하지 못한 이들의 트라우마 효과라 할 것이다. 이들에게 이런 충격을 준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민주노총의 경험이다. 민주노총의 집행 권력이 부패스캔들에 말려도 바뀌지 않는 것을 보며 정상적인 정치적 선택이 어렵다고 본 것이다. 또 하나는 간접적이긴 하지만 진보연대의 구축과정이 그것이다. 반대해도 나가는 과정을 패권주의로 패권의 뿌리를 외부적 요인 즉 종북으로 본 것이다. 이런 증세의 병적 표출이 대선 패배후의 과정일 것이다.

그럼으로 민주노동당이라는 외양간을 고치기 위해 외양간의 담과 바닥과 문을 고치지 않고 소구유만 색칠하는 것이 돼서는 안 된다. 민주노동당에게 소도둑은 민주노총당, 민족자주와 통일, 운동권 당 등의 명칭이 아니다. 투쟁을 낙관하지 못하고 지배 언론과 대중들의 상식에 기대는 체제내적 순치과정에 들어선 그간의 우리 모습이다. 이에 대한 반성이 있어야 한다. 신자유주의에 굴복한 그 마음에 대한 투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계급 민족 생태 소수자 운동에 대한 종합적 무능력에 대한 자기반성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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