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공유 : cafe.daum.net/myrefarm/14Lb/38523


안녕하세요.
나의 모친은 파킨슨병으로 효정요양병원에(광주 삼거동) 입원했었습니다.

지난 1월 2일 본 요양병원서 종사자와 입원환자 등 최초 7명의 코로나 확진 이후,
3일에는 지금까지중 다수의(58명) 확진자가 발생했으며, 제 모친도 포함됩니다.
이날 오후에 본 요양병원서 확인차 알림문자가 온 이후,
이날 저녁 강진의료원에서 제 모친을 강진으로 격리수용중이라 연락옵니다.
격리상태라 병원매점도 이용하면 않되고 보호자가 별도로 택배등을 보내야한다기에,
필요 물품을 구비해 강진에 직접 내려가(5일 오전에) 물품을 전달했습니다.

 

 

강진의료원서 1월11일경 모친의 코로나 1차 PCR검사서 무증상 양성,
1월 21일경 코로나 2차 PCR검사서 무증상 음성으로 다행히 완치 판정입니다.
정부지침상 코로나 감염병 전문지정시설서 2주 이후엔 특별한 사유를 제외하곤
퇴원이 원칙이라 제 모친의 퇴원준비를 해야한다했습니다.
그러나 퇴원할 형편이 않된다고 부탁해 다행히 퇴원시기가 다음주 이후로 늦춰졌습니다.
제 모친이 스스로 거동이 불가능한 고위험군(파킨슨) 중증환자라서,
만일 무작정 퇴원조치하면 시골 자택서 자가격리생활해야할진대,
제가 옆에서 케어해준다한들 1주 간격으로 발생하는 트라우마는(심한 떨림)
대처 불가능한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그땐 급히 앰블란스 불러 광주시내 대형병원으로 급히 이송해 진정조치요해야함,
하여 강진의료원 의사님도 이 사정을 미리 짐작해 감사히 배려해 주셨습니다.)


한편 효정요양병원에 제입원 요청하였으나, 병원 사정상 제입원 불가하다합니다.
(재입원중 모친에게 불쌍사가 발생하더라도 보호자가 감수하겠다해도 않된다고함.)
대신 제휴중인 다른 병원을 안내해줍니다.(광주시립제1요양병원)
그런데 광주시립제1요양병원에선 남성병실만 있지 여성병실은 없어 불가하다합니다.
효정에 다시 연락해 그곳말고 다른곳은 없는지하니, 우리도 여기저기 알아보고있으니,
최대한 강진의료원서 버티라는조입니다.
그 여기저기라는곳이 어디인지 잘 알려주지않으시니, 나름 알아보게됩니다.

헤아림요양병원에(광주 일곡동) 문의해보니 감염병 전담병원은 맞으나,
제 모친이 이제 음성판정이라 입원 불가하다합니다.
(코로나 전담이라 PCR검사서 아직 확진인 양성판정일시 입원가능)

나름 앞서 문의한 즐거운요양병원은(나주시 노안면) 확실한 음성이 아니라 않된다합니다.
감염병 전담병원이 아닌 일반 요양병원이라서 그러했습니다.
(확실한 2차례 음성 완치일시 입원 가능대상이며, 일단 대기대상정도로 포함됨)

모친의 코로나 소견서에 음성 판정이나 아직 1차 음성으로 차후 PCR서 양성 가능성을 배제하기가 쉽지않다는 소견이라,
일반 병원 입장에선 좀 염려스러운 부분인것입니다.

아무튼 원무직원께 삼가 차후 모친의 좋은 PCR 판정시 잘 부탁하신다했습니다.

귀촌후 2017년 요양원서 잠시 외박한 모친과 잠시 노안성당을 방문.
(전에 모친이 가끔 다니시던 노안성당)   영화 배경장소; 설행_눈길을 걷다

 

잠시 강진의료원에 요양중인 모친께 보낸 2차 물품 택배선물



한편 코로나 전문학자의 소견으로는 무엇이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점이 있어 참고로 수록합니다.
코로나 1차,2차에서 유증상 진단 환자이면 모르나 무증상 환자일시,
양성->음성과 음성->음성중 후자가 확실해보이나 꼭 그렇지만은않다합니다.

예컨데 무증상에 한해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시 2~3일 사이에 증식하면서 염증을 일으키다가
일주일정도 되면 활동이 멈추게 되고 더이상 반응을 하지않는다 합니다.

(한편 증상이 없는 신종 코로나19 바이러스 감염증 환자 10명 중 8명은 완치될 때까지
특별한 증상이 발현되지 않았다는 연구 결과가 일본에서 나왔다함.)

하지만 이때도 (분자진단법)PCR검사를 통해 바이러스가 검출되기 때문에 증상은 없지만
양성판정을 받는 이른바 위양성이 나타날수있다 합니다.

완치판정을 받아도 바이러스 사균이 남아 있어서 코로나 시험지판독에는 계속 양성반응이 나오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무증상 완치중인 환자중 양성이 뜨는 이유는 몸 안에 그 바이러스가 죽은 이후에도 찌꺼기가 된 상태에서
아직 몸 밖으로 다 빠져나가지 않은 상태이기에 검사를 해도 양성이 뜬다고 하셨다.)

PCR 양성중 활성코로나로 인한 양성과 코로나사균에 의한 양성 두가지가 있다는것이지요.
한편 유증상 환자일시 차후 PCR 양성중 어떤 양성인지는 환자의 상태에 따라 상이하다고합니다.



- 참고 자료 -
무증상 양성판정 완치판정 받고 재확정 위양성 논란 2020.09.11
blog.naver.com/bussel5/222086534717 자신감을 엮는 남자의 썸타기 좋은날
무증상인데 양성판정을 받거나 음성이 나와 완치 받은 이후 재확정판정을 받는 경우가...

코로나19 양성 무증상 치료 후기 2020.12.13
blog.naver.com/guitarjeus/222172650910 기타치고 사진찍고 리뷰하는 놈
여러분 정말 조심하세요. 무증상이리고 해도 육체,정신적으로 피곤해 지는건 마찬가지..


코로나 양성 후기 / 코로나 무증상 확진 / 생활치료센터 퇴소 / 퇴소... 2020.12.10
blog.naver.com/iii0815/222168631262 China Southern 의 블로그
어쨌든 포함되어서 양성이 뜬다면 내가 양성이 떴을 때 바이러스가 지금 활동하고...
이거에 대한 답변은 1.아직 이게 완치라는 개념이 아니기 때문에 완치자라는 표현...

본문은 제가 나름 기록하고 있는 생활수기중 포함예정 수록입니다.


1#
나의 모친은 파킨슨병으로 광주 삼거동의 효정요양병원에 입원중이십니다.
지난 2일 공중파에서 비공개로(모자이크처리) 광주 시골의 요양병원서 종사자와 입원환자 등
7명이 코로나19 확진 판정이라는 심각한 상황이 발생됐다고 보도합니다.
모자이크 영상이 모친이 요양중이신곳인듯하여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맞았습니다.
이후 3일 언론이 효정요양병원을 비공개에서 공개로 전환하며, 코로나에 3일 58명,
4일 15명, 5일 5명 등 총 85명의 확진자가 발생했다.고 나옵니다.
제 모친도 불행히 3일에 확진판정되었다고 이날 오후에 요양병원서 알림문자가 옵니다.


가족중 본인 다음으로 출가한 여동생이(예비 부양의무자) 모친을 좀 신경쓰는데요,

3일 저녁에 염려의 전화를하길래 침착히 대처하려하니 과한 염려는 말라했습니다.
모친이 기저질환이 있으나 아직 무증상감염 상태이고(지금까지),
인생사에 예측이라는게있는데, 모친이 갑자기 운명할 확율은 적을듯하다 했습니다.
요양병원이 시골에 있다하나 병원 총직원이 무려 150여명이고 대부분 시내인근에 사니,
좀 일찍 확진자가 발생해서 문제일뿐 언젠가는 발생될 상황이니 말입니다.
아무튼 안심했으면한다해서 여동생도 침착히 받아 드렸습니다.
그러면서도 갑작스런 모친의 코로나 확진이라, 마음이 아프며 먹먹했습니다.

현 코로나사태 시대에 연세든 부모가 코로나 확진일시,
자녀는 마음이 아플뿐아니라 때론 눈시울마저 불거질것입니다.
가정에 버림받다시피한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 스스로 일찍 자립한 저로서는,
눈물까지 나온다는 그 자녀가 한편으론 그저 부럽기도합니다.

그냥 친지 어머니일이듯 먹먹하기만할뿐인 속사정은,
생전에(소년기까지) 제게 칼부림까지하며 학대를 일삼았던 지금은 고인이 된 부친뿐아니라,

모친도 제가 5세때 제게 고의적으로 칼을 던지어 목숨을 위태롭게한 중대한 실수를 하여서입니다.
이 만극한 사건 이야기을 자서전식의 나의 생활수기에서 대략 밝혀서 아실분도 있을것입니다.
마이리틀히어로, 김영광을 보면 나의 삶이 오버랩됩니다. http://blog.daum.net/chmanho/16883715
아래에 그때의 사건을 다시 재구성해 자초지경을 기록해봅니다.


2#

나의 부친의 고향은 지금의 큰집터인 나주시 노안면 양천리 금동마을입니다.
신씨 집성촌에서 동네 유지에 속하는 좀 부유한가문이었다고합니다.
 평산신씨 사간공파 신종식공의 후손, 차계 신태술가문(둘째고조의 장손댁)

제 부친은 한국전쟁전 장계 첫째고조의 몇째가문인 작은종손댁 막내아들이다,

전쟁후 구한말에 벼슬을 했던 차계 신태술가문 장손댁에 입양됨
인근 성산에(광주시 신동 산55) 고인돌이 있는데, 조선후기때부터 제 조상이 관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sdsms/2R8A/12
그런데 한국전쟁때 저희 할아버지는 북한무장공비에게 납치.실종을 당하셨다고 하며,

할머니는 전쟁 후유증에 지병까지 겹쳐 끝내 일찍 운명을 달리하셨습니다.
하여 제 아버지는(작은 아버지) 어렸을때 동쪽마을(내기) 고씨네의 부농에 의해 자랐고,

(모친이 고씨이며, 신가 첫째고조 작은종손댁의 인척이며, 친할아버지 친구집안)
후에 (광주 벽촌)내기마을에서 독립은 하셨으나 가난한 농부였습니다.
어떤 문중은 가문의 재산을 본가 큰아버지가 대부분 물려 받은터라 그런듯하다 합니다.
그러나 알고보니 실상은 문중이(특히 당숙들) 큰집의 유산을 편취해가서 그러했습니다.
그리고 더 기막힌것은 유산편취 사건 공모자중 제 부친도 가담된것이었습니다.
즉 큰형을 배신하고 배다른 당숙에 빌붙어서 유산을 일부 할당 받으려다,
결국은 당숙들에게 이용만 당하고 토사구팽된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부친은 그리 당한것을 당숙에게 추궁해 해결받거나 하려하지않고,
아무 상관없는 가족에게 풀었습니다.

(모친에게 술주정을 부리면서 자주 시비 걸었으며 폭력행사도 종종 있었습니다.
자녀들에게도 학대를 일삼았는데, 특히 제게 더심했으며 칼부림까지했었습니다.)
또한 적반하장으로 큰집에 가서 재산을 더 떼달라 때를쓰는 패악질을 부렸드랬습니다.


아무튼 부친으로 인해 집안 부부싸움이 잦았는데, 약5세때 어느날 부부싸움 며칠후였습니다.
집에서 어머니는 잠시 무엇을 각오한듯하더니,
갑자기 저에게 맞아 죽거나말거나 막무가내로 부억칼을 던지었습니다.
하여 그칼이 그대로 머리에 맞아 꽂히어 피가나는 부상을 당했습니다.
이렇게 황망하게도 어머니 칼에 맞아 사경을 해맸으며, 거의 죽다살아났더랬습니다.
당시 머리부상인데도 치료도 제대로 못받고, 머리에 쑥이나 지혈제, 연고를 몇번 바른게 전부였고,
그때부턴가 뇌의 일부가 기능상실되어, 사고후 머리부상은 아물었으나,
한동안 기억상실증, 앞면장애, 정신착란증까지 겹쳐 꿈과 현실을 구분못하기도했습니다.

하여 어릴때 정신적 충격으로 부모님 모두에게 마음문을 닫고 가족을 가슴에 묻은지 오래입니다.

자매에게도 서운함은, 상식적으로 제 부친은 분명 가정파괴범이 맞은데,

불의에 타협하는자마냥 막내남동생과 여동생마저도 그래도 부친이라며 좀 두둔하며,
지금은 고인이 된 부친의 기일을(제사) 거의 해마다 챙긴다고합니다.
이 사실만 생각하면 조만간 그 한심한 자매와도 인연을 끈고,
귀촌생활을 접고 고향을 등지고 영영 떠나야겠구나하는 생각이 수차례입니다.
(역술로볼때 이번의 갑작스런 모친의 코로나 확진도 제 큰집의 유산을 편취하는 못쓸짓을 하고 떠난
당숙과 거기에 빌붙은 부친도 구천에서마저도 업을 씻기는커녕 악귀가 되어,
이승의 모친도 괴롭히고 있는듯하다고 생각이 들 지경입니다.. )


3#
∇ 한편 또 어떤 문중삼촌은 저희 증조신태술가문에 맡기었던(조상땅찾기 최초 단독명의),
큰종손성산을(큰부산;나주시 양천리 산8-1), 현제 증여된 공동명의인 의사와 달리 개판으로 관리했습니다.
(아래 고추대 중간묘가 문중조상대표묘인데, 조상턱밑까지 로터리쳐 밭만들어 놓는등의 엽기행각을 벌임.
원래 이 대표묘가 옛날엔 무등산,금성산 봉우리가 보이는 북동쪽 명당에 위치해 있었는데,
유신시대때 당숙들이 아래처럼 아무 봉우리도 않보이는 아래 서쪽 졸당으로 이장시킨 누를 범함)


하여 본인이 나서서 본 신태술가문과 힘을 합해, 아래와 같이 현 공동증여.명의인을 설득시켰습니다.
"원래 이 성산은(큰부산) 잔디 추모공원 형태로 큰종손과 작은종손이 명의등기하에 종손들만 묘를 쓰거나 땅을 쓰는게 원칙이었으며, 큰종손이 본 작은종손 증조신태술 가문에 맡기었고(조상땅찾기 최초 단독명의), 줄곳 관리했습니다.
그런데 이곳도 당숙이 끼어들어 작은종손댁 신태술후손 신철수를 등기해준다고 농락하고는 결국 배제하고 당숙이(신용섭) 슬쩍 등기입적했습니다. 이러한 사실 증언을 문중과 친지들에게서 녹취로 확보한바, 변호사도 이 임야가 임의등기된 정황이 확인된다고하니, 조상땅찾기를 준비중에 있으며, 다만 큰집 늦장남을(신태주) 공동명의인으로 포함해줄것을 바랄뿐입니다.
그러나 조상땅찾기 소송보다 현 공동명의인에게 유리한 아래와 같은 협상을 원합니다.

현제 성현삼촌이 여러 문중땅을 쓰는 대신 큰부산 성산을 잘 관리해야하는 조건이건만 그렇지를 않았으며,
시정하려는 의지도 없습니다. 문중땅을 쓰면서도, 문중.조상을 위해 해야할 의무는(문중기금 기탁) 뒷전인것이지요.
(그 삼촌은 이제 큰부산에서 손떼겠다고 약속하면서도 미련을 못버리고 간보고다님)

하여 이제 그 삼촌을 배제하고 대타로 본 신만호가 본 성산을 관리하고자하며,
이미 본인은 귀촌후 몇년전부터 시간있을때 댓가없이 큰부산내 쓰레기제거와 잡목제거를 해오고 있습니다.
또한 대표묘가 싼티나는 풀묘인것을 2020년 겨울에 아래와 같이 잔디입힘작업을 완료했습니다.
차후 대표묘를 예전의 명당인 윗자리로 이장시켜주고, 현 너저분한 상태의 성산 중앙을 모두다 잔디작업해줄터이니,
대신 제 큰집 신태주를 공동명의인으로 등기해주셨으면합니다.
그렇다고 예전의 이상한 삼촌처럼 큰부산을 쓸 생각은 없으며, (등기상 임야이기에 밭은 불법임)
다만 명의인과 공동으로 따갈수있는 관상용 공동과일나무 정도만 가상에 식재하고자합니다."

이에 큰부산 공동명의인은 알았다며, 상의해 나중에 되도록 긍정적인 답변을 주도록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 삼촌은 큰부산주가 화난것을 알고 이 큰부산에서 잠정 철수한 상태입니다.

 

 


4#

다시 앞에서의 본인 성장기때의 이야기를 이어가고자합니다.
아무튼 어릴때 머리다침 사고 이후 사고장애를 극복하려는 노력을 하였기에 정신착란증은 가셨으나,
건망증이나 일시 앞면장애는 휴유증마냥 좀 있서, 그것도 거의 정신력으로 버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린고비 생활수기 전격공개- 박봉 자수성가기, 하늘자산;5천만원이상, 땅자산;1억원이상 달성
짠돌이카페 베스트선정 원문 : http://cafe.daum.net/mmnix/7mn8/7890
(글쓴이: 채널만호, 추천: 8 , 조회: 11,485, 2015.12.31 댓글 116)

모친에게 한편으론 지금도 조심스레 그 모진행동의 심정이 무엇이었는지 되묻고싶기도하나,
귀촌후 모친과 첫 재회에서도 모친이 스스로 입을 열지않는한 생애 한번도 묻지를 않았습니다.
그냥 짐작하기를 아마 부친이 가족과 큰집에게도 패악질을 저질르니,
자녀들을 죽이고 자신도 이생을 하직하려는듯한 것이라 생각할뿐입니다..



5#
1월 3일 저녁 강진의료원에서 제 모친이 이곳으로 격리이송됐다고 전화가 왔습니다.
격리상태라 생필품과 간식사러 병원매점도 이용하면 않되고 보호자가 별도로 택배로나마,
챙겨줘야합니다. 4일 모친에게 필요한 의류,생필품,간식등을 사서 박스를 꾸리어,
5일 오전에 강진에 직접 내려가 의료원에 모친 물품을 전달하고 왔습니다.

 

 

 


10여년만의(귀촌전) 어머니와의 첫통화


집안의 상황이 어찌하든 문중 때문에 가세가 기운 큰집을 위한 나눔행보는 계속됩니다.

 

 

안녕하세요.
수도권 객지인은 이맘쯤 명절 귀향을 준비중일것입니다.
한편 어떤 시골사람은 바뻐 못오는 도시 가족을 위해 역귀성을 준비중이지요.
저도 일찍이 귀촌해서 수도권에 사는 친지와 지인단체(NGO)에 선물전달하려 종종 상경합니다.
택배로 하지않고 굳이 상경의 또다른 목적은 서울에서만이 손쉽게 살수있는 물품이 있거나,
혹은 서울 특정지역에서 장보면 더 싸게 살수있는 물품과 먹거리가 많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당일치기 말고 차박과 함께 잠시 여행도 결들이면서 말이지요.
참고로 다마스 차박 모기장 자작후기입니다 =>http://cafe.daum.net/push21/JAtR/1415

그런데 올해 긴 늦장마로 일단 성산벌초를 앞당겨 8월말에 마무리했습니다.
그리고 일단 서울 친지에게도 미리 택배로 선물을 보냈습니다.
교통대란지에 위치한 낙성대,남성역인근에 사시는지라,
서울갈일이 있어도 택배로 보내는게 신간편하니 말입니다.



 

1#

∇ 전남 나주시 노안면 양천리 (금성산줄기의) 산에서 바라본 내고향 산하

 

 



∇ 시골집 텃밭과 빌려쓰고 있는 친지 (고인돌)야산텃밭 모습니다.

 


 

 ∇ 2019 올해 수확한 과일 일부와 매실을 따서 만든 매실장아찌입니다.

 

 


 

∇ 서울 친지와 NGO에 선물줄겸 수박을 심었는데, 운송문제가 있었습니다.

하여 (7월하순) 수박은 몇개만 안전포장을 하여 NGO에(꿀잠) 선물택배하였습니다.

 


 

∇ 수박은 대부분 광주시내에 사는 친지와 동네사람에게 나눔하였습니다.

 




∇ 올해는 여느때보다 날씨가 변덕스러워 나주 배밭의 봉황배 비품이 40% 이상이었습니다.

배밭에서 일하고 일당외에 비품배를 거져 10가마니나 받아서 햇배 나눔하였습니다.

제고향에 3마을이 옹기종기 모여있는데, 대타로 배없는 시골집 곳곳에 큰양파망 1개씩하니,

리어카로 한가득으로 졸지에 시골사람들 배터지게 먹게되는 행운이 생긴것이지요.
(비품배가 많아도 보통 일꾼에게 몇박스량만 거져줍니다만,
 배밭사장과는 사둔집안인지라 엄청난량을 챙겨 받을수 있었습니다.)

먼친지중 배즙을 짠다하여 그집에만 4가마니주니, 배즙으로 3박스 나왔습니다.

아래사진은 200여포(1박스) 대신 짜달라 부탁한 비용(3만원선)을 주고 받은 일부입니다.

 

 

 

∇ 역상경을 늦추고 9월초 서울 친지에게 배즙과 농산물을 택배선물하였습니다.

 




 

2#

올해 긴 늦장마로 일단 친가문성산 벌초를 앞당겨 8월말에 마무리했습니다.

저는 비문명 환경이 더좋아보이며, 벌초한 야산이 더흉하게 보여서 벌초엔 신경을 않썻습니다만,

큰집댁이 매년 애써서 벌초를 하시니, 시골에 있는 제가 대타로 벌초를 하기로 했습니다.

 

 

 

 

 



∇ 참고로 저희 평산신씨 사간공파 신종식공의 후대 족보입니다.

객지의 큰집댁에 족보책이 있느나 바뻐서 아직 아래처럼 계보목록을 못만들어서,
이번에 어렵게 원거리 연락을 하며 간략히 종합한 계보입니다.

(클릭하시면 계보 사진을 크게 볼수있습니다.)

 


 

∇ 9월8일에 객지에 계시는 나주 금동마을의 큰집댁이 성묘하러 방문하셨습니다.

큰집이 벌초비로 10만원을, 작은댁도 통장으로 벌초비 10만원을 송금해 주셨습니다.

 

벌초하여 용돈이라도 생기니 약간의 보람이라도 있는것이지요.

그것도아니라면 벌초할 이유가 없음은 왜 힘들게 벌초하고 사시는지 깝깝이 보는 1인입니다.

그것은 문명의 가공된 착시 현상이지, 결코 태고의 자연 모습이 아님입니다.

 

 

 



∇ 평산신씨 사간공파 신종식공의 후대 (장계성산) 문중야산 한입구입니다.
(전남 나주시 노안면 양천리 산8-1, 임야 약4000여평)

벌초라면 이정도만 족하다 생각하며, 귀촌후 인도만(밭두럭이나 오솔길) 가끔 신경쓰곤합니다.

 

 

공동문중야산내에 조상묘가 무려60여개로 저거 다 벌초하려면 문중사람 다동원해야 가능합니다.
벌초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점점 우거지는 잡목문제가 있어 시골에 남아있는 문중들과,
작년가을 큰맘먹고 잡목제거와 벌초를 마무리한 문중야산 중간 모습입니다.

(이것을 용역을 부른다면 인건비가 무려 1천만원 상당할 정도로, 자체로 몇주나 걸렸습니다.)

보라색 반원표시는 장계 후손중 조선후기쯤의 대표묘입니다.

잡목문제를 위한 고육지책으로 최근 먼친척이 야산텃밭을 만들어 사용중입니다.

 

 

 


 

∇ 어제 성묘 방문하신 큰집댁에게 귀가시 사진의 호박 2개를 선물했습니다.

그리고 배즙과 발효액등, 선물도 있을때 주기도 편하고 많이 줄수 있었습니다..

 

 

 

 

 

http://cafe.daum.net/myrefarm/14Lb/36580

http://cafe.daum.net/push21/PnON/2101

http://cafe.daum.net/sisa-1/pAhc/76  

 

 

 

자서전 서막 - 한국전쟁과 당시 나의 고향에 있었다던 이야기

 

(아래의 이야기는 당시의 풍문과 목격담을 각색해 구상한 실화입니다.)

 

 

때는 한국전쟁 당시 1950년 10월경 유엔군과 군경이 전남지역을 수복하면서,
좌익들은(인민군 일부와 빨치산) 다시 산으로 들어갔다.

빨치산 인민유격대 조직은 전남도당 유격사령부 예하에 6개 지구 체제로 재개편한 무장조직이었다.
약 6만여명이었던 이들은 남조선노동당 박헌영대장 휘하로,
전남도당 위원장은 박영팔, 부위원장 겸 빨치산 총사령관은 김선우이다.

이중 제5지구당 (불갑산)불갑지구는 함평, 영광, 무안, 목포가 활동무대로 약 2,500명이었다.
(위원장; 김용우, 빨치산사령관; 박정현, 모두 구빨치산 출신)

한편 1951년 2월 20일경 새벽 대대적인 불갑산 토벌작전인 남한 군경합동 '대보름작전'이 전개된다.
이 불갑산 토벌작전에 11사단 20연대와 영광과 함평경찰, 청년방위대와 지역우익단체가 동원됐다.  
이 불갑산 토벌작전을 당한 빨치산중 일부는 나주 금성산으로 후퇴하여, 나중에는 영산강을 건너 장흥으로 향했다.
그중 금성산으로 퇴각하다 흩어진 몇몇 빨치산은 나주야산에 머물다,
봄에 피난주민 행색으로 위장한체 노안면 양천리 계량재에 이르게 된다.

이들은 계량재 아래에 인가를 발견하고 내려가 왠 불탄 성당이 있어 내려가다 멈짓하고 산으로 다시 올라 숨는다.

 

  ∇  나주시 노안면 양천리 망산,뿔바위 인근 전경


∇ 나주시 노안면 양천리 계량마을 노안성당 (현제모습)

 

왜냐면 그 성당은 붉은색 성당으로 멀쩡했기에, 반공대가 유인책으로 그리했을지도 모른다는 판단이 순간 선듯하다.
이들은 계량재를 지나 망산 인근에서 하산하여 인근마을(국룡)을 우회해 들판을 지나 산에서 발견한 방죽으로 향한다.
방죽(장등제) 들판으로 진입해 은신하여, 잠시 휴식을 취하며 주변을 바라보다,
원거리에 있는 기이한 풍경인 고인돌 유적지를 발견하게 된다.

이 빨치산은 순간 저 고인돌 유적지 주인은 아마 이지역의 지주일거라 판단하고,
야산길을 따라 고인돌이 있는 인근 마을로 향했다.

가면서 야산밭에서 일하던 지역 농민에게 고인돌 야산주인집을 수소문하여 그 마을로 향한다.

 

  ∇ 양천리 장등방죽으로 사진위 중간 남색둥근표시가 고인돌 유적지이다.

 

빨치산 : "수고하십니다. 전쟁 난리통을 격다 길을 잃어 배회중이외다.. 참, 저 신기한 고인돌 야산주인이 누구요?"
지역주민 : "아이고, 어쩌다 여기까지 피난 행렬이요?.. 그 야산주인은 저기 금동마을의 신철수아들네이지라~"

 


즉, 위 고인돌과 관련된 마을은 지금의 나주시 노안면 양천리 금동마을이며, 나의 할아버지의 본가였던 집성촌 마을이다.
또한 나의 평산신씨인 할아버지 본가는 소유 야산중에 조상이 오랬동안 관리했던 위 고인돌 야산이 있으며,
집성촌 당시때부터 지주에 속하는 부유한 가문이었다고한다.
이 빨치산은 그날 늦은오후 짐에 숨겨둔 노획한 국군총을 꺼내들고 나의 금동 할아버지집을 급습하였다.
댁이 대가족이었으나 당시 집안엔 방금 밭에서 온 할머니와(중년여성)  한 작은아들만 있었고,
나머지는 다들 밖에 나와 있는 상황이었다.

댁에 총을 들이밀고 먼저 요구한것이 요기거리로 중년여성이 먹거리를 내오자, 좀 희안한 광경이 펼쳐졌다.
빨치산 간부가 자신은 망을 보는데 주념하며,
부하에게 먼저 식사하라하고 먹거리를 거의 양보한체 자신은 대충 먹는것이다.

그리고 있다 조용히갈터이니, 자금과 식량을 내주라면서 다는 줄필요없고 알아서 주라는것이다.
그러자 이 큰집 아들이 앞뒤다짜르고 아니꼬아하며  한마디 거든다.

 

작은아들 ; "앰병~ 그럴거면 머하러 총을 겨누고 지랄이요? 차라리 좀 달라고 구걸하지.."
빨치산 간부 ; "이런 삭아지하고는.. 이보시오 동무, 총알받이로 있다 저 버르장머리없는 녀석이나 대리고 나오시오."
하고는 나의 큰할머니인 중년여성이 챙겨주는것을 받고, 먼저 엄호하며 길을 나설 준비를 한다.
그럴즈음 집안의 가장 할아버지가(중년남성) 바깥일을 마치고 귀가중,
누가 뭐라하는 소리를 듣고 살피자 집안서 총을 든 괴한과 맞닥뜨린다.

집안의 중년남성은 만류하며 내아들 말고 나를 잡아가라 자처했고, 부하는 이내 중년남성을 인질로 하여 길을 나섰다.
왜냐면 총알받이로 소년은 불필요했으며, 간부도 이에 이유를 묻지 않았다.

 

   ∇ 나의 할아버지 본가집터 옛모습

 

 


이 빨치산은 초저녁 인적이 드문 계림리를 거처 서광산(평동 남서쪽)을 지나
지금의 공항 남서쪽 천변을 끼고 서창동으로 향했다.

아마 무등산과 화순야산의 거점지 근황이 궁금해서인듯하다.
이 두명의 빨치산에게 인질이 처음엔 나의 할아버지 혼자였지만,
평동끝을 지나다 길에서 마주친 주민 두명을 생포해 인질이 셋이 된다.

인질 손을 묶은체 끌고가면서, 가다 주민이 물으면 빨치산 내통자를 끌고 가는거라 둘러댔으며,
주민은 낮선 반공대원이긴 하지만 국군총을 소지하고 있어 긴갑다했고,
그래도 의심하는듯 보이는 행인 둘을 잡아가는것이다.

이들은 늦은밤 인적이 드문 지금의 광주시 서구 서창동(회재로) 인근 (백마산)큰야산에서 잠시 여장을 풀었다.
그러는 사이 송정리 인근 지역주민이 밤에 왠 수상한 사람들이 지나는것을 보고,
급히 지역 파출소 같은 반공치안대에 알렸다.

당시 반공치안대엔 이북에서 내려온 서북청년단이 규합해 반공조직을 관리감독하거나, 독거다이 왕초가 종종 있었다.
치안대에 당직을 서다 지역주민의 급보를 받은 서북청년단출신 대원은 전공을 독차지하고자
지역출신 대장에 따로 보고하지 않고,
총 몇개와 전쟁중에 노획해 숨겨둔 수류탄 한개를 챙기고,
급히 (반공청년단)반공대원을 소집하여 빨치산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독거다이 왕초인 서북청년단출신 반공대원은 지리에 밝은 지역반공대원들을 앞세워 단독으로 빨치산을 추격해,
서창동 인근야산 아래 능선들판에서 애워싸며 매복한체(5명이상), 빨치산을 기다리며 급습을 준비하고 있었다.


 

"쾅~"
때이른 새벽 빨치산이 야산에서 내려와 신작로 같은 탁트인 농로를 걸을즈음,
대각선방향에서 폭탄이 날아와 이들 앞에 떨어진다.

폭탄이 날아오기 몇초전 한 일질이(나의 할아버지) 대각선방향에서 누가 숨어 공격직전임을 감지하고,
위험하다 외치며, 손이 묶인체로 농로옆 도랑으로 몸을 내던지어 피신한다.
그 말에 순간 빨치산들은 총으로 엄호하며 두리번 거리는 순간, 이내 폭탄이 인근에 날아와 터진것이다.
이렇게 갑작스런 폭탄과 함께, 미처 피하지못한 총알받이 인질 둘은 사지가 찢기어 그자리에서 죽고,
빨치산간부는 중상, 좀 뒤에서 걸어온 부하는 반사적으로 엎드리며 짐으로 몸을 엄호해 가벼운 부상을 당한다.
그간부는 위기의 순간에서 자신은 틀렸으니 후일을 도모하라며 부하에게 도망치라며 손타레친다.
빨치산부하는 급히 몸을 은폐하고 자신의 총이 멀쩡한지 확인후,
급히 무기를 챙기고 간부에게 경례를 신속히 한후 현장을 피한다.

그러는 사이 도랑으로 몸을 날려 몸을 피한 인질(나의 할아버니)은 폭탄은 피했으나, 그렇다고 몸이 건사한게 아니었다.
도랑에 처박힌듯 되어 허리,옆구리 부상등 크고 작은 전신 찰과상이 생겨 거의 중상자 처지가 되버린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아군도 재수없는자들이라 판단하고, 아무도 없는 쪽으로 무조건 도망을 쳤다.

 

한편 매복해 30M인근에서 수류탄을 막무가내로 까낸 사람은 서북청년단출신으로,
이런 막무가내 공격으로 나중엔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폭탄소리와 함께 주변이 아수라장이 된 현장을 확인하고 이후 덮치러 달려갔는데,
위기의 순간에도 빨치산 부하는 총을 쏘며 저항을 하였다.

그 바람에 지역반공대원 한명이 총상을 당하자, 순간 잠시 대원이 몸을 숨기는 사이, 그 빨치산은 서둘러 줄행랑을 쳤다.
부상당한 빨치산이 도망치는것을 보고, 대원 몇명은 그를 추격하기 시작했고, 나머지는 폭탄이 터진 현장으로 향했다.
빨치산을 추격한 지역반공대원중 한명이 총을 들고 있었으나 총을 잘 쏘지못하여 총알이 헛나갔고,
빨치산은 시야에서 점점 멀어져갔다.

그것을 보고 답답한 서북청년단출신은 뒤늦게 적을 향해 격발했으나, 원거리라서 총알을 피해 이내 사라진 뒤였다.
그 와중에 한 반공대원은 도망치는 인질을 향해 아군이니 안심하라, 쉬었다가라 소리치지만 일없다며 시야에서 사라진다.

 

추격을 포기하고 폭탄현장으로 와 죽어가는 빨치산간부의 총을 수거해 확인해보니 격발이 되지않았다.
그총은 나무대머리판인 국군총으로 인민군총보다 견고치못하여,
폭탄파편을 맞고 붕떠서 굳은 길에 떨어져 고장났기 때문이다.

이보다 아군이 양민까지 죽인처사가 되고 말았으니, 반공대에 더 심각한 난관이 봉착한 것이다.
갑자기 당황해진 치안인솔자는 무과실전공으로 위장하고자 지역반공대원에게 삽하고 응급약을 챙겨오라 지시한다.
이후 인가에서 약과 삽들을 챙겨오자, 한명은 부상대원을 치료하고 나머지들은 음침한곳에 구덩이를 파기 시작했다.
한편 그곳 인가에서는 앞면있는 먼 지역주민(반공대원)이 왠 약과 삽을 달라해서 줬기는 줬으나 무슨일인가 궁금하여,
폭탄,총소리에 놀란 주민과 함께(몇명이) 그 대원을 미행했다.
그리고 멀찍이 숨어서 그 현장과 그들의 현장조치를 보고 이내 놀랄수밖에 없었다.
암매장하려던 사람이 빨치산이 아니라 어디서 본적이 있는듯한 주민으로 둘다 양민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무등산,화순야산 인근에 임시주둔지로 두고 지역정찰을 하고 있던 몇명의 빨치산이,
5KM인근 고지대에서 폭탄 소리를 듣게된다.

본능적 직감이었는지 빨치산 동지와 직결된 상황이라 판단하고 그 빨치산은 서창동방향으로 향한다.
가다 매월동(회재로)을 지날즈음 서창동에서 폭탄부상을 당한 대원 한명을 만나게 되고,
그대원 동지가 알려준대로 사건현장으로 찾아갔다.

서창동 야산아래 언덕들판 인근에 도착하니 멀찍이서 반공치안대들이 시신을 암매장하는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탕, 탕.."
합세해온 빨치산이 현장으로 숨어와 사격하자, 서북청년단대원은 현장에서 즉사,
지역반공대원 한명은 총상을(총상 총 두명)맞고 쓰러진다.

그러자 나머지 반공대원들은 가져온 총만 챙긴체 뒤도 돌아보지않고 삼십육계 줄행랑을 친다.
사건현장에 도착한 빨치산은 총상으로 미처 현장을 빠져나오지못한 반공대원 두명에게,
지금 무슨일을 벌이려고한거냐고 추궁한다.

그래서 시인하길 "서북청년단출신 사람이 전공에 눈이 멀어 신중한 작전을 뒤로하고 막무가내로 폭탄을 던졌어라.
그바람에 주민인 인질이 죽었지라, 그래서 이걸 숨기려 암매장하고, 폭탄으로 빨치산만 죽인걸로 위장하려고 했지라~..."

 

 

PS (추신; 덪붙임)


이사건의 진위는 당시도 그렇고 지금이라도 지역주민에 수소문하려한들 잘 알길이 없다.
왜냐면 당시 반공파 목격 주민 스스로도 누구에게 말하기 민망할만큼,
위처럼 그 광경이 너무나 어처구니없고 황망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광주지역 반공치안대 스스로도 쪽팔려서 이사건을 입다물고 있었기에 더욱이 알수가 없다.
다만 알수있는것은 이처럼 빨치산에 비해 반공치안대에 의한 양민의 이러저러한 피해가 더 많았고(예; 누명),
그 행태 또한 치졸했다는것이다.

(1951년 봄 국군 11사단은 불갑산 토벌작전을 개시하며,
일대 주민들에게 소개령을 내리고 마을에 불을 질러 주민 터전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주민들은 국군의 소개 작전, 지시로 인근 월야, 해보, 나산면 마을로 피난을 했지만, 되려 인명피해가 더컸다고한다.
해보면 성대마을로 피난 간 주민 대다수는 국군 5중대('5중대 사건)에 의해 무참히 희생되는 일이 발생했다고한다.)


그리고 격전지가 이 백마산 인근인지는 확실치는 않다.
다만 지금은 고인이된 동네 문중큰어른이 당시 수소문한 바에 의하면,
당시 광산군 어떤주민이 목격하길, 양천리사람 한명이 어떤자에게 끌려가는듯했다한다.(나의 할아버지로 추정)
그리고 풍문에 그다음날 무등산 못가 광주 남서쪽 변두리의 크고작은 야산이 많은곳에서,
왠 폭탄소리와 총싸움이 좀 있었다는것이다.

그때 즈음 반공대원이 빨치산에 깨진적이 있고, 그럼에도 무슨 모의를 하려 했다는것 등등이다.
 이를 증명하듯 인근에 양민 몇이 암매장되있다 사라졌다고한다.
한편 나의 할아버지는 당시 잠시 실종되었다 며칠후 나타났는데, 거의 반병신 상태였다는것이다.
그리고 문중어른이 이르길 그것은 전쟁 후유증이라며, 그후 오래 못살다 결국 운명하였다고 한다.
또한 전쟁 당시 양천리내 행방불명자였던 사람은 나의 할아버지만으로, 이러저러한 기억의 조각들이 퍼즐로 남아있다..

 

 

http://cafe.daum.net/myrefarm/14Lb/34940
http://cafe.daum.net/sisa-1/dqMu/32342
http://cafe.daum.net/push21/PnON/1914

 

종교는 언제 니체사상을 극복할건지.. (삶의 경험담에 부쳐)

세상에 안타깝게도 정의의 온전한 신은 없고..

 

 

사람들이 세상에서 어느신이 가장 쎈지합니다.
가장 쎄면 그만큼의 책임과 의무가 따르는법인데,
안타깝게도 온전히 지구와 인류의 평화와 정의를 지켜낸신은 하나도 없습니다.
의무는 방기한체 권리만 요구하는 신과 그추종자는 도처에 널려있으며,

천민자본주의와 독선이 모든 종교계에 만연해 있습니다.
기독교는 종교계중 가장 천민자본주의가 만연해 천주교와 달리 종교인과세에도 소극적입니다.

이슬람은 기독교계에 비해 헌금 강요를 하지않습니다만, 구태한 봉건문화가 문제이며,

일부극단주의자가 무차별테러를 일삼기도합니다.

한편 어떠한 잔악행위는 시대만 다를뿐 하나님을 따르는 모든 종교계서 자행됐음이 진실입니다.
중세시대엔 국수주의를 위시해 가톨릭에서는 종교 폭압정치와 마녀사냥을 자행했고,
이를 벋어나고자 근대에 청교도들이 아메리카로 이주했습니다.
그런데 이주민들과 일부 기독교인도 가세해 원주민 소탕작전을 펼쳤고 ,

그과정에서 수많은 아메리카원주민을 학살하는 오류를 범합니다.

기독교가 중세가톨릭의 전행을 되풀이한 이유는 중세에 교회를 신성시했는데,

그 교회독재의 잔재를 청산치못하고, 다른 형태로 이어져왔기때문입니다.

"예수천당 불신지옥!, 예수않믿으면 다지옥가!" 하며,

다른종교를 우상숭배로 치부하는 공포전도와 독선주의가 그것입니다.

인류사회에 중세에서 근대과도기에도 종교가 온전치못하다보니,

독재정치도 횡횡했고 공산당같은 이념과 냉전도 여기서 파생됩니다.

김일성이 기독교집안이었는데, 공산사상뿐아니라 일부는 기독교를 취합 이념화해,

주체사상을 수립, 기괴한 김부자독재체제를 이어가게됩니다.

불교계는 원래 도올김영옥교수가 주창하듯 깨닮음의 종교였지만,

독선적교회의 영향으로 불교의 법전해석도 갈라져서 일부 불자중에는 부쳐님을 잘 모시지못하면 

사바세계나 무간지옥에 떨어진다며, 절에 자주 갖다받치는 시주질과 기복신앙으로 변질되기도합니다.

 

교회라면, 그리스도인이라면 세상의 빛이 되어 먼가달라야하는데,

어떻게된것이 기업화되고 속세와 똑같은 교인이 천지입니다.
교회가 사역이 아니라 사업화,장사속으로 전락하다보니,

이것을 수습하고 뒤치닥거리다 종치는게 그나마 양심있는 현제의 주님의 종들의 서글픈 현실입니다.
개인적으로 청소년기에 예수님을 믿어 교회를 다녔고 선교사가 꿈으로,
전문인선교사를 준비했지만 이렇듯 허망한 현실을 접하고 때려친지 오래입니다.
하나님도 무능하고 방관자적이라 예수님을 믿기는하나 교회는 다니지않습니다.

 

 

한편 살며 느끼는것은 조상신 앞에서 누가 센지 함부러 논하지말라 생각됩니다.
조상신만큼 쎈신이 있을까? 반문할정도로 쎄긴아주쎕니다.
그래서 사회정의를 구현하는가면 어느신처럼 생색내기에 그칠뿐 이또한 말짱꽝으로 한심뿐입니다.
유교문화주의에 봉건,권위사회라는 오류가 팽배해,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역설도 있습니다.
가정이 가부장적으로 집안 자녀 재산분배도 자매와 아래남동생에겐 극히 일부만 돌아가고
장남이 거의 독차지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습니다.

 

 

개인사 예기를 좀 하고자합니다.
나의 집안 원래 본 고향은 한국전쟁전후까지만해도 나주시 노안면 양천리 금동마을로 당시 좀 부유한가문이었습니다.
집터만해도 마을에서 좀 큰편이었고, (300평이상으로 본가외 큰감나무 수십그루와 텃밭등이 있었음)
논,밭 약20마지기선, 야산임야 4천평이상이였습니다.

형제 둘중 저희 부친은 둘째로 작은아버지로 통합니다.
저희 부친은 물려받은 재산이라봐야 논 3마지기에 큰집터 절반정도의 대지융통부동산정도였습니다.
(집터는 옆 성동마을에 낡은집을 얻어 분가해 확보했드랬습니다.)
가문의 재산을 대부분 물려 받은 본가 '금동마을'의 큰집에서는 아우가 상대적으로 적은 재산에 삶도 궁핍하기에,
재산을 좀더 나눠주려는 취지로 야산 두개중 동네서 가까운 임야 2천평을 공동갑으로 등기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약50여년전으로 사실은 큰어머니 배려였으며, 큰아버지는 인색했기에 그럴 생각은 사실 없었음)

이 임야는 서울 여의도공원처럼 낮은언덕과 완만한평지로 이루어져있기에 개간해 야산밭으로 활용하기에 적합한땅이었으며,
이미 큰집에서 100평 이상을 수월히 개간해 사용중으로, 중장비만있다면 대부분 개간할수있는 좋은 임야입니다.
그런데 저희 부친은 그 조건을 뒤로하고, "야산밭은 빌려써도 좋으니까 논이나 좀 떼어주소" 합니다.
그것을 수년이 지나도 서로의 의견이 좁혀지지않았고, 큰아버지는 "거시적으로 말고 먼장래를 생각해보라. 장차 밭농사도 흥할것인데 논3마지기도 좋겠다만, 임야1000평을 받아 개간해 야산밭으로 사용하는게 훨씬 경제적이다"는 취지로 설득해도 반응이 시킁둥합니다.
그러자 이러한 정황을 10여년간 넌지시 지켜본 큰당숙이 큰아버지에게 "작은 아우가 싫다고하니 그야산을 우리에게도 좀 주소. 싼임야값이라도 치뤄줄테니 나중에 작은갑으로 등기해주소"하고는 저희 부친에게는 "큰형이 야산말고 방죽옆논을 좀 준다하며, 우리 당숙2인은 그야산을 일부 싸게 사기로했네.
부동산법을 아는 내가 서류대행해줄테니 큰형에게 임감을 달라고하시게. 내가 다 알아서 해줌세."하고 말장난을 칩니다.
자초지경을 다시 확인하지않고 큰집에 도장을 휙 받아 바로 건네준 부친은,(풍문으론 제부친은 그냥왔고 당숙네가 최종 도장을 편취해갔다함)
등기과정에서야 논할당 논의가 없음과 큰당숙이 돈도 않주고 임야 일부를 편취하렴을 알고
큰집에 알립니다.
그러나 큰집이 관공서에 가보니 이미 당숙들이 등기장난을 쳐놓은 상태로 때는 늦었습니다.

이것은 제가 소년기때 큰아버지 편찮은 틈을타서, 친지당숙이 위처럼 어찌어찌해서 큰아버지 인감도장을 빼돌려서,
큰집야산을 공동명의 3인(공동갑;큰아버지, 당숙2명)으로 둔갑한 사건입니다.
하여 눈뜨고 당한 큰아버지는 당숙들에게 "너희는 우리 작은집에 비해 논.밭이나 재산이 좀 있고, 먼 친척이다.
공동명의로 둔갑해둔 고인돌 야산을 작은집에게 계속 빌려줄터이니, 너희들은 사용할 생각일랑말어라."며 선을 그었습니다.
치상 당숙들은 군소리없이 저희 작은집에게 밭을 사용하는데 이의를 제기하지않았고, 이리하여 지금까지 이릅니다.

 


∇ 원래 큰집임야였던 야산 2천평 일부모습(사진에 일부보이듯 성산 우측엔 고인돌문화재가 있음)

 

 


 

여기서 짚고넘어갈것은 큰당숙이 정말 악해서 큰집임야등기장난을 쳤는가인데,
정신이 훽해서 그런것이지 정말 사람이 그래서 그런것이 아니며, 원인은 아래처럼 조상신이 노해서임이 큽니다.
당시 큰아버지가 저희 작은집에 야산공동갑 제의 수년이후,
제부친은 일단 논을 더 받기전까지 야산을 빌려쓴다 생각하고 확장,개간해서 밭을 늘렸는데 그과정이 문제였습니다.
큰집이 이미 개간한 100여평 바로 밑 주변에 우리 신씨 웃대조상묘가 몇개 있었는데,
그것을 순리대로 이장하고
개간해야했는데 그러지를 않고, 그 조상묘를 밑으로 쭉내려서 이장시켜 버렸습니다.
묘지순서가 웃대는 위로 아랫대는 아래여야하는데, 웃대 조상묘를 밑으로 쭉내려놨으니,
이른바 아랫대와 겸상하는 형세인것입니다.

∇ 고인돌야산 북동쭉으로 사진상에 보이는 묘지 2개(증조 신태술네)
위둥근칼라강판공구리는 무관함(주위에 대뿌리가 치고오고 있어 차단막 작업한 상태임)

 

 

그래서인지 내나이 4~5세경 그조상묘 이장사태이후 저희집안에 별의별 불화가 끈이지를 않았습니다.
세살때까지 기억으론 부친이 선한 사람이었는데, 조상묘사건이후 거의 괴물로 돌변해 있었습니다.
그 만극한사건이 있은직후 큰집 장녀가 저희부친에게 조상묘를 제대로 이장시키라고 항의했지만,
"출가외인은 문중사에 참견말라"며 모르쇠로 일관했습니다.

그러며 간혹 술취해서 큰집에 찾아가 "제발 논이나 좀 떼주라"며 추태를 부렸다고합니다.

 이렇듯 제부친은 갑자기 술주정뱅이가 되 집안이 시끄러웠으며, 자녀들에게 칼부림까지하며 자주 학대했습니다.
3남2녀중 첫째가 누나인데(둘째는 나 장남) 누나는 결혼후에도 우울증에 시달리다 끝내 자살에 이르고맙니다.
모친에게도 시련이 닥쳤으니, 내가 국민학교다닐때 어느날 다리를 크게 다쳐,
모친외가의 가족력 파킨슨병이 되살아나 그때부터 지금까지 파킨슨병으로 고생중이십니다.

 

 

조상묘사건 그때시점에 첫째 남동생이 태어났는데 나중에보니 지적장애아였습니다.
처음에는 지적장애였는데 장애 극복하려는 노력을 않했고, 나중에 커서는 인성에 문제있는 인격장애에 이릅니다.
예로 어둑한 밤에 자려는 동네노인들의 집에 자주 찾아가 못자게 말을걸며 귀찮케하는 진상짓에,
쓸데없이 싸돌아다니다 못해 남의 자전거를 편취해 지금까지 훔친 자전거만 50대가 넘으며,
부모님돈 훔치는것도 모잘라 어렵게사는 먼사촌댁에 침입해 기물파손 및 절도행각이니, 못쓸인간 그자체입니다.

 

 

 

한편 아버지로 인해 집안의 부부 싸움도 잦았는데, 내나이 5세때 어느날 집안의 부부싸움 며칠후,

제가 어머니에게 무슨 투정을 한것도 아니었는데, 집에서 어머니는 갑자기 뭐라 짜증을 내며,

저에게 맞아 죽거나말거나 막무가내로 부억칼을 던지었습니다.
그래서 그칼이 그대로 제 머리에 맞아 꽂히어 머리부상을 당했고 사경을 해맸었습니다.
하여 갑작스런 어머니의 칼던짐에 머리부상과 정신적 충격으로 후천적 지적장애가 생겼습니다.
이것은 나의 친지중에서나 죽마고우도 이후 사회직장사람도 모르는 사실입니다.
선천적장애가 있는 남동생과 달리, 사고장애를 딪고 일어서려는 노력을 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머리부상으로 상처는 아물었으나 뇌를 다쳐서
기억상실증, 앞면장애, 정신착란증까지 생기기도해 꿈과 현실을 구분못하기도했지요.

사회생활에서도 일이 서툴다고 종종 핀잔을 듣기도해,
자의,타의로 그만둬야했던적이 수차례일정도로 절망과 고독의 삶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래도 분발하려 하며 나름 장애를 극복하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유년기 학교에서나 사회생활에서나 그냥 특출나지않는 소년이나 사람으로만알뿐
귀촌시 골사모에 저의 삶의 사연을 올려서 읽으신 분들외에는,

뇌를 다친줄은 죽마고우도 지금까지도 모르고있고, 주위 사회인은 더더욱 모르는 사실입니다.
다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후유증이 심해져서 기억력이 퇴화되고
앞면장애,마비가 조금씩 생기다보니 대인기피는 어쩔수없는거같습니다.

그러다보니 사고와 기억력에 있어, 지금까지 거의 정신력으로 버티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노력의 결실이었는지 지금도 회상하면 내인생에 신묘한 사건이 몇차례 있었습니다.

 

가사난으로 중퇴후 직장생활을 하며 틈틈히 검정고시 학원을 다니며 공부를 했습니다.

검정고시학원 반에서 등수가 2~10등으로 공부를 잘했고 장학금도 받으며, 고졸자격을 이수했습니다.

 

 

 

그리고 고졸자격이기에 병역을 민방위가 아닌 단기병으로 입대하였습니다.

단기병으로 제대하기까지 말년휴가까지 포함해 보통 많게는 포상휴가가 5차례입니다만,

군대생활을 다만 열심히했을뿐인데 휴가가 8차례 가까이(한달) 됐으니,

군선.후배들이 포상휴가 비법의 조언을 구할정도였습니다.

 단기병 복무시 군사단 무등산 미화활동대회에서 포상휴가 받은사례 활동모습.

 

가문사람중 삶이 나은 인생이 아니지만 노력과 배푸는 공덕을 실천하였기에 저주도 저멀리가지않았나 생각됩니다.

 

 

자린고비 생활수기 전격공개- 박봉 자수성가기

하늘자산;5천만원이상, 땅자산;1억원이상 달성

짠돌이카페 베스트선정 원문 : http://cafe.daum.net/mmnix/7mn8/7890

 

∇ 귀촌전까지의 후원관련 이미지영상


누가 어느신을 믿는지 묻는다면 두루믿는 케이스로, 좀 온전한 신이라면 다믿으나 아닌신은 상종도 않는다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모르겠으나 예수님하면 사회정의를 실현하고자하는 일부 천주교인들과
촛불에 앞장선 진보기독교인들이 가끔 떠올립니다.
교회를 다니지는 않지만 나의 마음한켠에는 은혜와 소망의 예수님, 낮은자의 예수님으로 남겨있습니다.
그리고 자비스러운 부처님도 그리워져봅니다.
기독교 덕목의 '믿음,소망,사랑'도 괜찮겠지만, 불교에서 "공덕하여 성불하소서"하는 격언이 마음에 와닺습니다.
이세상에서 사람들이 "공덕=인간질" 이것만 잘하면 천하태평인것을 생각해봅니다..

긴 이야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1#  이번 추석 전에 극장가에서 흥행을 기록한 영화가 <택시운전사>, <청년경찰>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를 유심히 보면 영화구성을 왜 이리 급조하듯 각색했는지 의구심이 들다,
상업성 때문에 그랬었구나고 어림짐작과 함께 약간의 아쉬움이 남게 됩니다.
 
<택시운전사>는 민주화 격동기의 실화를 바탕으로, <청년경찰>은 동포번화가 풍문 등을 각색한 영화입니다.
각색이다 보니 허구는 존재하겠으나, 당시 어떤 당사자들이나 특정대상에 상처를 안겨주는 각색은
대부분 감독들이 자제합니다만, 아쉽게도 위의 영화들은 좀 그러지 못했습니다.
(특히 상업성보다 공익을 우선시하는 다큐영화는 더욱 각색에 조심에 조심을 기함.)

 

 

<택시운전사> 스토리를 대략 살펴보면,
영화 초반에서 1980년경 자칭 베스트드라이버라는 개인택시 만섭(실존인물명; 김사복)은
서울에서 영업중 도로가 시위와 경찰들로 막히자 "대모할려고 대학 갔나?.., 후광에 겨워서  저러는것들은 사그리 잡아서 사우디 보내야 한다니까.."며 보수적인자로 나옵니다.
그러면 실존인물인 김사복은 어땟을지 본다면, 기반있는 집안이지만 옹졸한 보수편향은 아닙니다.
또한 영화에서 1980년 5월, 개인택시 친구가 거액의 외국손님유치건이(광주 왕복 택시비 10만원건) 있음을 알자, 만섭은 밀린 월세도 생각나 겸사 그 건을 중간에 낳아체 임의로 외국손님을 태우고 가서 좌충우돌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나 당시 실존인물 김사복은 호텔택시업체에 소속된 요즘의 고급모범택시처럼 레벨있는 택시기사였으며, 독일인 외신기자인 피터(위르겐 힌츠페터)와 정식탑승 고객유치하에 손님인 외신기자를 모셨습니다.

또한 영화 중반에 들어서면서 택시운전사 만섭은 충격적인 군부의 광주민간인학살의 현장을 목도하고도, 자신의 영업택시로 외신기자가 취재하는것을 가이드를 하다 영업차가 망가지자, 외신기자를 멱살잡이하며 추태를 부립니다.
본 영화 중 가장 아쉬운 장면이 이것으로 꼭 이렇게까지 막장 기사인것으로 각색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실존인물인 김사복은 광주학살의 충격적인 상황을 목격하고 현지 택시기사와 의기투합한 동시에 의연하고 조심스런 자세로 외신기자를 가이드하며 취재를 도왔습니다.
그러면 왜 저런 막장택시기사로 스토리를 전개했을까 들여다본다면, 당시 실존 택시기사대로 항상 모범을 보이며 의연하게 외신기자와 착착 손발이 맞아 취재를 도왔다며, 영화를 만들었다면 흥행이 됐을까?
네, 의구심대로 안타깝게도 흥행 면에서는 장담할수는없고, 뻔한 스토리에 다만 박스중하위권에서 고전했으리라 생각됩니다.
하여 감독도 이 부분이 고민거리로, 광주이야기를 박스 상위권으로 올려놔야겠다는 시대적 사명감이 발동합니다만, 이거 실화를 흥미롭고 진지하게 하여 흥행성을 살리는 동시에 손색없이 만들어야 하니 영화제작자로선 쥐가나는 부분이지요.
하여 흥행이라는 상업성을 위해 어쩔수없는 각색을 하다 좀 오버된 각색이 연출된 것이 아닌가 추측이 됩니다.

그래서 영화 하반부에선 그 속물 기사가 그래도 이러면 안되지 하고 반성하며 외신기자와 의기투합해
시대적 사명을 함께 완수해나가는 명품 엔딩영화로 끝을 맺습니다.

 


아울러 김사복아들의 초연함을 알수있는데, 다큐 인터뷰에서 그냥 지금은 고인인 김사복 그분이 우리 아버지가 맞다고만할뿐, 김사복을 속물기사로 묘사된 것에 내색하지 않고 의연합니다.
그래도 마음은 좀 힘들었을텐데 벙어리냉가슴을 굳이 내비치지 않고 초연함에, 존경과 함께 안스러움이 밀려옵니다.
아울러 저항에 함께한 광주시민들과 군부의 만행을 알리기 위해 애쓴 여러 사람들에게 경의를 표하는바입니다..

 

 

 

2#  지난 8월 개봉한 영화 <청년경찰>은 중국동포가 많이 사는 대림동 일대를 조선족조폭 주무대화해 우범지대로 묘사해 논란이 있습니다.
<청년경찰>의 줄거리를 일부를 보면, 서민의 아들인 가난한 기준은 학비가 무료이기 때문에, 과학고를 다닌 희열은 특별한 일을 하고 싶어서, 각각 경찰대를 선택한 가운데 벌어지는 핼조선내 서민사회초년생의 에피소드를 담고 있는 성장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아저씨>와 <아수라>와 오버랩되지만 각색이 많아 사실성은 이 영화에 못 미치나 흥행성은 더 높은 스릴러영화입니다.
청년경찰들이 납치된 젊은 여성을 찾아 헤매다 난자밀매 조직을 발견하는 설정은
<아저씨>에서 전직 국정원요원 태식이 납치된 이웃집 소녀를 찾다가 장기밀매조직을 접하게 되는 장면과 비슷합니다.
<아저씨>에서 범죄의 공간은 차이나타운으로 지칭되지만, 최악의 범죄를 자행하는 주범은 한국인이듯, <아수라>도 부패한 박시장이 자신의 비리를 알고 있는 검사를 제거하기 위해 조선족이 섞여있는 외국인노동자들을 동원합니다.
 <청년경찰>에서도 조선족장기밀매조직이 한국인조폭을 등에 업고 한.중합작하에 비리병원을 매수해 일을 벌여나가는 내용입니다만,
영화화면에서는 조선족장기밀매조직이 모든것을 주도하고 계획하는 것으로 묘사되면서, 동포번화가를 우범지대로 보여줍니다.

 

 

또한 추석에 개봉해 최근 흥행중인 영화 <범죄도시>의 경우,

실제 지난 2004년 조선족 왕건이파와 2007년 연번흑사파를 일망타진한 강력반 괴물 형사들의 '조폭소탕작전'을 영화화 한 작품으로, 동포번화가를 좀 우범지대로 묘사됩니다.
그러면 영화처럼 실제로 조선족조폭이 한국인조폭보다 더 잔악하고 심한가 조사해본다면,
한국인이든 조선족이든 똑같이 목소리 높고 성질이 지랄같다는게 정답입니다.
예로 안산 원곡동의 한국조폭이 중국인조폭을 박살내서 자기 수하로 만들었습니다.

고로 중국인조폭 <= 덜떨어진 조폭 혹은 시다바리 조폭, 한국인조폭 <= 체류자도 구슬려먹는 지능화된 교활한조폭이라 할수있습니다.

 

당시 기사에 '가리봉동 공포의 조선족 조폭…칼·도끼 들고 폭력·돈 갈취'라는데 실제는 맞는 면이 있고 틀린 면이 있습니다.
상세기사에는 [이들이 2005년 7월 옌볜 출신 폭력배를 모아 연변 흑사파를 결성하고, 동포주변상인들에게 보호비 명목으로 돈을 빼앗고 2006년 10월부터 2007년 2월까지 9명을 다치게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특히 다리에 칼이나 도끼를 차고 다니면서 작은 시비에도 쉽게 흉기를 휘두르고 공짜 술을 얻어먹는등 70-80년대 국내 조폭특성을 띄었다고 한다. 당시 피해액은 고작 200만원으로 드러났는데 피해자들이 보복이 두려워 진술을 하지 않았고, 실제 가해자들은 신분세탁 뒤 재입국을 쉽게 할수있었다..]
<= 개인독고다이깡패가 아닌 조직폭력배가 5개월에 겨우 200만원만 뜾어냈다니, 그것도 칼이나 도끼를 차고 다니면서??
그래서인지 지역출신 깡패가 "재들은 뭐라냐? 목소리만크고뭐여? 저러고 다니면 나중에 큰코다칠텐데.. 근데 저리 조직사업해서 밥이라도 먹고다닐라나? "하고 웬만하면 역이지 않으려하면서 지켜보곤했다합니다. 그도그럴것이 국내에서는 범죄와의 전쟁으로 인해 국내조폭들이 70-80년대처럼 "나 조폭이여!" 하며 쇠파이프등을 질질 끌며 행세하는것이 아닌, 나아바리를 사업성 있게 다만 법을 염두하여 지능화해 그리고 다양화하고 있음이 차이입니다.

 

서민지역이라는 특성상 동내부호들도 이곳에서 꾸준한 상업을 포기하고 더 좋은 환경으로 종종 옮기는 추세였고 지역주민도 그러한지라, 지역조폭도 세력형성에 미미했고 대부분 잘자란 생업이라도 있던 패거리 혹은 독고다이깡패이거나 지역상인 또한 독고다이 정신이 강했습니다.
90년대 이후 동포와 중국인이 이 지역에 유입되면서 동포,중국인상인이 대폭 늘어나 차이나타운이 형성되었고, 문제라면 주로 지역주민과 동포와 이방인과의 상호문화충돌이나 생활중 사소한 다툼이 간혹 패싸움으로 번지기도했는데, 상대적으로 많은 외지인들의 기세에 의해 지역주민이 싸움에서 밀려나기도했을뿐, 어느쪽이든 어지간한 인간군상이었음이 진실입니다.

 

그래서 동포나 외국인노동자 밀집지역이 우범지대인가? 를 살펴보면,
이 질문은 서민 밀집지역이 우범지대인가? 에서 답을 찾는게 객관적입니다.

과거에 80~90년대 산업화시대때 공돌이,공순이들이 가리봉동과 구로동, 가산동일대에 많이 거주했었습니다. 그리고 영등포동에는 서민시장 및 유흥가가 형성되었고, 구로구와 영등포구일대가 저질스런 동네로 회자되었는데, 근본적인 원인중 한가지는 나라가 복지보다 경제개발이 우선이라며, 노력해도 노동착취로 인해 가난의 대물림이라는 빈곤의 악순환이 이어져, 삶의 희망이 멀어지는 현실에서 자포자기하는 서민이 늘어났고, 술과 도박 혹은 사소한것에도 동네,이웃쌈판으로 이어지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서민이라고 막장이나 자포자기인생만 있을까요?
부자라고 해서 인성이 다 뒷받침되는자만 있는게 아니듯, 국내서민이든 동포든 어려워도 참고 삶을 이겨나가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광주학살사태때 외신기자를 조력해준 '택시기사'를 속물기사로 묘사한 것이 좀 그러할진대,
<청년경찰>이나 <범죄도시>에서는 특정지역을 우범지대로 묘사한 것은 흥미거리를 떠나서 도가 지나친것이 아닌지 생각됩니다.

 

참고로 군함도에서 한민족끼리 위기상황속에서도 아귀다툼하며 좌충우돌하는 장면이 연출되듯, 우리 한민족끼리 반목보다 이제는 민족화합이 필요한것이 아닌지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청년경찰', '범죄도시'…중국 동포 범죄 실체는?  출처; 소비자경제  2017.10.15
http://www.dailycnc.com/news/articleView.html?idxno=74723

[IOM이민정책연구원에서 발행한 보고서 ‘체류외국인의 범죄에 대한 진실과 오해’에 따르면 총 외국인 범죄자의 강력범죄 건수 중 중국(동포가 포함된)은 5위 안에 포함되지 않는다. 절도범죄 소계도 마찬가지이며 폭력범죄는 1.03배로 국내 범죄자의 비율과 비슷하다.
강력범죄는 국내 범죄자 비율 대비 파키스탄 5.97, 몽골 3.86, 러시아 2.92, 우즈베키스탄 2.86이며 폭력범죄는 몽골 2.49, 중국 1.03, 우즈베키스탄 0.89, 러시아 0.79이다..]



3#  혹자는 "그들 스스로 중국인이라고 하니 짱개아닌가?"고 비속어를 섞어가며 빈정댑니다만, 이 또한 한심한 작태입니다.
일본의 경우 어떤 동포가 일본인인것을 부정하려한다해도 최대한 미래세대의 자국민으로 인정하려는 제도를 펼칩니다.
중국 또한 마찬가지입니다만, 유독 우리 대한민국만은 중국동포와 고려인 3세 이상을 외국인으로 치부하려고 있습니다.

일각에서는 조선족 3세 스스로 자신이 중국인이라는자가 많으니 동포 혜택을 제한해야겠지만, 고려인 3세만큼은 그게 덜하니 최대한 받아서 동포 대우해주자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땅덩어리나 사람이나 우리보다 넓고 많은 일본과 중국이 나름 동포우대정책에도 신경을 쓰는데,
정작 사람 한 사람이라도 아쉬울 미래한국 상황인데도 사람을 정체성의 잣대로 솎아 내치면서 골라 받아든다??
그 당사자가 범죄자인 경우 대부분의 나라가 입국을 거절하는 경우는 있으나, 정체성을 잣대로 한다면 좀 이상한 발상입니다.
 정체성의 문제는 그 동포에게서나 생긴것이 아닌 '동화정책'이라는 그 동포가 거주하고 있는 나라 시스템에 의해서 발생된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동화정책에 버금가는 정책을 내세워서 포용하는 제도를 시행하면 됩니다만, 그것을 약간 시도하면서도 이상한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동포도 다문화라는 틀거리내에 포함시켜서, 외국인체류자와 비슷한 정책과 대우로 뭉뜽거리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정부에서는 "너희가 동포인지 정체성이 무엇인지는 관심은 없고, 다만 합법적인 체류하에 일 열심히하고 기술.기능을 잘 습득해 사회에 큰 이바지하거나, 돈 많이 벌어 놓거나 혹은 돈 많이 들고와 정착해 있는다면 너희 능력을 높이사 귀화혜택을 좀 주겠노라"는 식의 제도입니다.

한편 중국은 토착한족과는 이방인이던 조선한인을 중국인으로(조선족) 포용하여 조선족부주석만도(부대통령) 2명이나 임명시켰습니다.
아울러 우리 조선족은 연변자치주를 형성하고 중국에서 특등급 쌀과 작목을 생산해 내는 쾌거를 이루었고, 현제 리동춘 전인민대표(전국회의원)가 녹색혁명에 노력하고 있는등, 농산업, 무역, 건설업, 문학, 스포츠 등에 유능한 인재가 널리 분포되어있습니다.

 

이것은 러시아고려인도 마찬가지로 과거 연해주에서 우즈베키스탄으로 강제이주 당했던 조선한인도 변변치못한 신분보장상태여서도, 그곳의 척박한 땅을 일구어 다량의 작물을 생산해내고 삶을 개척해 냄으로써, 현지 러시아인을 놀라게 했습니다.


리동춘 환갑기념 《된장아리랑》닐리리 ,리동춘의 《된장아리랑》출판식 및 학술세미나가 연길에서
출처; [ 길림신문 ] 편집/기자: [ 김성걸,강동춘 ] 원고래원:[ 2015-07-24 ] 
http://www.jlcxwb.com.cn/sports/content/2015-07/24/content_159849.htm

 

연변전통된장과 “귀향아리랑”  출처; 연변통보 2008-01-10
http://www.yanbianews.com/bbs/zboard.php?id=news07&no=69

 

연변 | 된장 사랑, 된장 아리랑 출처; [해란강닷컴 ;문학뉴스]  2016-10-30
http://www.ihailanjiang.com/bbs/board.php?bo_table=2002&wr_id=107

 

 

 

http://cafe.daum.net/kseriforum/HjpR/2672 김광수경제포럼
http://cafe.daum.net/hanryulove/538/113121 한류열풍사랑
http://cafe.daum.net/10in10/9HTt/62101 텐인텐
http://cafe.daum.net/moonfan/bhr8/105051 문팬
http://cafe.daum.net/yoonsangwon/TXKe/6473  생존시대
http://blog.ohmynews.com/chmanho/owner/entry/edit/551424 오마이뉴스블로그

 

1#

  늦가을이 되면 오래전 양천리를 비롯 광산구 인근에선 무말랭이 수확이 한창이었어요.
광산구 신동에 위치한 내 고향에서도 무말랭이(신기루) 작업이 한창이었지요.
제 집안은 빈농이라 농지에 무우농사가 그리 풍족치 않은관계로
자체적 조달이 어려워, 주로 이웃마을에 일당제를 나간 곳중
큰토지에 속하고 생산가치 없는 잘잘한 무우를 많이 버려진밭에서
무우를(무말랭이 재료) 얻어와 작업을 하였어요.
특히 계량마을 인근의 부농밭에 버려진무우가 많이 있는편이어서,
그곳으로 가족단위로 나가 무우를 무상으로 얻어와 활용한 기억이나네요.
아마 그 부농의 후덕한 인심이 훗날 복으로 되돌아왔던것일까요,

몇년전 성골롬바노중학교 카페를 알게되어 나중에 카페글을 보던중,
요셉천사의집을(고아원) 이대호님이 운영하신다기에,
존함이나 얼굴도 처음본분이라 그런가보다했어요.
그러다 관련글을 유심히 보다 이대호원장 고향이 계량마을 인근이라시길래,
어렸을적 노안성당 입구 밭에서 무말랭이 재료(무우)를 얻게된 기억이 나면서,
무슨 보은할것이 없나 생각이 나던거에요.
하여 보은하는 마음으로 요셉천사의집과 병풍산하의 복지기관에 후원을 이어오고있어요.

 

 

 

 

 

 최근 제가 더 좋은 직업으로 이직을 준비중인지라,
잠시 시간적 여유가 있어 오랬동안 못갔던 고향집을 방문하고 고향산하를 들러볼까해요.

 

 

 

 고향 생각하니 고향산천중 저희집 성산에(금동 뒷산) 고인돌이 제일 먼저 생각이 되며,
 제일 먼저 반길듯 눈에 아른거리네요..

 


 

  2#

 △ 10여년만의 어머니와의 첫통화

일찍 출가했던 여동생이 3년전 편지를 하는덕에 집안 소식과 연락처를 알게되었지만,
과거 고향에 불편한 일이 있었던지라 어쩔수없이 가기가 망설여졌습니다.
여동생에 의해 가족의 연락처를 알았지만 고향을 생각하면 지나온 과거 고향 옛적의 않좋던 기억이 떠올라 그리움이 악몽이 되어 잠을 뒤척이기도 했지요.
(마이리틀히어로, 김영광을 보면 나의 삶이...; http://blog.daum.net/chmanho/16883715
삶의 십자가... ; http://blog.daum.net/chmanho/16883718 )
어찌하든 어머니가 이미 60이 넘은 고령인지라 살아생전에 뵙는게 도리라 생각되어,
오래간 주저하던 연락을 12월초 여동생과 어머니께 하게되었어요.

그리고 12월 첫주말에 10여년만에 못보았던 고향산천을 방문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지병이 악화돼 광주시내의 요양병원에 입원중이었고, 형제들도 대부분 광주에 정착해있었습니다.
먼저 매재댁에(여동생) 방문후 여동생과 함께 요양병원에 들려 어머니를 만나뵈었습니다.
안쓰러히 반기던 어머니께 고향소식을 듣던중 윗집 숙경이할머니가 돌아가신 이유가
갑작스런 교통사고를 당해서였다는 뜻밖의 소식을 뒤늦게 알게되었습니다..
(삶의 십자가를 지시고 홀연히 떠나셨으니, 어찌하든 미안한 마음과 함께 천국에서 영면하시길 빌뿐입니다..)
병원에 있는 관계로 어머니도 고향을 자주 못갔지만 기회가 된다면 가끔씩 찾아보고싶다하여, 거동상담을 받은후 어머니와 함께 고향마을을 방문하였습니다.

 

 



 




 

 

타고다니던 다마스 타이어가 수명이 다되어

중고타이어 괜찬은게 있는지 최근 인터넷서핑을 하던중

인천시 서구 왕길동에 위치한 김가네타이어를 찾게 되었어요.

타이어 수명은 타기에 따라서 신품기준 3~5년인데요,

괜찬은 중고타이어를 얻는다면 약3년까지도 가능하며,

저는 전에 장안에서 재생타이어를 구매하여 오늘까지 3~4년 타고 다녔드랬죠.

이제는 재생타이어를 얻기가 거의 불가능하여 신품이나 아니면 아쉬운데로 중고타이어를 구매해야하는데, 다마스의 경우 단종된 모델인데다 타고다니던 사람들이 워낙 오래타고 다니는지라,

타이어가 매장에 들어온다해도 상태가 별로인 경우가 대부분이었어요.

 

김가네타이어 사장님은 "폰 사진으로 보여준 다마스타이어 개당 1만원에 장착비 모두 포함해 5만원만 받을게요"

이렇게 뜻밖에도 인천외각도시의 왕길동에서 중고중에서 상태가 A급인것이

내가 필요한 4짝 모두하여 개당 1만원에 있었던거에요. 앗! 놀라워라~

오늘 찾아가 직접보니 트레이드 잔량이 60~70% 남아있는 장안 자동차시장에서 상태 A급에 속하는거로 2만원을 받았으면 받았지, 깍아주기는 거의 드문 물건인데, 1만원에 있었으니 얼마나 감사한지요.

타이어를 벨런스까지 맞추어 장착후 사장님은 5만원만 받으려했으나 1만원 더하여 6만원 드렸어요.

이심전심이라고, 외진 수도권에서 이렇게 싸게 물건을 주셨으니, 장사하시는 노고도 생각되어

못해도 그정도는 드려야 사람의 도리라 생각도 돼서, 사장님은 괜찬다고 했지만 강권해 드렸지요.

 

 

 

 

 

 

귀가후 저녁에 촬영했고요, 전에 타이어 쓰던분이
      건설일한듯 흙이 베어있었지만 튼튼하고 괜찮습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했듯이,
제가 월150도 않되는 수입에 아직 주택한채도 없는 서민이지만, 나름 아끼어 저축하면서도 나누고 사니 하늘님이 간간이 단비같은 복을 내려주시며, 이것에 더욱 감사하며 살고있어요.

 

이야기를 더하여 저의 가정사에 대해 잠시 이야기할까해요.
2013년에 개봉된 '마이리틀히어로'에서 저와 닮은 주인공 김영광의 스토리처럼 환경은 다르지만 ,
집안이 여의치않고 화목치 않아 순탄치 않은 유년시기를 보내었어요.
고향은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동으로 가난한 농가의 전쟁고아 집안입니다.
원래 본 고향은 한국전쟁전후까지만해도 뒷마을 나주시 노안면 금동마을로 성산에 고인돌이 있는데요,
옛날 제 조상이 관리했으며, 집성촌에서 동네 유지에 속하는 좀 부유한가문이었다고합니다.
http://cafe.daum.net/sdsms/2R8A/12

그런데 한국전쟁때 저희 할아버지는 북한무장공비로 추정되는 괴한에 의해 납치.실종을 당하셨다고 하며, 할머니는 전쟁 후유증에 지병까지 겹쳐 끝내 일찍 운명을 달리하셨습니다. 하여 제 아버지는 어렸을때 뒷 마을(내기마을) 고씨성의 부자농가에 의해 자랐고, 후에 내기마을에서 독립은 하셨으나 가난한 농부였습니다. 문중에선 가문의 재산을 본가 '금동마을'의 (큰형)큰아버지가 대부분 물려 받은터라 그런듯하다 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문중이(특히 당숙들) 큰집의 유산을 편취해가서 그러했습니다.

아무튼 지금은 고인이된 부친은 어렸을적 당시 친지나 이웃에게는 좋게 다정히 대했지만, 어머니에게 자주 화풀이하고 자녀들에게도 좀 쌀쌀하게 대하고 학대를 했습니다.
이렇게 아버지로 인해 집안의 부부 싸움도 잦았는데, 어느날 (초등학교 들어가기전 유년시기에) 집안의 부부싸움 며칠후, 제가 어머니에게 무슨 투정을 한것도 아니었는데, 집에서 어머니는 갑자기 뭐라 짜증을 내며, 저에게 맞아 죽거나말거나 막무가내로 부억칼을 던지었고, 그칼이 그대로 머리에 맞아 꽂히어 피가나는 부상을 당했습니다.
하여 갑작스런 어머니의 칼던짐에 머리부상이 돼 사경을 해맸으며, 부상 휴유증과 적지않은 정신적 충격을 받았습니다. 당시 머리부상이었지만 치료도 제대로 못하고, 머리에 쑥이나 지혈제, 연고를 몇번 바른게 전부였고, 그때부턴가 뇌의 30% 가까이가 죽거나 기능이 마비되다시피하여, 사고후 머리부상은 아물었으나 기억상실증, 앞면장애, 정신착란증까지 생기기도해 꿈과 현실을 구분못하기도했어요.
그이후 정신착란증은 가셨으나 기억상실증이나 앞면장애는 휴유증마냥  간혹 있어서 거의 정신력으로 버티며 살아가고 있지만, 아무래도 사고와 기억력에 있어 한계가 있는듯이 아무리 노력해도 전문대 입학 합격마져 않되서 포기를 해야했습니다.
중학교를 중퇴하고(16세) 그때부터 상경하여 간간히 집안에 용돈을 보태주고, 후 20세 전후때 학업을 할수있는 신문배달을 새벽에 하고 낮에는 검정고시학원을 다녔으며, 반에서 5등 안팍일 정도로 원래 머리가 나쁜것은 아니었어요. 그러나 머리사고휴유증이 있어서 대입검정고시(고졸)까지는 가능하나 전문대 입학할 점수가 될듯하다가 영어,수학(이것은 무엇을 달달 왜워서 되는게 아니라서) 실력이 부족해 포기할수밖에 없었고, 금속가공업에 종사하다 IMF로 구조조정 당해 현재는 신문일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의 삶에도 한줄기 희망이 있었으니 예수님의 사랑이며, 하늘의 은덕입니다.
사실 제가 주택한채도 없는 이유는 여지껏 돈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살면서 나름 베푸는 삶을 실천하다보니 좀 미루어지고 있을뿐입니다. 여지껏 여기저기 후원한 돈을 환산해보니 5천만원이 훨씬 넘던데요, 현제 가지고 있는 자산 1억미만과 합산해 약간의 대출을 받았다고 가정하면, 2억좀넘는 소형단독주택을 구매했을텐데, 그래봤자 소형주택이고, 거기서 나오는 수익으로 약간의 대출이자,재산세,오른건보료,집수선비등 재하면 그걸로 땡이니 구지 악착같이 돈돈 할필요없다는 결론입니다.
제가 종교에 편견이 없어 오래전 지인이 점을 봐주는데요, 점쟁이 왈 "인생는 기구하나 평생 빌어먹을 팔자는 아니고 근본있는 가문에다 베푸는 삶이 베어있는듯하니 그 후덕으로 간간히 하늘의 은덕을 받다가 언젠가는 인생역전하여 자수성가할 팔자"라고 하듯이 살면서 하늘의 은총이 함께하시고 있으며 그저 감사할뿐입니다..

 

참, 귀가할때 부평시장에 간만에 들려 장을 보았어요.
부평시장에는 싱글족에게도 안성맞춤인 장거리가 많이 있어 매력적이지요.
반찬거리도 싸고 야채.채소도 그렇고 떡이나 고기류도 싼 가게가 좀 있으니까요.
부평시장에서 반찬, 야채, 떡 등을 싸게 샀네요^^
반찬를 아래처럼 8천원에 득템했어요^^

 

 

 △ 혼합겉절이 2근;3000원, 물김치 1킬로;천원, 돼지껍데기무침 2팩;2천원, 연근무침;천원, 조개젓갈;천원하여 총 8천원으로, 돼지껍데기무침부터 시작하여 각 반찬들도 아주 가격이 착하네요^^

 

 

  오이 4개;천원, 달래냉이;천원, 부추;오백원.

 

 

  물김치를 3리터 반찬통에 넣고 약간의 야채류를 손질하여 넣으니 거의 꽉차는거같네요^^

 

 

 

 

 

 △ 올해에 후원한 목록들이며, 통장에 파란밑줄도 정기후원중인것이에요^^

 

 

 

http://bbs3.agora.media.daum.net/gaia/do/story/read?articleId=154241&bbsId=S101&pageIndex=1

 

4

 

 

민주당이 살려면 고노무현을 넘어 고김근태정신을 이어받아야..

 

간만에 게시글을 쓰면서, 영화 변호인에 대한 잔잔한 소회를 적어봅니다.
고노무현선생이 한때 속물 변호사였다가, 개념 변호사로 변모했다는데, 거기까지는 정말 치하할만하며 자랑거리입니다.
그리고 그 후 대통령이 되기전 NGO활동 및 정치초선 때의 행보도 대략 무난히 잘했다고 할수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모든 일엔 절차와 순서가 있듯이 정치판에서 절차탁마해 나가야 하는데
정치판에서 자신의 정치.대선순서를 좀 미리 앞서 확보함으로써, 기어이는 다음 17대 대선에서 수구에게 정권을 뺏기는 참극이 이어졌습니다.
당시 국민 중에 정치변화라는 열망이 있음은, 야권인 김대중정부가 먼가 크게 변혁할 줄 알았는데 좀 그런듯.아닌듯했음이었는데,
그것을 노무현 선본은 오판하여 젊은 지도자가 필요한 것으로 착각해, 어찌어찌하여 정치판도를 바꾸었으며, 그러면 정말 젊은 정치모습을 보여줘야 했는데, 김대중정부와 마찬가지로 변혁한듯 안한듯 하였습니다.

 

16대 대선정국 당시 김근태선생이 자신을 산화하듯 대권을 노무현선생에게 양보함으로써, 노무현바람이 일어 노무현이 대권을 이어 받았는데,
만일 정치선배인 김근태선생의 호의를 고사하고 대권주자를 김근태선생으로 통일해 밀어주었다면, 더욱 아름다운 야권의 정치 모습이었을 것이며, 야권이 춘추정국 속의 승자이니 이런 식의 보수층의 빙정거림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15대 김대중선생 다음으로, 16대 대선에는 김근태선생이 대통령의 대를 이어나감으로, 다음 17대 대선에는 노무현선생이 압도적인 당선, 그 다음 현18대 대선에는 문재인의원 무난히 당선 등으로, 모르긴 몰라도 지난 과거처럼 17대 대선에 수구정권인 이명박이 당선된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김근태선생은 계속 제야에서 대통령이 되는 모습을 본 상태에서 편히 눈을 감았을 것이며, 김대중선생도 그리하였을 것이고,
더욱이 노무현선생은 지금처럼 고인이 아닌 정계에 은퇴했다 해도 NGO 등에 남아 후학을 양성, 오래 살며 편한 노년을 맞았을 것입니다.

 

이제 어차피 엎질러진 물이니 과거는 그렇다 치고, 18대 대선에는 정치야권이 더욱 성숙한 모습을 보여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영화 변호인에서 송강호 주연은 영화를 통해, 노무현의 모습뿐만이 아니라
당시 사회상과 부림사건이라는 공안정국 속에서 한변호사의 사투와 민초의 고초를 보여주며, 언젠가는 정의는 승리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했듯이, 노짱.노짱하려 영화를 만든것이 아니라고 선을 그었습니다.

 

지난 17대 지방총선에서 친노인사들이 정치계에 대거 입문은 고사하고 고전을 면치 못했듯이, 민심은 냉정하였으며, 허면 18대 대선에는 대권주자가 리틀노무현이라는 문재인보다 정치9단에 민주당의 정치노장격인 이해찬, 박지원 등을 전면에 내세워 대선을 치렀더라면 좀 승산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사회경륜은 있으나 정치경륜은 초선을 막 지난듯한 문재인을 내세움으로써, 야권 정치판에서 춘추정국시대를 또다시 야기하는 미숙함을 비추었습니다.
정치에서도 정치전문가가 나서야한다는것이, 사회의 순리요 진리일진대,
이러한 순리를 역행하니 민초들의 표심도 사분오열 분산되었으며, 결국 정치모레배에 기득권층으로 단결된? 수구보수층이 어부지리로 정권을 획득하기에 이릅니다.

 

여기서 잠깐, 왜 친노프레임이 정치판의 만능통치약이 아닌지 살펴보지요.
고노무현선생이 어느덧 대통령이 되고난 이후 지난 구태 수구정권에 비해 고김대중선생을 이어 정치.경제.민생 민주화 및 선진화를 이끌었으나
한편으론 딱히 그렇지 않은 안타까운 행보도 보였습니다.
경제민주화냐 경제발달가속화냐에 대해 지난 이명박정권에서 "지금은 곤란하다, 기다려달라" 하듯 그리 정치했습니다.
때론 공감은 안가면서도 이해는 되나, 공안정치의 한 축에 여전히 함께했다는것은 용서할수없는 민주정부의 안타까운 단면입니다.
한미에프티에이의 민중의 반대투쟁에 경찰이 강경진압으로 대처해, 몇 명의 농민이 맞아 죽었고(전용철 열사, 홍덕표 열사)
2006년경 하중근 포항건설노조원이 포항 형산강 로터리 집회에서 경찰폭력으로 뇌 손상 당해 운명하셨고, 2007년경 이근재 노점노동자가 고양시의 노점상 폭력단속에 항거하다 시신이 되어 돌아오는 등,
이외에 투쟁하다 투신, 음독, 분신으로 자결한 사람이 수십 명이 넘습니다.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서해안 새만금갯벌을 죽이어 해민의 생업에 타격을 입히었고, 해민의 생업대안을 찾지못한체 민초를 방치한점.
세종시개발과 한미에프티에이, 이라크파병 문제에 대해 국민과 대화를 통해 해결했어야하는데, 그들만의 잣대를 미리 그어놓고, 소통부제로 고압통치적인 리그를 행세하다, 종국에는 한나라당과의 정치연정까지 하는 막장에 이릅니다.

 

한편 당시 열린우리당 김근태의원은 한미에프티에이 반대를 하여, 여의도 국회 점거 농성을 하고 단식도 하며 투쟁을 이끌면서, 당지도부가 옳은 정책은 적극 지지했고, 틀린 정책은 비판해 거부하며, 아닌 것은 아님을 보여주면서 정의를 선도하셨습니다.
(2007년 범제야 FTA 전선; 불가피론-강기정.김부겸.문재인.박영선.이해찬.유시민.전병헌.정세균.정동영.한명숙.  신중론-정운찬.문국현
  FTA반대-김근태.김두관.박원순.이인영.이종걸.임종인.정봉주.정청래.천정배.최재천.최문순.홍미영../ 이후 반성하고 FTA 반대에 합류; 김정길.문재인.박영선.박지원.유시민.정세균.정동영 등 총 60여명)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115&articleId=1769901

 

그럼 지금의 친노 리틀노무현인 문재인과 친문재인파는
과거 노무현의 과오를 뛰어넘는 자세를 갖추었는지가 관건인데, 안타깝게도 딱히 그리 못하고 있습니다.
친문이 김한길파의 문재인 비난공세로 민주당 대표에서 문재인이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는 등 하던데, 이러한 패배주의는 참 한심하지 아닐 수 없습니다.
지난 민주당 이인영의원이 아프리카 정치수다방 망치부인과의 인터뷰 때(2013년 11월 4일)
문재인이 한길이에게 밀려 딱히 그리된건아니고 민주당내 변화의 한 시도로 그리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김한길파의 구태연함을 질타하는 것은 좋은데, 그 이상을 할수있는 대안을 보여주면서 해야 하는데, 18대 대선부정선거에 있어 처음에는 총체적 부정선거라기보다 국정원 대선개입을 집중 언급하며 좀 문제가 있다고 본다 했다가, 요즘에는 총체적 부정선거라고 본다고 하면서도, 18대 대선이 선관위 중앙서버 조작을 하는 등의 개표조작.개표부정이 있었음은 애써 부정하면서, 국정원, 군.경 대선개입만을 파해 치며 언급하는 아이러니한 모습입니다.
그리고 18대 대선부정선거 규탄 시국대회의 조직력이 그리 크지도 않는 등, 김한길파와 마찬가지로 행동은 별무신통입니다.

 

개인적인 사례지만 작년 가을에 친문재인이 주류를 이루는 팩트티브 생방시 제가 개표부정 등 총체적 부정선거를 주장하며, 친문들도 정신차려야한다고 주장을 하니, 아예 방송시청 못하게 블랙을 걸어버리더군요.
그리고 개표부정을 주장하는 민주시민들을 수개표쟁이라 매도하며 강퇴를 자행하면서
자기 방송은 민주적인 범민주진보방송이라 하고 참 어처구니가 아닐수없습니다. (http://cafe.daum.net/facttv/GUlg/1665)

 

민주당원내에서 현 민주당 지도부 사퇴 및 비대위 구성하자는 목소리도 있던데,
혹여 김한길 사퇴하여 비대위 지도부가 문재인의원이 아니길 바랍니다.
문의원이 김한길만큼은 아니겠지만 지난 한명숙.정세균 체제를 통해, 그들 또한 한계가 있는 지도층임이 확인됐습니다.
현 친문들은 전부는 아니지만 패배주의에서 벋어나야 할것이며, 이제 민주당은
일신우일신해 김근태선생 같은 진정성 있는 행보와 강단을 좀 갖추어야할것입니다.

감사합니다.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003&articleId=5171317

각자가 자신의 이슈에 골몰하는 사이, 민주세력은 공격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광화문광장에서 수꼴 노인들에게...

(어제 민족민주열사추모제 인근에서 어버이연합이 지나는 민주시민에게 기습테러를 가했음)

노동계는 노동계대로... 시민단체는 시민단체들 대로 각자의 이슈에 골몰하고 있는 사이에 벌어지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민주추진세력들이던, 민주주의를 외치는 사람들이든, 민주주의를 향유하는 사람들이든 모두 흩어져 있습니다.

불법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집회의 자리에는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대한문앞에서 이루어지는 성당의 미사에서도

쌍차동지들을 위한 기도만 있을 뿐 불법 부정선거에 대한 목소리가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우리 촛불들 내에서도 부정선거와 관련하여 수개표와 전자개표기에 꽂혀 있는 사람들...

국정원의 불법 부정선거 조직적 개입에 대해 골몰하는 사람들... 거기서도 또 다시 분파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아고라는 아고라 대로 불법 부정선거에 대한 성토를 하기 보다 기왕에 정권이 출범했으니 잘 하기를

바란다는 기원을 하는 논객... 불법과 부정은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고 성토하는 논객들로 옥신각신하고 있습니다.

 

미권스는 미권스대로, 나꼼수는 나꼼수대로, 문풍지는 문풍지대로, 한지는 한지대로, 명진스님카페는 명진스님카페대로...

다 각자 흩어져 세상 돌아가는 현실을 개탄하면서도 움직이지 않고 있습니다... 누가 대신해서 움직이기를 바랄 뿐...

 

그러는 사이 독버섯과 같이 악마의 무리들은 그 뿌리와 촉수를 뻗쳐오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경찰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백주대낮에 테러를 가하는 상황입니다.  http://amn.kr/sub_read.html?uid=9431, 그런데도 이를 보도하는 언론은 없습니다.

이미 기성 언론은 죽었고, 그나마 올곧은 목소리를 내는 서울의 소리마저도 편집인을 감옥에 가두고야 말았으니 암흑입니다.

 

우리 이제 각자의 이슈에 골몰한 채 남의 일로 치부하는 현실을 스스로 반성해 봅니다.

2009년 3월 쌍차에 공권력이 투입되기 직전... 전면적 배타적 점거파업은 불법이므로 쌍차분들이 위험해지니

전면적 배타적 점거를 하지 마시기 바란다는 메시지를 전하려고 갔다가 이미 단단하게 각오를 한 사람들에게 조언을 전달할 엄두를 못낸 채 쌍차사람들이 불침번을 서는 본관 현관에서 주먹밥 하나 얻어먹고 무기력하게 돌아서서 돌아온 뒤 공권력의 폭력적인 행사를 보며 안타까워 했을 뿐... 그분들의 슬픔을 내 슬픔으로 안고 가지 못한 스스로를 반성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쌍용차 문제이든, 전교조문제이든, 역사문제이든, 그 모든 문제의 근본은 이명박근혜 새누리당 세력의 근간인 뉴라이트 세력이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저들을 대상으로 온마음을 다해 뭉쳐 버티지 않으면 저들의 민주주의 말살친일의 부활을 막을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야기인데 이 불법 부정선거를 통해 만들어진 불의한 정권하에서 도미노처럼 차례로 넘어지기 보다는 이땅의 모든 민주화세력은 뭉쳐야 합니다.  마치 사자들의 공격에 대비하여 스크럼을 짜고 단단히 맞서듯이 말입니다.

그 운동이 바로 백만 트위터리안 민주주의 사수대를 결성하는 것입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LU8DDYz68kM&feature=player_embedded

 

각자의 이슈별로 각자가 외롭게 외칠 것이 아니라, 발등에 돌이 떨어져 충격이 가해지면 온몸에 고통이 전달되어 온몸이 떨듯 동시에 전율하는 그런 살아있는 육신같은 연대... 노동문제이든, 민생문제이든, 갑과 을의 문제이든, 힘없고 약한 사람들이 뭉쳐 동시에 한목소리로 외치는 것... 그것이 바로 저들의 도미노 무너뜨리기 전략에 말려들지 않는 방법입니다.   

 

2013. 6. 9.   글쓴이 : 현종

 

백은종 석방을 위한 비상대책위원회 / http://cafe.daum.net/amn.kr

 

 

http://cafe.daum.net/facttv/GUlg/1126

http://cafe.daum.net/ddanziradio/NVZ0/52477

http://cafe.daum.net/yogicflying/Cia1/431621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