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코리아) 통일하면 독일처럼 체제가 합치어 비자 없이 자유로이 왕래하고 교역.교류하는 것을 생각하는 분도 있는데, 이것은 수십년쯤에나 가능한 것으로, 당장 몇년에는 전혀 실현 불가능한 망상입니다. 한편 몇년이후로도 가능한 통일안이 있는데, 오래전 진보정치인 권영길이 제시한 고려연방제입니다. 고려연방제란 상호 체제를 인정한 상태로 조건부비자를 통해(부작용이 없으면 비자조건 완화) 남북을 왕래하며 교역.교류하는 것을 말합니다.
참, 여기서 왜 남북이 체제를 허무는 완전한 통일이 단기간 몇년이후로는 불가능할까요? 이는 남북 모두 싯지못할 실수와 앙금이 있어서이죠. 북한이 고난의 행군을 하는등 경제적으로 어렵게 된 이유가 한.미 공조로 추진된 경제제재인데, 이것은 북한 기득권뿐이나라 인민대중까지 원망이 높다 못해(수만은 아사자 대부분이 인민임) 미국에 원한이 된 지경입니다. 남한의 기득.수구권이 친미를 통해 북한을 경제제재를 하고 무역 봉쇄정책을 펴 압박하는 외교를 꾀했는데, 이것은 한반도 장래를 생각할때 잘못된 행위입니다.
한편 북한은 남파간첩사건 및 연평해전 등 국지적 도발을 일삼았기에 대한민국 서민에게도 북한이 좀 불편한 존재이긴 사실이죠. (다만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인혁당사건, 천안함사건, 국정원의 왕모 사업가.유우성 간첩조작 사건, 최근 비무장지대(dmz)지뢰폭발사건 등은 한.미가 원인을 제공했거나 조작극) 연평해전의 경우 대한민국 월드컵축제 당시 진보계의 노무현 참여정부시절때 일어난 사태라 더욱 충격이 큰 것으로, 진보정부 상태에서도 북한이 도발을 했으니, 북한을 흡수해 통일한다는것 자체가 얼마나 망상인지 알수있습니다. 지금처럼 수구정권이라면 더더욱 택도없거나 추진된다해도 이념점쟁이 심화돼 국론분열이 더욱 격화되고, 사회양극화로 폭동.소요사태도 발생돼 거의 도루묵 통일이 예상됩니다. 즉 남한의 가진자들이 무엇을 나누는 사회환원정신이 모잘라 북한인민을 저임금에 일을 부려먹겠고, 상대적으로 극빈층인 북한인민들이 반발심으로 부자들 사업체를 약탈.방화, 이에 기득권과 수구보수가 합작해 관재대모를 하게되고, 이에질세라 쇠파이프 등을 동원해 보수를 아작 내는등, 여지껏 보지 못한 환상의 시추레이션이 펼쳐지겠죠. 이렇듯 설령 가능하더라도 후폭풍이 큰것으로 현제 남남갈등은 아무것도 아닐 정도로 소요사태가 발생되 도루묵 통일인 것입니다. 다만 다음 정권이 민주인사인 정부로 바뀌면 가능성이 있겠습니다만, 민주참여정부시절에도 격한 연평도발이 발생했으니, 평화의 남북화합일지라도 단기간의 흡수통일은 이 또한 망상입니다.
최근 한반도 비무장지대(DMZ) 지뢰폭발사건이후 한반도 주변정세가 급변하는등 아이러니가 생기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국방부에선 북한군이 DMZ에 침입하여 지뢰를 매설해 벌여진 사건이라 단정하고, 휴전선에 대형 확성기를 설치해 북한당국을 비방하고 대내외적인 공세를 펴며 압박했습니다. 이에 북한은 비열한 모략극과 공세를 중단하라며 이런 식으로 물리력을 동원해 북진까지하려든다면 무자비한 응징만이 있을것이라며, 마치 쐬기라도박듯이 준전시 비상사태를 발동하고 휴전선 인근.후방에 단.장거리포를 대거포진하고 핵잠까지 포함한 50여척 잠수함도 포진, 비상대기를 하는등, 이로 인해 한반도 전시위험 사태를 방불케 했습니다.
한편 중국은 북한군의 비상.군사행동을 앞두고, 중국군을 북한 접경지역에 탱크-장갑차를 집결하고, 외교당국자 5명을 극비로 한국靑 방문해 물밑 접촉하는등, 한반도 정세에 관여했습니다. 이미 중국군은 작년 10월 동북 3성에서 한반도 유사시 투입하는 기동주력 부대를 동원해 북한의 급변에 대비한 대규모 군사훈련을 실시했습니다. 당시 '연합행동-2014E'라는 작전명을 붙인 훈련은 선양(瀋陽) 군구 주관으로 제39집단군과 공군을 주력으로 각종 군종과 병종 부대 2만명이 참가했으며, 앞서 39집단군은 2013년 12월 백두산 인근에서 동계훈련을 했고, 작년 4월에는 실전 능력과 신속배치 기동력을 강화하려는 훈련도 했습니다. (참고글 ; http://cafe.daum.net/sisa-1/mvOx/746 , http://media.daum.net/foreign/others/newsview?newsid=20150823172208694)
이렇듯 전쟁으로 북을 얻을 수 있다 생각한다면 천하바보입니다. 급변사태로 한반도에 전쟁이 나고, 북이 전쟁에 승산이 없고 불리하다 싶으면 공산당은 조선을(북한땅) 중국에 받치겠다는 각오까지 하고 중국개입을 긴급히 요청할 것이며, 중국은 이미 준비한대로 남한 역공과 전후 수습에 전격 나설 것입니다. 그도 그럴것이 북한은 중국의 막대한 무상원조 외 많은 차관이 있습니다.(중국의 대북무상원조만 보더라도 대한민국 대북원조는 애들 껌값에 불과하다 합니다.) 경제특구만하더라도 중국사업체에 많은 부동산.땅(자원이 매설돼있는 막대한 토지도) 자체를 내주어 돈과 맞바꾼지 오래인 실정입니다. 하여 유사시 중국은 북한에 투자한 경제 및 차관회수 명분으로 재산권 행사 차 반드시 진군을 합니다.
그러면서 중국이 한편으론 외교당국자 5명을 극비로 한국靑 방문해 물밑 접촉을 하고, 2015년 8월 30일 미 백악관 라이스보좌관과 북한문제를 논의하며, 미국이 확전을 피하기 위해 북한을 중국과 분할 통치하는 방안에 응대한 것은 흥미로운 일이며, 중국의 복잡 다난한 속내를 엿볼수있습니다. (참고글 ; 푸틴.. "미국이 시베리아를 빼앗으려 해" http://cafe.daum.net/revelation1/ImMq/4114 미국의 한반도 플렌 http://cafe.daum.net/revelation1/ImMq/4115 ) 작년에 한중 정상회담서 “북한 동북4성 편입 생각있나” 朴대통령 질문에 中시진핑 부인 “南주도 통일 지지” 했습니다만, 이러한 환담을 이제 중국이 지킬 필요가 없음은, 朴대통령 스스로 이질적인 대내외 행보로 파톤이 났기 때문입니다. 최근 중국의 오래간만의 열병식에 대한민국 박대통령이 중국의 초대에 응하고 박통이 중수석에 한반도 평화통일을 예기했습니다. 그러다 이후 한미외교 행보에서는 유사시 전쟁도 구사할수있는 흡수통일을 예기하고 다닙니다. 즉 보수층을 위시하며 전쟁도 불사하는 흡수통일 구상하다 중국에 평화를 예기했으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빈말임은 그 이후 다시 보수적 흡수통일 구상인 것입니다. 그럼 그렇지 하며 주변 열강은 한반도에 어떤 부담감을 갖을 필요 없이 그들의 이로운대로 판도를 판단할 수도 있게 됐으니, 장차 제3차대전 아마겟돈의 서막이 IS에 의하여뿐아니라 미국의 야욕 혹은 한반도 급변사태로 일어날수도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전쟁시 설령 대한민국이 유엔연합군의 도움으로 어찌어찌해서 전쟁승리를 한다해도 돌아오는 것은 6.25때보다 더 처절한 공멸같은 폐허 속의 헛된 승리이며, 그로 인해 이익을 보는 것은 미.중.일.러 등 주변 강국으로서 이들에게 전쟁패해복구에 막대한 차관과 지원품을 받아야할것이며 남는 것은 빚더미입니다. 북한정권에 핵포기만 시킬수있다면 북한체제를 붕괴시킬수있다는 생각이 한국 지성인에게도 있습니다만, 이 또한 모를 가변성이 있습니다. 북한이 핵포기를 하되 태국과 버마처럼 경제는 개방하되 군사독재 장기집권을 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리하게되면 한국 또한 신유신독재가 도사리는 마당에 한.미는 북한에 더이상 외교간섭을 할수없게되며, 중국도 미국에게 한반도 정세에 더이상 신경을 끄라고 종용할것입니다.
현제 미국은 암암리에 동북아경제권을 확보하기 위해 시베리아와 만주를 러시아로 분리독립 시키려고 계획 중이며, 중국의 개입을 무마하기 위해 북한땅을 중국에 내주는 제안을 하고 있습니다만 속내는 따로 있습니다. 그리한 후 중국에 편입된 북한지역을 중심으로 북한자치구(조선인이라 불리는 북한인민) + 간도(조선족과 중국에 이미 넘어온 조선인) 독립운동을 자극하고 그와 연대하여 소수민족 독립운동을 지원해 중국을 흔들겠다는 속셈입니다. 중국이 북한에 긴밀한 외교 외에 다변화적 외교를 하고 있음은 조선인은 신장.위구르족보다 더 골치 아픈 소수민족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10년전 유엔이 북한에 안보리 경제제재 조치에도 불구하고 중국이 비공식으로 북한과 교역을 대폭 확대하며 무상원조까지 해주었고, 북한에 나진선봉 등 경제특구를 세워 주었지만, 중국기업인이 노무(급료)를 밀리면 장비를 압류하기도 한다 합니다. 그리고 중국 첩보원이 발각되면 가차없이 처단하며, 최근 친중 고위간부 장성택 숙청으로 북중관계가 약간 서먹해지기도 했습니다. 조선인 성격만 봐도 다소 호전적이니 대한민국 민족주의자의 간도회복 염원은 현제 구상만 있을뿐 실천.실현성은 부족하여 공염불에 불과하겠지만, 조선인이(북한) 한다면 기회를 엿봐 할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중국사람의 뇌리에 존재하기도한다합니다.
마무리하며, 서두의 남북통일 논단에서, 통일은 단계적으로 하여, 우선 상호 체제를 인정한 상태로 조건부 왕래하며 교역.교류하는 '연방제' 통일을 구상해야할것이며, 이것이라도 실현 가능하다면 한민족의 큰 과업 달성이라 생각됩니다. 감사합니다.
'사람, 생명, 평화의 길을 찾는 오체투지 순례단'은, 하루 약 4km씩 전진해 1차로 지난해 9월 지리산 노고단을 출발하여, 2차로 3월 28일 충남 공주시 계룡산 신원사 중악단에서 오체투지 수행을 시작, 103일 만인 지난 5월 16일 과천 남태령 고갯길을 넘어 서울로 입례했다. 오체투지란 고대 인도 예법인 양 무릎과 팔꿈치, 이마 등 신체의 다섯 부위를 땅에 대고 절하는 방식이며,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문규현 신부, 전종훈 신부, 불교환경연대 상임대표 수경스님을 중심으로 하여 평화를 위하는 민주시민이 함께해, 현제까지 수천여명 이상이 이 오체투지에 참여했다. 이번 순례는 오는 5월 20일 명동성당에 도착해 대 미사를 진행하고, 21일에는 서울시청,청계광장을 거쳐 조계사에서 큰 법회를 열 예정이며, 다음달 6일 임진각 망배단, 이후 북한 묘향산 등에 도착하는 것으로 총 이백삼십 킬로미터에 이르는 오체투지 순례 일정을 마치게 될 계획이다.
◎ 5월 20일(수) ■ 순례구간 | (용산전쟁기념관 다음)용산2가 국민연금공단 맞은편 -> 명동성당 ■ “명동성당 시국미사” · 17:00 명동성당 성모동산 · 시국성명서 발표 * 미사 참례자는 오전, 오후 오체투지순례에 함께하여 주십시오.
◎ 5월 21일(목) ■ 순례구간 | 명동-시청-청계광장-조계사 ■ 시청(서울광장)에서 조계사까지 - “서울시민과 함께 하는 오체투지 순례”
1. 행사 개요 □ 취지 : 사람.생명.평화의 길을 찾아 작년부터 오체투지 기도순례를 진행 중인 순례단을 따뜻이 맞이하며, 서울시민들이 직접 오체투지에 동참함으로써 몸과 마음으로 생명평화를 느끼는 체험 마당 □ 일시 : 2009년 5월 21일(목) 오후 1시 ~ 4시 □ 코스 : 시청 앞(서울광장) - 청계광장 - 종각 - 조계사(1.8km) □ 주최 : 불교시민사회단체연석회의 □ 주관 : 불교환경연대, 정토회 □ 후원 : 대한불교조계종 환경위원회
2. 순례일정 13:30 집결(시청 앞 광장) 13:40 출발준비, 출발의식 14:00 오체투지 순례시작(각 종단 성직자, 시민사회, 정토회 등) 14:25 청계광장 도착 15:20 종각 16:10 후미 대열 조계사 도착 16:20 순례 마무리 의식
5.18민주화 운동이 벌써 29주년을 맞이 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재 도청 이전문제로 시끄럽다.
시중에 떠도는 ' 5.18은 폭도다.' '5.18은 북한 특수부대에서 조종한 폭동이다.' 라고 서슴없이 말하는 '전사모' 이하 5공 살인마 정권을 추앙하는 못된 者들, 심지어는 현정권이 '구국의 영웅 전두환'이라고 미화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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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도록이면 5.18의 시간적인 접근을 위해서 발체한 상황일지의 내용도 첨부했습니다. 사진에 잔인한 장면도 있지만 5.18의 진실에 근접하려면 이런 아픔은 감내해야 한다고 봅니다.
어쩌면 이런 사진도 턱없이 모자르다고 봅니다.
잔인하다 하여, 참혹하다 하여 스스로 감추고 드러내지 않으면 또다시 당하지 말라는 법도 없습니다. 역사는 반복됩니다. 방심하면...
아~ 광주여!
그러나, 역사를 기억하지 못하면 살인마는 부활한다.
1. 계엄 확대조치와 산발적 학생시위...
계엄포고문
2, 1980년 공수부대의 무차별 진압작전... 일명 ' 화려한휴가'라는 작전명령
수창초등학교에 집결한 공수부대가 조를 재편성해 시내 각 곳으로 배치된다. 이들은 모두 철망이 부착된 철모를 쓰고 등에는 총을 메었으며 대검과 곤봉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한편 오전의 수동적이고 산발적인 시위와 달리 학생들은 적극적인 공격의 형태로 이들과 맞서게 된다.
광주공원 부근에 모인 시위대는 도청 쪽으로 진출해 학생회관 앞에서 경찰과 충돌, 페퍼포그차 한 대를 불질렀으며 파출소를 파괴하였고 농장다리 부근에서는 버스에 탑승해 있는 경찰들을 무장해제시켜 인질로 잡기도 했다. 시위대의 가두투쟁이 적극적으로 변화함에 따라 7공수에 이어 11공수가 광주로 투입되었고, 여단병력으로 증강된 공수부대와의 충돌 또한 더욱 치열해진다. 공수부대는 집안까지 쫓아 들어가 학생으로 보이는 젊은이들을 끌고 갔으며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달려들어 곤봉과 대검을 닥치는 대로 휘둘러댔다. 작전명령 '화려한 휴가'가 시작된 것이다. 피로 얼룩진 시위는 밤까지 계속되었으며 시민들은 분노와 공포의 밤을 보냈다. 이날부터 '광대' '대학의 소리' 팀 외에도 개인별, 단체별로 시위 상황을 적은 유인물이 제작, 배포되었다. 이러한 분산적인 선전작업은 21일부터는 '투사회보'로 결집되어 언론이 통제된 항쟁기간동안 시민의 눈과 귀가 된다. 계엄사령부는 통금을 1시간 앞당겨 21:00 ∼ 04:00로 발표했으며 시내전역과 직장예비군의 무기 및 탄약을 회수하였다. 5월 18일 13:10
- 7공수 35대대, 31사 96연대로부터 도청 앞 데모대 진압 명령 수행. (특전사 전투상보)
- 유동 삼거리, 수창국교 근처 등에 M16소총을 비껴맨 일군의 공수부대 출현.
시외버스공용터미널을 중심으로 시내 곳곳의 시위진압.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시간미상<정호용, 전두환 등 군 수뇌에게 광주사태 보고하고 3공수 7공수 20사단 증파 결의>
- 서울 : 이때 주영복 국방장관, 이희성 계엄사령관, 전두환 보안사령관 겸 중정부장 서리 등 군수뇌부가 모여 광주사태에 관한 대책회의를 열었다. 여기에서 정호용 사령관이 광주상황에 대한 자세한 브리핑을 하면서 제3공수여단과 제7공수여단을 동시에 증파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전두환 장군은, "20사단도 함께 진입시키는게 좋겠어. 계엄군이 집중적으로 나서면 그만큼 이쪽의 시위가 위력적일 테니까." (말, 1988.5)
시민동향
- 5.17 이전의 학생 가두시위에는 시민들이 냉담한 반응을 나타냈으나 - 5.18에는 군인들이 금남로 등 시내 중심가에서 학생으로 보이는 청년이나 여자를 마구 때리고 짓밟고 찌르는 등의 잔인한 행동을 시민들이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으며
- 일부 시민들은 군인들이 경상도 사투리를 쓰기 때문에 경상도 사람들이 난동을 부린다고 격분하였고, 일부 부녀자는 '내 자식도 어디 가서 저렇게 맞고 다닐 것이다'하고 울면서 칼에 찔린 청년들을 노상에서 치료해 주려고 하였음(군인들이 방해).
- 특전대원들이 '전라도 새끼들 씨를 말려버려야한다''면서 청년들을 폭행한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음.
- 거부장 옥상에서 구경하고 있던 시민들이 군인들에게 투석하자 군인들이 거부장으로 들어와 3명을 연행한 사례로 보아 일부 시민들이 학생 편에 가담할 우려가 있음. (시청 상황일지)
3,일시적 소강상태(1980,5,19)
19일 0:05
- 제11공수여단(여단장 최웅 준장, 병력규모 102/696) 제31사단에 도착.
- 태평양지역 미공군사령관, 전술공군기 출동 대기중이라고 발표.
09:00 금남로에 군중들 모여들기 시작
10:00 대동고생 교내시위
* "1교시 수업을 위해 교실에 들어갔더니 한 학생이 벌떡 일어나 '선생님, 공수들에게 맞아죽은 형님, 누나들의 원수를 우리가 갚아야 합니다' 하고 울부짖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맞습니다, 우리는 왜 이렇게 비극의 역사 속에서 살아야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고 말하고 울었다. 순식간에 교실은 울음바다가 되었고, 격분한 학생들이 의자를 부숴들고 교실을 뛰쳐나갔다. 학생들은 그때부터 운동장을 돌며 '민주교사 합세하라, 민주학생 동참하라, 광주시민 학살한 공수들을 때려죽이자'고 외치며 교내시위를 벌였다. 그러자 공수들이 학교 앞에 몰려와 진을 쳤고 헬기가 계속 학교 상공을 돌며 학생들의 동태를 살폈다." (구술 : 박행삼, 현사연 조사)
* "우리들은 등교하자 전날 시내에서 행해졌던 공수들의 만행에 대한 목격담을 주고받으며 웅성거렸다. 1교시 수업을 전후로 3학년 학생들이 일제히 운동장으로 뛰쳐나갔다. 일부 학생은 저지하는 선생님을 밀치고 1,2학년 교실을 돌아다니며 '우리의 형님, 누나들이 공수들의 총칼에 맞아 죽어가고 있습니다. 우리 고등학생들이 총궐기하여 공수들을 물리칩시다'하고 호소했다. 그러자 학생들이 운동장으로 몰려나갔다. 우리는 스크럼을 짜고 운동장을 돌면서 '전두환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목청껏 외쳤다. 11시경 교문 진출을 시도하는데 공수들이 몰려와서 학교 주변을 포위하고 정문을 완전히 차단하고 있었다. 단체로는 학교를 빠져나갈 수 없다고 판단한 우리는 삼삼오오 짝을 지어서 시내로 나가 시위대열에 합류하게 되었다." (구술 : 이덕준, 현사연 조사)
* "학도호국단 연대장이 교실을 돌아다니며 '대학생 언니, 오빠들이 데모를 하다 다치고 죽었다. 조의를 표하기 위해 교복의 칼라를 떼자'고 말했다. 우리들은 연대장의 말대로 교복의 흰 칼라를 떼어냈다. 한두 시간 수업을 받은 후 다시 연대장이 우리들을 운동장에 모이게 한 후 30여 분 동안 시위를 주도했다. 의식있는 몇 분 선생님이 동참하셨지만 대부분의 선생님들은 '학생들이 시위를 하는 것은 이롭지 못하다'며 만류했다. 결국 시위를 중단하고 오후 2시쯤 하교했다." (구술 : 박안숙, 현사연 조사)
* "도청 앞 상무관 골목에서 공수들이 아가씨를 붙잡아놓고 팬티와 브래지어만 입힌 채 손으로 당겨보는 등 온갖 희롱을 하고 있었다. 그 광경을 목격한 나는 온몸의 피가 정지되는 것 같았다. 저런 금수만도 못한 놈들을 보고도 항의할 수 없는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기만 했다." (구술 : 천순남, 현사연 조사)
- 수창국민학교 정문 부근에서는 공수부대가 젊은이를 전봇대에 거꾸로 매달았음.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 "금남로 양쪽 인도에 굉장히 많은 시민들이 운집해 있었고, 차도에 선 공수대가 이끄는 장갑차가 서서히 운행하고 있었다. 갑자기 '밀어버려!' 하는 지휘관의 외침이 들렸다. 순간 공수들이 인도의 시민들을 향해 우르르 몰려들었다. 거리에 서 구경하던 시민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공수들은 도망치다 넘어진 사람을 붙잡아 곤봉으로 실신할 때까지 때렸고 골목으로 도망친 시민들을 끝까지 쫓아가서 피투성이를 만들어 끌고 갔다." (구술 : 장막동, 현사연 조사)
...너무 방대하여 대략적인 것만 먼저 올림... 양해바랍니다.
두번째의 장입니다.
다소 과한 잔혹한 참상의 장면이 나오더라도 광주을 위해서 똑바로 잘 보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진실이 광주민중항쟁의 진실인 것입니다.
4,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항거.(19일 오후부터~20일오전꺼지)
공수부대의 살륙전에 치를 떨던 시민들은 이제는 공포감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적극적으로 싸움에 가담하게 된다. 시민들의 이러한 참여와 투쟁은 학생시위에서 민중항쟁으로 질적인 변화를 함과 동시에 지금까지보다 훨씬 치열하고 공세적인 국면으로 상황이 변화된다. 개머리판과 대검을 휘둘러대며 점점 더 포악해지는 공수부대에 맞서 일부 고등학생까지 합세한 시위대는 비가 오는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죽음을 각오한 싸움을 계속했으며 한걸음 더 나아가 뒤처진 공수를 공격하거나 고립된 차량을 포위하기도 했다. 가톨릭센터에서는 경계가 허술한 틈을 이용해 총과 방패를 빼앗았으며 광주고 앞에서는 시민들에게 포위당한 장갑차에서 최초의 발포가 있었다. 이날 밤 시내 중.고등학교에는 휴교령이 내려졌다. 계엄군이 3특전여단으로 교체되고 20일 오전부터는 시위진압의 양상이 달라진다.
13:00 - 15:00 가톨릭센타 앞 시위
가톨릭센터 앞에 모인 시위군중은 4, 5천 명에 달했다. 이들은 금남로를 차단하고 있는 경찰을 향해 돌과 화염병을 던지며 몰아붙였다. 청년들은 금남로 2가 제일교회 신축공사장에서 사용하는 두 개의 기름통에 불을 붙여 군경저지선에 힘껏 굴려보냈다. 군과 경찰은 갑자기 시위대로 접근, 곤봉과 총, 대검을 휘둘렀다. 흩어졌던 시위대는 다시 모여 도로변의 대형 화분과 공중전화 박스 등으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계속 돌을 던졌다. 오후 3시쯤 군경저지대는 진압화기가 바닥난 듯 방패를 앞세우고 곤봉을 손에 쥔 채 긴장된 모습으로 제자리를 고수했다.
오후 3시 20분경 점심을 끝낸 공수병력이 도청 앞과 광남로 사거리에서 점차 포위망을 좁혀왔기 때문이다. 시위대는 돌을 던지며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캐리버 60 기관총으로 무장한 장갑차가 무서운 속력으로 시위대를 향해 돌진해 왔다. 바로 이 순간 가톨릭센터 안으로 올라갔다가 빠져나오지 못하고 인질로 잡은 공수부대원을 지키고 있던 청년들은 일시에 들이닥친 공수대에 의해 최후를 맞이해야만 했다. 이곳에서 수많은 살상자가 생겼다.
- 가톨릭센터 건물 안에서 시체 6구가 발견됨.
14;35
- 시내는 거의 철시하고 있으며, 차량이 완전히 통제되고 있음. 일반건물, 독서실, 식당 등도 뒤져 젊은이는 트럭으로 실어가고 있음.
- CBS 승용차 1대, MBC 승용차 3대, 일반승용차 2대에 방화. 시민,학생 바리케이드 쌓고 MBC(시내 중심가에 위치) 앞, 금남로 지역 등 3개소에서 군인들과 대치중(오후 2시 현재)에 있음. 한 곳에 시민 학생 2천 명 정도씩.
- 대동고, 중앙여고 학생들이 수업을 거부하고 데모를 시작할 기미를 보이자 군인들이 출동하였고, 이들이 학교를 포위해 학생들은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음 .
14:50 일반시민들의 합류로 불어나는 시위대
화염방사기를 시위진압에 사용
*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앞에 운집한 시민들이 소방서 부근에 진을 치고 있던 공수들에게 돌을 던졌다. 계엄군들이 달려오면서 화염방사기를 공중을 향해 쏘아 댔다. 총구에서 불이 뿜어나오는 살상용 화염방사기를 쏘아대는 것을 보자 한편 두렵기도 했지만 공수들의 잔악함에 치가 떨렸다. 소방서 뒤쪽에는 장갑차 한 대가 세워져 있었고 주변에 공수들과 시민들이 있었다. 시민들이 욕설을 퍼붓고 야유를 보내도 처음에는 반응을 보이지 않던 놈들의 태도가 돌변했다. 갑자기 최루탄을 쏘며 시민들을 무작위로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나는 주변 민가에 몸을 숨겼다. 잠시 후 그곳으로 들이닥친 공수들에게 온몸을 구타당하고 의식을 잃었다. 깨어나보니 그들이 나를 질질 끌고 가고 있었다. 우리는 트럭에 실려 조선대학교 체육관으로 갔다. 오후 3시경이었다. 몇 시간 동안 그곳에서 살인적인 구타와 기합을 받은 후 저녁 6시경 전경버스에 실려 상무대로 갔다." (구술 : 최충용, 현사연 조사)
15:30 격렬해지는 시위대
- 광주지역 학생, 시민 합류하여 1천여 명이 투석하면서 관광호텔 방향으로 진행중에 있음. (계엄사 상황일지)
- 관광호텔 앞에서 시위군중 3천여 명 군경에 강력히 대항.(전교사 작전일지)
- MBC 방송국 앞에서 분산된 시위군중 2백여 명이 MBC 앞에 세워둔 승용차 등 8대를 방화 및 투석. (전교사 작전일지) 16:45
- 진압작전을 위한 병력배치
11특전여단 61특전대대 : 시외버스터미널
11특전여단 62특전대대 : 한일은행 앞
11특전여단 63특전대대 : 광주고교 앞
7특전여단 35특전대대 : 광주소방서 (전교사 교훈집)
18:00 시외버스 공용터미널에 시체 쌓여
- 시외버스 공용버스터미널 주차장에는 7, 8구의 시체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고, 무등경기장 스탠드 아래쪽에는 10여 구의 시체가 즐비하게 늘어져 있었다. 이날 공수대원의 대검에 찔리거나 몽둥이에 맞아죽은 사람들이었다.
특히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주차장의 시체는 시외버스 공용버스터미널 로터리 광장에서 시위하던 군중들이 차량으로 수송된 공수부대원들에 의해 희생된 사람들이었다. 이같은 시체들은 '공수부대원들이 부녀자나 노인들에게까지 무차별 난타해서 많은 사람을 죽였다', '머리통을 때려 즉사시켰다', '임신부를 죽였다'는 풍문들을 사실로 입증할 수 있는 증거물이 된 셈이다.
K씨(40)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저는 이날 낮 시골에서 올라오는 어머니를 마중하러 공용터미널에 갔었읍니다.
그러나 시외버스들이 제대로 운행되지 않아 돌아오려고 광남로 쪽으로 나 있는 문을 나와 걸어오는데 시외에서 버스가 들어오는 입구 안쪽에 시체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어요. 아마 7, 8구는 되었을 것입니다. 더욱 제가 놀란 것은 맨 위 시체가 엎어져 있었는데 등에 X표로 칼자국이 나 있더군요. 얼마나 두렵고 무서웠는지 모릅니다." (10일간의 취재수첩)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면 똑바로 윗 사진들을 쳐다보세요.
잔인하게 보이십니까? 참혹해 보이십니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러한 광주시민들은 대한민국을 지킨다는 정예의 공수부대등에게 살상 당했습니다.
23:08 3특전여단 광주에 투입 23:50
- 광주역 분수대에서 여학생을 발가벗겨 놓고 유방을 도려내 죽였다는 소문으로 시민들은 더욱 훙분했다. 나중에 계엄분소 부사령관도 이런 사건이 있었다고 시인함. (현사연 조사 종합)
아침, 신임 소준열 계엄분소장과 정호용 특전여단장
- 정호용 장군은 국군보안사령부 기획조정실장인 최애섭 준장과 함께 광주에 와서 장형태 지사와 안병학 도경국장 경무관에게, "폭도의 총에 맞아 죽더라도 자리를 지키라"
고 지시하였다(그러나 자리를 이탈하여 시외로 도피하였다). 이날 소준열 중장이 전남북지역 계엄분소장 겸 육군전투병과 교육사령관으로 부임하여 현지의 정호용 장군과 상의하였다. 소준열 장군이 정호용 장군에게, "이대로 방치하다간 큰일나겠소. 하루라도 빨리 평정을 시켜야 되겠소." 정호용 장군이 소준열 장군에게,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말, 1988.5)
지난밤의 유인물을 본 시민들 분노
<유인물 내용>
시내 죽은 인원 수십 명이다.
공산당도 이렇게 무자비하지 않았다.
계엄군이 경상도 출신이다.
특정인 물러가라. (전교사 작전일지)
10:20 팬티만 입힌 채 기합
- 금남로 3가 가톨릭센터 바로 앞이었다. 희한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30명이 넘는 젊은 남녀가 팬티와 브래지어만 걸친 알몸으로 붙잡혀 기합을 받고 있었다. 4열로 줄지어 선 젊은이들. 나중에 필자가 좀더 가까이 다가가 세어보니 어떤 줄은 7명, 어떤 줄은 6명, 어떤 줄은 8명이었다. 정확하게 세어보지 못했으나 이 가운데 여자는 10여 명쯤으로 짐작되었다.
당시의 정황에 대해 윤대주교는 이렇게 술회했다.
"내가 그 광경을 보고 난 후 옆길을 보니까 어떤 젊은이가 두 군인에게 붙들려 수없이 두들겨맞고 있었어요. 머리는 무엇으로 찍어버렸는지 모르지만 피가 낭자했어요. 내가 보기에도 그대로 놔두면 죽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나 나 자신 무서움이 들어 감히 쫓아내려가 만류하지 못했어요. 그 뒤 그 사람의 생사가 궁금했지만 왜 내가 내려가 만류하지 못했을까. 성직자로서 지금도 가슴 아프고 또 두고두고 가슴이 메이게 하는 광경이었지요. 나는 그때의 일을 두고 수없이 참회하고 하느님께 용서를 빌었습니다." (10일간의 취재수첩)
* "일반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가톨릭센터 앞에서 미치광이짓을 하고 있었다. 남녀청년 10여 명을 붙잡아놓고 남자는 팬티만 입히고 여자는 브래지어와 팬티만 입힌 채 옆으로 굴러, 뒤로 굴러 등 기상천외한 기합을 줬다. 동작이 조금만 느려도 곤봉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도시복판에서 젊은이들을 반나로 만든 채 기합을 주다니……짐승한테도 그렇게 잔인하게 대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옆에서 지켜보던 많은 시민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하던 짓을 계속했다. 한쪽에서는 7, 8명, 다른 한쪽에서는 2, 3명의 남녀가 그런 기합을 받고 있었다." (구술 : 서명원, 현사연 조사)
14:20 시위진압에 화염방사기 사용
- 서방 삼거리에서 시위대와 공수부대 충돌. 공수대 화염방사기 발사하여 까맣게 그을린 시체 및 부상자는 군용트럭에 싣고 감.
- 서방 삼거리의 시민과 공수부대 사이에 충돌. 공수부대는 화염방사기로 20개의 불길을 뿜어댔고, 시위대 선두에 섰던 사람들은 순식간에 불에 타죽음. 공수부대는 시체 및 부상자를 군용트럭에 싣고 감.
- 광주역 부근 20여 대의 택시가 모여 동료기사들의 죽음에 분노, 조직적인 대응책으로 전환시키는 논의 활발. (1980년대 민주화운동)
아~ 광주여!
사진이 너무 잔혹하다 하여 외면하지는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그 당시 오월의 진실에 조금이나마 가깝게 접근하는 하나의 선량한 매개체라 생각해 주시고 민주주의를 이룩하기 위해서 얼마나 잔인하게 신군부 쿠데타 세력들에게 학살 당했는지 정도는 정확히 알아야..., 29년이 지난 지금 시점에서 또다른 많은 분들과의 교감과 유대가 형성되리라는 생각에서입니다.
위 사진들은 아래 설명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29년전 무고한 광주시민들이 국군으로부터 무차별 학살을 당했습니다.
피로 쓴 광주 민주화 운동이 1987년 6월 항쟁으로 불타 올랐었고, 지난해 촛불문화제로 진화를 하였습니다.
지금도 사악한 독재의 후예들이 권력의 정점에서 국민을 국민으로 보지않고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민주주의가 아주 위험지경에 처해 있습니다.
국민의 기본권은 물론 헌법의 부정하고 임정을 부정하는 역사왜곡이 심화되고 있으며 민주주의 가치가 침해되고 있으며 남북대결구도가 가시화 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민주주의의 적은 국민들의 침묵과 국민들의 정치무관심, 선거권 권리불행사입니다.
국민여론이 무시되고 있으며 국민들의 표현의 자유, 언론인들의 언론의 자유가 파괴되고 있습니다. 이는 대한민국 사회를 정의롭지 못하게 하는 한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광주민주화운동 29주년에 즈음하여 스스로 헌법상 보장된 국민저항권, 국민자위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국민은 도탄에 빠지고 있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사회 전반적인 문제점은 우리들에게 민주화의 의미를 되새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말 국민이 국민으로서 살기 힘든 시대입니다.
이제, 국민은 선거로, 투표로 말하고 국민의 당연한 헌법상 권리를 되찾아야 하는 숙명적인 국민의 의무가 실감나는 대한민국입니다.
△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는 10월 4일 오후 경기도 파주시 임진각에서 전 통일부장관, 서울대 명예교수 등이 참석한 가운데, '10.4 남북정상 선언 1주년 기념식'을 열었다.
이어 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는 오후 3시 종로구 보신각 앞에서, 2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촛불보복 공안탄압 규탄대회'를 열었다. 참가자들은 최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간부들을 구속 수사함에 대해 "정부의 무분별한 공안탄압"이라며 규탄하고, "국가보안법이 아닌 민주시민을 위하는 국민보안법이 돼야할 것"을 촉구했다.
△ 이 대회에서 최근 가택수색 및 연행조사를 당했던 촛불 유모차부대 주부가 깜짝발언을 이었다.
발언에서 "정부는 촛불을 들었던 사람들을 무차별로 연행해 국민의 입에 재갈을 물리려 하고 있으며, 냉전시대의 유물인 국가보안법으로 운동 진영을 탄압하고 있다"고 우려했다.
△ 보신각 앞 집회 참가자들은 오후 늦게 을지로입구→회현사거리 까지 인도를 따라 평화행진하고, 서울역광장으로 이동하여 `10.4 남북정상선언 1주년 기념 통일문화제'에 합류했다.
△ 한편 서울역에서는 오후 4시 30분부터 캠페인과 함께 "촛불시민 회칼테러 진상규명 비상대책위원회" 주최의 촛불문화제가천여 명 이상의 시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열렸다.
△ 10월 4일 저녁 서울역 광장에서 10.4선언 첫돌을 기념해, '6.15공동선언, 10.4선언 이행을 위한 통일문화제'가 천여 명 이상의 시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개최했다.
△ 이날 민주노총은 결의문을 통해 현 정권의 반통일 사대매국 형태, 부시의 내정간섭을 규탄하고, 6.15공동선언, 10.4선언 이행 및 주한미군 없는 평화협정 실현을 촉구했다.
△ △ 한편 민주노동당도 이날 민주노총 행사에 이어, 오후 2시 30분부터 용산역 계단에서 '6.15공동선언, 10.4선언 이행·반통일, 반민중 이명박 정권 규탄 당 결의대회'를 열었다.
△ 대학생 율동공연
△ 민주노동당원들
△ 민주노동당은 이날 결의문을 통해, 현 정부의 반통일적 대북적대정책 ‘비핵개방 3000’ 폐기 촉구 및 남북관계 파탄 행위를 강력히 규탄하고, 6.15공동선언, 10.4선언 이행을 촉구했다.
△ 이날 오후 3시경 용산역 계단 앞 집회 참가자들은 서울시청 앞으로 이동해, 보신각 앞까지 '비핵개방 3000폐기, 6.15공동선언 10.4선언 이행 촉구 거리행진'을 진행했다.
△ 이날 15일 오후 4시경 종로 보신각 앞에서, '6.15공동선언 8주년 기념 본대회'가 개최했다.
△ 피켓신
△ 이날의 연사들 - 6.15남측위 공동대표, 민주노동당 강기갑 원내대표.
△ 참가자들은 결의문을 통해, 현재 진행 중인 광우병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고시철회, 협상 무효 촛불집회와 연동하여 총체적 이명박 정부의 실정을 규탄 하고, 6.15공동선언을 부정하고 반북대결로 일관하는 현 정부 규탄 및 6.15공동선언 이행 10.4선언 실천을 촉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