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는 언제 니체사상을 극복할건지.. (삶의 경험담에 부쳐)

세상에 안타깝게도 정의의 온전한 신은 없고..

 

 

사람들이 세상에서 어느신이 가장 쎈지합니다.
가장 쎄면 그만큼의 책임과 의무가 따르는법인데,
안타깝게도 온전히 지구와 인류의 평화와 정의를 지켜낸신은 하나도 없습니다.
의무는 방기한체 권리만 요구하는 신과 그추종자는 도처에 널려있으며,

천민자본주의와 독선이 모든 종교계에 만연해 있습니다.
기독교는 종교계중 가장 천민자본주의가 만연해 천주교와 달리 종교인과세에도 소극적입니다.

이슬람은 기독교계에 비해 헌금 강요를 하지않습니다만, 구태한 봉건문화가 문제이며,

일부극단주의자가 무차별테러를 일삼기도합니다.

한편 어떠한 잔악행위는 시대만 다를뿐 하나님을 따르는 모든 종교계서 자행됐음이 진실입니다.
중세시대엔 국수주의를 위시해 가톨릭에서는 종교 폭압정치와 마녀사냥을 자행했고,
이를 벋어나고자 근대에 청교도들이 아메리카로 이주했습니다.
그런데 이주민들과 일부 기독교인도 가세해 원주민 소탕작전을 펼쳤고 ,

그과정에서 수많은 아메리카원주민을 학살하는 오류를 범합니다.

기독교가 중세가톨릭의 전행을 되풀이한 이유는 중세에 교회를 신성시했는데,

그 교회독재의 잔재를 청산치못하고, 다른 형태로 이어져왔기때문입니다.

"예수천당 불신지옥!, 예수않믿으면 다지옥가!" 하며,

다른종교를 우상숭배로 치부하는 공포전도와 독선주의가 그것입니다.

인류사회에 중세에서 근대과도기에도 종교가 온전치못하다보니,

독재정치도 횡횡했고 공산당같은 이념과 냉전도 여기서 파생됩니다.

김일성이 기독교집안이었는데, 공산사상뿐아니라 일부는 기독교를 취합 이념화해,

주체사상을 수립, 기괴한 김부자독재체제를 이어가게됩니다.

불교계는 원래 도올김영옥교수가 주창하듯 깨닮음의 종교였지만,

독선적교회의 영향으로 불교의 법전해석도 갈라져서 일부 불자중에는 부쳐님을 잘 모시지못하면 

사바세계나 무간지옥에 떨어진다며, 절에 자주 갖다받치는 시주질과 기복신앙으로 변질되기도합니다.

 

교회라면, 그리스도인이라면 세상의 빛이 되어 먼가달라야하는데,

어떻게된것이 기업화되고 속세와 똑같은 교인이 천지입니다.
교회가 사역이 아니라 사업화,장사속으로 전락하다보니,

이것을 수습하고 뒤치닥거리다 종치는게 그나마 양심있는 현제의 주님의 종들의 서글픈 현실입니다.
개인적으로 청소년기에 예수님을 믿어 교회를 다녔고 선교사가 꿈으로,
전문인선교사를 준비했지만 이렇듯 허망한 현실을 접하고 때려친지 오래입니다.
하나님도 무능하고 방관자적이라 예수님을 믿기는하나 교회는 다니지않습니다.

 

 

한편 살며 느끼는것은 조상신 앞에서 누가 센지 함부러 논하지말라 생각됩니다.
조상신만큼 쎈신이 있을까? 반문할정도로 쎄긴아주쎕니다.
그래서 사회정의를 구현하는가면 어느신처럼 생색내기에 그칠뿐 이또한 말짱꽝으로 한심뿐입니다.
유교문화주의에 봉건,권위사회라는 오류가 팽배해,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역설도 있습니다.
가정이 가부장적으로 집안 자녀 재산분배도 자매와 아래남동생에겐 극히 일부만 돌아가고
장남이 거의 독차지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습니다.

 

 

개인사 예기를 좀 하고자합니다.
나의 집안 원래 본 고향은 한국전쟁전후까지만해도 나주시 노안면 양천리 금동마을로 당시 좀 부유한가문이었습니다.
집터만해도 마을에서 좀 큰편이었고, (300평이상으로 본가외 큰감나무 수십그루와 텃밭등이 있었음)
논,밭 약20마지기선, 야산임야 4천평이상이였습니다.

형제 둘중 저희 부친은 둘째로 작은아버지로 통합니다.
저희 부친은 물려받은 재산이라봐야 논 3마지기에 큰집터 절반정도의 대지융통부동산정도였습니다.
(집터는 옆 성동마을에 낡은집을 얻어 분가해 확보했드랬습니다.)
가문의 재산을 대부분 물려 받은 본가 '금동마을'의 큰집에서는 아우가 상대적으로 적은 재산에 삶도 궁핍하기에,
재산을 좀더 나눠주려는 취지로 야산 두개중 동네서 가까운 임야 2천평을 공동갑으로 등기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약50여년전으로 사실은 큰어머니 배려였으며, 큰아버지는 인색했기에 그럴 생각은 사실 없었음)

이 임야는 서울 여의도공원처럼 낮은언덕과 완만한평지로 이루어져있기에 개간해 야산밭으로 활용하기에 적합한땅이었으며,
이미 큰집에서 100평 이상을 수월히 개간해 사용중으로, 중장비만있다면 대부분 개간할수있는 좋은 임야입니다.
그런데 저희 부친은 그 조건을 뒤로하고, "야산밭은 빌려써도 좋으니까 논이나 좀 떼어주소" 합니다.
그것을 수년이 지나도 서로의 의견이 좁혀지지않았고, 큰아버지는 "거시적으로 말고 먼장래를 생각해보라. 장차 밭농사도 흥할것인데 논3마지기도 좋겠다만, 임야1000평을 받아 개간해 야산밭으로 사용하는게 훨씬 경제적이다"는 취지로 설득해도 반응이 시킁둥합니다.
그러자 이러한 정황을 10여년간 넌지시 지켜본 큰당숙이 큰아버지에게 "작은 아우가 싫다고하니 그야산을 우리에게도 좀 주소. 싼임야값이라도 치뤄줄테니 나중에 작은갑으로 등기해주소"하고는 저희 부친에게는 "큰형이 야산말고 방죽옆논을 좀 준다하며, 우리 당숙2인은 그야산을 일부 싸게 사기로했네.
부동산법을 아는 내가 서류대행해줄테니 큰형에게 임감을 달라고하시게. 내가 다 알아서 해줌세."하고 말장난을 칩니다.
자초지경을 다시 확인하지않고 큰집에 도장을 휙 받아 바로 건네준 부친은,(풍문으론 제부친은 그냥왔고 당숙네가 최종 도장을 편취해갔다함)
등기과정에서야 논할당 논의가 없음과 큰당숙이 돈도 않주고 임야 일부를 편취하렴을 알고
큰집에 알립니다.
그러나 큰집이 관공서에 가보니 이미 당숙들이 등기장난을 쳐놓은 상태로 때는 늦었습니다.

이것은 제가 소년기때 큰아버지 편찮은 틈을타서, 친지당숙이 위처럼 어찌어찌해서 큰아버지 인감도장을 빼돌려서,
큰집야산을 공동명의 3인(공동갑;큰아버지, 당숙2명)으로 둔갑한 사건입니다.
하여 눈뜨고 당한 큰아버지는 당숙들에게 "너희는 우리 작은집에 비해 논.밭이나 재산이 좀 있고, 먼 친척이다.
공동명의로 둔갑해둔 고인돌 야산을 작은집에게 계속 빌려줄터이니, 너희들은 사용할 생각일랑말어라."며 선을 그었습니다.
치상 당숙들은 군소리없이 저희 작은집에게 밭을 사용하는데 이의를 제기하지않았고, 이리하여 지금까지 이릅니다.

 


∇ 원래 큰집임야였던 야산 2천평 일부모습(사진에 일부보이듯 성산 우측엔 고인돌문화재가 있음)

 

 


 

여기서 짚고넘어갈것은 큰당숙이 정말 악해서 큰집임야등기장난을 쳤는가인데,
정신이 훽해서 그런것이지 정말 사람이 그래서 그런것이 아니며, 원인은 아래처럼 조상신이 노해서임이 큽니다.
당시 큰아버지가 저희 작은집에 야산공동갑 제의 수년이후,
제부친은 일단 논을 더 받기전까지 야산을 빌려쓴다 생각하고 확장,개간해서 밭을 늘렸는데 그과정이 문제였습니다.
큰집이 이미 개간한 100여평 바로 밑 주변에 우리 신씨 웃대조상묘가 몇개 있었는데,
그것을 순리대로 이장하고
개간해야했는데 그러지를 않고, 그 조상묘를 밑으로 쭉내려서 이장시켜 버렸습니다.
묘지순서가 웃대는 위로 아랫대는 아래여야하는데, 웃대 조상묘를 밑으로 쭉내려놨으니,
이른바 아랫대와 겸상하는 형세인것입니다.

∇ 고인돌야산 북동쭉으로 사진상에 보이는 묘지 2개(증조 신태술네)
위둥근칼라강판공구리는 무관함(주위에 대뿌리가 치고오고 있어 차단막 작업한 상태임)

 

 

그래서인지 내나이 4~5세경 그조상묘 이장사태이후 저희집안에 별의별 불화가 끈이지를 않았습니다.
세살때까지 기억으론 부친이 선한 사람이었는데, 조상묘사건이후 거의 괴물로 돌변해 있었습니다.
그 만극한사건이 있은직후 큰집 장녀가 저희부친에게 조상묘를 제대로 이장시키라고 항의했지만,
"출가외인은 문중사에 참견말라"며 모르쇠로 일관했습니다.

그러며 간혹 술취해서 큰집에 찾아가 "제발 논이나 좀 떼주라"며 추태를 부렸다고합니다.

 이렇듯 제부친은 갑자기 술주정뱅이가 되 집안이 시끄러웠으며, 자녀들에게 칼부림까지하며 자주 학대했습니다.
3남2녀중 첫째가 누나인데(둘째는 나 장남) 누나는 결혼후에도 우울증에 시달리다 끝내 자살에 이르고맙니다.
모친에게도 시련이 닥쳤으니, 내가 국민학교다닐때 어느날 다리를 크게 다쳐,
모친외가의 가족력 파킨슨병이 되살아나 그때부터 지금까지 파킨슨병으로 고생중이십니다.

 

 

조상묘사건 그때시점에 첫째 남동생이 태어났는데 나중에보니 지적장애아였습니다.
처음에는 지적장애였는데 장애 극복하려는 노력을 않했고, 나중에 커서는 인성에 문제있는 인격장애에 이릅니다.
예로 어둑한 밤에 자려는 동네노인들의 집에 자주 찾아가 못자게 말을걸며 귀찮케하는 진상짓에,
쓸데없이 싸돌아다니다 못해 남의 자전거를 편취해 지금까지 훔친 자전거만 50대가 넘으며,
부모님돈 훔치는것도 모잘라 어렵게사는 먼사촌댁에 침입해 기물파손 및 절도행각이니, 못쓸인간 그자체입니다.

 

 

 

한편 아버지로 인해 집안의 부부 싸움도 잦았는데, 내나이 5세때 어느날 집안의 부부싸움 며칠후,

제가 어머니에게 무슨 투정을 한것도 아니었는데, 집에서 어머니는 갑자기 뭐라 짜증을 내며,

저에게 맞아 죽거나말거나 막무가내로 부억칼을 던지었습니다.
그래서 그칼이 그대로 제 머리에 맞아 꽂히어 머리부상을 당했고 사경을 해맸었습니다.
하여 갑작스런 어머니의 칼던짐에 머리부상과 정신적 충격으로 후천적 지적장애가 생겼습니다.
이것은 나의 친지중에서나 죽마고우도 이후 사회직장사람도 모르는 사실입니다.
선천적장애가 있는 남동생과 달리, 사고장애를 딪고 일어서려는 노력을 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머리부상으로 상처는 아물었으나 뇌를 다쳐서
기억상실증, 앞면장애, 정신착란증까지 생기기도해 꿈과 현실을 구분못하기도했지요.

사회생활에서도 일이 서툴다고 종종 핀잔을 듣기도해,
자의,타의로 그만둬야했던적이 수차례일정도로 절망과 고독의 삶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래도 분발하려 하며 나름 장애를 극복하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유년기 학교에서나 사회생활에서나 그냥 특출나지않는 소년이나 사람으로만알뿐
귀촌시 골사모에 저의 삶의 사연을 올려서 읽으신 분들외에는,

뇌를 다친줄은 죽마고우도 지금까지도 모르고있고, 주위 사회인은 더더욱 모르는 사실입니다.
다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후유증이 심해져서 기억력이 퇴화되고
앞면장애,마비가 조금씩 생기다보니 대인기피는 어쩔수없는거같습니다.

그러다보니 사고와 기억력에 있어, 지금까지 거의 정신력으로 버티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노력의 결실이었는지 지금도 회상하면 내인생에 신묘한 사건이 몇차례 있었습니다.

 

가사난으로 중퇴후 직장생활을 하며 틈틈히 검정고시 학원을 다니며 공부를 했습니다.

검정고시학원 반에서 등수가 2~10등으로 공부를 잘했고 장학금도 받으며, 고졸자격을 이수했습니다.

 

 

 

그리고 고졸자격이기에 병역을 민방위가 아닌 단기병으로 입대하였습니다.

단기병으로 제대하기까지 말년휴가까지 포함해 보통 많게는 포상휴가가 5차례입니다만,

군대생활을 다만 열심히했을뿐인데 휴가가 8차례 가까이(한달) 됐으니,

군선.후배들이 포상휴가 비법의 조언을 구할정도였습니다.

 단기병 복무시 군사단 무등산 미화활동대회에서 포상휴가 받은사례 활동모습.

 

가문사람중 삶이 나은 인생이 아니지만 노력과 배푸는 공덕을 실천하였기에 저주도 저멀리가지않았나 생각됩니다.

 

 

자린고비 생활수기 전격공개- 박봉 자수성가기

하늘자산;5천만원이상, 땅자산;1억원이상 달성

짠돌이카페 베스트선정 원문 : http://cafe.daum.net/mmnix/7mn8/7890

 

∇ 귀촌전까지의 후원관련 이미지영상


누가 어느신을 믿는지 묻는다면 두루믿는 케이스로, 좀 온전한 신이라면 다믿으나 아닌신은 상종도 않는다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모르겠으나 예수님하면 사회정의를 실현하고자하는 일부 천주교인들과
촛불에 앞장선 진보기독교인들이 가끔 떠올립니다.
교회를 다니지는 않지만 나의 마음한켠에는 은혜와 소망의 예수님, 낮은자의 예수님으로 남겨있습니다.
그리고 자비스러운 부처님도 그리워져봅니다.
기독교 덕목의 '믿음,소망,사랑'도 괜찮겠지만, 불교에서 "공덕하여 성불하소서"하는 격언이 마음에 와닺습니다.
이세상에서 사람들이 "공덕=인간질" 이것만 잘하면 천하태평인것을 생각해봅니다..

긴 이야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한반도 지진 가장 위험 지역은 경상도와 남서해안 및 수도권
경상도 해안가 원전 밀집지역 우려커


어제 11월 15일 경북 포항에서 근래 한반도 역대최대 진동의 지진이 발생했습니다.
지난해 9월 경북 경주에서 발생한 지진(규모 5.8)보다 규모는 5.4로 조금 작았지만,

지표면과 가까운 곳에서 발생해 진동은 더 컸습니다.

 한국지질자원연구원에서 16일 오전 11시에 분석한 포항 여진 현황  출쳐© News1

 

지진은 주로 지층이 어긋나있는 '단층'(斷層·fault)에서 발생하며,
그중 이번 세기에 변형이 일어나 지질학적으로 활성으로 판단되는 '활성단층'에서 대형 지진 가능성이 크다합니다.
특히 최근에 1회 이상 움직인 단층을 '활성단층'으로 분류하며, 경주∼양산∼부산으로 이어지는 '양산단층'이 잘 알려진 가장 큰 활성단층입니다.
또한 서울 부근에 추가령 단층과 왕숙천 단층이 있으며, 밀양을 통과하는 자인단층, 부산과 울산을 잇는 동래단층 등이 있습니다.

 

지질연 관계자는 "포항에서 발생한 규모 5.4 지진의 진앙분포를 분석하니,
존재가 보고된적 없는 북북동 방향의 약한 퇴적층, 단층대를 따라 지진이 발생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서쪽에 있는 상층 지반이 동쪽에 있는 하층 지반을 타고 올라가는 역단층 작용이 일어나면서 지진이 발생했다는 것이며, 위치는 지난해 경주지진 발생지점에서 북동쪽으로 약 40km 지점입니다.

남한내에는 약 450개의 활성단층이 알려져 있으며, 한반도 내 아주 작은 단층까지 따지면 수천개에 이를것으로 추정합니다.

 

 

 

 

한편 2011년, 거대 쓰나미와 후쿠시마 원전 사태의 원인이 된 규모 9.0의 일본 대지진의 여파로,

 한반도에도 이후 지진 횟수가 크게 늘었습니다.
1년 뒤인 2012년 2월 19일부터 27일까지 8일 동안 울산 동구 앞바다에는 규모 2.4~3.2의 지진이 4차례나 일어났습니다.
이곳은 쓰시마부터 동해까지 길게 뻗은 거대한 활성 단층인 ‘쓰시마-고토 단층’이 원인으로,
 특히 울산 해안 지역에 원전이 밀집되어 있어 우려가 높습니다.

 

지난해 일어난 경주 지진도 우리나라 활성단층 중에 양산단층이란 곳에서 일어났다고 하는데요.
경주에는 월성원전을 비롯해서 방사능 폐기물 처리장까지 있어서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양산단층 주위에는 월성원전 외에도 기장에 있는 고리원전도 있어서 이런 저런 말이 많습니다.

 

[양이원영/환경운동연합 처장 : 여기는 원전만 밀집돼 있는 게 아니고요. 활성단층도 밀집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한반도 전체에서 가장 활성단층이 많은 곳이고 그것뿐만 아니라 활성단층대라고 해서 이번에 지진의 진앙지라고 지목받고 있는 양산단층대라고 하는 곳은 영덕 영해부터 양산까지 140km가 넘는 그 연장선에 어마하게 큰 단층대거든요. 그러니까 활성단층이라는 것이 재차 확인이 된 겁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신고리원전 바로 옆에 있는 일광단층 그리고 월성원전 또 옆에 있는 울산단층 그리고 몰양단층 등등 한 활성단층대만 7개가 있고요. 활성단층 확인된 것만 60개가 넘습니다.
http://media.daum.net/society/others/newsview?newsid=20160914212212501

 

 


경기.수도권은 당분간 지진이 멈춘 지역이지만, 한반도에서 지진 에너지가 가장 많이 응축되어 있는곳입니다. 최근 고해상 지진 토모그래피에 의하면 서울 지역 지하에는 뚜렷한 단층구조가 약 10 km 깊이와 30 km 깊이에서 발견되었습니다.
포항,경주도 위험하지만 서울 수도권 또한 잠재 위험지역으로, 특히 강남이 가장 지진에 취약한 지역입니다.
과거 이 지역은 논밭이었는데 낮은 지대에 하천이나 바람으로 운반되어 퇴적한 ‘충적토’지반으로 지진에 매우 약합니다.  만약 M5.5 정도의 지진이 한강에서 일어난다면 강북은 암반층이라 피해가 그리 크지 않겠지만 강남은 완전히 붕괴된다고 봐야하겠죠.
지난 반세기 동안 줄기차게 세워진 강남 지역의 건물들이 지반 아래로 내리 누르는 스트레스 에너지는 한강을 따라 관악산으로 뻗어 있는 활성단층대와 맞물려 분출할 수도 있습니다. 모래밭 위에 조성된 여의도는 지진나면 그야말로 사상누각입니다..

 

 


 [보도자료 참조]

포항 지진 원인 '단층'이란?..남한에만 활성단층 450개  | 연합뉴스 |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7/11/16/0200000000AKR20171116048400017.HTML?input=1179m

 

포항지진, 경주와 다른 단층에서 발생…"존재 몰랐던 단층" 지질연 포항지진 분석…"약한 퇴적층이라 피해컸다"
(서울=뉴스1) 최소망 기자 | 2017-11-16     http://news1.kr/articles/?3155239

 

과거 동해와 전라남도에 진도9급 대지진이 왔었다. http://cafe.daum.net/kseriforum/7ofT/35218

 

1#  이번 추석 전에 극장가에서 흥행을 기록한 영화가 <택시운전사>, <청년경찰>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를 유심히 보면 영화구성을 왜 이리 급조하듯 각색했는지 의구심이 들다,
상업성 때문에 그랬었구나고 어림짐작과 함께 약간의 아쉬움이 남게 됩니다.
 
<택시운전사>는 민주화 격동기의 실화를 바탕으로, <청년경찰>은 동포번화가 풍문 등을 각색한 영화입니다.
각색이다 보니 허구는 존재하겠으나, 당시 어떤 당사자들이나 특정대상에 상처를 안겨주는 각색은
대부분 감독들이 자제합니다만, 아쉽게도 위의 영화들은 좀 그러지 못했습니다.
(특히 상업성보다 공익을 우선시하는 다큐영화는 더욱 각색에 조심에 조심을 기함.)

 

 

<택시운전사> 스토리를 대략 살펴보면,
영화 초반에서 1980년경 자칭 베스트드라이버라는 개인택시 만섭(실존인물명; 김사복)은
서울에서 영업중 도로가 시위와 경찰들로 막히자 "대모할려고 대학 갔나?.., 후광에 겨워서  저러는것들은 사그리 잡아서 사우디 보내야 한다니까.."며 보수적인자로 나옵니다.
그러면 실존인물인 김사복은 어땟을지 본다면, 기반있는 집안이지만 옹졸한 보수편향은 아닙니다.
또한 영화에서 1980년 5월, 개인택시 친구가 거액의 외국손님유치건이(광주 왕복 택시비 10만원건) 있음을 알자, 만섭은 밀린 월세도 생각나 겸사 그 건을 중간에 낳아체 임의로 외국손님을 태우고 가서 좌충우돌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나 당시 실존인물 김사복은 호텔택시업체에 소속된 요즘의 고급모범택시처럼 레벨있는 택시기사였으며, 독일인 외신기자인 피터(위르겐 힌츠페터)와 정식탑승 고객유치하에 손님인 외신기자를 모셨습니다.

또한 영화 중반에 들어서면서 택시운전사 만섭은 충격적인 군부의 광주민간인학살의 현장을 목도하고도, 자신의 영업택시로 외신기자가 취재하는것을 가이드를 하다 영업차가 망가지자, 외신기자를 멱살잡이하며 추태를 부립니다.
본 영화 중 가장 아쉬운 장면이 이것으로 꼭 이렇게까지 막장 기사인것으로 각색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실존인물인 김사복은 광주학살의 충격적인 상황을 목격하고 현지 택시기사와 의기투합한 동시에 의연하고 조심스런 자세로 외신기자를 가이드하며 취재를 도왔습니다.
그러면 왜 저런 막장택시기사로 스토리를 전개했을까 들여다본다면, 당시 실존 택시기사대로 항상 모범을 보이며 의연하게 외신기자와 착착 손발이 맞아 취재를 도왔다며, 영화를 만들었다면 흥행이 됐을까?
네, 의구심대로 안타깝게도 흥행 면에서는 장담할수는없고, 뻔한 스토리에 다만 박스중하위권에서 고전했으리라 생각됩니다.
하여 감독도 이 부분이 고민거리로, 광주이야기를 박스 상위권으로 올려놔야겠다는 시대적 사명감이 발동합니다만, 이거 실화를 흥미롭고 진지하게 하여 흥행성을 살리는 동시에 손색없이 만들어야 하니 영화제작자로선 쥐가나는 부분이지요.
하여 흥행이라는 상업성을 위해 어쩔수없는 각색을 하다 좀 오버된 각색이 연출된 것이 아닌가 추측이 됩니다.

그래서 영화 하반부에선 그 속물 기사가 그래도 이러면 안되지 하고 반성하며 외신기자와 의기투합해
시대적 사명을 함께 완수해나가는 명품 엔딩영화로 끝을 맺습니다.

 


아울러 김사복아들의 초연함을 알수있는데, 다큐 인터뷰에서 그냥 지금은 고인인 김사복 그분이 우리 아버지가 맞다고만할뿐, 김사복을 속물기사로 묘사된 것에 내색하지 않고 의연합니다.
그래도 마음은 좀 힘들었을텐데 벙어리냉가슴을 굳이 내비치지 않고 초연함에, 존경과 함께 안스러움이 밀려옵니다.
아울러 저항에 함께한 광주시민들과 군부의 만행을 알리기 위해 애쓴 여러 사람들에게 경의를 표하는바입니다..

 

 

 

2#  지난 8월 개봉한 영화 <청년경찰>은 중국동포가 많이 사는 대림동 일대를 조선족조폭 주무대화해 우범지대로 묘사해 논란이 있습니다.
<청년경찰>의 줄거리를 일부를 보면, 서민의 아들인 가난한 기준은 학비가 무료이기 때문에, 과학고를 다닌 희열은 특별한 일을 하고 싶어서, 각각 경찰대를 선택한 가운데 벌어지는 핼조선내 서민사회초년생의 에피소드를 담고 있는 성장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아저씨>와 <아수라>와 오버랩되지만 각색이 많아 사실성은 이 영화에 못 미치나 흥행성은 더 높은 스릴러영화입니다.
청년경찰들이 납치된 젊은 여성을 찾아 헤매다 난자밀매 조직을 발견하는 설정은
<아저씨>에서 전직 국정원요원 태식이 납치된 이웃집 소녀를 찾다가 장기밀매조직을 접하게 되는 장면과 비슷합니다.
<아저씨>에서 범죄의 공간은 차이나타운으로 지칭되지만, 최악의 범죄를 자행하는 주범은 한국인이듯, <아수라>도 부패한 박시장이 자신의 비리를 알고 있는 검사를 제거하기 위해 조선족이 섞여있는 외국인노동자들을 동원합니다.
 <청년경찰>에서도 조선족장기밀매조직이 한국인조폭을 등에 업고 한.중합작하에 비리병원을 매수해 일을 벌여나가는 내용입니다만,
영화화면에서는 조선족장기밀매조직이 모든것을 주도하고 계획하는 것으로 묘사되면서, 동포번화가를 우범지대로 보여줍니다.

 

 

또한 추석에 개봉해 최근 흥행중인 영화 <범죄도시>의 경우,

실제 지난 2004년 조선족 왕건이파와 2007년 연번흑사파를 일망타진한 강력반 괴물 형사들의 '조폭소탕작전'을 영화화 한 작품으로, 동포번화가를 좀 우범지대로 묘사됩니다.
그러면 영화처럼 실제로 조선족조폭이 한국인조폭보다 더 잔악하고 심한가 조사해본다면,
한국인이든 조선족이든 똑같이 목소리 높고 성질이 지랄같다는게 정답입니다.
예로 안산 원곡동의 한국조폭이 중국인조폭을 박살내서 자기 수하로 만들었습니다.

고로 중국인조폭 <= 덜떨어진 조폭 혹은 시다바리 조폭, 한국인조폭 <= 체류자도 구슬려먹는 지능화된 교활한조폭이라 할수있습니다.

 

당시 기사에 '가리봉동 공포의 조선족 조폭…칼·도끼 들고 폭력·돈 갈취'라는데 실제는 맞는 면이 있고 틀린 면이 있습니다.
상세기사에는 [이들이 2005년 7월 옌볜 출신 폭력배를 모아 연변 흑사파를 결성하고, 동포주변상인들에게 보호비 명목으로 돈을 빼앗고 2006년 10월부터 2007년 2월까지 9명을 다치게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특히 다리에 칼이나 도끼를 차고 다니면서 작은 시비에도 쉽게 흉기를 휘두르고 공짜 술을 얻어먹는등 70-80년대 국내 조폭특성을 띄었다고 한다. 당시 피해액은 고작 200만원으로 드러났는데 피해자들이 보복이 두려워 진술을 하지 않았고, 실제 가해자들은 신분세탁 뒤 재입국을 쉽게 할수있었다..]
<= 개인독고다이깡패가 아닌 조직폭력배가 5개월에 겨우 200만원만 뜾어냈다니, 그것도 칼이나 도끼를 차고 다니면서??
그래서인지 지역출신 깡패가 "재들은 뭐라냐? 목소리만크고뭐여? 저러고 다니면 나중에 큰코다칠텐데.. 근데 저리 조직사업해서 밥이라도 먹고다닐라나? "하고 웬만하면 역이지 않으려하면서 지켜보곤했다합니다. 그도그럴것이 국내에서는 범죄와의 전쟁으로 인해 국내조폭들이 70-80년대처럼 "나 조폭이여!" 하며 쇠파이프등을 질질 끌며 행세하는것이 아닌, 나아바리를 사업성 있게 다만 법을 염두하여 지능화해 그리고 다양화하고 있음이 차이입니다.

 

서민지역이라는 특성상 동내부호들도 이곳에서 꾸준한 상업을 포기하고 더 좋은 환경으로 종종 옮기는 추세였고 지역주민도 그러한지라, 지역조폭도 세력형성에 미미했고 대부분 잘자란 생업이라도 있던 패거리 혹은 독고다이깡패이거나 지역상인 또한 독고다이 정신이 강했습니다.
90년대 이후 동포와 중국인이 이 지역에 유입되면서 동포,중국인상인이 대폭 늘어나 차이나타운이 형성되었고, 문제라면 주로 지역주민과 동포와 이방인과의 상호문화충돌이나 생활중 사소한 다툼이 간혹 패싸움으로 번지기도했는데, 상대적으로 많은 외지인들의 기세에 의해 지역주민이 싸움에서 밀려나기도했을뿐, 어느쪽이든 어지간한 인간군상이었음이 진실입니다.

 

그래서 동포나 외국인노동자 밀집지역이 우범지대인가? 를 살펴보면,
이 질문은 서민 밀집지역이 우범지대인가? 에서 답을 찾는게 객관적입니다.

과거에 80~90년대 산업화시대때 공돌이,공순이들이 가리봉동과 구로동, 가산동일대에 많이 거주했었습니다. 그리고 영등포동에는 서민시장 및 유흥가가 형성되었고, 구로구와 영등포구일대가 저질스런 동네로 회자되었는데, 근본적인 원인중 한가지는 나라가 복지보다 경제개발이 우선이라며, 노력해도 노동착취로 인해 가난의 대물림이라는 빈곤의 악순환이 이어져, 삶의 희망이 멀어지는 현실에서 자포자기하는 서민이 늘어났고, 술과 도박 혹은 사소한것에도 동네,이웃쌈판으로 이어지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서민이라고 막장이나 자포자기인생만 있을까요?
부자라고 해서 인성이 다 뒷받침되는자만 있는게 아니듯, 국내서민이든 동포든 어려워도 참고 삶을 이겨나가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광주학살사태때 외신기자를 조력해준 '택시기사'를 속물기사로 묘사한 것이 좀 그러할진대,
<청년경찰>이나 <범죄도시>에서는 특정지역을 우범지대로 묘사한 것은 흥미거리를 떠나서 도가 지나친것이 아닌지 생각됩니다.

 

참고로 군함도에서 한민족끼리 위기상황속에서도 아귀다툼하며 좌충우돌하는 장면이 연출되듯, 우리 한민족끼리 반목보다 이제는 민족화합이 필요한것이 아닌지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청년경찰', '범죄도시'…중국 동포 범죄 실체는?  출처; 소비자경제  2017.10.15
http://www.dailycnc.com/news/articleView.html?idxno=74723

[IOM이민정책연구원에서 발행한 보고서 ‘체류외국인의 범죄에 대한 진실과 오해’에 따르면 총 외국인 범죄자의 강력범죄 건수 중 중국(동포가 포함된)은 5위 안에 포함되지 않는다. 절도범죄 소계도 마찬가지이며 폭력범죄는 1.03배로 국내 범죄자의 비율과 비슷하다.
강력범죄는 국내 범죄자 비율 대비 파키스탄 5.97, 몽골 3.86, 러시아 2.92, 우즈베키스탄 2.86이며 폭력범죄는 몽골 2.49, 중국 1.03, 우즈베키스탄 0.89, 러시아 0.79이다..]



3#  혹자는 "그들 스스로 중국인이라고 하니 짱개아닌가?"고 비속어를 섞어가며 빈정댑니다만, 이 또한 한심한 작태입니다.
일본의 경우 어떤 동포가 일본인인것을 부정하려한다해도 최대한 미래세대의 자국민으로 인정하려는 제도를 펼칩니다.
중국 또한 마찬가지입니다만, 유독 우리 대한민국만은 중국동포와 고려인 3세 이상을 외국인으로 치부하려고 있습니다.

일각에서는 조선족 3세 스스로 자신이 중국인이라는자가 많으니 동포 혜택을 제한해야겠지만, 고려인 3세만큼은 그게 덜하니 최대한 받아서 동포 대우해주자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땅덩어리나 사람이나 우리보다 넓고 많은 일본과 중국이 나름 동포우대정책에도 신경을 쓰는데,
정작 사람 한 사람이라도 아쉬울 미래한국 상황인데도 사람을 정체성의 잣대로 솎아 내치면서 골라 받아든다??
그 당사자가 범죄자인 경우 대부분의 나라가 입국을 거절하는 경우는 있으나, 정체성을 잣대로 한다면 좀 이상한 발상입니다.
 정체성의 문제는 그 동포에게서나 생긴것이 아닌 '동화정책'이라는 그 동포가 거주하고 있는 나라 시스템에 의해서 발생된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동화정책에 버금가는 정책을 내세워서 포용하는 제도를 시행하면 됩니다만, 그것을 약간 시도하면서도 이상한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동포도 다문화라는 틀거리내에 포함시켜서, 외국인체류자와 비슷한 정책과 대우로 뭉뜽거리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정부에서는 "너희가 동포인지 정체성이 무엇인지는 관심은 없고, 다만 합법적인 체류하에 일 열심히하고 기술.기능을 잘 습득해 사회에 큰 이바지하거나, 돈 많이 벌어 놓거나 혹은 돈 많이 들고와 정착해 있는다면 너희 능력을 높이사 귀화혜택을 좀 주겠노라"는 식의 제도입니다.

한편 중국은 토착한족과는 이방인이던 조선한인을 중국인으로(조선족) 포용하여 조선족부주석만도(부대통령) 2명이나 임명시켰습니다.
아울러 우리 조선족은 연변자치주를 형성하고 중국에서 특등급 쌀과 작목을 생산해 내는 쾌거를 이루었고, 현제 리동춘 전인민대표(전국회의원)가 녹색혁명에 노력하고 있는등, 농산업, 무역, 건설업, 문학, 스포츠 등에 유능한 인재가 널리 분포되어있습니다.

 

이것은 러시아고려인도 마찬가지로 과거 연해주에서 우즈베키스탄으로 강제이주 당했던 조선한인도 변변치못한 신분보장상태여서도, 그곳의 척박한 땅을 일구어 다량의 작물을 생산해내고 삶을 개척해 냄으로써, 현지 러시아인을 놀라게 했습니다.


리동춘 환갑기념 《된장아리랑》닐리리 ,리동춘의 《된장아리랑》출판식 및 학술세미나가 연길에서
출처; [ 길림신문 ] 편집/기자: [ 김성걸,강동춘 ] 원고래원:[ 2015-07-24 ] 
http://www.jlcxwb.com.cn/sports/content/2015-07/24/content_159849.htm

 

연변전통된장과 “귀향아리랑”  출처; 연변통보 2008-01-10
http://www.yanbianews.com/bbs/zboard.php?id=news07&no=69

 

연변 | 된장 사랑, 된장 아리랑 출처; [해란강닷컴 ;문학뉴스]  2016-10-30
http://www.ihailanjiang.com/bbs/board.php?bo_table=2002&wr_id=107

 

 

 

http://cafe.daum.net/kseriforum/HjpR/2672 김광수경제포럼
http://cafe.daum.net/hanryulove/538/113121 한류열풍사랑
http://cafe.daum.net/10in10/9HTt/62101 텐인텐
http://cafe.daum.net/moonfan/bhr8/105051 문팬
http://cafe.daum.net/yoonsangwon/TXKe/6473  생존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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