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이야기는 당시의 풍문과 목격담을 각색해 구상한 실화입니다.

귀촌후 틈틈히 나의 인생이야기를 기록중이며, 그중 공유의 글을 올리는바입니다.)

 

 

때는 1951년 이후 전남 무등산 일대에 활동하던 남부군 빨치산중 일부대원이 내장산,지리산 본거지로 떠나게된다.
이곳은 지리산보다 은신에 취약한지역으로, 한국전쟁 전후 남부군(빨치산) 일부가 임시 은신처로 활용했다.
또한 6.25 인민해방구 시절부터 9.28 후퇴 이후에도, 무등산은 지리산처럼 한동안 남부군의 거점지가 되었다.
광주가 수복된 직후인 1950년 10월 29일,
서석국민학교에 주둔중인 국군 제20연대가 습격을 받고, 학교 건물 일부가 불에 탔다.

하여 군경은 무등산 빨치산 토벌작전을 개시하고, 작전 수행을 위해 경찰이 주민들을 동원하여 신작로를 개설했다.
1950년 12월부터 다음해까지 계림동에서 원효 계곡에 이르는 12㎞ 구간에 도로를 개설한것이다.
그 후 이 도로를 확장하고 포장한 것이 현재의 관광도로이며,
지금의 산수동~원효사 간 구간은 6.25 전쟁이 낳은 산물이라 하겟다.

또한 국군이 1951년경 초가을때 무등산 중봉자락인 규봉암(영평리) 일대에
전투기로 화학무기를 살포하며, 포위작전을 펼쳤다.

남부군에 점점 은신에 취약해지자, 이들은 산발적으로 탈출해 화순으로 도피하거나 지리산 본거지로 향했다.
그 과정에서 군경토벌대와 맞닥뜨려 산발적 교전이 발생했고, 수적으로 열세인 이들은 대응사격을 하며 흩어졌다.
이 인민유격대는 남조선노동당 박헌영대장의 이현상 남부군 총사령관(지리산지구 제2병단) 조직부대중 하나였다.

 

 

 

한편 1951년 늦봄 이른새벽, 광주 외각에서 척호활동하던 몇명의 남부군은,
광주변두리 남서쪽방향에서 왠 폭탄소리를 듣게된다.
순간 낙오된 영산강 동지와 직결된 상황이라 판단하고, 신속히 서창동방향으로 향한다.
가다 매월동(회재로)에 다다르자 폭탄부상을 당한 동지 한명을 만나게 되고,
동지가 알려준대로 폭탄현장으로 향했다.

 

한편 남부군 인질로 있다 폭탄이 터지기 직전 몸을 피하다 부상당한 나의 할아버지는 현장에서 무조건 탈출했다.
그후 대각선에서 숨어 구경하던 지역주민중 한명이 도와주러 인질이 있는곳으로 숨어서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다가가 묶인 손을 풀어주었고, 나의 할아버지는 잠시 휴식만 취한체 이내 이곳을 떠났다.

 


남부군이 서창동 야산 언덕들판 인근에 도착하니,
멀찍이서 반공치안대들이 양민을 암매장하는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탕, 탕, 탕.."
합세해온 남부군이 현장으로 숨어와 일제히 사격하자,
치안대 인솔자는(서북청년단출신) 현장에서 즉사,
지역반공대원 한명은 총상을 맞고 쓰러진다.
그러자 나머지 반공대원들은 가져온 총만 챙긴체 뒤도 돌아보지않고 삼십육계 줄행랑을 쳤다.
폭탄현장에 도착한 남부군은 총상으로 도망치지못한 반공대원에게, 지금 무슨일을 벌이려한거냐고 추궁한다.
알고보니 이북출신 반공대원이 단독으로 치안대를 인솔하며 막무가내 작전을 펼치는 바람에, 
치안대 폭탄을 맞아 인질인 무고한 양민이 죽어있었다.

하여 무과실 전공으로 위장하고자 인질인 지역양민을 암매장하다, 결국 이렇게 발각된것이다.
합세해온 남부군은 조금전 운명한 불갑산 인민간부를 인근에 임시 매장하고 잠시 애도하였다.
그리고 다친 반공대원에게 "인민에 총부리나 겨누지 말고 농사에나 전념하시오." 충고를 하고 자리를 떴다.


 

남부군이 폭탄현장에서 짐을 챙기고 자리를 완전히 뜨자,
멀찍이 숨어 남아서 지켜보던 주민 몇이 그 현장으로 나온다.

폭탄현장에 와 아직도 아수라장 흔적이 생생함을 보고,
허탈하여 한주민이 총상당한 반공대원에게 말을 건넨다.

 

마을주민; "아이고, 꼴이 말이 아니구만이랴~..
그건그렇고, 삽가지고 뭔 난리요~ 빨갱이하면 우리도 싫어하니까, 삽달라해서 줬는데, 이건 아니지않소?"


반공대원 "죽것소. 묻지 마시요~"


마을주민 ; "애고 모르것다. 우리 주민도 오늘 못본걸로할테니, 젊은양반 어디 나서지말고 농사나 전념하게요 들~."
 
반공대원 ; "아이고, 알았당께~ 아주마이~ 나좀 부추켜주시요~"

 

그러했다. 당시 전쟁이라는 엄혹한 시기였기에 아군이든 적군이든 주민이든 서로 묻지말아야할 일이 많았다.
 "묻지를마세요." 트로트는 현대에 김성환 아티스트가 애정을 담은 가요이다.
만일 격동기때 이곡이 시판됐다면 애환곡으로 널리 불리었을지 싶다.

아무튼 졸지에 패잔병이 된 반공대원은 지역주민의 부축하에 이 현장에서 터벅터벅 빠져나왔다.
한편 해는 천연덕스럽게 슈퍼선이 되어 동쪽 무등산 위로 높게 드리우고 있었다..


 

서창동 폭탄현장을 수습하고 나온 남부군은
다시 무등산 방향으로 발길을 잡고, 광주에 당분간만 은신하게 된다.

군경토벌대의 무등산 포위작전이 개시된 상태여서, 이들은 이후 화순방향으로 선회하였다.
화순 야산에 은신하여, 한동안 화순 토벌대의 후방을 교란하다, 이후 또다시 방랑자가 된다.



사람들은 호남권에 빨치산 잔당이 전시 이후로도
인근에 흩어져 은거하는수가 많았다고하는데, 맞는듯하나 틀린면도 있다.

전쟁 당시 전남권만 가담자까지 포함해 남부군(빨치산)이 약6만여명으로 가장 많은 규모인듯보인다.
태백산맥을 끼고 오대산, 태백산, 소백산(강원도, 경상북도)  속리산을 끼고 덕유산, 가야산(충청도, 경상도권)
지리산을 끼고 내장산 및 서,남해 내륙일대(전라도, 경상도) 도합해 남한내에 수십만 이상의 인민유격대가 존재하였다.
이중 전사하거나 생포 및 자수된 인민유격대 수를 아무리 많이 추산하여도 10만여명 안팎이다.
당시 군경의 대대적인 토벌작전 이후, 좌익분자 색출작업도 횡횡하였다.
하여 대부분의 빨치산과 인민 부역자들도 처벌을 피하고자 근거지나 터전을 버리고 멀리 떠나야만 했다.
군경의 대대적인 토벌작전으로 전사하거나 붙잡히거나
혹은 타지역으로 도피를 하다 사살되지만 이들이 다가 아닌것이다.

일부의 빨치산은 인민군이 퇴각할 때 혹은 그후 기회를 엿보아 월북했다.
또 상당수의 일부는 도중에 빨치산 활동을 포기하고 근거지를 떠나 피난민과 석여서 도처에 은거하게 된다.
즉 호남권에서는 호남권밖으로, 영남권도 이지역 밖으로 등등 대규모 엑소더스가 이어진것이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체결 이후 도처에 남아있는 빨치산은 이렇게 각 도처로 흩어져 은거하며 살게 된다.

당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강동정치학원을 통해 양성한 유격대원을 포함해 약 2500여명의 남부군(빨치산)을,
 1948년부터 몇년을 거쳐 남파했다.  그후 9.28 후퇴이후 일부 잔존한 인민군을 합쳐 수십만명 이상인것은,

시사하는바가 크다. 이들에 가담한 민초중 일부는 생존형이었지만 의기투합 의지 또한 많았다.

 

 

한편 인민치하에서 생존을 위해 부역한 대부분의 생존형 소극 부역자들은 차마 자신의 터전을 떠나지 못하였다.
하여 격전지 인근 마을을 비롯 재수없는자는 군경의 토벌작전에 휩쓸려 학살을 당하였고,
운좋은자는 자수해 약간의 처벌만 받고 풀려나기도 했다.
즉 부역자중 운좋은자는 경찰서나 지서에 연행되 조사를 받은 뒤 훈방되었고,
혹은 죄질이 나쁜자는 서울 등지로 이송해 징역 형을 얻도받았고(일부는 사형), 대부분 수감하다 석방됐다.

 

한국전때 인민군과 남부군(빨치산)에 의해 영광을 비롯 남도의 교회와 기득권 세력에 대한 숙청과 탄압이 이어졌다.
탄압이 다소 일방적이었는데, 그렇다면 현제 교회와 기득권이 부의 분배를 하며 먼가 달라야 하는데 그렇지는 않다.
그러면서 당시 빨갱이에게 당했다며 이를 가는데, 과연 억울하다고만 할수있는지 의문이 드는 대목이다..
필자도 당한 집안의 입장에서 양심 고백하자면 그런자는 딱하고 가련할 뿐이다.
그저 역지사지해야만 할말이 있을뿐이다..


생각해보면 당시 호남권에 빨치산이 많이 존재했던 이유는 지리적으로 은거 가능지역이 많다는 지정학적 이유가 크다.
민중의 자각이나 만인 평등사상 분포지는 오히려 구한말 동학사상이 활발했던 중부권으로 충청도와 전북이었다.
구한말 당시 전라도 나주만해도 동학 항쟁시 관군들이 동학도들을 아작냈다고한다.
한편 나주 지역 인사들중 이것이 나주의 자랑인양 공중파 지역민방에서 버젖이 떠벌리고 있다.
이렇듯 전남권에 아직도 은연중에 구태와 천민자본주의가 만연해 있는 실정이다.
현제 호남권의 정치인만봐도 적패스런 바른미래당 인사가 대부분이거나
두각이 잘 안나타난 더민당, 민평당 인사가 주를 이룬다.

일출한 사회 인사는 대부분 중부권에 분포되어 있으며, 그다음에 호남, 경남등에 조금씩 있는편이다.

 

좀 과한 상상이지만, 만일 80년대에 신군부가 광주사태를 벌이는 만행이 자행되지 않았다면,
전남 또한 좀 적패스럽고 모호한 강원권처럼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이 된다.
신군부의 광주 학살 만행으로 인해, 잠들고 있던 남도의 의식을 깨워
독재와 저항해 어느덪 민주화성지로 우뚝서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호남은 무슨 저력에 있어 어떠한가?에 대한 답은 한반도 어느지역 못지않게 잠재력, 저력이 풍부하다.
한반도 호남은 아시아 물류교역의 허브였거나, 외세나 적패와의 끈임없는 투쟁의 역사를 이어온 고장이라 할수있다.
통일신라 이후로 남도에 해상교역이 활발했으며(청해진 장보고대사), 고려시대때 남도에서 삼별초와 함께 항몽하였다.
조선시대 임진왜란때 왜구를 물리쳤으며(남해 충무공 이순신 활약), 격동기때 신군부의 광주만행에 맞서 투쟁하였다.
이렇게 무슨 저력이나, 성장 잠재력은 월등히 풍부하다.
그러나 민주화도 아이러니하게 부의 분배력까지는 이어지지 않거나 미진한 실정이다.
이곳이 정말 좋은곳이라면, 잘사고 못사고를 떠나 도시나 시골이나 인심이 좋아야할것이다.
그러나 남도의 인심도 이반되어, 현실은 타지역처럼 호불호만 있을뿐 마찬가지라는것에서 문제점을 직면하고 있다.
아무튼 오블리스 노블리제, 이것은 일부 유럽 선진국을 제외하고 모든 나라와 인류가 실현해야할 과제로 남아있다..

 

9

 

지난 밤에(11/26) 기이한 꿈을 꾸었네요.  

북한 김정은 주석이 올해 늦가을 지나 전격 방한했어요.

즉 올해 초겨울쯤 남한 방한은 하되 회담 날짜와 면담인사 및 장소는 1급비밀하였는데요.

이날 방한 전날 방한 확정 보도가 나고 그 다음날 전격 방한을 한거에요.

판문점을 거쳐 방한한 모습을 공영방송이 TV 생중계를 해주었어요.

방한하여 회담한 장소는 남산타워 전망대였어요.

(현실에서는 북한 수장을 국무위원장이라 호칭하지만,
꿈에서는 인민들이 주석 혹은 수령이라 호칭하여 꿈이니 꿈 용어로 통일합니다.)


저는 아무것도 모르다가 쌀쌀한 그날 서울역전을 우연히 지나나 대형스크린을 통해,

북한 주석이 1시간전 서울로 와 남산타워 전망대에 막 도착한 모습을 보았지요.

남북한대표 및 고위정상들이 남산 전망대에서 포토타임을 잠시 가졌어요.

남한정상들은 좌측, 북한정상들은 우측 총8명으로 참가단이 특별했어요.

좌 남측 정상들 ; 김대중전대통령, 정동영장관, 김근태전총리, 문재인각하

우 북측 정상들; 김정은주석, 리설주여사, 장성택장군, 김일성전주석

 위처럼 꿈나라에서는 김대중전대통령이 아직 살아계셨고,

보건복지부장관을 지낸 김근태전의원도 지난 정권때 총리를 지내다 퇴임했지만,

대통령 유력 후보를 고사하고 문재인후보에게 후보자리를 넘겨준 장자방이었어요.

이것은 16대 대선때 노무현선생에게 대권자리를 넘겨준 전례가 있는만큼,

 국민들도 뜻깊어 하여 국민의 열망에 힘입어 방한정상에 포함된거였어요.

 

우측 북한 정상들중 김일성 전주석이 몸이 좀 수척해졌지만 여전히 살아 장수하고있었어요.
그리고 친중파 숙청설로 나돌았던 장성택장군도 건재한 상태로 리설주여사만큼 회담을 담담히 리드하였어요.

특히 인상적인건 회담전 정식포토타임을 갖은후 장성택장군이 2차 깜짝포토타임을 제안한거였어요.

앞 내빈객중 이재명지사를 먼저 부른후, 아차 잊을뻔했다며 박원순시장도 부른후,

나란히 10여명이 포토타임을 갖고, 모두들 악수했고,

특히 북측 인사들이 이지사에게 고초가 많다는조의 환담도 오갔어요. 


대형스크린을 보다 저 회담장소에 갈수있을까 궁금하던차,
사람들이 말하길 회담 장소는 갈수있어도 회담장소 군중내빈으로 구경하는것도 이미 비밀로 정해져있더래요.
그러나 회담 끝나고 남산에 내려올때는 남산 주위에서 구경가능하다는거에요.
그래서 호기심으로 남산타워로 향했어요.

가보니 앞면있는 시민단체 대표가 자원봉사하면서,

 저보고 회담 끝나가고 있으니 멀찍이서라도 보고싶으면 지금 서둘러 올라가라는거에요.
꿈에 남산타워 전망대는 20층이었어요.
하여 경호원의 안내하에 남산타워로 향하여 올라가니,
승강기쪽에는 사람이 만원으로 인산인해였지만, 계단으로 올라가는쪽은 다행히 좀 한산했어요.
그래서 계단을 타고 한참 올라가다보니 10층이 지나서야 자녀도 대리고 온 시민을 비롯해 사람들이 좀 붐비기 시작했지요.
그래도 사람들이 질서 정연하게 착착 올라갔기에 더디지않고 18층까지 잘갔는데, 문제는 그다음이었어요.
왠 주한미군 가족도 거기에 합세하여 올라갔었는데,
18층 사이에서 주한미군 여러 자녀들이 계단을 거의 점거한체 놀이터마냥 장난을 치고있는거에요.
근데 그 주한미군 부모는 잘도 잘논다 좋다며 히히낙락할뿐 그러지마라 만류않하고 죽치고 멈춰 있는거에요.
그래서 좀 기다리다 짜증나서 머라하고 해집고 18층을 지날수있었고,
나머지 시민들도 그제서야 좀 그리 힘겹게라도 올라가게 됬어요.
19층을 지날 즈음 방금 회담을 마치고 정상들이 귀가중이라는거에요.
하여 서둘러 20층에 다다라서 바라보니, 정상들 뒷모습만 겨우 본체 이내 횡하고 사라지고 말았어요.
나머지 내 뒤를 따라 방금 올라온 사람 외 그 이후 시민들은 뒷모습도 보지못한체,

닭 쫒던 개 신세가 된듯되어 다들 허탈해지고 말았어요.
그래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시민들은 전망대 유리창쪽에 모여 내려가는 정상들 모습을 찾고있었어요.
저도 북한정상들이 도보로 내려가는 모습을 창문너머 히끝히끝하게 볼때즈음..,

잠시후 꿈이 깨었어요..

 

 

자서전 서막 - 한국전쟁과 당시 나의 고향에 있었다던 이야기

 

(아래의 이야기는 당시의 풍문과 목격담을 각색해 구상한 실화입니다.)

 

 

때는 한국전쟁 당시 1950년 10월경 유엔군과 군경이 전남지역을 수복하면서,
좌익들은(인민군 일부와 빨치산) 다시 산으로 들어갔다.

빨치산 인민유격대 조직은 전남도당 유격사령부 예하에 6개 지구 체제로 재개편한 무장조직이었다.
약 6만여명이었던 이들은 남조선노동당 박헌영대장 휘하로,
전남도당 위원장은 박영팔, 부위원장 겸 빨치산 총사령관은 김선우이다.

이중 제5지구당 (불갑산)불갑지구는 함평, 영광, 무안, 목포가 활동무대로 약 2,500명이었다.
(위원장; 김용우, 빨치산사령관; 박정현, 모두 구빨치산 출신)

한편 1951년 2월 20일경 새벽 대대적인 불갑산 토벌작전인 남한 군경합동 '대보름작전'이 전개된다.
이 불갑산 토벌작전에 11사단 20연대와 영광과 함평경찰, 청년방위대와 지역우익단체가 동원됐다.  
이 불갑산 토벌작전을 당한 빨치산중 일부는 나주 금성산으로 후퇴하여, 나중에는 영산강을 건너 장흥으로 향했다.
그중 금성산으로 퇴각하다 흩어진 몇몇 빨치산은 나주야산에 머물다,
봄에 피난주민 행색으로 위장한체 노안면 양천리 계량재에 이르게 된다.

이들은 계량재 아래에 인가를 발견하고 내려가 왠 불탄 성당이 있어 내려가다 멈짓하고 산으로 다시 올라 숨는다.

 

  ∇  나주시 노안면 양천리 망산,뿔바위 인근 전경


∇ 나주시 노안면 양천리 계량마을 노안성당 (현제모습)

 

왜냐면 그 성당은 붉은색 성당으로 멀쩡했기에, 반공대가 유인책으로 그리했을지도 모른다는 판단이 순간 선듯하다.
이들은 계량재를 지나 망산 인근에서 하산하여 인근마을(국룡)을 우회해 들판을 지나 산에서 발견한 방죽으로 향한다.
방죽(장등제) 들판으로 진입해 은신하여, 잠시 휴식을 취하며 주변을 바라보다,
원거리에 있는 기이한 풍경인 고인돌 유적지를 발견하게 된다.

이 빨치산은 순간 저 고인돌 유적지 주인은 아마 이지역의 지주일거라 판단하고,
야산길을 따라 고인돌이 있는 인근 마을로 향했다.

가면서 야산밭에서 일하던 지역 농민에게 고인돌 야산주인집을 수소문하여 그 마을로 향한다.

 

  ∇ 양천리 장등방죽으로 사진위 중간 남색둥근표시가 고인돌 유적지이다.

 

빨치산 : "수고하십니다. 전쟁 난리통을 격다 길을 잃어 배회중이외다.. 참, 저 신기한 고인돌 야산주인이 누구요?"
지역주민 : "아이고, 어쩌다 여기까지 피난 행렬이요?.. 그 야산주인은 저기 금동마을의 신철수아들네이지라~"

 


즉, 위 고인돌과 관련된 마을은 지금의 나주시 노안면 양천리 금동마을이며, 나의 할아버지의 본가였던 집성촌 마을이다.
또한 나의 평산신씨인 할아버지 본가는 소유 야산중에 조상이 오랬동안 관리했던 위 고인돌 야산이 있으며,
집성촌 당시때부터 지주에 속하는 부유한 가문이었다고한다.
이 빨치산은 그날 늦은오후 짐에 숨겨둔 노획한 국군총을 꺼내들고 나의 금동 할아버지집을 급습하였다.
댁이 대가족이었으나 당시 집안엔 방금 밭에서 온 할머니와(중년여성)  한 작은아들만 있었고,
나머지는 다들 밖에 나와 있는 상황이었다.

댁에 총을 들이밀고 먼저 요구한것이 요기거리로 중년여성이 먹거리를 내오자, 좀 희안한 광경이 펼쳐졌다.
빨치산 간부가 자신은 망을 보는데 주념하며,
부하에게 먼저 식사하라하고 먹거리를 거의 양보한체 자신은 대충 먹는것이다.

그리고 있다 조용히갈터이니, 자금과 식량을 내주라면서 다는 줄필요없고 알아서 주라는것이다.
그러자 이 큰집 아들이 앞뒤다짜르고 아니꼬아하며  한마디 거든다.

 

작은아들 ; "앰병~ 그럴거면 머하러 총을 겨누고 지랄이요? 차라리 좀 달라고 구걸하지.."
빨치산 간부 ; "이런 삭아지하고는.. 이보시오 동무, 총알받이로 있다 저 버르장머리없는 녀석이나 대리고 나오시오."
하고는 나의 큰할머니인 중년여성이 챙겨주는것을 받고, 먼저 엄호하며 길을 나설 준비를 한다.
그럴즈음 집안의 가장 할아버지가(중년남성) 바깥일을 마치고 귀가중,
누가 뭐라하는 소리를 듣고 살피자 집안서 총을 든 괴한과 맞닥뜨린다.

집안의 중년남성은 만류하며 내아들 말고 나를 잡아가라 자처했고, 부하는 이내 중년남성을 인질로 하여 길을 나섰다.
왜냐면 총알받이로 소년은 불필요했으며, 간부도 이에 이유를 묻지 않았다.

 

   ∇ 나의 할아버지 본가집터 옛모습

 

 


이 빨치산은 초저녁 인적이 드문 계림리를 거처 서광산(평동 남서쪽)을 지나
지금의 공항 남서쪽 천변을 끼고 서창동으로 향했다.

아마 무등산과 화순야산의 거점지 근황이 궁금해서인듯하다.
이 두명의 빨치산에게 인질이 처음엔 나의 할아버지 혼자였지만,
평동끝을 지나다 길에서 마주친 주민 두명을 생포해 인질이 셋이 된다.

인질 손을 묶은체 끌고가면서, 가다 주민이 물으면 빨치산 내통자를 끌고 가는거라 둘러댔으며,
주민은 낮선 반공대원이긴 하지만 국군총을 소지하고 있어 긴갑다했고,
그래도 의심하는듯 보이는 행인 둘을 잡아가는것이다.

이들은 늦은밤 인적이 드문 지금의 광주시 서구 서창동(회재로) 인근 (백마산)큰야산에서 잠시 여장을 풀었다.
그러는 사이 송정리 인근 지역주민이 밤에 왠 수상한 사람들이 지나는것을 보고,
급히 지역 파출소 같은 반공치안대에 알렸다.

당시 반공치안대엔 이북에서 내려온 서북청년단이 규합해 반공조직을 관리감독하거나, 독거다이 왕초가 종종 있었다.
치안대에 당직을 서다 지역주민의 급보를 받은 서북청년단출신 대원은 전공을 독차지하고자
지역출신 대장에 따로 보고하지 않고,
총 몇개와 전쟁중에 노획해 숨겨둔 수류탄 한개를 챙기고,
급히 (반공청년단)반공대원을 소집하여 빨치산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독거다이 왕초인 서북청년단출신 반공대원은 지리에 밝은 지역반공대원들을 앞세워 단독으로 빨치산을 추격해,
서창동 인근야산 아래 능선들판에서 애워싸며 매복한체(5명이상), 빨치산을 기다리며 급습을 준비하고 있었다.


 

"쾅~"
때이른 새벽 빨치산이 야산에서 내려와 신작로 같은 탁트인 농로를 걸을즈음,
대각선방향에서 폭탄이 날아와 이들 앞에 떨어진다.

폭탄이 날아오기 몇초전 한 일질이(나의 할아버지) 대각선방향에서 누가 숨어 공격직전임을 감지하고,
위험하다 외치며, 손이 묶인체로 농로옆 도랑으로 몸을 내던지어 피신한다.
그 말에 순간 빨치산들은 총으로 엄호하며 두리번 거리는 순간, 이내 폭탄이 인근에 날아와 터진것이다.
이렇게 갑작스런 폭탄과 함께, 미처 피하지못한 총알받이 인질 둘은 사지가 찢기어 그자리에서 죽고,
빨치산간부는 중상, 좀 뒤에서 걸어온 부하는 반사적으로 엎드리며 짐으로 몸을 엄호해 가벼운 부상을 당한다.
그간부는 위기의 순간에서 자신은 틀렸으니 후일을 도모하라며 부하에게 도망치라며 손타레친다.
빨치산부하는 급히 몸을 은폐하고 자신의 총이 멀쩡한지 확인후,
급히 무기를 챙기고 간부에게 경례를 신속히 한후 현장을 피한다.

그러는 사이 도랑으로 몸을 날려 몸을 피한 인질(나의 할아버니)은 폭탄은 피했으나, 그렇다고 몸이 건사한게 아니었다.
도랑에 처박힌듯 되어 허리,옆구리 부상등 크고 작은 전신 찰과상이 생겨 거의 중상자 처지가 되버린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아군도 재수없는자들이라 판단하고, 아무도 없는 쪽으로 무조건 도망을 쳤다.

 

한편 매복해 30M인근에서 수류탄을 막무가내로 까낸 사람은 서북청년단출신으로,
이런 막무가내 공격으로 나중엔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폭탄소리와 함께 주변이 아수라장이 된 현장을 확인하고 이후 덮치러 달려갔는데,
위기의 순간에도 빨치산 부하는 총을 쏘며 저항을 하였다.

그 바람에 지역반공대원 한명이 총상을 당하자, 순간 잠시 대원이 몸을 숨기는 사이, 그 빨치산은 서둘러 줄행랑을 쳤다.
부상당한 빨치산이 도망치는것을 보고, 대원 몇명은 그를 추격하기 시작했고, 나머지는 폭탄이 터진 현장으로 향했다.
빨치산을 추격한 지역반공대원중 한명이 총을 들고 있었으나 총을 잘 쏘지못하여 총알이 헛나갔고,
빨치산은 시야에서 점점 멀어져갔다.

그것을 보고 답답한 서북청년단출신은 뒤늦게 적을 향해 격발했으나, 원거리라서 총알을 피해 이내 사라진 뒤였다.
그 와중에 한 반공대원은 도망치는 인질을 향해 아군이니 안심하라, 쉬었다가라 소리치지만 일없다며 시야에서 사라진다.

 

추격을 포기하고 폭탄현장으로 와 죽어가는 빨치산간부의 총을 수거해 확인해보니 격발이 되지않았다.
그총은 나무대머리판인 국군총으로 인민군총보다 견고치못하여,
폭탄파편을 맞고 붕떠서 굳은 길에 떨어져 고장났기 때문이다.

이보다 아군이 양민까지 죽인처사가 되고 말았으니, 반공대에 더 심각한 난관이 봉착한 것이다.
갑자기 당황해진 치안인솔자는 무과실전공으로 위장하고자 지역반공대원에게 삽하고 응급약을 챙겨오라 지시한다.
이후 인가에서 약과 삽들을 챙겨오자, 한명은 부상대원을 치료하고 나머지들은 음침한곳에 구덩이를 파기 시작했다.
한편 그곳 인가에서는 앞면있는 먼 지역주민(반공대원)이 왠 약과 삽을 달라해서 줬기는 줬으나 무슨일인가 궁금하여,
폭탄,총소리에 놀란 주민과 함께(몇명이) 그 대원을 미행했다.
그리고 멀찍이 숨어서 그 현장과 그들의 현장조치를 보고 이내 놀랄수밖에 없었다.
암매장하려던 사람이 빨치산이 아니라 어디서 본적이 있는듯한 주민으로 둘다 양민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무등산,화순야산 인근에 임시주둔지로 두고 지역정찰을 하고 있던 몇명의 빨치산이,
5KM인근 고지대에서 폭탄 소리를 듣게된다.

본능적 직감이었는지 빨치산 동지와 직결된 상황이라 판단하고 그 빨치산은 서창동방향으로 향한다.
가다 매월동(회재로)을 지날즈음 서창동에서 폭탄부상을 당한 대원 한명을 만나게 되고,
그대원 동지가 알려준대로 사건현장으로 찾아갔다.

서창동 야산아래 언덕들판 인근에 도착하니 멀찍이서 반공치안대들이 시신을 암매장하는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탕, 탕.."
합세해온 빨치산이 현장으로 숨어와 사격하자, 서북청년단대원은 현장에서 즉사,
지역반공대원 한명은 총상을(총상 총 두명)맞고 쓰러진다.

그러자 나머지 반공대원들은 가져온 총만 챙긴체 뒤도 돌아보지않고 삼십육계 줄행랑을 친다.
사건현장에 도착한 빨치산은 총상으로 미처 현장을 빠져나오지못한 반공대원 두명에게,
지금 무슨일을 벌이려고한거냐고 추궁한다.

그래서 시인하길 "서북청년단출신 사람이 전공에 눈이 멀어 신중한 작전을 뒤로하고 막무가내로 폭탄을 던졌어라.
그바람에 주민인 인질이 죽었지라, 그래서 이걸 숨기려 암매장하고, 폭탄으로 빨치산만 죽인걸로 위장하려고 했지라~..."

 

 

PS (추신; 덪붙임)


이사건의 진위는 당시도 그렇고 지금이라도 지역주민에 수소문하려한들 잘 알길이 없다.
왜냐면 당시 반공파 목격 주민 스스로도 누구에게 말하기 민망할만큼,
위처럼 그 광경이 너무나 어처구니없고 황망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광주지역 반공치안대 스스로도 쪽팔려서 이사건을 입다물고 있었기에 더욱이 알수가 없다.
다만 알수있는것은 이처럼 빨치산에 비해 반공치안대에 의한 양민의 이러저러한 피해가 더 많았고(예; 누명),
그 행태 또한 치졸했다는것이다.

(1951년 봄 국군 11사단은 불갑산 토벌작전을 개시하며,
일대 주민들에게 소개령을 내리고 마을에 불을 질러 주민 터전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주민들은 국군의 소개 작전, 지시로 인근 월야, 해보, 나산면 마을로 피난을 했지만, 되려 인명피해가 더컸다고한다.
해보면 성대마을로 피난 간 주민 대다수는 국군 5중대('5중대 사건)에 의해 무참히 희생되는 일이 발생했다고한다.)


그리고 격전지가 이 백마산 인근인지는 확실치는 않다.
다만 지금은 고인이된 동네 문중큰어른이 당시 수소문한 바에 의하면,
당시 광산군 어떤주민이 목격하길, 양천리사람 한명이 어떤자에게 끌려가는듯했다한다.(나의 할아버지로 추정)
그리고 풍문에 그다음날 무등산 못가 광주 남서쪽 변두리의 크고작은 야산이 많은곳에서,
왠 폭탄소리와 총싸움이 좀 있었다는것이다.

그때 즈음 반공대원이 빨치산에 깨진적이 있고, 그럼에도 무슨 모의를 하려 했다는것 등등이다.
 이를 증명하듯 인근에 양민 몇이 암매장되있다 사라졌다고한다.
한편 나의 할아버지는 당시 잠시 실종되었다 며칠후 나타났는데, 거의 반병신 상태였다는것이다.
그리고 문중어른이 이르길 그것은 전쟁 후유증이라며, 그후 오래 못살다 결국 운명하였다고 한다.
또한 전쟁 당시 양천리내 행방불명자였던 사람은 나의 할아버지만으로, 이러저러한 기억의 조각들이 퍼즐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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