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04월14일 MWTV 2주년 기념파티 포토    ⓒ 신만호 시민기자

 


MWTV(이주노동자의 방송: www.mwtv.or.kr) 2주년 기념 파티가 4월 14일 저녁 연세대학교 푸른샘(학생회관 3층)에서 열렸습니다.



MWTV 2주년 기념파티에 작은대안무역팀이 한켠에 부스를 마련하고 단속추방반대를 상징하는 stopcrackdown bakery(스탑크랙다운 빵)을 구워주었다.
 
 


네팔 전통 문화공연 - 네팔문화포럼팀
 
 


△ 축하 인사말 - (외노협, 이주노조, 민주노총)
 
 


△ 공연: 국내 민중가수 -조약골, 연영석, 박준
 


 
 


△ 공연 -
나비(통기타)
 
 


△ 행사 중
MWTV 활동가를 소개하고 축하 떡을 나누었다.
 
 




△ 외노협 우삼열 사무국장이 민주노총 주봉희 부위원장이 앉아 있는 파티 자리에 찾아와 지난 불미스러운 일에 대해 해명과 사과를 하며 화해를 청했고, 상호 화해로써 그간의 묵은 감정을 좀 해소하였으며 상호 대화의 물꼬가 트였다.
 
 


아프리카 전통춤 공연 - 엔지팀
 


 
 


△ 문화공연 -이주노동자팀 스탑크랙다운



2007년 04월14일 줌마 보이샤비 축제 포토   ⓒ 신만호 시민기자

 

 

4월은 이주노동자의 새해 명절.축제가 있는 달로,
한국은 설, 중국은 꾸오니엔, 베트남은 테트룽뚜, 태국은 송끄란, 스리링카는 알루트 아우룻다 등이 있습니다.
방글라데시의 줌마민족 새해 명절은 '보이샤비' 이며, 대한민국 서울에서도 방글라데시 및 줌마 이주노동자를 위한' 2007 보이샤비 축제'가 4월 14일 안국역 마리카페에서 열렸습니다.

줌마 이주노동자들에 의해 결성된 <재한 줌머인 연대(JPNK, 이하 줌머인 연대)>와 국내의 줌마 인권 지원단체 '경계를 넘어'는 이날 명절 행사를 통해 한국 사회에 치타공 산악지대의 상황을 알리고 줌머의 문화를 알렸습니다.
줌마인은 방글라데시 치타공 산악지대(CHT)의 선주민들인데, 방글라데시 정부는 줌마인이 소수민족이라 차별하고 그들이 독립(자치권)을 요구한다는 이유로 탄압정책으로 일관하고 있어서, 줌마인들은 보이사비 축제도 즐겁게 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줌마민족은 1997년 12월 2일, 당시 대표정당인 PCJSS와 방글라데시 정부 간에 평화조약을 체결한 바 있지만, 그 후 9년이 지난 2007년 현재까지도 여전히 정부와 군대의 박해는 계속되고 있으며 조약 체결 시 약속한 완전자치의 보장, 군대의 철수, 주류 벵갈리인들의 정착촌 건설 중단과 귀환 등의 요구는 아직도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날 보이샤비 축제에서는 행사장 한켠에 줌머의 인권 상황을 알리는 포스터를 배치해 놓고, 내국인과 함께 줌마 문화 음식을 나누며 줌머의 인권 상황을 다룬 다큐멘터리 상영과 문화 공연이 이어졌고, 참가자들은 방글라데시에서의 줌마인에게 평등과 평화가 함께하길 염원했습니다. }

 


△ 4월 14일
안국역 마리카페에서 ' 2007 보이샤비 축제'가 열렸다.
 


△ 줌마 민속문화 물품 외
 


△ 국내.외인이 어우려저 줌마 전통 음식을 마누고 있다.
 


△ 이주인 축하 내빈객들
 


△ 내국인 축하 내빈객들
 


△축하 문화공연- 별음자리표
 


△ 줌마 민속 문화공연



2007년 04월13일 토론회 포토   ⓒ MTU(서울경인이주노조) 신만호 미디어활동가

 

진취적인 상설 이주인권활동 연대체 조직하자- 여수참사 대책위 평가와 과제 토론회에서

 

'여수 외국인보호소 화재참사 공동대책위 평가와 과제' 토론회가 4월 13일 오후 민주노총 3층에서 열렸습니다.
1부에서는 '여수공대위 활동의 성과와 한계'에 대한 평가를 했습니다.

2부에서는 이후 과제로 '단속과 보호소 문제 해결, 법무부의 선별 '합법화'안에 대한 입장과 대응 방안을 중심으로 하는 공대위(혹은 새로운 연대체) 활동 단위 조직 및 활동 방향'을 논의했습니다.
여수참사 이후 활동 방향에 관한 논의에서,
지난번 여수공대위 전체회의에서 논의된 '단속/보호소 감시단'(가칭)을 만들자는 제안의 일환으로 여수공대위의 느슨한 활동을 뛰어넘는 진취적인 행동단체인 이주노동자의 인권활동 상설 연대체를 조직해 건설하자는 제안이 있었습니다.
이에 참가자들 대부분 이 안을 수용하고, 명칭 및 조직 체계(시스템)는 향후 결정하기로 하고, 각 소속 단위에 이 안을 보고 논의하여 조속히 추진위를 꾸리는데 동참할것으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 발제 - 공대위 활동의 성과와 한계에 대한 평가 서평 (최현모 상황실장)
  (음성 안내) ▷ http://chmanho.ivyro.net/MidiFile/07.4.13여수대책위평가토론/413(최현모).mp3



△ 토론 - 공대위 활동의 성과와 한계에 대한 평가 中 (MTU 까지만위원장)
   (음성 안내) ▷ http://chmanho.ivyro.net/MidiFile/07.4.13여수대책위평가토론/413(까지만).mp3
 


△ 토론- 구호로서 만날 수 있는 가능성으로 (민변 정정훈 변호사)
   (음성 안내) ▷ http://chmanho.ivyro.net/MidiFile/07.4.13여수대책위평가토론/413(정정훈).mp3
 


△ 토론 - 이주인권, 노동권운동 확대 강화하자 (석권호 조직팀장)
   (음성 안내) ▷ http://chmanho.ivyro.net/MidiFile/07.4.13여수대책위평가토론/413(이광민).mp3
 


△ 토론 - 끝나지 않은 2.11 여수보호소 참사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 (이광민 대책위.집행위원장)
   (음성 안내) ▷ http://chmanho.ivyro.net/MidiFile/07.4.13여수대책위평가토론/413(조승희).mp3
 


△ 토론 - 여수공대위 활동 평가 (조승희 민주노동당 노동위원)
  (음성 안내) ▷ http://chmanho.ivyro.net/MidiFile/07.4.13여수대책위평가토론/413(최현모).mp3


△ 여수참사 대책위 평가, 1부 패널 토론에 이어 잠시 종합토론을 하고 있다.
 


△ 제안 - 여수공대위 향후 활동 과제와 방향에 대한 제안 (이정원 정책팀장)
   (음성 안내) ▷ http://chmanho.ivyro.net/MidiFile/07.4.13여수대책위평가토론/413(이정원).mp3


 
2007년 04월11일 토론회 포토   ⓒ MTU(서울경인이주노조) 신만호 시민기자


4월 11일 오후 민주노총 1층 회의실에서 '2007년 비정규 조직과 투쟁을 어떻게 할것인가'의 토론회가 '전국비정규직노조연대회'의 주최로 노동넷(nodong.net)의 생중계와 함께 개최했습니다.

이날 '비정규직 현장의 07년 조직화와 투쟁 계획'에 관한 기조 발제를 전비연 오민규 집행위원장이 하였고, 이어 특수고용대책회의 이현숙 부의장, 전국일반노조협의회 정의헌 의장, 서울경인이주노동조합 까지만 위원장, 현대차아산사내하청지회 김준규 정책기획부장이 각각 발제하였습니다.
연이어 '민주노총의 07년 비정규직 조직화와 투쟁계획'을 민주노총 석권호 비정규 국장이 발제했습니다.

그리고 [비정규직 투쟁 제안] '07년 비정규직 투쟁 이렇게 하자' 지정토론을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정지현 사무처장, 한국비정규노동센터 남우근 사무국장이 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종합토론을 하고 민주노총 주봉희 부위원장의 '2007년 비정규 조직.투쟁 결의 발언'과 함께 앞으로의 투쟁 실천 의지를 다졌습니다.




 
 4월 11일 ' 2007년 비정규 조직과 투쟁을 어떻게 할것인가'의 토론회가 생중계로 진행되었다.
 
 


 
 토론회 패널들
 



 
기조 발제- 전비연 오민규 집행위원장
 (음성 안내) ▷
http://chmanho.wo.to/MidiFile/07.4.11비정규조직투쟁토론회/오민규Q.mp3 
 



 
△ 발제 - 특수고용대책회의 이현숙 부의장
 (음성 안내) ▷
http://chmanho.wo.to/MidiFile/07.4.11비정규조직투쟁토론회/이현숙Q.mp3 
 



 
△ 발제 - MTU(서울경인이주노조) '까지만' 위원장
(음성 안내) ▷ http://chmanho.wo.to/MidiFile/07.4.11비정규조직투쟁토론회/V0040411-0.mp3 
 




 
△ 발제 - 민주노총 석권호 비정규 국장
 
(음성 안내) ▷ http://chmanho.wo.to/MidiFile/07.4.11비정규조직투쟁토론회/석권호Q.mp3 
 



△ 지정 토론 -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정지현 사무처장
(음성 안내) ▷ http://chmanho.wo.to/MidiFile/07.4.11비정규조직투쟁토론회/정지현Q.mp3 



△ 지정 토론 - 한국비정규노동센터 남우근 사무국장
 
(음성 안내) ▷ http://chmanho.wo.to/MidiFile/07.4.11비정규조직투쟁토론회/남우근Q.mp3 
  



 
△ 토론 이후 민주노총 주봉희 부위원장이 2007년 비정규 조직.투쟁 결의 발언을 하였다.
  
(음성 안내) ▷ http://chmanho.wo.to/MidiFile/07.4.11비정규조직투쟁토론회/주봉희Q.mp3

 


 
 토론회를 마치고 참가자들은 앞으로의 현장 투쟁. 실천 의지를 다졌다.
 


△ 2007년 4월 7일 '
한미FTA 타결 무효, 허세욱 동지 쾌유 기원' 대학로 집회 모습
ⓒ신만호 시민기자

 

지난 4월 2일 망국적인 한미FTA 협정이 타결됨에 반발해, 한미FTA저지범국민운동본부는 4월 7일 전국동시다발 집회를 열고 “한미FTA 타결 무효!”를 촉구하며 허세욱 동지의 분신이 헛되지 않도록 결의를 다지고 허동지의 쾌유를 빌었다.
이날 내내 서울 도심에서는 한미FTA저지범국민운동본부(범국본)와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이 대학로에서 수만 명이 참가해, 사전 철도노조 집회에 이어 범국본 본 대회를 열었다.
이어 참가자들은 시청 앞까지 대국민.선전전을 진행하며 행진을 한 후, 서울시청 앞에서 촛불문화제를 개최했다.  
 


△ 이날 한미FTA 타결 무효 촉구 집회에서의 각 참가단위 언사들 



 


 
 


 
△ 평통사가 분신한 허세욱 동지 쾌유를 위한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
 


△ 상징 의식
 



 


△ 구호 - "망국적인 한미FTA 타결은 무효다!  한미FTA 즉각 철회하라!"
 
 


△ 행진- 참가자들이 범국본 본 대회를 마치고 시청을 향해 행진하고 있다.
 


 


 
 


△ 민주노동당원들이 FTA 무효를 알리는 풍선을 굴리고 행진을 하고 있다.
 
 


 


△ 참가자들이 종로를 거쳐 을지로를 지나고 있다.
 


FTA 반대 오토바이 행동단들
 


△ 참가자들이 시청쪽으로 막 들어오고 있다.
 
 


△ 행진을 마치고 촟불집회 준비 모습
 


△ 촟불집회 언사들
 
 


 


 
 


△ 문예 공연
 


 


FTA 반대 촟불집회에 어린이들도 자주 참가하고 있다.
 
 


△ 이날 촟불집회에서의 FTA 반대  이색 카드 색션
 


△ 시청 앞의 집회장 풍경이 정겨워 보인다.
 

 [별을 쏘다④] 비운의 파이터, 추성훈과 아키야마  

프레시안   2007-04-06 오후 12:35:45
    

  
  "지난 해 전국체전에서 용인대 선수와 경기를 했는데 누가 봐도 성훈이가 이긴 경기였는데 판정에서 졌어요. 심판에게 항의했더니 심판 한 명이 성훈이에게 '네가 이해해라. 할 수 없지 않느냐'라는 말을 했다고 하더랍니다. 저도 그 말을 들을 때는 가슴이 폭발할 것 같았는데, 성훈이 마음이야 오죽했겠습니까?"
  
  한 때 유도간판스타였던 추성훈 선수의 어머니 유은화 씨가 <뉴스메이커>(2001.01.25)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심정이다. 믿었던 모국의 배신. 그 배신은 일본이 우리에게 주었던 아픔보다 더 아팠다고 한다. 하기야 믿었던 어머니가 나를 버리고 도망간다면 화내지 않을 자식이 어디 있겠는가. 추성훈은 그렇게 믿었던 어머니의 땅에서 버림받고 도망치듯 일본으로 귀화했다. 그리고 이종격투기 선수가 되어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났다. 두 개의 민족을 양 어깨에 달고 말이다.
  
  
이방인으로서의 추성훈
  
  우리는 '한 민족'이다. '단일민족'을 '반만년 역사의 자랑'으로 내내 세뇌 받아 왔던 우리에게 어느새 외국인들은 모두 '이방인'이 돼 버렸다. 그 이방인의 범주에 오늘 내가 말하려는 이종격투기 스타 아키야마 요시히로가 있다.
  
  그는 처음엔 추성훈이라는 한국이름의 유도선수로 알려졌다. 재일교포 4세였던 그는 1974년 전국체전에서 우승하고 한국 유도대표상비군에까지 선발된 적이 있던 아버지 추계이 씨의 영향을 받아 3살 때 도복을 입었다. 일본에서 유도를 시작했던 그는 고교 시절 전국대회를 휩쓸었고, 긴키대학 시절인 1995년부터 1997년까지 일본 관서지방 유도대회를 3연패했으며, 일본 명문실업팀들의 수많은 러브콜을 받았다. 지독한 실력파라서 그랬는지, 그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세계 최고가 되길 원했고 그것은 '국가대표'를 통해 이룰 수 있다고 마음먹었다. 그것도 일본이 아닌 한국국가대표로 말이다. 그는 자신의 모국인 한국으로 건너와 국가대표가 되기 위해 부산시청에 둥지를 튼다. 1998년이었다.
  
  하지만 실력이 뛰어났던 그도 처음부터 알려지진 않았다. 1998년과 1999년에 열린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추성훈은 두 번 모두 3위를 차지하는 초라한 성적을 보여준다. 물론 이 때부터 주변에서 '재일교포'라는 딱지와 함께 편파판정의 목소리가 나오긴 했지만, 그게 다 연습부족이려니 했단다. 이 악물고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면서 결국 그는 2000년도 한국마사회배 코리아오픈 국제유도대회 81㎏에서 금메달을 따낸다. 국가대표의 길에 한 걸음 다가서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그렇지만 이내 번번이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석연찮은 판정패로 좌절의 쓴맛을 봐야 했고, 이때부터 그는 일본귀화를 생각하게 된다.
  

  '한판으로 이기지 못하면 판정에서는 진다'
  
  "한국에서는 더 이상 어떤 희망도 찾을 수 없습니다. 일본인으로 귀화하겠다는 생각을 60%정도 굳힌 상태입니다."

  
  2001년 초 추성훈이 한 말이다. 국내유도계의 텃세를 이기지 못하고 국가대표를 포기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던 그에게 같은 해 3월 22일, 몽골에서 열리는 아시아선수권대회 국가대표의 기회가 왔고, 결국 꿈에 그리던 태극마크를 달게 됐다. "어렵게 기회가 왔으니 최선을 다해 보답하겠습니다." 남다른 각오로 덤볐기 때문일까. 그는 지금까지 맺혔던 한을 이 대회에서 모두 풀어버리려는 듯했다. 처음 태극마크를 달고 출전한 경기에서 그는 예선전부터 결승까지 모든 경기를 '한판'으로 끝내버리고 당당히 금메달을 목에 건다. 역시 추성훈!
  
  그 때 그 경기를 볼 수 있다면 꼭 보라고 추천하고 싶다. 특히 일상의 스트레스에 힘들어 하시는 분들껜 특효약이 될 듯싶다. 10초에서 길게는 1분 안에 모든 경기를 후련하게 '한판'으로 끝내버리는 그 괴력. 같이 본 여자친구는 '멋있다'고 난리법석을 떨었지만, 난 서글프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 '한판'이 추성훈이 가지고 있던 '강박증'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한판으로 이기지 못하면 판정에서는 진다"라는 강박증. 그 만큼 그 동안 국내유도시합에서 받았던 편파판정의 스트레스가 컸던 것 같았다.
  
  이러한 서글픈 감정이 비단 나만의 착각이었을까? 아니다. 이는 곧 현실이 된다. 사실, 첫 태극마크를 단 이후 남자 81㎏에서 추성훈을 따라갈 적수는 없었다. 그 동안 추성훈의 벽이었던 조인철 선수도 추성훈에게는 번번이 패했다. 2001년 4월 아시아선수권대회 우승 및 최우수선수, 6월 제10회 FAJR국제유도대회 우승, 10월 전국체전 우승, 그리고 조인철 선수의 은퇴까지. 이미 국내 유도 81kg에서 추성훈은 최강의 자리를 굳혔고, 2002년 부산아시아게임에서의 국가대표까지도 예상됐다. 하지만 그는 결국 일본귀화를 선택한다.
  

그의 금메달에 "조국을 메쳤다"고 답한 한국
  
  "조인철 선수가 은퇴하기 1년 전부터 몸이 안 좋아 실력이 조금씩 떨어진다는 것을 성훈이는 알았습니다. 선수끼리 (도복을) 잡아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훈이에게 기회를 주기는커녕 오히려 한국에선 조 선수의 은퇴를 만류했습니다. 성훈이가 많이 실망했습니다. 같은 한국 사람인데 누구는 몸이 안 좋아 은퇴해야 하는데도 만류하고, 성훈이에게는 기회를 주지도 않고. 성훈이가 말은 안 했지만 그래서 조인철 선수가 은퇴한 것을 알고도 귀화한 것 같습니다."(뉴스메이커, 2002.01.24)
  
  추성훈의 어머니 유은화 씨의 말이다. 조국을 위해 피땀을 흘렸고 결국 금메달까지 따왔건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너희 나라로 가라'는 무언의 압력이었다. "재일동포지만 일본에서 일본선수와 시합을 해도 경기장 안에서는 차별을 받지 않았다"는 그의 절규어린 호소는 계급, 인종, 국적, 성별을 초월하며 정당함을 고수해야만 하는 스포츠에 '야누스의 두 얼굴'이 존재함을 보여준다.
  


▲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유도 81kg급 결승에서 한국의 안동진에게 조르기를 시도하고 있는 추성훈 ⓒ연합뉴스

  결국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귀화했고, 2002년 부산아시아게임 때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아키야마 요시히로'의 이름으로 돌아온다. 예선에서 결승까지 무난하게 올라온 아키야마는 결승전에서 한국의 안동진(경남도청)과 붙었고, 심판판정까지 간다. 그 순간 그는 '귀화를 결심하게 했던 재일동포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불현듯 생각났다'고 한다. '설마…', '괜찮을 거야, 정말 이번에는 괜찮을 거야. 심판들이 모두 외국인이니까'라며 1시간 같았던 발표 전 10초의 시간 동안 그는 그렇게 자신을 위안했다. 결국 2-1. 아키야마의 승리로 결정 났고, 그는 순간 관중석에 있는 자신의 가족을 향해 두 손을 번쩍 치켜들며 활짝 웃었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 관중들은 박수가 아닌 야유로 답한다. 조국의 배신자라고. 한 스포츠 신문의 헤드라인처럼 '조국을 메쳤다'고…
  
  
왜 확실한 '금메달감'인 그를 내팽겨쳤을까?
  
  추성훈에게 가해졌던 조국의 냉담과 차별 이면에는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 것일까? 많은 이들은 우리의 민족성을 지적한다. 배타적이면서 이중적인 기준을 가지고 있는 민족성을 바탕으로 순수하지 못한(?) 혈통에 린치를 가한다는 것이다. 사실 '한민족'이라는 허울 좋은 이데올로기를 교육받은 우리로서는, '우리와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을 보면 공격적이고, 배타적이 된다. '다양성'과 '다름'에 대한 교육의 부족 때문일 것이다. 조금 나아졌다 싶다가도 중요한 순간엔 여지없이 그 기질을 발휘하는 민족성 때문에 '고령화와 출산율의 감소로 인한 노동인구 축소'라는 위기담론 속에서도 타민족의 귀화를 순순히 허락하지 않는 폐쇄성을 지키게 된 것 아닐까?
  
  지난 2002년 한국축구계가 월드컵 16강을 위한 최후의 승부수로 '귀화카드'를 꺼낸 바 있다. 프랑스는 말할 것 없고, 가까운 일본마저 용병선수를 귀화시켜 경쟁력을 높였기 때문일까. 우리의 배타적 민족성도 이처럼 국가적 대업을 위해서라면 누그러질 수 있겠구나 하는 일말의 희망(?)을 보여준 것이기도 하지만, 단지 이기기 위한 하나의 전략 차원에서 나온 카드로도 생각할 수 있다.
  
  현대 스포츠에서 1위나 금메달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거의 강박관념 수준이다. 국내의 체육고등학교에선 전국체전에서의 메달은 금메달일 뿐, 동메달은 '똥메달' 취급한다. 이런 사람들이 왜 조인철까지도 확실한 '금메달 감'으로 인정했던 추성훈을 내팽개쳤을까?
  

  "네가 이해해라, 할 수 없지 않느냐"…그 놈의 연줄이 뭐길래
  

▲ 그는 언론으로부터 "한국 유도 국가대표로 활약했다가 일본으로 귀화한 추성훈"이라는 설명에 이어 "조국을 메쳤다"는 비난을 들었다.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에 참여하기 위해 입국한 뒤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는 추성훈. ⓒ연합뉴스  

  잠시 한국의 '정(情) 문화'를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사실 우리만큼 '정'에 약하고 민감한 사람들도 드물다. 하지만 이런 이 집단끼리의 내부결속을 위해 너무 강하게 부각되면 이른바 '정실주의(情實主義)'로 나타나 부정부패의 원인이 된다. 이른바 '제 식구 챙기기' 현상의 단초가 되는 것이다.
  
  체육계라고 예외는 아니다. 몇 년 동안 한솥밥 먹고 동고동락하며 운동했던 사람들끼리 오죽하겠는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 '가족'이라는 공동체적 의식이 형성이 되고 소위 '연줄공동체'가 발달된다. 온갖 혜택과 보호를 받으면서.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부패라고,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에게는 자신들의 연줄공동체를 위협하는 외부의 적이 더 중요하다. '우리가족'이 다칠 수 있기 때문이다. 재미있게도 그 순간만큼은 아시아게임이나 올림픽에서의 금메달이라는 '대의명분'이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재일교포인 추성훈은 '연줄공동체'에 속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일본에서 실력 있는 유도선수로 자랐기에 유도국가대표로서 그의 내적조건은 충분했지만, 안타깝게도 한국에서 성공의 지름길인 '연줄'이라는 외적조건이 부족했다. 이러한 연줄 때문에 고생했던 선수가 어디 추성훈뿐이겠는가. 쇼트트랙에서부터 농구나 축구에 이르기까지 연줄에 따른 배제의 논리가 발휘되지 않는 곳이 없고, 그 논리에 고통받는 선수들은 음으로 양으로 늘어만 간다. 국가대표선발전에서 항상 '경기에선 승리했지만, 판정에서 졌던' 추성훈에게 '네가 이해해라, 어쩔 수 없지 않느냐'는 어떤 심판의 측은한 한 마디는 '난 이 가족구성원이 아니구나'라는 생각으로 고통 받게 했을 것이다.
  

'벌거벗은 삶'에서 탈(脫)하다
  
  가족의 확장으로서 국가 역시 마찬가지다. 국가에 속하지 못한 자들은 항상 위험에 노출되어 언제라도 내팽겨질 수 있는 벌거벗은 삶을 살 수밖에 없다. 법의 보호도, 경제적 도움도 그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왜? 그것이 자신들의 가족을 주류로서 더욱 빛나게 해주니까. 이탈리아 철학자 아감벤(G. Agamben)은 "현대국가는 자신들 내부의 주류를 더욱 빛내기 위해 빈민들이나 이주노동자들처럼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게 만드는 조건으로서 '벌거벗은 삶'을 양산해낸다"고 말했다. 이처럼 벌거벗은 삶으로서의 존재를 '신성한 인간' 즉 '호모 사케르(Homo Sacer)'라고 부른다.
  
  '한국 유도계의 주류를 더욱 빛내기 위해 희생당한 추성훈'이라고 말하면 논리적 비약일 수도 있겠다만, 어찌됐든 그는 주류에 편입되지 못하고 배제당한 '한국체육계의 호모 사케르'였다.
  
  결국 그는 '벌거벗은 삶'을 벗어나기 위해 이종격투기라는 전쟁터로 나간다. 차별과 배제의 고통에서 안타까워하는 그를 측은히 여겼던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명선수 기요하라 가즈히로의 적극적인 권유로 말이다. 명확히 알 순 없지만, 아마도 이종격투기라는 장(場)이 민족코드나 배제나 차별의 논리에서 탈(脫)한, 실력만이 유일한 기준이 되는 곳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추성훈은 2004년 12월 31일 열린 K-1 연말 이벤트 '다이너마이트' 대회에서 국제복싱연맹 헤비급 챔피언 출신 보타를 맞아 1라운드 1분54초 만에 팔꺾기 기술을 이용해 기권승을 거두며 데뷔 무대를 승리로 장식한다. 그 후 2005년 11월 5일 서울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열린 K-1 '히어로스' 대회에 한국 쪽 주장으로 참가한 그는 1라운드 중반 오쿠다 마사카쓰(일본)에게 잇단 펀치세례를 퍼부은 끝에 티케이오(TKO)승을 거뒀다.
  
  경기 뒤 그는 "한국에 와서 경기해 너무 기쁘다"며 "나는 지금 한국 사람이 아닌 일본사람이지만 내 가슴에는 한국 사람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소리쳤다. 또 오쿠다를 쓰러뜨리고 난 뒤 벌떡 일어서 양쪽 어깨에 붙이고 나온 태극기와 일장기를 번갈아 손바닥으로 탁탁 내리치며 자신은 두 민족을 포용하고 있음을 보여줬다. "추성훈도 저고, 아키야마도 저에요"라고 외치며.
  
  
두 민족, 그리고 두 이름: '일본인' 추성훈과 '한국인' 아키야마
  

▲ 유도선수에서 이종격투기 선수로 변신한 추성훈 ⓒ뉴시스  

  이종격투기 투사로 승리에 승리를 거듭하던 추성훈. 그는 한국에서 경험했던 유도에 대한 쓰라린 기억을 지우고자 이종격투기에 몸을 던져 챔피언에 이르기까지 승승장구했다. 유도선수 시절 모든 경기를 한판으로 끝냈던 것처럼 추성훈은 K-1에서도 '테이크 다운 후 역십자 꺾기(암바)'라는 공식에 따라 시합을 정리해 버렸다. 적어도 그에게 이종격투기의 공간은 걸리적거릴 것이 없는 무대였다. 하지만 그러한 그에게 또 다시 불길한 문제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유도에서 경험했던 차별이 이종격투기에서도 서서히 나타나고 있는 것이었다. 정통 일본인과 아류 일본인의 구별짓기.
  
  지난 2006년 12월 31일 추성훈은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K-1 프리미엄 2006 다이너마이트' 대회에서 일본 격투기의 영웅 사쿠라바 가즈시(37)와 맞붙었고, 정말 간단하게 1회 TKO승을 거둔다. 경기를 본 사람은 알겠지만, 참 시시하게 끝났다. 물론 급소를 맞은 당사자는 시시하지 않았겠지만.
  
  문제는 경기 후. 사쿠라바가 '추성훈이 몸에 오일을 발랐다'며 집요한 항의를 거듭했고 결국 K-1 주최사인 FEG에 정식으로 제소했다. 재검증 끝에 추성훈이 잘 모르고 중계카메라 앞에서 스킨로션을 몸에 바른 것이 포착돼 주최사는 이를 단순과실로 인정해 게임을 무효 처리했고 그의 파이트머니를 몰수했다. 그런데 얼마 후 이에 더해 FEG는 "K-1 다이너마이트 대회에서 사쿠라바 가즈시와 대결할 때 스킨크림을 몸에 바르고 링에 오른 추성훈에게 무기한 출장정지 처분을 내리기로 결정했다"면서 더욱 무거운 죄를 부과했다.
  
  일본의 격투기 영웅을 무자비하게 때려눕힌 괘씸죄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일본의 텃세 때문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그러한 반칙을 하면 원래 그러한 징계를 먹는 것일까? 물론 일회성의 사건을 가지고, 그것도 추성훈의 과실이 인정되는 사건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을 살 수 있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분명 그곳에서도 정통 일본인과 아류 일본인의 이분법을 바탕으로 편 가르기를 한다. 모든 사회의 유기체적 작동방식처럼 말이다.
  
  
끝나지 않을 차별의 시련…그러나 그를 믿는다
  
  왜 이토록 차별과 배제의 악연은 추성훈을 따라다니는 것일까. 어째서 한국의 추성훈도, 일본의 아키야마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걸까. 그것은 '일본인 추성훈'과 '한국인 아키야마'라는 모순적 재현 때문 아닐까? 한국에서는 일본인 추성훈으로 차별받고, 일본에서는 한국인 아키야마로 외면당하는 모순. 이종격투기만큼은 모든 차별과 배제로부터 자유로울 것이라 생각했던 그에게 이런 시련은 한국에서의 기억하기 싫은 경험과 중첩되는 경험일 것이다. '넌 그런 놈이야'. 이 꼬리표가 추성훈이 죽는 그 날까지 따라다닐 것이란 우울한 생각을 하긴 싫지만 어쩌겠는가. 이 모든 것이 삶의 조건인 것을. 그리고 추성훈 그대가 태어나면서 가지고 나온 선천성인 것을.
  
  추성훈과 아키야마. 그는 한국과 일본에서 받아왔던 차별을 토양삼아 성장한 하나의 소나무 같다는 생각이 든다. 도끼로 찍어도 넘어가지 않을 것 같은 그런 소나무 말이다. 그가 앞으로 있을 난국에도 흔들리지 말고 이겨나가길 바란다. 그대가 가지고 태어난 피, 뛰어난 격투 실력, 비(非)정통성, 비(非)주류, 강인함 등의 특성은 그대를 소나무 그 이상으로 만들어줄 것을 의심치 않는다.  
    
  

  남상우/충남대학교 스포츠사회학 박사

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60070406103951

 
  
2007 APWSL 한국위 총회를 마치고 참가자들의 기념촬영 모습
2007년 03월31일 행사 포토    ⓒ신만호 시민기자(chmanho1@hanmail.net)


2007년 APWSL(아시아·태평양 노동자연대) 한국위원회 총회가 3월 31일 오후 2시에 서울 종로5가 서울보증보험 건물 손해보험노조 3층 교육실에서 열렸다.

이날 총회에 회원 및 참관 단체인 필리핀 활동팀 ‘카사마코 공동체', 오산이주노동자센터 장창원 소장과 전태일 옴 활동가, (MTU)이주노조 위원장, 인도네시아 ‘헤리’ 활동가, 노동넷, 평통사, 여성연맹, 민주노총서울본부 부본부장, 민주노총연구소, 비정규노동센터, 서울보증보험, 한국합섬, 코오롱 정투위 노동자 등이 참여했다.

총회 순서는 APWSL 한국위 장창원 대표의 사회와 함께 참가자 소개 및 대회사를 통한 APWSL 단체 소개에 이어, 안건 심의에서 지난 사업보고와 앞으로의 사업방향과 계획을 논의. 의결했다.

APWSL(아시아·태평양 노동자연대)은 30년전 1978 - 1982년경 호주와 일본 노동자들이 한국의 군사독재하의 노동현장을 방문하면서 풀뿌리 현장노동자의 교류와 협력의 국제운동으로 출범을 모색하기 시작했고, APWSL 한국위원회는 1991년에 노동단체들이 참가하여 출범했다.

APWSL이 지향하는 바는 민주.자주적 노동조합운동, 노동조합운동에 있어서의 성적 평등, 풀뿌리 국제 노동자 연대, 노동자를 비롯한 민중들의 인권 등 국제자본과 초국적 기업들의 급증하는 침투와 지배, 지역의 정부들과 기업들에 의한 노동자 민중들의 인권 침해.착취에 대응하기 위하여 만들어졌고, 현제 네팔, 필리핀, 태국, 인도네시아, 호주, 대만, 일본, 한국 등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16개 국가에서 활동중이다.

이날 총회 안건 심의에서는 각 국가 위원회들 간의 교류와 연대 강화를 점검.모색했고, 정치적 압제에 저항한 (특히 필리핀과 네팔에서의) 투쟁, MTU(이주노조)를 통한 이주노동자 인권투쟁, 비정규직 노동자 투쟁, 여성노동자 인권, 반세계화 WTO. FTA 투쟁 캠페인 안건에 이어 정기적인 뉴스레터와 노동넷을 통한 인터넷 인프라 구축, 연대 기금 마련.운영 등을 점검하고 확충하는 방안을 모색하여 의결했다.

 


3월 31일 종로5가 서울보증보험에서 열린 2007년 APWSL 한국위원회 총회 모습

 


△ 2007년 APWSL 한국위원회총회 안건 심의 모습

 


△ 카사마코 필리핀 공동체가 총회장 한켠에 필리핀의 실상을 알리는 피켓을 마련했다.

 


△ 카사마코 필리핀 공동체 회원들
 


△ 총회 중간에 카사마코 필리핀 공동체 회원이 축가를 불러주었다.
 

 
 
2007 APWSL 한국위 총회를 마치고 참가자들은 기념촬영을 하였다.
  


3월 30일 복직.정규직 쟁취 투쟁 농성 584일차 기륭 앞 집중 연대집회 모습
2007년 03월31일  ⓒ 신만호 시민기자(chmanho1@hanmail.net)

 

기륭전자가 적자로 돌아섰는데 그 이유는 ‘환차손’ 때문만이 아닌 방만한 경영에 노조 탄압하려 막대한 돈을 허비해서 임이 알려졌습니다.
3월 30일 복직.정규직 쟁취 투쟁 농성 584일차(천막농성530일) 기륭 앞 집중 연대집회에서 김소연 분회장은 투쟁사를 통해 이같이 밝혔습니다.
기륭전자는 200억 흑자 기업이었는데, 작년부터 적자로 선회하여 현 12억 적자이며 그 이유는 노조 탄압하러 많은 용역깡패를 고용하고 노조 감시 비용에 법정대응비 등 이윤의 적지 않은 돈을 허비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기륭전자가 이번 주주총회에서 이사진 비용 12억에서 인사 2명 해임하여 8억으로 감축하기로 했다는데, 경영 타개 상황을 볼 때 8억이라는 이사진 비용도 여전히 큰바 방만한 경영 형태를 아직도 못 벋어나고 있는 등 경영 행태가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회 뒤로 헌화가 바삐 움직이고 있었는데 마치 개구멍 뒤로 무얼 전달해 오는듯 하다.

 

기륭전자는 이번 주주총회에서 대표이사 권혁준의 후임으로 채원석씨를 대표이사로 선임하고 권혁준 전 이사는 감사로 부임 시키는 등 권씨가 경영에서 완전히 손을 뗀 것이 아닌 자리만 바꾼 형태였습니다.
또한 주총에서 경영 실책에 대한 소액주주의 질문에 대해 몇 마디로 둘러대고 총회를 무슨 각본대로 진행하고 방망이만 두둘긴체 서둘러 마무리 하고 대표이사는 그들이 고용한 깍뚝이(용역)들의 호위 하에 서둘러 자리를 뜨기에 바빴습니다.

기륭전자는 코스닥 상장회사 였다는데 그 이미지에 허와 실이 존재해서는 않될것입니다.
기륭전자는 이제라도 노조 탄압하러 이윤을 허비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않될것이며 상생의 경영을 모색해야 할 것입니다.

 


  2007년 03월29일  ⓒ MTU(서울경인이주노조) 신만호 미디어활동가


'여수참사 근본 문제 해결 외면 . 단속추방 강행 정부 규탄 기자회견'이 '여수 외국인‘보호소’ 화재 참사 공대위' 주최로 3월 29일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개최했습니다.

이날 기자회견에서는 한택근 민변 사무총장의 UN 인권이사회 제출 민변 서면 진술서 발표와 김명식 국제 앰네스티 한국지부 팀장의 앰네스티 인터네셔널 사무총장의 한국 정부에게 보내는 항의 서한 발표 및 여수 화재 참사 근본적 해결을 위한 사회인사 정책 개선 요구 서명 보고도 함께 진행됐습니다.

정종권 민주노동당 서울시당 위원장, 이정원 여수외국인보호소화참사 공대위 정책팀장, 민주노총 서울본부 이재영 수석본부장 등이 정부의 여수 참사 문제 해결 외면에 대한 규탄 발언을 하였습니다.
여수 참사 공대위는 정부에 여수 참사 사태에 대해 인도적 해결 방안을 요구했지만 정부는 이를 무시한 채 간신히 목숨만을 건진 이주노동자들을 곧바로 재수감시켜 버리고 목격자이자 피해자인 20여명을 급히 출국 시켜 버리는 등 무책임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음을 성토했습니다.

이어, 민교협 김세균 교수의 기자회견문 낭독을 통해 정부에 청주외국인보호소에 재 구금된 7인의 이주노동자들을 즉각 석방할 것을 요구하고, 아울러 반인권적 보호 시설 폐쇄 및 단속 추방 중단을 촉구했습니다.

기자회견을 마치고 참가단체 대표단은 공대위 요구안 전달을 위해 국무총리실로 향했습니다.



외국인보호소의 실태를 알수 있는 피켓- 3.29 여수참사 외면, 단속추방 강행 규탄 기자회견에서
 


민교협 김세균 교수의 기자회견문 낭독
 


 


△ 구호 제창 - 참가자들이
반인권적 보호 시설 폐쇄 및 단속 추방 중단을 촉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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