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중심 산업에서 한국자금유입 인한 변화
[106호] 2007년 08월 22일 (수) 13:58:49 오재범 기자 dreamkid94@yahoo.co.kr

24일로 1992년 한중 수교가 이뤄진 지 15년을 맞았다. 수교 15년이 지난 지금 중국동포의 10%가 넘는 23만명 이상이 한국에 머무르고 있으며, 중국 동포사회는 농업중심에서 제조업, 서비스업으로 사회기반이 변화하고 있다. 거주지역도 동북 3성뿐만 아니라 중국산업발전 지역으로 확대되고 있다.

재중국 동포들은 지난 1992년 한중수교를 계기로 양국의 인적, 물적 자원의 흐름이 용이해지자 기회의 땅 한국에서 일확천금 꿈꾸며 한국으로 대거 입국했다.

양국 출입국관리국 자료에 따르면, 한국에 체류한 중국동포는 1992년 국교 수립 당시 3만 1천5명을 기록했지만, 93년 1만 2천227명, 94년 2만 2천605명, 95년 1만 9천95명으로 감소했다. 이는 당시 한중수교 이후 출입국 과정이 법제화 되면서 중국동포의 입국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후 99년에는 4만 6천731명, 2000년 6만 176명, 2002년 11만 8천300명, 2003년 13만 2천305명, 2004년 16만 1천327명, 2005년 16만 1천327명, 2006년 23만 6천853명으로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불과 15년 사이에 국내 체류 중국동포 수가 20배 가량 증가한 것이다.

전문가들은 그 원인으로 ‘양국 간 임금 차이’가 발생했기 때문이며, 한국이 지난 15년 동안 고임금사회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중국동포들에게 3D업종에 종사할 기회를 제공했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강용찬 목원대 교수는 ‘중국 조선족 동포의 삶과 민족경제’ 논문에서 “양국간 임금차이는 중국 도시 직장인이 1년에 1만원(인민폐)이라면, 한국에서는 일용직 노무자인 경우에도 1년에 700만원을 저금한다는 기준으로 볼 때, 매년 적어도 4만 6천원(인민폐)를 모을 수 있어 몇 년만 고생하면 중국에 집을 사고 사업자금을 마련할 수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많은 중국동포들이 생업인 농업을 포기하고 한국에 가서 돈벌이를 할 방안만 연구하는 바람이 여러 사회적 부작용을 발생했다”고 지적했다.

현지 한국어 매체 흑룡강신문 역시 “중국동포 농민 60%이상이 이미 농사를 포기하고 수단을 가리지 않고, 한국으로 갈 기회만을 노리고 있다”며 동포사회의 급격한 변화에 의한 부작용을 우려했다.

중국 내 연구기관인 ‘백산자료원’의 ‘21세기 중국 흑룡강성 조선족경제 발전방항’에 따르면, 1990년과 개방 이후인 1995년의 중국동포 부분별 수입비중이 농업, 임업, 축산업 등 중국동포가 전통적으로 종사하던 업종이 20% 감소한 반면 서비스업종에서는 20%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여기서 서비스업의 증가란 한국으로 가서 벌어들인 노동수입 비중을 뜻한 것으로 결국 중국동포사회의 이주노동자 송금액이 동북 3성 전체수입의 35%까지 차지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해석이다. 이는 중국 동포사회의 빠른 산업화로 이어졌다.

최근 발표된 전남대 세계한상문화연구단 연구자료에 따르면, 2005년 현재 중국동포의 도시거주 인구비율은 60%선을 넘어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 중국동포가 운영하는 기업의 수는 약 1만 7천500개로 집계했다. 동북3성이 더 이상 농업기반의 도시가 아니라는 것이다.

회사 형태로는 독자기업이 67%로 가장 높았으며, 한국기업 등 외부자금과의 합자나 합작기업이 26%로 나타났다. 업종별로는 가장 많이 종사하고 있는 업종은 서비스업(50%)이며, 다음으로 제조업(37%), 도․소매업(13%) 순으로 조사됐다. 또 합자(합작)파트너로의 79%가 한국기업이며, 중국동포기업의 35%가 향후 한국에 투자할 계획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중국동포경제를 연구한 이장섭 전남대 교수는 이처럼 짧은 기간에 성장한 중국동포 경제의 특징을 놓고 “많은 중국동포기업들이 중국의 대도시에서 최근에 성장을 거듭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들에 대한 기초자료 하나 없다”며 “이는 결과적으로 중국에 진출한 한국기업에게는 엄청난 손실을 야기시키며 또한 중국동포 기업들에게는 새롭게 도약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결과가 된다”고 염려했다.

지난 15년 동안 중국동포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이들 동북 3성은 기존 농촌사회에서 벗어나고 점차 경제가 발달한 연해도시로 이러한 움직임이 확산돼 심양, 대련을 중심으로 한 동북지역과 북경, 천진의 경진지역, 청도, 위해, 연대를 아우르는 산동지역, 남경과 이우, 푸동을 포함하는 상해지역, 선전과 광저우 등의 광동지역 등 새로운 중국 동포 5대 거주지역을 형성해 나가고 있다.

이 때문에 중국동포 거주지역은 차츰 중국의 가장 북쪽 흑룡강성부터 남단의 해남성에 이르기까지 중국 연해를 따라‘에스(S)’자 모양을 이루고 있다.

이 교수는 “매년 10% 성장을 기록하는 중국경제에서 한국을 자본금 삼아 종자돈을 마련해 중국시장에서 활약하는 동포들을 많이 볼 수 있다”며 “이들이 앞으로 우리에게 중국에 대한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는 견인차 역할도 해줄 것으로 확신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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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여호길 미니홈 http://www.ckywf.com/news_2007/board.php?board=f_shehui05
모래안이야기 http://cafe.daum.net/moraean


H-2, 한국나들이(1)
1,인천공항에서

무연고동포인 장인 장모가 고령 동포로, H-2비자를 받고 한국으로 돈 벌러 온단다. 힘들어서 못한다고 하니 그쪽에서 버럭 화를 낸다. 남들 다 하는 걸 왜 못한다고 하느냐고. 그 뒷말은 안 들어도 뻔할 뻔자다. “사위는 치사하게 한중수교 전부터 다녔으면서 남들 다 가는 한국을 왜 나오지 말라고 하느냐.”고.

참으로 딱하다. 한국의 노동생활이 어디 중국의 중노동에 비할 수 있다더냐. 옛날 소학교교과서에서 보던 그대로 지주 자본가에게 ‘뼈 빠지게 일했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그런 노동환경은 날라리 중국노동환경과는 견줄 바가 못 되지만 그걸 모르고 무작정 한화만 바라보고 살같이 날아온다. 젊은 축들은 그럭저럭 길들기에 괜찮지만 노년이 문제다. 우리 사회와 가정의 자존심이고 뒷심인 노년들이 한국에 몰려와서는 한국인들에게 ‘체조’당하는 모습은 자존심 상해서 더는 볼 수 없다.

그런 젊은 층의 체면은 안중에도 없는 노인들도 마찬가지로 안쓰럽다. 하긴 그런 노인들이 편한 여생을 보내도록 두툼한 퇴직금과 용돈을 주지 못하는 우리 사회와 가정도 문제다. 어르신들은 퇴직금으로 취미생활은 커녕 의식주해결도 곤란하니 어찌 한국행을 마다하겠는가. 장인장모의 한국행도 그런 차원이다. 얄팍한 퇴직금을 받으면서 가만히 앉아 있느니 차라리 힘자랄 때 돈 푼이나 번다는 노인층에 만연된 유행성감기 같은 징후다. 결국 그 ‘유행성감기’를 아무런 처방전도 없이 잡아보려는 것부터가 무리였다. 결국 나는 장인장모의 의사를 존중하고 힘닿는 데까지 도와주기로 마음먹었다.

주일날 리무진버스는 공항고속도로를 따라 영종도로 달렸다. 길 아래로는 푸른 바다가 출렁출렁 와 닿고 길 위로는 맑고 푸른 하늘이 와 닿는다. 그 푸름 사이로 갈매기들이 때론 큰 호를 긋다가도 때론 긴 타원을 그리며 자유로이 날아옌다. 햇볕 따스하여 오곡백과 무르익는 나라, 바다에 둘러 싸여 아름다운 풍치로 가득 찬 나라, 오늘 따라 이 강산이 가슴 짜릿하게 느껴온다. 이런 아름다운 강산에서 단순 고역을 치르는 사람들, 그들 스스로의 자성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우리도 10년 만 일찍이 ‘중국식사회주의’든 자본주의든 했다면 장인장모도 돈 벌러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또 수많은 조선족노인들이 궁색한 모습을 하고 고국 땅에서 품팔이를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자존심도 나이도 팽개치고 눈을 찔끔 감고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려보내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또 새파란 젊은 애들한테 굽실거리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또 여기저기 쑤시고 아픈 몸을 끌고 세월만 세차게 흘러 돈이 쌓여지기만을 바라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인천국제공항 국제선 입국장에는 진작부터 마중을 나온 조선족들로 초만원을 이루었다. 먼저 온 조선족들이 새로 나오는 조선족들을 마중하러 온 것이다. 지난 10여 년 동안 김포공항에서 인천공항으로 공항만 바뀌었지 조선족들의 흐름은 조금도 멈추지 않았다. 다른 국제선출국장에서는 촌티를 벗고 얼마간 서울 물을 먹은 조선족들이 올 때와는 완연 다른 신사숙녀가 되어 중국행을 한다. 그렇게 사람과 함께 중국으로 흘러간 돈은 또 수많은 조선족가정의 의식주행을 해결하는데 쓰인다.

장인장모는 맨 나중에야 나타났다. 핸드카에 실린 짐에 가리어 하마터면 알아보지 못할 번했다. 평생이라도 살 것처럼 집에 쓸 만한 물건은 다 챙겨온 느낌이다. 약 꾸러미로부터 작업복과 생활용품, 심지어 이불까지 보인다. 제일 묵직한 트렁크를 챙기려고 핸드카에서 내려놓는 순간 진작부터 엿 먹이려고 기다렸다는 듯 트렁크바퀴 하나가 분리되어 저만큼 굴러갔다. 모두들 어이없어 나를 바라본다. 나는 몰려오는 눈총을 외면한 채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고 나서 제멋대로 굴러가고 있는 바퀴를 쫓아갔다. (계속)

여호길 2007/7/15 
 

 

2.외국인등록증 - 려호길

한국에 왔으니 먼저 외국인등록증부터 신청해야 한다. 장인은 동포한테 왜 하필 ‘외국인’이라고 붙이냐고 서운해 했다. 나는 국적관계로 볼 때 엄연히 외국인이라고 하니 저쪽(이북)같으면 큰일 날 소리라는 것이다. 외국인등록증을 받던 날 장인의 표정은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왜 하필 "중국어 영어발음을 따나가 신분증을 만드는가.” 하는 것이다. 중국여권과 신분증이 어찌됐던 동포한테는 한글 이름을 밝혀주는 것이 고국다운 자세가 아니냐는 것이다. 중국여권과 신분증과 대조해 보는 경우를 감안하여 한자나 한자영어발음을 한글 밑에 표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연변신분증처럼 한글표기를 먼저하고 밑에 한자나 한자영어발음을 표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듣고 보니 백 번 지당한 말씀이다.  

그러나 현실은 장인장모한테 외국인등록증부터 신청하게 했다. 나는 평일 직장에서 빠질 수 없어 장인장모한테 이리저리 가고 여차여차 하라고 가리켜 주었다. 또 조선족들이 많이 몰리는 서울출입국사무소보다는 조선족들이 상대적으로 적은 종로출장소로 보내어 외국인등록증이 빨리 나오도록 했다. 또 돈암동에 있는 한국인한테 부탁하여 동사무소에서 호적등본과 주민등록등본을 떼어서 거주지확인을 받도록 장인장모한테 갖다 주도록 하였다.  

외국인등록증이 나오자면 아직  한주일을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장인장모는 기다릴 수 없다며 내가 없는 동안이면 직업소개소를 찾아다니고 있었다. 아직 취업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가 장인한테 야단을 맞았다. 그냥 일을 하면 되지 ‘이쪽나라’는 왜 이렇게 복잡하냐는 것이다. 거기다 꼭 필요한 교육이라고 한술 더 떳더니 장인이 천둥같이 화를 냈다. 돈도 벌지 못했는데 또 돈 내고 공부하고 이건 도대체 조선족들을 데려다가 소비만 시키려고 잡도리를 했다는 것이다.

하긴 동포관련법은 해외동포들이 참여권이 없으니 시종일관하게 형평성을 잃은 법만 출범한다. H-2무연고동포의 선출방법만 봐도 그렇다. 한국어시험이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조선족이 거의 없음에도 강행시키고 마는 한국정부와 관련부처는 조선족을 얕잡아본다는 평밖에 얻지 못했다. 한국어시험은 해외동포들에게 모국어를 배우도록 격려하는 수단이여야지 그 이상은 아니다. 더욱이 조선어교육을 대학교까지 받는 중국에서 한국어시험은 중국동포에 대한 모독일 수밖에 없다.  

‘외국인등록증’신청으로부터 취업교육, 취업까지는 빨라야 1달이 걸리고 일자리 찾은 뒤 월급이 나올 때까지는 빨라야 2개월을 기다려야 한다. 2개월 숙식비용과 입국비용을 포함시키면 적어도 한화 200만원은 휴대하고 한국에 입국해야 한다는 말이 된다. 이런 H-2고 이런 방문취업제다. 인건비와 단가는 IMF전 수준이고 동포들이 많이 몰리다보니 요즘은 인건비가 1~2개월 밀리는 현상은 보통일이다. 옛날 노다지판이던 한국이 ‘놀다지’로 변해가고 있다. 마음상하고 몸상하고 돈은 모아지질 않는 한국생활을 웬만하면 접을 때도 되었지만 죽기내기로 오려는 사람들과 돌아가 봐야 할 일 없는 사람들이 겹치는 바람에 한국은 또 하나의 조선족집거구로 되었다. 또 많은 조선족들이 몰려드는 바람에 인건비와 단가가 떨어지고 조선족끼리 일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국면을 맞게 되었다. 

나는 저녁이면 일치감치 퇴근하여 장인장모와 식사도 하고 때론 여기저기 거닐기도 했다. 한번은 지하철을 타면서 장인장모한테 ‘지하철’이라고 가르쳐 주었더니 한 달 뒤 귀가할 때까지도 기어이 ‘소철’이란다. 혀가 굳어진 원인도 있겠지만 정신적 여유가 없다보니 새로운 사물을 접수하려는 용의가 없었다. 또 온통 연변 말을 쓰는 통에 내가 옆에서 통역해 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장인장모는 한국에 차가 많은 것도 못마땅했다. 그러면서 차 1대 값이 얼마나 가느냐고 묻는다. 내가 여기는 차를 사는 것이 아니고 할부로 차를 ‘뺀다’는 표현을 많이 쓰는데 할부기한에 따라 차 값도 틀린다고 하니 별 희한한 동네를 다 본다면서 "사위는 할부놀음을 절대 하지 말라."고 한다. 장인장모는 길가 가계와 매장들에 붙어 있는 가격표를 볼 때마다 난색을 하고 혀를 끌끌 찬다. “1원 2원 할 것이지 왜 동그라미는 잔뜩 쳐서 1000원 2000원, 10000원 20000원 하면서 바람만 잡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밖에 나서면 건물들이 제멋대로 들어앉아 동서남북이 분명치 않고 버스는 또 뱅뱅 돌며 시간만 허비하고 지하철은 계단이 너무 많아 탈이고 장사꾼들은 흥정을 할라치면 불친절하고 마진을 너무 많이 본다는 것이다. (계속)

2007년7월22일

 


3,직업소개소

결국 장인장모의 취업교육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지하철을 ‘소철’이라하고 간단한 서울말도 흉내 내지 못할 때부터 취업교육은 이미 물 건너갔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만약 그래도 고령 동포들에게 취업교육을 시켜야 한다고 하면 나는 서슴없이 ‘동포노인을 학대하지 말라!’는 표어를 들고 담당부서 앞에서 일인시위를 할 용의가 있다.

아무튼 장인장모의 한국행은 당사자들에게는 물론 나한테도 엄청 신경이 쓰이는 일이었다. 또 한국의 노동시장과 이들을 고용하는 고용주들에게도 결코 기꺼운 합작이 될 수 없음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다른 방법은 없었다. 결국 나는 장인장모를 도와 일자리를 찾아주어야 했다.

그러나 한국의 노동시장은 진작 변화되어 있었다. 아직 90년대만 해도 조선족의 한국취업은 별반 장애가 없었다. 오히려 일 욕심 많고 격식 없고 부담 없는 조선족을 당지인보다 선호하는 업주들이 많았다. 그러나 차츰 조선족의 수가 많아지고 불법체류가 합법화되면서 선택이 자유로워진 조선족들은 부단한 선택으로 최적의 보수와 최적의 노동환경을 선택하려고 한다. 그것이 부단한 이동으로 노출되어 한국인들의 경계와 반감을 사게 된 원인으로 작용한 것이다. 결국 고용허가제와 방문취업제의 실시로 분야별 업종별 취업범위는 확대되었지만 조선족을 쓰려는 업주들은 오히려 줄어든 것이다. 또 외국인노동자의 대량입국으로 일자리가 상대적으로 줄어들었고 업주들은 인건비가 싸지 않은 동포대신 자국민취직을 선호하는 방향으로 나간 것이다.

나는 여기저기 일자리를 부탁했지만 종무소식이다. 하는 수없이 길거리에서 ‘벼룩시장’ ‘가로수’ ‘교차로’를 뽑아다가 종일 전화를 해 보았지만 모두들 약속이나 한 것처럼 조선족이여서 안 쓰겠다고 한다. 문제의 심각성을 간과한 나는 원인부터 찾아야겠다고 생각하고 한 업주한테 정중히 물었다.

“조선족을 안 쓰겠다는 이유나 들어봅시다.”

그 쪽에서는 대답하기가 저어되었는지 뜸을 들이고 있었다. 내가 괜찮다고 독촉해서야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자기도 조선족을 여럿 명 써 보았는데 오래 있질 않더라는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떠나고 싶으면 마누라가 죽었다는 거짓말을 써가면서라도 기어이 떠나고 말더라는 것이다. 그러니 차라리 우리말 모르는 동남아애들을 쓰는 게 났더라는 것이다.  

“그래도 동폰데 어쩝니까. 짧은 시간에 한 푼이라도 더 챙겨가야 하는 입장이고 보니 그럽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한편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요즘 중국에서도 조선족들은 이런 나쁜 평을 들으며 산다. 그러나 고국에서마저 외면당하면 앞으로 어디 가서 3D라도 하겠는가. 당장 한국에 오지 않아도 될 상황은 아니지 않는가. 이는 부분적 조선족의 문제가 아닌 전반 조선족사회에 대두한 문제이다. 또 뒤에 오게 될 조선족들과 방문취업제가 조선족사회에 혜택으로 돌아갈 수 있느냐 없느냐는 문제와도 귀결된다. 바라건대 한국에서 노무활동을 하는 조선족들은 냄비근성을 버리고 인내력과 지구력을 키워 한국노동시장의 특수도 누려야 하지만 한국사회와의 동반자관계도 잘 구축해 나가야 한다.

광고지에서 극구 외면하는 것이 있었다. 대부분광고는 조선족을 안 쓰겠다 혹은 상기 말을 “사람을 구했다”로 대체해 버리는 반면 ‘중국동포대환영’이라고 쓴 줄 광고다. 너나없이 안 쓰겠다고 하는 판에 ‘대환영’이라고 하여 신나게 전화를 넣어보면 월급의 10%를 소개비로 바라고 진을 치고 있는 직업소개소들이다. 이들은 항공사 버금으로 중국동포들로 호황을 누리고 있는 업종이다. 결국 조선족들은 저절로 업주들에게 인심을 잃어놓고는 월급의 10%를 소개비로 선불로 갖다 바치면서 직업소개소에 의뢰하게 된 것이다.

나는 인터넷을 활용하여 전국범위에서 구인구직광고와 지방용역사무소에 전화를 넣어 장인장모를 추천했다. 그러나 선택할 만큼 일자리도 많지 않았거니와 만족할만한 자리도 없었다. 내가 망설이고 있을 때 장인이 싱글벙글 웃으며 전화를 걸어왔다. 직업소개소에서 일자리를 찾았다는 것이다. 농장인데 숙식을 제공받고 두 분이 월 160만원을 받기로 했단다. 그런데 소개비를 물어보니 20만원이란다. 전화번호를 물어 소개소 측에 요즘 월급의 10%이상을 소개비로 받는 곳이 어디 있느냐고 따지니 자기들은 회원제를 하기에 더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일자리가 만족되지 않으면 스무 번도 소개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봐요. 누가 할 일없어 한국으로 장난치러 온 줄 아세요? 두 번도 필요 없으니 한번에 OK할 곳으로 보내주세요.”

그쪽에서 말이 빗나갔음을 눈치 채고 꼬리를 내렸다. 그러면서 와서 상의하잖다. 그러나 좀 있다 직업소개소에 가 보니 소개소 측에서 노인들의 일자리가 흔치 않다며 바람을 넣는 바람에 장인장모는 고스란히 20만원을 주고 농장에 가기로 매듭을 지었던 것이다. (계속)

2007년7월26일 영등포에서

 

 

4,농장에서

정작 장인장모를 떠나보내려고 하니 시름이 놓이지 않았다. 곁에 모시고 하나하나 체크해 주어도 모를 판인데 외딴 시골에 보낸다고 생각하니 걱정이 태산 같았다. 숙소에 돌아와 보니 장인장모가 한참 짐을 싸고 있었다. 준비가 완료되자 장인은 출발시간이 아직 2시간 전인데도 짐을 들고 흔연히 뛰쳐나간다. 이 며칠을 얼마나 지겹게 보냈으면 저려라 싶었다. 말렸다가는 화를 면치 못할 것 같았다. 결국 장인장모는 하루 만 더 기다리면 외국인등록증을 찾을 수 있고 외국인등록증이 있으면 본인 명의로 핸드폰을 개통할 수 있건만 달랑 공중전화카드 한 장 넣고 길을 떠났다.  

직업소개소장이 차로 곤지암에 있는 농장까지 실어다 준단다. 결국 추가된 소개비는 운임으로 생각하기로 하였다. 카니발승용차에 짐을 싣고 차에 올라타려고 하니 직업소개소장이 도중에 누가 탈지 모른다면서 내가 합승하는 것을 거절했다. 내가 어찌 어르신들만 보낼 수 있느냐고 반문하니 도착해서 그 쪽 사장과 통화를 시켜주겠단다. 결국 나는 다른 날 방문가기로 하고 차에서 내리는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열악한 환경이라 내가 농장을 둘러보고 나서 어르신들을 내 놓지 않을까 지레 겁먹은 것이었다.

그날 저녁 농장주의 핸드폰으로 장모가 전화를 걸어왔다. “사위, 여긴 깊은 산골짜긴데 집이라곤 우사건물뿐이요. 전화도 없고 다른 사람이란 출퇴근하는 사장뿐이오.” 그렇게 말하는 장모의 목소리가 측은하게 들려왔다. 사위를 바라고 한국에 온 것은 아니지만 한국에 사위가 있다는 것이 끗발이 없다보니 도움이 되지 못했다.

다행이 TV는 있단다. 한국이 여러 가지로 납득이 가지 않아도 한국드라마는 인정해 주는 어르신들이다. 중국에 있을 때도 불법으로 무궁화위성접수기를 설치해 놓고 한국드라마만 보았다. 그러다가도 단속반이 들이 닥쳐 아파트외벽에 설치한 안테나를 뜯어 가면 장인장모는 단속이 풀릴 때까지 안절부절 못하고 괜히 화만 내곤 하였다. 단속이 풀리고 새 안테나를 사서 설치해주면 애들처럼 좋아하던 어르신들이다. 70년대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고국방송을 들어야 했다면 요즘 같은 세월에는 토를 달지 말아야 하건만 고국방송은 ‘境外방송’이라고 안테나와 위성접수기가 압수대상이다. 장인장모는 한국에 와서 희한한 것 중 하나가 한국TV가 편해진 것이다. 집에서 한국TV를 볼라치면 이걸 켜고 저걸 끄고 저걸 따고 이걸 꽂는 번거로움이 있었고 가끔 신호도 불안정하여 중요한 대목을 놓치는 일이 허다했지만 한국은 한번에 OK고 신호불량이란 없으며 숙소의 TV는 HDTV다. TV를 보며 즐거워하는 노인들의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보기도 좋았다.


나는 장인장모가 걱정되어 자주 안부전화라도 하고 싶었지만 농장주한테 전화를 거는 일이라 그럴 수가 없었다. 겨우 이틀을 기다려 전화를 넣으니 농장주가  장인을 바꿔준다,

“나는 괜찮은데 자네 장모가 걱정이요. 젖소 젖만 짠다던 것이 별의별 일을 다 시키오.”

전화기는 곧바로 장모한테로 넘어갔다. “사위요? 난 사위가 한국에 오래 있은 게 끔찍하오. 우리 집에선 사위만 와서 이런 고생을 했지 뭐요. 우리가 와 보지 않았으면 사위가 한국에서 고생한 걸 어찌 알았겠소.”

장모는 여러 가지로 불편하면서도 사위걱정을 먼저 하신다. 그리고는 며칠 더 해보겠으니 걱정 말란다.

“아닙니다. 장모님, 일이 고되면 무조건 포기하십시오. 체질에 맞아야 하는 겁니다. 아무 때도 전화만 하면 차를 갖고 모시러 가겠습니다.”

장모는 망설이고 있었다. 힘에 부치고 기대치에 못 미치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내가 포기시키는 것은 순서가 아니다. 일하지 않던 사람들이라 한국노동생활을 하려면 적응기가 필요하다. 그러니 본인들이 알아서 판단을 내려야 한다.

다시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장인으로부터 갑자기 전화가 왔다. 마침 골짜기를 지나는 사람이 있어서 사정하고 전화를 빌렸단다. 농장주가 곁에 없으니 장인은 시름놓고 그동안 있었던 일을 하소연한다. 농망기에만 농사일을 거들어준다던 것이 농사일이 기본이고 소사양은 아침저녁으로 잠깐씩 하는 정도란다. 거기다 농장주의 입에서 튕겨 나오는 것은 온통 욕지거리란다. 내가 모시러 가겠다고 하니 장인은 내일 농장주와 터놓고 말해 보겠단다. 그러고 나서 거처를 정하겠다는 것이다.

다시 이틀이 지나니 더는 기다릴 수 없었다. 나는 하던 일을 팽개치고 곤지암으로 떠날 준비를 했다. 그런데 농장주한테 전화를 넣으니 장인장모가 이미 전날 저녁 떠났다는 것이다. 직업소개소에서 다른 일자리를 소개시켜주었다는 것이다. 농장주한테 장인장모가 떠난 이유를 물으니 장인의 시력이 나빠서란다. 한국인들은 가끔씩 이런 깜찍한 죄목을 잘 만든다. 그럼 근시안경을 건 사람은 농사일을 못한다는 말이 된다. 근시안경을 건 사람은 소를 치지 못한다는 말이 된다. 근시안경을 건 사람은 일하지도 말고 밥도 먹지 말라는 말이 된다.

 “이봐요. 한번 만납시다.”

나는 화가 욱 치밀어 온 몸의 피가 거꾸로 솟았다. 농장주는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나는 노인들을 괴롭히는 것은 못 본다. 그 때문에 장인장모의 한국행이 더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나는 농장주를 만나 한판 붙어볼 생각이었다. 누가 욕지거리를 더 잘 하나 보여주고 싶었다. 조선족의 욕지거리는 한국에서 워낙 유명하여 사정을 아는 한국인들은 두 손을 버쩍 든다. (계속)

2007년8월3일 영등포에서

 

5,농장에서2 

직업소개소에 전화를 넣어서 장인장모의 행적을 추적하니 광주근교 야채재배농장으로 옮겼단다. 전에 누가 광주로 오라고 해서 봉고차를 끌고 경기도 광주로 갔다가 아니어서 뒤늦게야 전라도 광주로 이동한 적이 있다. 그래서 인젠 광주소리만 들어도 “어느 광주?”부터 묻는 나다.  

“경기도 광주지 그럼 전라도 광주겠어요?”

접때 소개비 20만원을 내면 스무 번도 소개해 준다던 직원이다. 기회를 만났는데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경기도 광주면 곤지암보다 서울과 한발 가까운 곳이다. 장인장모는 비닐하우스에서 야채 따는 일을 하고 있단다. 야채 따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듣는 말에 의하면 하루 종일 오리걸음을 하고 두 손으로 야채를 따는 것이 보통 힘든 일이 아니란다.

농장에 전화를 넣으니 40대 초반의 사나이가 사장이라며 전화를 받는다. 나는 먼저 번 농장주가 욕지거리를 너무해서 노인들이 무척 괴로워했다는 것과 어르신들이 중국에서 쭉 살다보니 한국에 대한 요해가 없다는 것 연세가 있어서 고집불통이라는 것 그러나 맡겨주면 살아온 세월이 있어서 스스로도 잘해내더라는 것 그리고 나한테는 하나뿐인 장인과 하나뿐인 장모니 잘 부탁드린다고 했다. 마지막 말은 물론 웃자고 한 말이다.

그 쪽에서 잘 알았다며 전화를 놓는다. 어쩐지 예감이 좋았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날 그 전화로 장모가 전화를 걸어왔다. 사장이 사위한테 전화를 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사위한테 전화를 하고 싶을 때면 언제든 전화를 쓰라고 했다면서 좋아하고 있었다.

한주일이 지난 어느 날 장모로부터 다시 전화가 왔다.  

“사위, 인젠 할 만 하오.”

“네?....... 축하합니다.”

한국에 와서 그 보다 더 반가운 말은 없다. 그 말이 떨어지기 전 한국은 그냥 지옥이다. 이제 그 지옥문을 열고 밝은 세상으로 성큼 나온 것이다. 또 그때면 중국에서 수 십 년 먹고 찐 부석부석하고 유들유들한 비게가 빠져 바지허리가 헐렁할 때이다. 그리고 피부는 탄력을 되찾고 몸매는 날씬해져 훨훨 날 것만 같은 기분이다. 물론 하루노동도 거뜬히 해 치우고 간만에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시기이다.

“장모님, 왜 돈 주고 다이어트를 합니까. 앞으로 우리 집에선 살찐 사람만 있으면 한국으로 보냅시다.”  

장모는 내 말뜻을 알아차리고 호호 웃는다. 자기도 요즘은 몸매가 가벼워져 날것만 같단다. 나도 날 것만 같았다. 드디어 장인장모가 한국생활에 적응 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뜻밖으로 고향에 있는 자녀들이 애를 먹였다. 아들딸 셋을 키워 모두 대학에 보내어 지금은 의사 교원 군관으로 사회에서 활약하고 있다. 처음 한국에 나오는 것을 자녀들이 동의할 리 없었다. 거기다 사위들과 며느리까지 합세하여 막았지만 놀러 가면 안가겠는가 해서 결국 말려내질 못했다. 그런데 농장주한테 괄시를 받았다는 말에 자식들이 펄쩍 뛴다. 한국인이 뭔데 사람을 괄시하는가 하는 것이다. 내가 본바닥사람들도 똑같이 당하는 경우가 있다고 해서 요행 입은 막았지만 이번에는 어르신들을 무조건 들여보내라는 것이다.  

장인장모는 동요하고 있었다. 게다가 함께 야채를 따는 조선족들이 합세했다. 자기들은 아들이 장가를 가지 못해서 혹은 집이 없어서 혹은 퇴직금이 없어서 이 고생을 하지만 댁들은 왜 이 고생을 사서 하느냐고 한단다. 나는 입국할 때 이미 만류했고 또 무참히 거절당했기 때문에 듣는 둥 마는 둥 대꾸하지 않았다. 분명 장인장모는 주변 조선족들로부터 우월감을 느끼고 있었다. 결국 장인장모는 귀가하기로 하고 나한테 항공권을 예약하라고 부탁해 왔다.

“아니, 그럴 거면 왜 왔어요. 남들 다 하는 걸 왜 못해요.” 내 입에서 좋은 말이 나올 리 없었다. “한국에 나온 조선족 대부분은 노후가 보장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는 이미 떼 부자가 되고도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곳에서 몇 해만 열심히 일하면 더 이상 퇴직금을 염두에 두지 않게 됩니다. 퇴직금을 받는 공직자 층이 그들로부터 우월감을 갖는다는 것은 위험한 발상입니다. ‘인민들이 준 권력’을 어찌 사용하고 지금은 살길을 찾아 객지로 해외로 흘러나온 인민들로부터 우월감을 느낍니까. 이건 퇴직금이 없는 사람들이나 할법한 일입니다.”

장인 장모는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더 말해 봐야 사위한테 꼬투리 잡힐 말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계속)

2007년8월12일 영등포

[102호] 2007년 07월 19일 (목) 14:22:48 이현아 기자 yomikako@hanmail.net

목소리 더욱 커진 국제결혼여성세계대회
인종 차별 금지, 이중국적 허용 등 주장

17일 개막한 국제결혼여성심포지엄에서는 다문화사회로 급격히 변하고 있는 세계 정세와 그에 따르는 한국 사회의 변화 필요성 등에 대한 논의가 주를 이루었다.

주제 토론에 앞서 리아 암스트롱(김예자) 회장은 “우리는 남들보다 안정적으로 현지에 적응할 수 있었지만 나름대로 문화가 다른 데서 오는 오해들도 겪었다”며 “그에 대한 노하우를 교환하기 위한 연대로 결성된 것”이라고 국제결혼여성총연합회의 의미를 되새겼다.

그는 이어 “그러나 다문화사회로 변하고 있는 국제적 흐름에 따라 활동의 대상을 한인 여성으로 국한하지 않고, 한국 정부에 대해서도 인종차별금지법 제정 촉구 등의 적극적인 활동을 펴 나가겠다”라고 향후 포부를 밝혔다.

이 날 토론회에서는 인종차별 금지법, 이중국적 허용 등 제도적 차원의 개선에 대한 필요와 요구방안 등이 심도있게 논의됐다.

또 분과별 토론과 전체토론을 거쳐 집약된 내용을 취합한 국제결혼여성총연합회는‘한국 정부가 혼혈아에 대한 차별 및 인종차별을 금지하는 법안을 제정하도록 촉구한다’는 결의안을 채택, 이러한 요구가 구호에 그치지 않도록 실질적 활동을 다짐하기도 했다.

특히 국제결론여성총연합회는 이 날 토론에서는 논의된 내용을 바탕으로 △국제결혼여성총연합회의 역사와 체계, 업적 등을 기록해 문서화할 것 △이중국적을 허용할 것 △국제결혼여성총연합회 회원 중 공로가 있는 자에 대해 정부가 초청해 노고를 치하할 것 △(현재 무비자 기간이 1개월인)미국 동포들의 무비자 기간을 3개월로 늘일 것 등의 요구를 담은 결의서를 작성해 19일 국회에 공식 제출했다.

리아 암스트롱 회장은 향후 한국 정부에 대한 활동의 폭이 넓어질 것으로 예상하고, 한국 내 사회단체들과의 긴밀한 연대 필요성을 강조해 눈길을 끌었다. 그는 이러한 활동의 시작으로 이번 심포지엄 프로그램으로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방문 일정을 포함시켰다고 밝히기도 했다.

지난 2005년 정식 협회를 발족한 이후 처음으로 개최된 이번 심포지엄은 세계 60여 명의 회원이 참석한 가운데 미국, 프랑스, 영국, 호주, 독일, 이탈리아, 필리핀, 대만 등 전 세계 8개국에 개설된 지부들이 벌여온 활발한 활동에 대한 성과를 보고하고 향후 발전방향을 모색하는 자리로 마련됐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자리이다.

이 때문에 각계각층의 인사가 행사에 참석했다. 우선, 찰스 암스트롱 콜롬비아대학 역사학과 석좌교수와 피터 루이스 전 호주국회의원이 각각 ‘모국, 세계화 시대 한국의 정체성’과 ‘세계국제결혼여성총연합회’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특히 피터 루이스 씨는 이 날 부인 정경옥 씨와 함께 '세계부부의 날 위원회'로부터 국제부부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기도 해 심포지엄 행사는 시종 세계국제결혼여성들의 잔치 축제 마당이 된 듯 들뜬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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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오늘과 내일](24) ‘실향민’ 의 삶 디아스포라
입력: 2007년 07월 13일 15:07:35
-조국이냐 거주국이냐 ‘새우잠’-

# 사이드가 선택한 실향의 의미

누스바움의 ‘유대인 증명서를 들고 있는 자화상’. 막다른 골목에 갇힌 사내가 검문하는 관원에게 외국인등록증을 내보이는 그림으로, 사내는 난민 일반을 표상한다.
디아스포라는 나의 e메일 주소다. 십년쯤 됐을까? 처음에는 그게 뭐냐고 물어오는 사람들이 많더니 요즘에는 왜 그걸 쓰게 됐냐는 질문으로 바뀌고 있다. 그중에는 월남한 ‘실향민’ 집안이냐는 자문자답도 있다. 아마 ‘이산(離散)’이라는 번역 탓이겠지만 진실의 일면은 담겨 있다. 그만큼 디아스포라라는 말이 사회적으로 시민권을 획득해 가고 있다는 증거다. 처음에는 스스로도 낯설었던 이 단어를 내가 쓰게 된 계기는 사이드(Edward Said)와의 만남이었다. 그는 ‘오리엔탈리즘’의 저자로도 유명하지만 동시에, 아니 그 이전에 무엇보다 미국 국적의 아랍계 디아스포라다.

아직도 뇌리에 선명히 남아 있는 것은 사이드가 ‘문화와 제국주의’에서 인용한 성 빅토르 위고의 말이다. “고향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상냥한 초보자다. 모든 땅을 자기 고향으로 보는 사람은 이미 강한 사람이다. 그러나 전 세계를 하나의 타향으로 보는 사람은 완벽하다.” 팔레스타인과 이집트라는 고향, 제국주의 분할에 의한 실향, 미국이라는 시오니즘의 타향에서 새로운 고향 찾기로 이어진 사이드의 사상적 궤적과 어우러지면서 이 잠언의 기묘한 울림이 내게 전해져 왔던 것 같다.

사이드에게 팔레스타인은 제국주의에 의해 강요된 아랍의 역사적 곤경을 표상한다. 자신의 이름 자체가 그 기괴한 낙인이다. 아랍계 이름 ‘사이드’에 억지로 짝지어진 영어식 이름 ‘에드워드’에 불쾌감을 덜 느끼게 되는 데에만 50년이 걸렸다고 그는 증언했다. 자서전의 제목처럼 사이드는 늘 ‘제자리에 있지 못하고(Out of Place)’ 다수파 ‘우리’와는 유리된 ‘실향민(homeless)’의 삶을 강요당했지만 난관을 비켜가지 않고 정면으로 그 삶을 선택했다. 코스모폴리탄의 삶이 아니라 디아스포라의 삶을. 성 빅토르 위고의 말은 그 궤적을 담고 있다.

# 조국과 거주국의 틈바구니에서

근대 제국주의의 산물인 디아스포라는 식민지 지배라는 구조적 강제에 의해 타국으로 이주한 뒤에도 조국과의 관계와 민족적 정체성을 유지하며 초국적 네트워크의 형성을 지향한다. 디아스포라 사회는 대개 제국주의 전쟁이나 박해에서 벗어나거나 경제적 기회를 얻기 위한 월경(越境) 또는 국가의 강제이주를 통해 성립되기 때문에 거주국과 조국의 틈새에서 각종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먼저 거주국에서는 자국 사회와 이질적인 디아스포라의 존재를 어떻게 수용해 국민통합을 이룰 것인지가 중요한 사회문제로 대두한다. 이 과정에서 터키인이나 모슬렘에 대한 서유럽의 외국인 혐오증처럼 소수자의 권리를 둘러싸고 심각한 정치문제로 발전하는 사례가 생겨난다. 스리랑카의 타미르인 디아스포라처럼 당국의 극단적 억압이 분리운동을 유발하거나 인접국의 정치적 개입을 초래하는 경우도 있다. 병합을 전후해 만주로 이주했던 조선인 디아스포라도 이중국적 상황 아래서 중국과 일본 민족주의의 충돌을 온몸으로 견뎌내야 했다.

한편 디아스포라와 조국의 관계는 상상된 문화적 귀속감이나 정치경제적 연계성 등 복합적 요인에 의해 형성된다. 이른바 ‘원격지 민족주의’의 대표격인 미국 유대인 사회는 거주국의 국익에 편승해 조국 이스라엘에 유리한 로비를 벌여 논란을 야기한다. 반면에 프랑스의 마그리브인 사회처럼 이슬람 원리주의를 둘러싼 정치적 대립 가운데 양쪽 반체제파의 거점이 될 때도 있다. 재일조선인처럼 조국이 분단상황에 처해 있는 경우에는 그 균열이 디아스포라 사회에도 복제·증폭되어 재생산되기도 한다.

# 난민의 운명에 대한 감수성의 촉각

이처럼 거주국과 조국 사이의 불안한 ‘균형’ 위에 자리한 디아스포라 사회는 대개 세 가지 대응방식을 보인다. 조국으로 귀환해 그 재건을 지향하거나, 귀환을 포기하고 거주국으로의 동화를 추진하거나, 아니면 거주국에서 독자적 정체성을 유지하며 기본적 인권과 민족적 권리를 추구하는 것이다. 오늘날 디아스포라가 주목받는 것은 마지막 지향성과 연관된다. 이제는 불가능하기에 귀환도 동화도 모두 거부하며 국민국가의 자명성과 폭력성에 대해 의문과 이의를 제기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디아스포라의 ‘실향’은 단순한 상실이 아니라 국민국가 이후의 미래를 선취하는 선택으로써 적극적 의미를 갖게 된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자서전 ‘아웃 오브 플레이스’와 서경식의 ‘디아스포라 기행’.
디아스포라는 국민국가의 다수자가 가하는 억압과 소외에 맞서 자신의 뿌리·경로(루트)에 대한 기억을 재구축하는 존재다. 그렇게 재구축된 기억 속에서 ‘조국’은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게 된다. 재일조선인 사상가 서경식은 아랍 소설가 카나파니(Ghassan Kanafani)의 유작을 인용해서 이렇게 말한다. “디아스포라에게 ‘조국이란’ 식민지 지배와 인종차별처럼 부조리한 ‘모든 일들이 일어나서는 안 되는 곳’”이라고. 그렇게 디아스포라는 근대 국민국가를 넘어선 곳에서 ‘진정한 조국’을 찾고 있는 것이라고 말이다.

디아스포라의 거울을 통해 우리는 과연 무엇을 성찰할 수 있을까? 서경식은 나치에 희생된 예술가들 가운데 누스바움(Felix Nussbaum)에 주목한다. 그의 유명한 작품 ‘유대인 증명서를 들고 있는 자화상’은 막다른 골목에 갇힌 사내가 검문 관헌에게 외국인 등록증을 내보이는 그림인데, 그것은 난민 일반의 초상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화가의 운명은 결코 예외가 아니라 난민의 공통된 운명이었다. 그러나 ‘국민’의 덫에 걸린 우리는 국가와 분리된다거나 국가가 자신을 추방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한다. 신자유주의의 폭력 앞에 스러져 가는 비정규직이나 ‘홈리스’의 곤경도 강 건너 불구경이다. 자신도 그 난민적 상황에 처할지 모른다는 상상력의 부재가 팽배해 있는 지금, 디아스포라는 난민의 운명에 대한 감수성의 소중한 촉각이다.

▲ 디아스포라는?

디아스포라의 어원은 그리스어 ‘디아스페레인(diaspeirein)’이다. ‘디아’는 ‘여러 방향으로(through)’, ‘스페레인’은 ‘씨를 뿌린다(to scatter)’는 뜻으로, 원래 고대 그리스인들이 인근의 소아시아 및 지중해 지역을 정복한 뒤 자국민을 이주시켜 식민지를 건설한 것을 가리켰다. 하지만 디아스포라는 대개 유대인의 이산 체험을 가리키는 부정적 의미로 사용되어 왔다. 대문자로 시작되는 이 디아스포라는, 유대인들이 소위 바빌론 유수 이후 팔레스타인 밖으로 강제이주를 당한 역사적 고난의 경험을 일컫는다.

그런데 최근 들어 디아스포라는 이스라엘 역사의 좁은 맥락을 뛰어넘어 조국으로부터 추방되어 타국에 소수자로 존재하는 공동체를 가리키는 용어로 일반화되었다. 유대인뿐 아니라 구미의 아프리카인, 인도인이나 아시아의 화교·화인처럼 세계 도처에 산재한 민족의 역사적 존재형태를 뜻하게 된 것이다. 그 결과, 디아스포라는 근대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파고 아래서 발생한 수많은 난민, 이주노동자, 망명자, 소수민족 공동체 등을 포괄하는 넓은 의미의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디아스포라의 특징을 개괄적으로 제시한 것은 미국의 정치학자 사프란(William Safran)이다. 그는 ▲특정 지역에서 외국의 주변적 장소로의 이동 ▲조국에 대한 집합적 기억이나 신화의 공유 ▲거주국 사회로의 온전한 진입에 대한 희망의 포기와 그로 인한 소외와 고립 ▲후손들이 결국 귀환해야 할 장소로서 조국의 이상화 ▲조국의 회복과 유지, 번영을 위한 정치경제적 헌신 ▲조국과의 지속적인 관계 유지와 공속의식 등을 그 특징들로 지적했다.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이념형이어서, 예컨대 조국으로의 귀환을 포기하거나 애초부터 염두에 두지 않은 디아스포라도 많다. 그러나 적어도 이주요인의 비자발성이라는 측면, 그리고 조국과의 관계 및 민족적 정체성의 유지, 초국적 네트워크의 형성에 대한 의지라는 측면에서 공통된 역사적 특징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디아스포라와 관련된 용어로는 민족적 소수자(ethnic minorities)와 크레올(creole)을 들 수가 있다. 우선 ‘민족적 소수자’는 거주국의 소수자로서 지닌 디아스포라의 민족적 특성은 공유한다고 볼 수 있으나, 기본적으로 국민국가의 틀을 전제로 삼기 때문에 국민과 난민 사이에 놓인 디아스포라의 불안정한 위치는 반영하지 못한다. 한편, 혼혈까지 포함하지만 주로 식민지에서 태어난 백인과 그 언어를 뜻하는 ‘크레올’의 경우는 디아스포라와 정치적 역관계에서 비대칭적이지만, ‘화이트 디아스포라’라고도 불리는 데서 알 수 있듯이 그 문화적 혼종성과 경계성의 측면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임성모|연세대 교수·사학과〉
     
'세계한민족여성네트워크' 재단법인 전환
제7회KOWIN 대회에서 공식출범식
[101호] 2007년 07월 12일 (목) 18:34:31 이현아 기자 yomikako@hanmail.net
   
 
   
 
세계한민족네트워크(KOWIN)가 재단법인으로 공식출범했다.

장하진 여성가족부 장관은 10일 서울 워커힐 호텔에서 개막한 제7회 세계한민족대회에서 재단법인 세계한민족여성네트워크(이하 재단)의 공식 출범식을 갖고 새로운 출발을 다짐했다.

2001년 첫 대회를 가진 KOWIN은 연대와 전문성의 강화, 차세대 리더 양성 등 당면과제들을 이행하기 위해 재단 설립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지난 2006년부터 재단 창립을 준비하기 위한 한국지회(지회장 최금주 (주)화이버텍 사장)와 준비위원회(회장 이경희 호주국제음악대학장)를 꾸려 재단 출범을 준비해 온 끝에 올 1월 여성가족부 승인을 받아 지난 5월 30일 정식 창립 절차를 마쳤다.

이날 출범한 재단법인 세계한민족여성네트워크는 지은희 덕성여대 총장(전 여성가족부 장관)이 명예회장으로 추대돼 후원회장 및 홍보대사 역할까지 맡아 활동하고 있으며, 산파 역할을 맡아온 이경희씨와 최금주씨가 각각 초대 회장과 부회장을 맡아 재단 실무를 담당하고 있다.

이에 지난 7년간 KOWIN 대회를 진두지휘해 온 여성가족부 국제협력과가 당연직 이사를, 각 지역의 네트워크의 뼈대를 이뤄온 지역담당관들이 운영이사를 맡도록 했다.

재단은 이사진 이하 현재 운영 중인 세계 16개 지역별 지회는 그대로 유지해 활동을 지속할 수 있도록 할 방침이며, 서울지회가 지난 2006년 추가로 신설돼 활동 중에 있다.

재단법인 KOWIN의 활동이 본격화됨에 따라 무엇보다 효율적인 자금운용이 절실해졌다. 이에 다라 재단측은 현재 회원 가입 확대에 박차를 가하며 여러 뜻있는 국내외 단체의 기부를 통한 기금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한편, 이 날 행사에 앞서 가졌던 소주제 토론회에서 회원들은 재단법인 설립과 관련한 토론과 질의 및 응답 시간을 가졌다. 회원들은 차세대 한인 여성의 발굴과 육성, 현지 적응에 대한 대안 등 다양한 사안을 주문하기도 했다.

토론을 마친 이경희 초대회장은 “회원들과 함께 시간을 가질 때마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새로운 발상에 깜짝 놀라게 된다”며 “오늘 전해 주신 고견을 절대로 잊지 않고 이뤄나가겠다”고 말했다.

토론 이후 이어진 장하진 여성가족부 장관 주최 만찬에 참석한 한명숙 열린우리당 의원은 “KOWIN이 부르니 어디서든 달려오지 않을 수 없었다”고 각별한 애정을 표현해 박수갈채를 받기도 했다. 이경희 초대회장은 장하진 장관으로부터 KOWIN 깃발을 건네받아 힘차게 흔들어 보이며 새출발에 대한 각오를 다졌다.

‘세계의 한국화, 한국의 세계화’라는 주제로 열린 이번 '2007 KOWIN 대회'는 14일까지 국정원과 헤이리 방문 등 문화 행사와 1대1 멘토링 등의 프로그램을 소화한 후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민주노동당, “평창 올림픽 유치 실패는 잘 된 일”
참세사 이윤원 기자 sisyphus@jinbo.net / 2007년07월06일 10시46분


2014년 동계올림픽 개최지가 러시아 소치로 최종 선정되자, 정치권과 언론은 한 목소리로 유감을 표했다. 이 가운데 민주노동당은 “평창은 패배하지 않았다. 동계올림픽 유치 실패는 평창 주민에게 잘 된 일”이라며 “언제까지 스포츠 쇼비니즘(국수주의)에 국민을 들러리 세울 건가”라고 정부와 정치권, 언론을 질타했다.


5일 민주노동당 정책위원회는 논평을 내고 “정부는 평창 동계올림픽이 5조 원의 부가가치 유발효과와 14만 명에 이르는 고용증대 효과를 가져온다고 선전했지만, 이를 위한 기간시설 설비에만 국고 4조 2천억 원이 투여된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고 꼬집었다. 이어 “설혹 고용이 그만큼 증대되더라도 일시적인 고용일 뿐이며, 강원도의 가장 큰 재산인 수려하고 청정한 자연의 파괴는 피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민주노동당은 2003년 유니버시아드 이후 대구 관광객이 2년 전보다 절반 규모로 줄고, 2002년 월드컵 당시에도 외국인 관광객이 예년의 2~30%에 불과했던 사례를 들었다. 남은 성과는 “곳곳에 지어져 유지비만 수십억 원에 이르는 너무 큰 운동장들 뿐”이라는 것. 2002년 아시안게임을 치른 부산의 경우에도 시설유지에만 매년 30~40억을 쏟아 붓다, 이후 해결책으로 내세웠던 경륜 사업마저도 600억 원의 경비를 삼킨 애물단지가 됐다는 것이 민주노동당의 주장.


또한 “동계올림픽은 구조적으로 반(反)생태적일 수밖에 없다”며 “선진국에서는 동계올림픽 유치전이 진행되면 예외 없이 환경 단체들의 극렬한 반대가 있어왔다”고 알렸다. 이처럼 “국제스포츠경기가 우리의 삶을 들쑤셔놓고 허무하게 사라지기를 벌써 십여 차례”인데 “아직도 이런 얄팍한 후진국적 선동이 먹힌다는 사실이 통탄스러울 따름”이라고 전했다.


민주노동당은 “아무리 국제체육경기가 많이 치러져도 우리의 삶의 질을 개선하거나 쾌적하게 만드는 것과는 무관하다”고 강조하며 “대구는 2003년 유니버시아드와 세계육상경기대회를 유치하는 쾌거(?)를 달성했지만, 250만 인구에 공공도서관은 여전히 13개 뿐”이라는 사실을 지적했다.


민주노동당은 “평창주민들이 궁극적으로 원했던 것이 더 행복하고 윤택한 삶이었다면 동계올림픽을 위해 국가와 지자체가 쏟아 부으려 했던 예산을 바로 주민들의 문화 복지 향상에 쓸 수 있도록 매진하면 될 일”이라며, “전 세계의 손님들을 위해 산과 들을 해치며 상다리 휘어지게 잔치를 벌인 후, 그 뒤치다꺼리로 수십 년을 고생해야 하는 끔찍한 난리를 평창 주민들은 다행스럽게 피해 갔다”고 평가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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