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여호길 미니홈 http://www.ckywf.com/news_2007/board.php?board=f_shehui05
모래안이야기 http://cafe.daum.net/moraean
H-2, 한국나들이(1)
1,인천공항에서
무연고동포인 장인 장모가 고령 동포로, H-2비자를 받고 한국으로 돈 벌러 온단다. 힘들어서 못한다고 하니 그쪽에서 버럭 화를 낸다. 남들 다 하는 걸 왜 못한다고 하느냐고. 그 뒷말은 안 들어도 뻔할 뻔자다. “사위는 치사하게 한중수교 전부터 다녔으면서 남들 다 가는 한국을 왜 나오지 말라고 하느냐.”고.
참으로 딱하다. 한국의 노동생활이 어디 중국의 중노동에 비할 수 있다더냐. 옛날 소학교교과서에서 보던 그대로 지주 자본가에게 ‘뼈 빠지게 일했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그런 노동환경은 날라리 중국노동환경과는 견줄 바가 못 되지만 그걸 모르고 무작정 한화만 바라보고 살같이 날아온다. 젊은 축들은 그럭저럭 길들기에 괜찮지만 노년이 문제다. 우리 사회와 가정의 자존심이고 뒷심인 노년들이 한국에 몰려와서는 한국인들에게 ‘체조’당하는 모습은 자존심 상해서 더는 볼 수 없다.
그런 젊은 층의 체면은 안중에도 없는 노인들도 마찬가지로 안쓰럽다. 하긴 그런 노인들이 편한 여생을 보내도록 두툼한 퇴직금과 용돈을 주지 못하는 우리 사회와 가정도 문제다. 어르신들은 퇴직금으로 취미생활은 커녕 의식주해결도 곤란하니 어찌 한국행을 마다하겠는가. 장인장모의 한국행도 그런 차원이다. 얄팍한 퇴직금을 받으면서 가만히 앉아 있느니 차라리 힘자랄 때 돈 푼이나 번다는 노인층에 만연된 유행성감기 같은 징후다. 결국 그 ‘유행성감기’를 아무런 처방전도 없이 잡아보려는 것부터가 무리였다. 결국 나는 장인장모의 의사를 존중하고 힘닿는 데까지 도와주기로 마음먹었다.
주일날 리무진버스는 공항고속도로를 따라 영종도로 달렸다. 길 아래로는 푸른 바다가 출렁출렁 와 닿고 길 위로는 맑고 푸른 하늘이 와 닿는다. 그 푸름 사이로 갈매기들이 때론 큰 호를 긋다가도 때론 긴 타원을 그리며 자유로이 날아옌다. 햇볕 따스하여 오곡백과 무르익는 나라, 바다에 둘러 싸여 아름다운 풍치로 가득 찬 나라, 오늘 따라 이 강산이 가슴 짜릿하게 느껴온다. 이런 아름다운 강산에서 단순 고역을 치르는 사람들, 그들 스스로의 자성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우리도 10년 만 일찍이 ‘중국식사회주의’든 자본주의든 했다면 장인장모도 돈 벌러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또 수많은 조선족노인들이 궁색한 모습을 하고 고국 땅에서 품팔이를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자존심도 나이도 팽개치고 눈을 찔끔 감고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려보내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또 새파란 젊은 애들한테 굽실거리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또 여기저기 쑤시고 아픈 몸을 끌고 세월만 세차게 흘러 돈이 쌓여지기만을 바라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인천국제공항 국제선 입국장에는 진작부터 마중을 나온 조선족들로 초만원을 이루었다. 먼저 온 조선족들이 새로 나오는 조선족들을 마중하러 온 것이다. 지난 10여 년 동안 김포공항에서 인천공항으로 공항만 바뀌었지 조선족들의 흐름은 조금도 멈추지 않았다. 다른 국제선출국장에서는 촌티를 벗고 얼마간 서울 물을 먹은 조선족들이 올 때와는 완연 다른 신사숙녀가 되어 중국행을 한다. 그렇게 사람과 함께 중국으로 흘러간 돈은 또 수많은 조선족가정의 의식주행을 해결하는데 쓰인다.
장인장모는 맨 나중에야 나타났다. 핸드카에 실린 짐에 가리어 하마터면 알아보지 못할 번했다. 평생이라도 살 것처럼 집에 쓸 만한 물건은 다 챙겨온 느낌이다. 약 꾸러미로부터 작업복과 생활용품, 심지어 이불까지 보인다. 제일 묵직한 트렁크를 챙기려고 핸드카에서 내려놓는 순간 진작부터 엿 먹이려고 기다렸다는 듯 트렁크바퀴 하나가 분리되어 저만큼 굴러갔다. 모두들 어이없어 나를 바라본다. 나는 몰려오는 눈총을 외면한 채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고 나서 제멋대로 굴러가고 있는 바퀴를 쫓아갔다. (계속)
여호길 2007/7/15
2.외국인등록증 - 려호길
한국에 왔으니 먼저 외국인등록증부터 신청해야 한다. 장인은 동포한테 왜 하필 ‘외국인’이라고 붙이냐고 서운해 했다. 나는 국적관계로 볼 때 엄연히 외국인이라고 하니 저쪽(이북)같으면 큰일 날 소리라는 것이다. 외국인등록증을 받던 날 장인의 표정은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왜 하필 "중국어 영어발음을 따나가 신분증을 만드는가.” 하는 것이다. 중국여권과 신분증이 어찌됐던 동포한테는 한글 이름을 밝혀주는 것이 고국다운 자세가 아니냐는 것이다. 중국여권과 신분증과 대조해 보는 경우를 감안하여 한자나 한자영어발음을 한글 밑에 표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연변신분증처럼 한글표기를 먼저하고 밑에 한자나 한자영어발음을 표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듣고 보니 백 번 지당한 말씀이다.
그러나 현실은 장인장모한테 외국인등록증부터 신청하게 했다. 나는 평일 직장에서 빠질 수 없어 장인장모한테 이리저리 가고 여차여차 하라고 가리켜 주었다. 또 조선족들이 많이 몰리는 서울출입국사무소보다는 조선족들이 상대적으로 적은 종로출장소로 보내어 외국인등록증이 빨리 나오도록 했다. 또 돈암동에 있는 한국인한테 부탁하여 동사무소에서 호적등본과 주민등록등본을 떼어서 거주지확인을 받도록 장인장모한테 갖다 주도록 하였다.
외국인등록증이 나오자면 아직 한주일을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장인장모는 기다릴 수 없다며 내가 없는 동안이면 직업소개소를 찾아다니고 있었다. 아직 취업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가 장인한테 야단을 맞았다. 그냥 일을 하면 되지 ‘이쪽나라’는 왜 이렇게 복잡하냐는 것이다. 거기다 꼭 필요한 교육이라고 한술 더 떳더니 장인이 천둥같이 화를 냈다. 돈도 벌지 못했는데 또 돈 내고 공부하고 이건 도대체 조선족들을 데려다가 소비만 시키려고 잡도리를 했다는 것이다.
하긴 동포관련법은 해외동포들이 참여권이 없으니 시종일관하게 형평성을 잃은 법만 출범한다. H-2무연고동포의 선출방법만 봐도 그렇다. 한국어시험이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조선족이 거의 없음에도 강행시키고 마는 한국정부와 관련부처는 조선족을 얕잡아본다는 평밖에 얻지 못했다. 한국어시험은 해외동포들에게 모국어를 배우도록 격려하는 수단이여야지 그 이상은 아니다. 더욱이 조선어교육을 대학교까지 받는 중국에서 한국어시험은 중국동포에 대한 모독일 수밖에 없다.
‘외국인등록증’신청으로부터 취업교육, 취업까지는 빨라야 1달이 걸리고 일자리 찾은 뒤 월급이 나올 때까지는 빨라야 2개월을 기다려야 한다. 2개월 숙식비용과 입국비용을 포함시키면 적어도 한화 200만원은 휴대하고 한국에 입국해야 한다는 말이 된다. 이런 H-2고 이런 방문취업제다. 인건비와 단가는 IMF전 수준이고 동포들이 많이 몰리다보니 요즘은 인건비가 1~2개월 밀리는 현상은 보통일이다. 옛날 노다지판이던 한국이 ‘놀다지’로 변해가고 있다. 마음상하고 몸상하고 돈은 모아지질 않는 한국생활을 웬만하면 접을 때도 되었지만 죽기내기로 오려는 사람들과 돌아가 봐야 할 일 없는 사람들이 겹치는 바람에 한국은 또 하나의 조선족집거구로 되었다. 또 많은 조선족들이 몰려드는 바람에 인건비와 단가가 떨어지고 조선족끼리 일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국면을 맞게 되었다.
나는 저녁이면 일치감치 퇴근하여 장인장모와 식사도 하고 때론 여기저기 거닐기도 했다. 한번은 지하철을 타면서 장인장모한테 ‘지하철’이라고 가르쳐 주었더니 한 달 뒤 귀가할 때까지도 기어이 ‘소철’이란다. 혀가 굳어진 원인도 있겠지만 정신적 여유가 없다보니 새로운 사물을 접수하려는 용의가 없었다. 또 온통 연변 말을 쓰는 통에 내가 옆에서 통역해 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장인장모는 한국에 차가 많은 것도 못마땅했다. 그러면서 차 1대 값이 얼마나 가느냐고 묻는다. 내가 여기는 차를 사는 것이 아니고 할부로 차를 ‘뺀다’는 표현을 많이 쓰는데 할부기한에 따라 차 값도 틀린다고 하니 별 희한한 동네를 다 본다면서 "사위는 할부놀음을 절대 하지 말라."고 한다. 장인장모는 길가 가계와 매장들에 붙어 있는 가격표를 볼 때마다 난색을 하고 혀를 끌끌 찬다. “1원 2원 할 것이지 왜 동그라미는 잔뜩 쳐서 1000원 2000원, 10000원 20000원 하면서 바람만 잡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밖에 나서면 건물들이 제멋대로 들어앉아 동서남북이 분명치 않고 버스는 또 뱅뱅 돌며 시간만 허비하고 지하철은 계단이 너무 많아 탈이고 장사꾼들은 흥정을 할라치면 불친절하고 마진을 너무 많이 본다는 것이다. (계속)
2007년7월22일
3,직업소개소
결국 장인장모의 취업교육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지하철을 ‘소철’이라하고 간단한 서울말도 흉내 내지 못할 때부터 취업교육은 이미 물 건너갔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만약 그래도 고령 동포들에게 취업교육을 시켜야 한다고 하면 나는 서슴없이 ‘동포노인을 학대하지 말라!’는 표어를 들고 담당부서 앞에서 일인시위를 할 용의가 있다.
아무튼 장인장모의 한국행은 당사자들에게는 물론 나한테도 엄청 신경이 쓰이는 일이었다. 또 한국의 노동시장과 이들을 고용하는 고용주들에게도 결코 기꺼운 합작이 될 수 없음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다른 방법은 없었다. 결국 나는 장인장모를 도와 일자리를 찾아주어야 했다.
그러나 한국의 노동시장은 진작 변화되어 있었다. 아직 90년대만 해도 조선족의 한국취업은 별반 장애가 없었다. 오히려 일 욕심 많고 격식 없고 부담 없는 조선족을 당지인보다 선호하는 업주들이 많았다. 그러나 차츰 조선족의 수가 많아지고 불법체류가 합법화되면서 선택이 자유로워진 조선족들은 부단한 선택으로 최적의 보수와 최적의 노동환경을 선택하려고 한다. 그것이 부단한 이동으로 노출되어 한국인들의 경계와 반감을 사게 된 원인으로 작용한 것이다. 결국 고용허가제와 방문취업제의 실시로 분야별 업종별 취업범위는 확대되었지만 조선족을 쓰려는 업주들은 오히려 줄어든 것이다. 또 외국인노동자의 대량입국으로 일자리가 상대적으로 줄어들었고 업주들은 인건비가 싸지 않은 동포대신 자국민취직을 선호하는 방향으로 나간 것이다.
나는 여기저기 일자리를 부탁했지만 종무소식이다. 하는 수없이 길거리에서 ‘벼룩시장’ ‘가로수’ ‘교차로’를 뽑아다가 종일 전화를 해 보았지만 모두들 약속이나 한 것처럼 조선족이여서 안 쓰겠다고 한다. 문제의 심각성을 간과한 나는 원인부터 찾아야겠다고 생각하고 한 업주한테 정중히 물었다.
“조선족을 안 쓰겠다는 이유나 들어봅시다.”
그 쪽에서는 대답하기가 저어되었는지 뜸을 들이고 있었다. 내가 괜찮다고 독촉해서야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자기도 조선족을 여럿 명 써 보았는데 오래 있질 않더라는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떠나고 싶으면 마누라가 죽었다는 거짓말을 써가면서라도 기어이 떠나고 말더라는 것이다. 그러니 차라리 우리말 모르는 동남아애들을 쓰는 게 났더라는 것이다.
“그래도 동폰데 어쩝니까. 짧은 시간에 한 푼이라도 더 챙겨가야 하는 입장이고 보니 그럽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한편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요즘 중국에서도 조선족들은 이런 나쁜 평을 들으며 산다. 그러나 고국에서마저 외면당하면 앞으로 어디 가서 3D라도 하겠는가. 당장 한국에 오지 않아도 될 상황은 아니지 않는가. 이는 부분적 조선족의 문제가 아닌 전반 조선족사회에 대두한 문제이다. 또 뒤에 오게 될 조선족들과 방문취업제가 조선족사회에 혜택으로 돌아갈 수 있느냐 없느냐는 문제와도 귀결된다. 바라건대 한국에서 노무활동을 하는 조선족들은 냄비근성을 버리고 인내력과 지구력을 키워 한국노동시장의 특수도 누려야 하지만 한국사회와의 동반자관계도 잘 구축해 나가야 한다.
광고지에서 극구 외면하는 것이 있었다. 대부분광고는 조선족을 안 쓰겠다 혹은 상기 말을 “사람을 구했다”로 대체해 버리는 반면 ‘중국동포대환영’이라고 쓴 줄 광고다. 너나없이 안 쓰겠다고 하는 판에 ‘대환영’이라고 하여 신나게 전화를 넣어보면 월급의 10%를 소개비로 바라고 진을 치고 있는 직업소개소들이다. 이들은 항공사 버금으로 중국동포들로 호황을 누리고 있는 업종이다. 결국 조선족들은 저절로 업주들에게 인심을 잃어놓고는 월급의 10%를 소개비로 선불로 갖다 바치면서 직업소개소에 의뢰하게 된 것이다.
나는 인터넷을 활용하여 전국범위에서 구인구직광고와 지방용역사무소에 전화를 넣어 장인장모를 추천했다. 그러나 선택할 만큼 일자리도 많지 않았거니와 만족할만한 자리도 없었다. 내가 망설이고 있을 때 장인이 싱글벙글 웃으며 전화를 걸어왔다. 직업소개소에서 일자리를 찾았다는 것이다. 농장인데 숙식을 제공받고 두 분이 월 160만원을 받기로 했단다. 그런데 소개비를 물어보니 20만원이란다. 전화번호를 물어 소개소 측에 요즘 월급의 10%이상을 소개비로 받는 곳이 어디 있느냐고 따지니 자기들은 회원제를 하기에 더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일자리가 만족되지 않으면 스무 번도 소개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봐요. 누가 할 일없어 한국으로 장난치러 온 줄 아세요? 두 번도 필요 없으니 한번에 OK할 곳으로 보내주세요.”
그쪽에서 말이 빗나갔음을 눈치 채고 꼬리를 내렸다. 그러면서 와서 상의하잖다. 그러나 좀 있다 직업소개소에 가 보니 소개소 측에서 노인들의 일자리가 흔치 않다며 바람을 넣는 바람에 장인장모는 고스란히 20만원을 주고 농장에 가기로 매듭을 지었던 것이다. (계속)
2007년7월26일 영등포에서
4,농장에서
정작 장인장모를 떠나보내려고 하니 시름이 놓이지 않았다. 곁에 모시고 하나하나 체크해 주어도 모를 판인데 외딴 시골에 보낸다고 생각하니 걱정이 태산 같았다. 숙소에 돌아와 보니 장인장모가 한참 짐을 싸고 있었다. 준비가 완료되자 장인은 출발시간이 아직 2시간 전인데도 짐을 들고 흔연히 뛰쳐나간다. 이 며칠을 얼마나 지겹게 보냈으면 저려라 싶었다. 말렸다가는 화를 면치 못할 것 같았다. 결국 장인장모는 하루 만 더 기다리면 외국인등록증을 찾을 수 있고 외국인등록증이 있으면 본인 명의로 핸드폰을 개통할 수 있건만 달랑 공중전화카드 한 장 넣고 길을 떠났다.
직업소개소장이 차로 곤지암에 있는 농장까지 실어다 준단다. 결국 추가된 소개비는 운임으로 생각하기로 하였다. 카니발승용차에 짐을 싣고 차에 올라타려고 하니 직업소개소장이 도중에 누가 탈지 모른다면서 내가 합승하는 것을 거절했다. 내가 어찌 어르신들만 보낼 수 있느냐고 반문하니 도착해서 그 쪽 사장과 통화를 시켜주겠단다. 결국 나는 다른 날 방문가기로 하고 차에서 내리는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열악한 환경이라 내가 농장을 둘러보고 나서 어르신들을 내 놓지 않을까 지레 겁먹은 것이었다.
그날 저녁 농장주의 핸드폰으로 장모가 전화를 걸어왔다. “사위, 여긴 깊은 산골짜긴데 집이라곤 우사건물뿐이요. 전화도 없고 다른 사람이란 출퇴근하는 사장뿐이오.” 그렇게 말하는 장모의 목소리가 측은하게 들려왔다. 사위를 바라고 한국에 온 것은 아니지만 한국에 사위가 있다는 것이 끗발이 없다보니 도움이 되지 못했다.
다행이 TV는 있단다. 한국이 여러 가지로 납득이 가지 않아도 한국드라마는 인정해 주는 어르신들이다. 중국에 있을 때도 불법으로 무궁화위성접수기를 설치해 놓고 한국드라마만 보았다. 그러다가도 단속반이 들이 닥쳐 아파트외벽에 설치한 안테나를 뜯어 가면 장인장모는 단속이 풀릴 때까지 안절부절 못하고 괜히 화만 내곤 하였다. 단속이 풀리고 새 안테나를 사서 설치해주면 애들처럼 좋아하던 어르신들이다. 70년대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고국방송을 들어야 했다면 요즘 같은 세월에는 토를 달지 말아야 하건만 고국방송은 ‘境外방송’이라고 안테나와 위성접수기가 압수대상이다. 장인장모는 한국에 와서 희한한 것 중 하나가 한국TV가 편해진 것이다. 집에서 한국TV를 볼라치면 이걸 켜고 저걸 끄고 저걸 따고 이걸 꽂는 번거로움이 있었고 가끔 신호도 불안정하여 중요한 대목을 놓치는 일이 허다했지만 한국은 한번에 OK고 신호불량이란 없으며 숙소의 TV는 HDTV다. TV를 보며 즐거워하는 노인들의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보기도 좋았다.
나는 장인장모가 걱정되어 자주 안부전화라도 하고 싶었지만 농장주한테 전화를 거는 일이라 그럴 수가 없었다. 겨우 이틀을 기다려 전화를 넣으니 농장주가 장인을 바꿔준다,
“나는 괜찮은데 자네 장모가 걱정이요. 젖소 젖만 짠다던 것이 별의별 일을 다 시키오.”
전화기는 곧바로 장모한테로 넘어갔다. “사위요? 난 사위가 한국에 오래 있은 게 끔찍하오. 우리 집에선 사위만 와서 이런 고생을 했지 뭐요. 우리가 와 보지 않았으면 사위가 한국에서 고생한 걸 어찌 알았겠소.”
장모는 여러 가지로 불편하면서도 사위걱정을 먼저 하신다. 그리고는 며칠 더 해보겠으니 걱정 말란다.
“아닙니다. 장모님, 일이 고되면 무조건 포기하십시오. 체질에 맞아야 하는 겁니다. 아무 때도 전화만 하면 차를 갖고 모시러 가겠습니다.”
장모는 망설이고 있었다. 힘에 부치고 기대치에 못 미치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내가 포기시키는 것은 순서가 아니다. 일하지 않던 사람들이라 한국노동생활을 하려면 적응기가 필요하다. 그러니 본인들이 알아서 판단을 내려야 한다.
다시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장인으로부터 갑자기 전화가 왔다. 마침 골짜기를 지나는 사람이 있어서 사정하고 전화를 빌렸단다. 농장주가 곁에 없으니 장인은 시름놓고 그동안 있었던 일을 하소연한다. 농망기에만 농사일을 거들어준다던 것이 농사일이 기본이고 소사양은 아침저녁으로 잠깐씩 하는 정도란다. 거기다 농장주의 입에서 튕겨 나오는 것은 온통 욕지거리란다. 내가 모시러 가겠다고 하니 장인은 내일 농장주와 터놓고 말해 보겠단다. 그러고 나서 거처를 정하겠다는 것이다.
다시 이틀이 지나니 더는 기다릴 수 없었다. 나는 하던 일을 팽개치고 곤지암으로 떠날 준비를 했다. 그런데 농장주한테 전화를 넣으니 장인장모가 이미 전날 저녁 떠났다는 것이다. 직업소개소에서 다른 일자리를 소개시켜주었다는 것이다. 농장주한테 장인장모가 떠난 이유를 물으니 장인의 시력이 나빠서란다. 한국인들은 가끔씩 이런 깜찍한 죄목을 잘 만든다. 그럼 근시안경을 건 사람은 농사일을 못한다는 말이 된다. 근시안경을 건 사람은 소를 치지 못한다는 말이 된다. 근시안경을 건 사람은 일하지도 말고 밥도 먹지 말라는 말이 된다.
“이봐요. 한번 만납시다.”
나는 화가 욱 치밀어 온 몸의 피가 거꾸로 솟았다. 농장주는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나는 노인들을 괴롭히는 것은 못 본다. 그 때문에 장인장모의 한국행이 더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나는 농장주를 만나 한판 붙어볼 생각이었다. 누가 욕지거리를 더 잘 하나 보여주고 싶었다. 조선족의 욕지거리는 한국에서 워낙 유명하여 사정을 아는 한국인들은 두 손을 버쩍 든다. (계속)
2007년8월3일 영등포에서
5,농장에서2
직업소개소에 전화를 넣어서 장인장모의 행적을 추적하니 광주근교 야채재배농장으로 옮겼단다. 전에 누가 광주로 오라고 해서 봉고차를 끌고 경기도 광주로 갔다가 아니어서 뒤늦게야 전라도 광주로 이동한 적이 있다. 그래서 인젠 광주소리만 들어도 “어느 광주?”부터 묻는 나다.
“경기도 광주지 그럼 전라도 광주겠어요?”
접때 소개비 20만원을 내면 스무 번도 소개해 준다던 직원이다. 기회를 만났는데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경기도 광주면 곤지암보다 서울과 한발 가까운 곳이다. 장인장모는 비닐하우스에서 야채 따는 일을 하고 있단다. 야채 따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듣는 말에 의하면 하루 종일 오리걸음을 하고 두 손으로 야채를 따는 것이 보통 힘든 일이 아니란다.
농장에 전화를 넣으니 40대 초반의 사나이가 사장이라며 전화를 받는다. 나는 먼저 번 농장주가 욕지거리를 너무해서 노인들이 무척 괴로워했다는 것과 어르신들이 중국에서 쭉 살다보니 한국에 대한 요해가 없다는 것 연세가 있어서 고집불통이라는 것 그러나 맡겨주면 살아온 세월이 있어서 스스로도 잘해내더라는 것 그리고 나한테는 하나뿐인 장인과 하나뿐인 장모니 잘 부탁드린다고 했다. 마지막 말은 물론 웃자고 한 말이다.
그 쪽에서 잘 알았다며 전화를 놓는다. 어쩐지 예감이 좋았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날 그 전화로 장모가 전화를 걸어왔다. 사장이 사위한테 전화를 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사위한테 전화를 하고 싶을 때면 언제든 전화를 쓰라고 했다면서 좋아하고 있었다.
한주일이 지난 어느 날 장모로부터 다시 전화가 왔다.
“사위, 인젠 할 만 하오.”
“네?....... 축하합니다.”
한국에 와서 그 보다 더 반가운 말은 없다. 그 말이 떨어지기 전 한국은 그냥 지옥이다. 이제 그 지옥문을 열고 밝은 세상으로 성큼 나온 것이다. 또 그때면 중국에서 수 십 년 먹고 찐 부석부석하고 유들유들한 비게가 빠져 바지허리가 헐렁할 때이다. 그리고 피부는 탄력을 되찾고 몸매는 날씬해져 훨훨 날 것만 같은 기분이다. 물론 하루노동도 거뜬히 해 치우고 간만에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시기이다.
“장모님, 왜 돈 주고 다이어트를 합니까. 앞으로 우리 집에선 살찐 사람만 있으면 한국으로 보냅시다.”
장모는 내 말뜻을 알아차리고 호호 웃는다. 자기도 요즘은 몸매가 가벼워져 날것만 같단다. 나도 날 것만 같았다. 드디어 장인장모가 한국생활에 적응 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뜻밖으로 고향에 있는 자녀들이 애를 먹였다. 아들딸 셋을 키워 모두 대학에 보내어 지금은 의사 교원 군관으로 사회에서 활약하고 있다. 처음 한국에 나오는 것을 자녀들이 동의할 리 없었다. 거기다 사위들과 며느리까지 합세하여 막았지만 놀러 가면 안가겠는가 해서 결국 말려내질 못했다. 그런데 농장주한테 괄시를 받았다는 말에 자식들이 펄쩍 뛴다. 한국인이 뭔데 사람을 괄시하는가 하는 것이다. 내가 본바닥사람들도 똑같이 당하는 경우가 있다고 해서 요행 입은 막았지만 이번에는 어르신들을 무조건 들여보내라는 것이다.
장인장모는 동요하고 있었다. 게다가 함께 야채를 따는 조선족들이 합세했다. 자기들은 아들이 장가를 가지 못해서 혹은 집이 없어서 혹은 퇴직금이 없어서 이 고생을 하지만 댁들은 왜 이 고생을 사서 하느냐고 한단다. 나는 입국할 때 이미 만류했고 또 무참히 거절당했기 때문에 듣는 둥 마는 둥 대꾸하지 않았다. 분명 장인장모는 주변 조선족들로부터 우월감을 느끼고 있었다. 결국 장인장모는 귀가하기로 하고 나한테 항공권을 예약하라고 부탁해 왔다.
“아니, 그럴 거면 왜 왔어요. 남들 다 하는 걸 왜 못해요.” 내 입에서 좋은 말이 나올 리 없었다. “한국에 나온 조선족 대부분은 노후가 보장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는 이미 떼 부자가 되고도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곳에서 몇 해만 열심히 일하면 더 이상 퇴직금을 염두에 두지 않게 됩니다. 퇴직금을 받는 공직자 층이 그들로부터 우월감을 갖는다는 것은 위험한 발상입니다. ‘인민들이 준 권력’을 어찌 사용하고 지금은 살길을 찾아 객지로 해외로 흘러나온 인민들로부터 우월감을 느낍니까. 이건 퇴직금이 없는 사람들이나 할법한 일입니다.”
장인 장모는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더 말해 봐야 사위한테 꼬투리 잡힐 말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계속)
2007년8월12일 영등포